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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은혜 은혜로다

LNCK 2015. 10. 1. 11:46

◈은혜 은혜 은혜로다               24:29~33                    출처보기

 

 

 

 

3.단락 해석이 새롭습니다. 꼭 보세요.

 

 

서론

여호수아가 이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10세입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니까, 여호수아의 죽음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요셉의 뼈도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아살의 죽음도 여기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부분에 왜 갑자기 죽음, 죽음, 죽음.. 죽음들이 연이어서 소개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단지 , 인생은 죽는 거야하는 단순한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너도 죽어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일까요?

 

저는 이 본문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특별히 29절의 말씀을 대하면서,

이 말씀 속에서 성령께서 제게 주시는 음성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29절을 한 번 천천히 읽어보십니다.

24: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으매

 

29절은 여호수아가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누군가가, 여호수아서 마지막에 첨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여호수아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 새겨진 비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여호수아가 자서전을 썼습니다만,

이제 본문은 여호수아의 비문입니다.

 

여러분, 문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패는 내가 얼마든지 내 뜻대로 새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석에 새겨지는 비문입니다.

비문이 어떻게 기록되어져 있는가가 그 사람의 생애를 좌우합니다.

 

29절은 바로 여호수아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의 비문입니다.

다시 한 번 보십시다.

24: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으매

 

저는 이 비문을 주의 깊게, 한 자 한 자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짧은 비문이, 정말 한 자 한 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제 뇌리에 와서 박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 뚫어지게 바라볼 때,

이 짧은 한 문장, 이 비문이 한 단어로 요약되고, 압축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한 단어는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데 29절에,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3가지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 원제목이 은혜, 은혜, 은혜로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이여, 제게도 이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은혜를 입기를 소원합니다.

이번 주일날 말씀을 듣는 주의 성도들 각자 위에, 이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은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제가 열망했을까요?

여러분, 29절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받았던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이 일 후에의 은혜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은혜를 받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여기서 후에라는 말은, 넓게는 여호수아의 전 생애 후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좀 좁게 살피면, 우리가 얼마 전에 살펴온 이 여호수아서 2324,

그가 세겜에서 백성들을 만나서 행했던 이 일 후에로 보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어느 듯 나이 많이 늙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 눈앞에 자신의 최후가 점점 다가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내가 이 일을 꼭 했으면 좋겠다라고 열망하는 것이 3가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여호수아의 버킷 리스트라고 명명하면서,

지난 3주간동안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꼭 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1) 내가 세겜으로 가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지금 실로에 있습니다. 실로는 당시 수도입니다.

 

여기서 그는 저 90킬로나 먼 곳에 있는 세겜으로 가야겠다는 버킷 리스트를

그가 작성하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세겜으로 그가 드디어 갑니다. 버킷 리스트 1번을 완성합니다.

 

2) 그의 두 번째 버킷 리스트는, 그 세겜에서 하나님께 1인칭을 올려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그전까지 그는 계속적으로 자기가 1인칭이었고, 자기가 주도적이었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감당해 온 것처럼 그가 여호수아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께 1인칭을 올려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3) 그가 세 번째 버킷 리스트를 행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는 이 일을, 마지막에 그가 감당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 대에서 끝나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나만 천국 가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래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너희는 섬길자를 택하라,

후손들에게 신앙을 다짐시킵니다.

 

3가지를 그가 행했습니다.

이 일들을 다 행한 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 땅에 살면서, 나름 꿈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 꿈과 계획들이 다 이루고 난 뒤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

이것은 은혜 중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소원들을 가지고 있지만,

뭐 그런 소원이 아주 거창한 꿈과 소원이 아니더라도,

우리 나름대로 꿈과 소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원들이 참 우리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이런 꿈을 가집니다.

내가 그래도 자녀들 결혼은 시키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서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자녀가 30대 초반, 30대 중반까지는 좀 참겠는데

어느 듯 40대를 훌쩍 넘깁니다.

그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부모들이 가슴앓이를 합니까.

 

당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시간에 나눕니다.

지난 612일에, 한 형제가 이 자리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소원 2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제게 소원이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에게 어린 딸이 둘이 있는데,

이 딸 둘을 제가 결혼을 시키고, 그래서 결혼식 날 이 딸들의 손을 붙잡고

제가 신랑에게 이 딸들을 인계를 시키는 것이 제 꿈입니다.

 

또 하나의 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20151231일 송구영신 예배 때,

이 교회에 서서 제가 간증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이, 그 간증을 하고 불과 보름쯤 되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제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하고 있는데, 그의 아내 집사님이 자기 딸을 데리고,

너무 밝은 표정으로 제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주례석에 서 있는 제 눈에,

그 형제님의 간증이 갑자기 클로즈업 되면서, 제 뇌리에 딱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순간 제가 마음이 움찔 하면서,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그래도 자녀는 앞세우지 않아야 될 터인데..’ 그런 소원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자기 뜻대로 됩니까?

작년 한해에 저희 교회 장례식이 550건 정도 났습니다.

제가 다 가보지는 못 하지만, 상황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힙니다.

더 이상 무슨 말로 위로하기 어려운, 그런 케이스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일 후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다 마친 후에..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소원하고, 자기가 기도하는 일을 잘 마무리 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은혜가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방금 불렀던 찬양대로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이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씀을 외치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큰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2. 여호수아가 받았던 두 번째 중요한 은혜는

여호수아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가24:29

 

도대체 이게 무슨 은혜입니까?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어떻게 불리면서 달려왔습니까?

 

33:11절에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수종자였다는 겁니다.

1;1절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 즉 사람의 종으로 출발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종(개인 비서)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생을 마무리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의 종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 그런 영광스러운 명칭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이후로, 이 여호수아를 지칭할 때마다, 더 이상 이제는 모세의 종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입니다.

 

2:8절에 보면,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는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42: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붙드시는 종,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이 종은 사역/사명과 언제나 관련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과 사명을,

하나님 앞에서 훌륭히 잘 감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향하여 예비해 놓으신 상급이 있는데,

그 상급을 받아 누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자다.. 성령께서 그렇게 인 쳐 주신 것입니다.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칭찬을 받았습니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 되신 그 분이, 달란트를 맡은 종에게 이렇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로 항상 나누어집니다.

한 부류는 사람의 종으로 일생을 삽니다. 사람 눈치보고, 사람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가, 자기의 주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남편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가, 자기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다 주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남편을, 그 자녀를, 그 부모를 기쁘게 할까?

그걸 생각하며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종으로 일생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인정받는 자,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기를 기뻐하는 자.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상급과 면류관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수아가 받았던 마지막 은혜는

3. 눈의 아들 여호수아

 

29절에 기가 막힌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수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2850명 정도입니다.

2850명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까, 이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죽었다. 이삭이 잠들었다. 야곱이 죽었다. 다윗이 죽었다..’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본문의 여호수아가 죽었을 때는,

그냥 여호수아가 죽었다라고 쓰지 않고,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었다라고 하면서,

여호수아의 아버지를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큽니다.

몇 주 전에 아버지, 제가 눈의 아들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 했습니다만,

아버지 이라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들 한 명 잘 둔 덕에, 이 아버지의 이름이 온 이스라엘에 다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수 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도,

여호수아의 아버지가 눈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들 한 사람이 잘 되니까,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유명하게 되고,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부산 당감동이라는 동네에서 조그만 교회를 개척하던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은 빛도 없이 정말 드러나지 않고 그냥 일생동안 목회하다가 은퇴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 자녀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다 훌륭한 목사님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함께 이렇게 유명한 인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때문에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유명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은혜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아들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곤혹을 치르고,

아버지의 명예가 떨어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버지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위에서 말한 그 사실 때문에,

오늘 성경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표현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이 주는 영적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 강단에 섰습니다.

여러분, 눈 이라는 사람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라는 이름의 뜻은, 물고기랍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깊이 히브리어 원문 알파벳 숫자들을 살펴본 결과

눈이라는 이름의 문자적 의미는 생선이지만,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 그리고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눈이라는 이름이, ‘생명 그리고 생명이랍니다.   주1)

 

생명 그리고 생명이라는 말의 뜻은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원천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원천인 그 분이, 세상에 알려지지를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더군다나 모릅니다.

생명의 원천인 그 분은, 유대나라 조그만 민족에게만 영광을 받고, 알려진 분에 불과헀습니다.

한 마디로 생명의 원천이신 그 분이 local God으로 계셨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수 천 년동안 다른 민족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전혀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대민족만 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저 나사렛에서 그의 아들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일생동안 오직 하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읽어보십시오.

그 분이 단 한 번도 사람을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난 뒤에, 물 위를 걷고 난 뒤에,

5천명을 먹이고 난 뒤에, 그가 영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일생동안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이 일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가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이렇게 그분을 향하여 취조했습니다.

26:63절에 대제사장이 말합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우리에게 말하라

이게 죄목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판결내립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는데,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고 있습니다.

고통하며 괴로워할 때, 그 밑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를 바라보며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가 십자가에서 죽고 있다.’

그렇게 저들이 비난하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 예수가 드디어 숨을 거두었습니다. 테텔레스타이 하며 마지막 그가 숨을 거두고,

그 시신이 아래로 내려졌을 때, 사람들이 그 예수를 바라보며 이렇게 증언합니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예수는 일생동안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 일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드디어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부터 예수의 죽음을 계기로, 하나님이 로컬 갓을 벗어나십니다.

하나님이 온 세계에 그 이름이 전파됩니다. 오늘 우리까지도

그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놀랍고 기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죽을 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으매라는 표현은,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유명하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면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똑같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오실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이 눈이라는 분은, 알려지지도 않고, 처음과 끝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이 눈은,

생명 그리고 생명 즉 생명의 원천, 바로 하나님을 상징하는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는 일생동안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이 일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오늘 이제 우리는 죽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여호수아가 받았던 이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1) 죽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이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2) 죽기 전에, 사람의 종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 우리가 인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죽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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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내용 출처

5125[]; 기본어근 ; 다시 싹트게하다, 새순으로 증식시키다, 영속하다, 계속되다

 

5126[]; 영속, 장구 ; 33:11(눈의 아들 여호수아 ; 영속자-다시 싹트게 하는 자가

 

세운(1121) 여호수아-여호와께서 구원하심), 72:17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