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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시편 Psalms 1 / David Pawson

LNCK 2015. 10. 4. 10:03

vimeo.com/469965031

www.youtube.com/watch?v=ge6dOhO4R1k&feature=youtu.be

시편 Psalms 1                       영어  녹취록             출처보기          *데이빗 파슨 설교 모음

 

David Pawson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책은 <시편>입니다.

이 책은 성경에서 제일 긴 책이고, 찾기도 제일 간단한 책입니다.

성경을 집어서 들고, 중간 부분을 펼치면 바로 <시편>입니다.

성경 목차를 펴서 훑어보면서, 시편이 어디쯤인가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또한 제일 쉽게 사용됩니다. 즉 구절 설명이 가장 필요 없는 책이며,

문화적으로나 해석해 줄 필요도 없고,

오늘 우리가 쓰는 용어에 적합하도록 번역할 필요가 거의 없는데,

이 점이 참으로 우리를 아주 놀라게 합니다.

 

여러분 <시편>이 쓰여진 연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약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시편을 기록(수집)했는데,

오늘날로 계산하면 2500년 전이라는 오랜 세월의 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마치 어제 쓰여진 글처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생생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다른 책들은, 반드시 신약의 각도에서 재해석해야 알 수 있지만,

<시편>은 그렇지 않고, 읽으면 금방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 교회가 모임을 가질 때 <시편>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은 물론 히브리 사람들의 찬송가이지만,

그들은 이 책을 <시편 (시들, 시집)>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는 현악기의 활줄을 튕길 때 나는 소리를 가리키며,

셀라의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사람들은, 현악의 선이 끊어질 때 다윗이 셀라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하하하

 

이것은 당연히 농담이고, 셀라는 음악 용어인데, 조금 후에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몇 가지 음악 용어를 제외하고는, 시편을 이해하는데 다른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시편을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이 책은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소개하겠습니다.

 

서론 2:02~

 

유대인들은 이 책을 찬양이라고 부르며,

찬양이라는 이름이 확실히 듣기에 좋습니다.

 

특히 유대인 Jew이라는 단어가 바로 찬양을 가리키고,

JewJudah의 약칭이며,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란, ‘찬양하는 사람’, 혹은 응당 찬양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책은 음악에 맞춘 150개의 시이며,

말로 하는 것이 있고, 노래로 하는 것도 있으며, 혹은 세 번째 용도도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외치기도 합니다. 어떤 시편은 외치며 읽어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시편을 이렇게 고함치며 읽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수 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과 그 옆에 있는 감람산에까지 가득히 서서,

그 수 십 만 명이 모두 함께 시편을 낭독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호와가 다스리신다! 온 땅이여 즐거워할 지어다!”

그들의 함성이 유대 산지에 울려 퍼지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그래서 <시편>말로도 하고, 노래로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영국 사람들은 소리 지르는 것을 싫어합니다.

 

<시편>은 개인적으로 사용이 되고, 또한 공적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두 개로, 나의 시편우리의 시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시편의 대부분은 회중이 함께 노래하는 것입니다.

150개 중 대세가 우리의 시편인 셈이지요.

 

물론 집에 있을 때는 나의 시편즉 개인적으로 노래하지만,

그런데 회중이 함께 모이면 우리 아버지여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

그런데 그때도 우리 아버지여, 오늘날 우리에게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어요.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각자가 혼자 기도할 때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의 한 부분으로서 공동체성을 갖고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 기도를 할 때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이, 당신의 필요와 같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모든 예배와 모든 기도는 공동체적입니다.

당신이 매번 기도할 때, 당신이 몸 전체의 일부 지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지만 어떤 시편은 아주 개인적인 말씀인데,

이 개인적인 시편 대다수는 다윗이 기록한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대화할만한 모든 내용을 다, 이 개인적 시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뒤에서 세 가지 종류의 시편을 볼 것입니다.

제가 쉽게 그들을 요청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라는 시편으로 분류하였어요.

*Please psalms, Thank you psalms, and Sorry psalms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요청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이 세 마디를 드릴 필요가 있지요.

 

이 시편은 제자장이 사용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이 개인적 시편에는 제단, 제사장, 제사장 옷, 그리고 향 같은 것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편은 백성에게 읽으라고 준 것이며, 개인적인 신앙에 도움 되는 것들이고,

우리 같은 이러한 평범한 백성들에게 준 것이고, 소위 말하는 나의 마음속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신앙은, 우리 감정 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이 시편에는 인류의 모든 감정이 포함되어 있고, 아주 깊은 슬픔이 있습니다.

저를 깊게 감동하는 한 마디가 있는데, 이는 바로 주께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시에 만약 가족이 죽는 일을 만나면,

가족에게 화환을 보내어 애도의 뜻을 표시하는 풍습이 아니라,

10cm 높이의 유리병을 눈 밑에 가져다가 눈물을 받아서

가족/친지에게 보내어 애도의 뜻을 표시하였습니다.

 

여러분, 아주 재미있지 않습니까? 시편 저자가 말하기를 주께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편이 표현하는 감정에는 기쁨이 있고, 좌절이 있고, 분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에서 표현한 분노를,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크리스천은 그러한 시편을 부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이 부류의 시편을 살펴봅시다. 학자들은 이 부류의 시편을 저주시라고 합니다.

이 시편들은 복수를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살기가 충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크리스천이 이러한 시편을 과연 인용해야 하겠습니까?

 

조금 후에 우리 함께 <시편>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저주시가 가장 큰 문제이지만, 다른 문제들도 있지요.

 

마르틴 루터는 말하기를, ‘우리는 <시편>에서 성도의 마음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하였고,

칼빈도 이와 비슷하게 ‘<시편>, 마치 우리 마음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말하였어요.

 

어떤 사람은 심지어 말하기를 매 시편마다, 우리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한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가 바로 나의 사정을 노래한 시다라는 뜻.

 

<시편>이 구약에서 제일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책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제일 친밀한 책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자기 인생과 동일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약성경 가운데서 이 책에 대해 제일 익숙하고, 제일 사랑하는 책이 바로 <시편>입니다.

사람들이 시편23편에 대해 널리 알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축구 시합에서까지 이 시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23편이 제일 오해되고 또한 남용되는 시가 되었습니다.

뒤에서 이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시편은 성경의 축소판이며, 성경 중의 성경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중에서 <시편>을 제일 많이 인용하였고,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인용한 것이 <시편> 110: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러분, 성경의 모든 시가 <시편>에만 들어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익숙한 사람은 아시겠지만, <시편>밖에도, 시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시편 바깥에서 적어도 11명이 시를 기록하였습니다.

모세와 미리암도 시를 기록하였는데, 출애굽기 15장입니다.

 

드보라도 시를 기록하였는데, 사사기 5장입니다.

한나도 시를 기록하였는데, 사무엘상에 나옵니다.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시를 기록했는지 주의해 보셨습니까?

보통 여자들이 남자보다 시를 좋아하지요. 아마 뇌의 작용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여자의 뇌는 직관이 남자보다 더 발달했는데,

그리고 남자들은 보통 조금 신경 써서 시를 감상하지만, 여자는 마음의 직관으로 시를 감상하지요.

 

욥이 세 개의 시를 기록하였고, 이사야가 하나를 기록하였고,

히스기야 왕이 하나를 기록하였고, 예레미야, 그리고 요나도 기록하였습니다.

 

요나는 기도할 때, 시로 노래를 지어 불렀어요.

우리가 <요나>서를 공부할 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이미 죽은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어요.

요나가 그때 살아 있은 게 아닙니다.

 

그 물고기가 시체 하나를 삼켰어요. 요나가 말하기를 내가 스올(무덤)에서, 부르짖었더니

거기는 죽은, 형체가 없는 영혼들의 거처이며,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그가 이 기도에서 각기 다른 시편을, 5번이나 인용하였어요.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이 요나의 죽은 영혼을 육체와 결합시켜 주셨고,

물고기가 그의 시체를 토해낼 때 살아났는데,

완전히 예수님의 부활과 유사하지요. *analogy

 

요나는 살아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부활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처럼, 요나도 사흘 동안 죽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어떤 분들은 제가 강의한 <요나서>를 들어 보지 못한 것 같네요.

 

하박국도 시편을 인용하였는데, 후에 <하박국>도 우리 함께 공부합시다.

 

<시편>에 기록된 시 대다수는, 경건의 목적으로 수집되었습니다.

시편은 한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5권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시편이 1, 2, 3, 4... 이렇게 아주 명확히 총 5권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5권으로 집합된 찬송가라고 할 수 있고,

이것들을 함께 묶으면 바로 우리의 <시편>이 되는데, 참으로 다양합니다.

길이도 서로 다르지요. 제일 짧은 것은 단 3절만 있는데, 바로 117편이고, 제일 긴 것은 119편입니다.

 

저의 한 친구가 어려운 일에 봉착했어요. 그가 환자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는데,

기도 중에 환자가 도리어 심장이 멈추어 버렸어요.

그래서 그가 거기에 있는 성도들더러 <시편> 119편을 끝까지 읽으라고 하고,

그는 계속하여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119편을 읽는 동안 20분이라는 시간을 벌어주었고, 결국 이 난관이 해결되었어요.

다행히도 그의 계속된 기도 가운데, 심장이 멈춘 환자가 결국 다시 회복되었어요.

만약 당신이 시간을 벌려면, 그들에게 <시편> 119편을 읽으라고 부탁하세요. *농담

 

시편의 넓이는, 개인적인 필요에서부터 온 세상의 필요까지 다 포함되어 있고,

깊이 면에 있어서도, 제일 큰 기쁨에서 제일 깊은 슬픔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시편은 우울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고 있느냐

이 말씀이 시편 42, 43편에 후렴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히브리 시이어서 낭독하는 것이 좋지만, 너무 분석하지는 마십시오.

설교자들은 시편을 분석하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은 그저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만약 너무 많이 분석하고 쪼개면,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파괴됩니다.

 

시편 하나를 먼저 전부를 읽고 나서 묵상을 하면, 어떤 메시지가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만약 필요하시다면 반복해서 읽으십시오.

 

5권의 책

 

11~41 (41)

242~72 (31)

373~89 (17)

490~106 (17)

5107~150 (44)

 

5권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요.

5권의 시편 모두는 영광송(송영)으로 끝을 맺는데,

마지막에 모두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영광송이라는 것은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doxology doxa가 헬라어로 영광

제일권의 마지막 한편인 41편이 영광송이고, 72, 89, 그리고 106편도 영광송입니다.

특히 150편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였어요. 이것은 시편 150 전체의 영광송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매 권마다 모두 영광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너의 심정이나 느낌이 어떠하든지, 마지막에는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5권은 매 권의 길이가 다릅니다. 이는 시편이 포함한 수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권과 제5권의 편수가 제일 많은데, 둘 다 40편을 초과했고,

2권은 약30, 3, 4권 각각은 16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각 권의 두루마리의 길이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12:11~

 

이 다섯권의 책에는 하나님에 대해 서로 다른 호칭이 있어요.

엘로힘은 이름이 아니라, 이 단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복수입니다.

 

하나님의 단수형은 인데, 마치 알라와 비슷하죠. *중동에선 같은 말

이는 한분인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분의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는 엘로하’,

삼위인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엘로힘)가 구약성경에 거듭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복수 단어 뒤에는, 항상 단수인 동사가 나오는데,

바로 삼위일체를 뜻하니까, 단수 동사를 쓰는 겁니다.

 

성경의 첫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창조하다는 단어가 단수,

그러나 하나님은 복수 엘로힘 이지요.

 

그래서 성경의 첫 구절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 관점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베일로 가려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지요)

 

그들의 눈에는 이 복수의 하나님 이름이, 여왕인 복수 우리와 부르는 것이 같습니다.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에 대한 복수 명사는,

마치 여왕들이 우리라고 말할 때와 같지요.

혹은 대처 부인이 농담하기를 “ ‘우리가 오늘 할머니가 되었다.”라고 할 때입니다.

 

*여왕, 또는 수상 자신은 단수이면서, 겸양적 표현으로 우리로 말한다는 뜻인 듯.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해하는 듯.


그런 말은 왕궁에서 왕족이 쓰는 특수한 표현이죠. ‘우리라고요.

그런데 그런 우리보다, 진짜 우리가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 위가 한 분으로 계십니다. 삼위일체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한분이라면, 그 분은 사랑일 수 없고, *세 분이라야 사랑의 관계가 성립하지요.

만약 하나님이 한분이라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위격을 가지신 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한 분이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면서, ‘나는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시편에는 계속하여 엘로힘(직함, 하나님)이 나오고요. *, 임금(직함)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 입니다. *태조(이름)

 

어제 여기에 온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저에게 알려주기를

야웨 라는 단어가 세 글자로 구성되었는데, Y H W H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야웨존재한다라는 동사의 분사형입니다. *존재하는

누가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저는 야웨를 항상 존재하시는 분 ALWAYS’로 번역하기를 좋아합니다.

야웨 하나님은 the God Always 이십니다.

 

1권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을 야웨라 부르는데, 야웨라는 단어가 272번 나타났지만, Elohim15번만 나타났습니다.

 

2권에서는 반대로 엘로힘 단어가 야웨보다 더욱 많이 나타났습니다. *엘로힘 207, 야웨 74

 

3권에도 마찬가지로 엘로힘 단어가 야웨 보다 3배나 더욱 많이 나타났어요. *엘로힘36, 야웨13

 

하지만 4권과 5권에는 또 반대로 야웨가 339, 엘로힘은 7번만 나타났습니다.

 

이 변화가 시편의 성질과 저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시 대부분은 제1권과 제2권에 들어있고,

또 제5권에도 몇 개가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원인이 있는데, 엘로힘초월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 줍니다.

, 그는 아주 먼 곳에 계시며, 우리보다 훨씬 높다 라는 뜻입니다.

그는 우리와 다르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야웨 라는 이름,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내재해 계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친밀히 가까이 할 수 있고, 그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죠? *서구에선 친한 관계는 교수, 목회자도, 비공식석상에선 이름을 부르잖아요.

 

이 두 개가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초월자이시며(엘로힘),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야웨)이심을, 둘 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사람과 다르며, 높은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가까이, 친밀하게 내주하고 계십니다.

 

만약 당신이 한 면만 알고, 다른 면을 모르고 있다면, 균형을 잃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혹자는,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친밀하게 지내지만, 그분이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너무 멀어서, 하나님이 높이 계신다는 것만 믿어서,

감히 그분의 이름을 친밀하게 부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자는, 그분을 그리스도라 부르는데, 직함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그의 이름보다 느낌이 멀어 보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이고, 우리는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가집니다.

만약 누가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를 좋아 한다면,

그분과의 개인적 관계가 그리 친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직함에 의해 존중하게 부를 필요가 있고,

또한 그 이름을 친밀하게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둘 다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렇게 아주 좋은 균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작과 마지막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친밀하게 야웨로 부르고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를 살펴봅시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이 제일 많습니다.

대부분이 1권과 2권에 기록되어있고, 5권에 또한 몇 편이 있습니다.

 

다음은 고라의 자손인데, 여러분, 고라를 기억하십니까?

당시 고라가 모세에게 반역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손들은, 성막에서 찬양하는 성가대가 되었어요.

나중에 솔로몬 성전에서도 성가대를 계속했지요.

 

그들이 몇 편의 시를 기록하였는데, 모두 2권과 3권에 있으며,

42~49편 모두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다음으로는 아삽의 자손인데, 그들도 성전의 성가대입니다.

아삽의 시편은 모두 3권에 있는데, 특히 73-83편입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무명인들이 시편을 기록하였는데,

무명인들이 기록한 시편은 모두 4권과 5권에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누가 기록하였는지 모릅니다.

 

이 무명인들이 기록한 시도 유용하게 사용되어진다는 사실은,

우리 무명인 들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모세도 한편을 기록하였는데 490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시편입니다.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영국 국가 행사 때 잘 부르는 찬송. 새찬71

 

이 찬송은 시편 90편에서 취한 것이며, 이것은 모세가 기록한 노래입니다.

특히 현충일(전사자 추모) 주일에 이 찬송을 부르면, 저는 참지 못하여 눈살을 찌푸립니다.

 

왜냐면 그 가사에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는 것으로, 우리의 방어는 확실하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왜 그렇게 많은 예산을 국방비로 허비하지요?

 

영국에 크롬웰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있는데,

하나님은 믿고 의지하지만, 총에 총탄은 넣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이 시편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자세히 보겠습니다. 18:23~

 

모세의 노래, 90편이 가장 오래된 시입니다.

모세 시대에 기록한 것이어서, 제일 오래된 시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기록한 시가 제일 많고, 그 중에 73개가 다윗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외에도 이름이 안 적힌 몇 개가 더 있는데, 이것도 그가 기록한 것 같아요.

그래서 시편의 절반 이상을 다윗이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이 죽을 때, 그는 자신을 가리켜 재미있는 표현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삼하23:1

 

*삼하23: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Israel’s sweet singer

 

한번은 제가, 어떤 초신자로부터 아주 멋진 간증을 들었습니다.

(갓 회심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까, 온 세상이 모두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우리 마을의 작은 다리를 건널 때, 시냇물이 저를 보고 노래하였고,

새들이 저를 향해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든 자연계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노래하며 집으로 걸어갔고, 제가 집안으로 찬송하며 들어갔는데,

저의 아내도 노래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아내가 진짜 노래한 것은 아니고

아내는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 재봉틀 브랜드가 Singer 였지요.

그래서 온 세상 모두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한 외과의사를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둘이 같이 "Dr. E. D."라는 TV 방송에 출연했어요. *거기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의사는 말하기를, 자기가 한번은 미국의 싼 호텔에 투숙했는데,

하루는 그 4층 베란다에서 난간에 기대고 있었는데, 그 베란다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여 떨어져서, 콘크리트 바닥에 박아 머리가 터졌는데,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에 시체처럼 누워있었고,

구급차가 그를 병원에 호송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시신안치실에 넣어졌습니다.

 

근데 이틀 후에,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일으켜 살아났다고 하였어요.

당시 그가 그때 자기의 경험을 얘기했는데,

요즘 <매일 신문>에도 그와 비슷한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절대로 아주 조심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당시 그 의사의 경험은, 그가 하늘에서 주님과 동행하였고,

그가 하나님과 또한 주님과 함께 동산을 걸어 다녔는데,

당시 그의 귀에는 계속하여 음악 소리가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걷는 중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관현악단과 성가대들이 어디에 있는가 살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 음악이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갑자기, 꽃과 나무들이 노래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온 피조세계가 노래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였어요.

그리고 그가 바로 즉시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과학계에서도 동일한 발견이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과학 잡지를 읽었는데,

거기서 말하기를, 나무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녹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걸 녹음테이프에 담을 수 있다고 하네요. 아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사실 성경은 일찍이 온 자연계에 노래가 충만하고, 나무들이 하나님을 향해 노래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자연계의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은, 그게 우리의 가청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저의 집에 천사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녹음한 것이 있는데, (?)

우리 대다수는 천사의 노래를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걸 듣지 못해서 주님께 감사합니다.

만약 듣는다면, 천사의 노래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데,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듣고서, 우리가 어떻게 노래하겠습니까. *비교되어 중단하겠지요.

그래서 온 자연계에 음악이 충만한데, 시편은 이 점을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21:48~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였습니다. 삼하23:1

(다윗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아름답고 훌륭한 시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이런 시인이 된 것은, 과거에 목자의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향 시골에서 노래하는 법을 스스로 배웠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악기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양떼를 돌보면서, 매일 같이 앉아서, 그 악기로 노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변의 대자연과 함께 노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홀로 있을 때, 그는 자기 주위에 많은 성가대(대자연)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에 보면, 솔로몬이 1005개의 시를 지었다고 하지만,

그 중에 6개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럼 나머지 999개는 어디로 갔지요?

 

제가 추론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앉으신 어떤 분들은 제 추론을 들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구약에서는 제일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700명의 장모가 있는 남자가,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혜가 있다면, 그런 잔소리, 참견꾼들을 700명이나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내가 700명이요, 그 외에도 첩이 300명이니,

제 추론에 의하면, 그가 사랑한 여자 한 명당 노래를 1개씩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자들 중에서, 한 사람만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여러 사랑의 노래가운데, 오직 하나만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아가)1, 다른 시가 5

 

 

이것은 저의 추론입니다. 나중에 제가 그를 만나면, 제대로 물어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아주 아름다운 시편을 몇 개 기록하였어요.

당시 그가 이러한 시를 계속 기록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 중의 한 시는, 성전을 준공할 때 불렀던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다윗더러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여서, 다윗은 건축재료 준비만 하였고,

성전 지을 땅까지 사서 준비를 했지요. 그래도 그가 성전을 지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손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이름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샬롬과 같은 말이지요.

그래서 성전을 그가 건축했는데, 그의 마음에 계시가 임했습니다.

성전은 너무나 장엄한 건물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이런 시를 지었지요.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그가 이스라엘에서 제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였기에,

이러한 놀랍게 훌륭한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는 시간과 돈만 낭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고라의 자손, 아삽과 헤만 등도 시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왜 시편을 기록하였을까요? 그들은 어떻게 시편을 지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것은 모두 실제 삶의 경험에서 온 시들입니다.

그들의 실제 삶에서 떠오른 시적 감흥과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감정이 충만합니다.

시인들의 시상은, 보통 어떤 특정 상황에서 느낌으로 떠오르지요.

 

그들의 감각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시편에, 역사적 배경의 제목을 명시하였어요.

즉 다윗이 그 시를 기록한 원인이 되는 사건을, 지적해 주고 있지요.

 

14개가 다윗의 생에 일어난 사건과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시편 전체가 다윗의 일생을 묘사했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지만 그 중에 14편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왕위를 빼앗으니 다윗은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 실제로 다윗은 자기 목숨을 위해서 도망했습니다.

3이 바로 그가 아들로부터 도망가는 기간에 기록한 것입니다.

 

읽을 때, 아들을 피해 도망가는 그 아버지의 수치가 느껴질 것입니다.

3편에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7, 다윗이 베냐민 사람 구스의 공격을 받을 때, 쓴 것입니다.

 

18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과 모든 대적의 손에게 벗어나 구원받았을 때 기록한 것이고,

그가 도망할 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서 시18편을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이 전에 중한 죄를 두 번 지었어요. 여러분 모두 아시듯이

첫 번째는 밧세바하고 죄를 범했는데, 이것은 사탄이 그를 유혹하여 지은 죄가 아닙니다.

다윗이 밧세바하고 지은 죄는, 완전히 그 자신의 잘못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조심해야 하는데, 모든 일을 사탄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짓는 많은 죄들은, 사탄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시험할 필요가 없고,

사탄이 근본적으로 손을 대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탄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일반인의 평소 관점과 약간 다르네요. 차후 검토를 요합니다. ‘자기 육신의 정욕때문이란 뜻이지요.

 

다윗이 밧세바하고 죄를 지은 것은 전환점인데, 이로써 모든 것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날 오후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하락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었고,

사탄은 손을 대지 않았고, 이 모든 것은 다윗 자신의 잘못이었습니다.

*성경에, ‘사탄이 격동하였다는 말이, 밧세바 사건에 안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 와서 비유로 그에게 말을 하는데,

비유를 들어서, 다윗의 죄를 지적하였지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이로써 다윗이 시51편을 기록하였는데,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나의 이름을 당신의 생명책에서 지우지 마소서”, 51, 제일 감동적인 시입니다.

 

하지만 그가 두 번째 죄를 범할 때는 사탄이 개입하였어요.

그의 인생 노년에, 그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후, 사탄이 다윗에게 와서 말했어요.

네가 얼마나 위대한 왕이냐? 네게 지금 군대가 얼마나 되냐?” 추켜세웠습니다.

 

사실 다윗이 인구조사를 근본 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그가 이미 승전했기 때문입니다.

*인구조사는, 전쟁 나가기 전에, 군대를 계수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인구조사는 완전히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성경에 사탄이 그를 시험하였다고 하였어요.

그에게 네게 현재 병사가 얼마나 되냐라고 물으니,

다윗이 바로 인구조사를 하여, 의기양양하게 그 많은 군인 수를 세어보지요.

 

그러다가 그는, 이게 범죄임을 깨닫고, 바로 시32편을 기록하였는데,

이것 또한 감동적인 시편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그가 입을 열어 죄를 고백하자 바로 건강이 회복되었어요.

그리고 또 많은 훌륭한 시편들이 있습니다.

 

시편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제가 당시 다윗이 시편을 기록했던 곳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사해 해안인데, 거기는 대부분 소금과 메마른 광야 밖에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의 계곡이 있는데, 따라 걸어 올라가면 폭포와 못이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엔게디입니다.

 

만약 사해를 가시면, 거기를 가 보십시오. 거기의 산지가 완전히 메말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갑자기 시원한 연못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그 안에서 수영을 했습니다. 그 연못에 하나의 폭포가 있는데,

여기에 앉으신 분 중에 엔게디에 가 보신 분 계십니까? 그 분은 제 설명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의 동굴이 있는데, 당시 다윗이 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이 이 동굴에 용변을 보러 들어왔지요.

다윗이 그가 용변을 보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다가와서 그의 옷자락을 칼로 베었어요.

 

사울이 대변을 보고 동굴에서 나오니, 다윗도 바로 나와서

칼로 벤 옷자락을 사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는 표이지요.

 

그러자 사울은 순간 후회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보다 의롭구나. 나라면, 그런 기회에서,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때 사울이 다윗을 놓아주었어요.

 

하지만 다윗은, 그 계곡에 숨어 있었을 때, 그 외에도 많은 시편을 기록하였어요.

그가 시원하게 흐르는 물을 묘사한 것을 보면, 다윗의 시편에 항상 물을 얘기한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그 폭포에서 수영을 했다고 저는 봅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에, ‘물기둥이 나를 휩쓸었다고 했기 때문이고,

여러 가지 물과 연관이 있는 표현들을 그가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종종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고, 나의 요새시라고 노래하였는데, 기억하시죠?

이것은 마사다인데, 바로 엔게디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 있고,

이 삼각형의 크고 높은 바위의 삼면이 모두 절벽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유대인과 로마인의 마지막 전쟁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어요.

로마군대는 1년 반 동안, 그 바위 위로 올라가는 비탈길을 만들었고,

그들이 공격해 올라가보니까, 모든 유대인들은 이미 자살하여 죽어 있었습니다.

 

마사다의 이야기는 아주 감동적이면서도, 슬픈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마사다가 바로, 다윗이 노래한 반석이요 요새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위에 있으면, 아무도 당신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매번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라고 하였는데,

그가 마사다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그 곳들을 방문해 보시면, 시편이 지어졌던 실제 삶의 정황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편은 저자가 직접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기의 심정을 완전히 여지없이 다 드러내었습니다.

현대적 표현으로, 다 보여주었습니다. 자기의 감정 상태를요.

 

그런데 보통 일반 남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자기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그래서 교회 철야 기도시간에, 누구나 자유롭게 일어서서 대표로 기도할 때,

여자가 남자보다 잘 기도하는데,

남자들은 이 방면에 장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여자들은 뇌는, 언어 영역이 남자들보다 더욱 발달했다고 해요.

그래서 대다수의 통역자들은 보통 여자입니다.

여자들이 생각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남자보다 더욱 쉽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이 언어 표현 능력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는, 남자들도 많이 일어나서 기도하고, 간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매들처럼요.

 

남자들은 이 방면에 확실히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성령님이 이 문제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먼저 혀를 터치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을 혀로 표현하게 됩니다.

 

어떤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전혀 울어보지 못하였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보았어요. 그런 남자들도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 울기도 하면서

자기 감정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밖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이 시편들은, 성령충만을 받은 남자에 의해서 지어진 것들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렇습니다.

보통 남자들은 자기 내면의 두려움이나 불안을, 솔직하게 시나 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성령충만했기 때문이지요.

 

<시편> 23편은 다윗이, 목동의 일상의 경험에서 감흥을 얻어 기록한 것입니다.

일상의 삶의 경험에서 시를 쓴 사람 가운데, 맹인 조지 매터슨 이라는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는 맹인들이 사용하는 시계가 있었는데, 점으로 숫자를 표시하였고,

한번만 만져보면 몇 시인지 알고, 그는 평상시에는 시계를 코트 허리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하루는 그가 시계태엽을 감으면서, 몇 시 인지를 만져 볼 때,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 맡기지 않았을 때는, 참으로 연약하고 빈곤하였습니다.

마음에 동기가 언제나 없었는데, 태엽을 감아주실 때 제가 흔들거렸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태엽 사슬로 제 마음을 묶어주시니,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제 마음을 노예로 삼으셨습니다.

그 식지 않는 사랑이, 앞으로 제 마음을 지배하실 것입니다.”

 

이 시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이것은 한 맹인이 쓴 시이며,

그가 시계태엽을 감을 때 얻은 감흥입니다. 대다수의 시편은 이렇게 쓰여졌는데,

이는 일상생활의 어떤 것이, 시상을 떠오르게 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29, 한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간 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다윗이 마침 밖에서 이 폭풍우를 만났었습니다.

다윗은 야외에서 졸고 있다가 갑자기 우레(뇌성)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29편은 구구절절 하나님의 음성을 얘기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는 마치 우레 소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는, 듣고 우레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음성이 어떠할까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보기에는 우레 소리와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모두가 개인의 경험을 묘사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시편은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위기상황에서 기록한 시편이 있고, 일상생활에서 기록한 시편이 있는데, 둘 은 크게 다릅니다.

많은 시편이 위기 중에서 기록되었고, 이스라엘에 관한 시편은 이스라엘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기록된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기억하는데, 2차대전이 시작된 후, 영국의 교회들에 사람이 꽉 찼습니다.

모든 사람마다 갑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특히 됭케르크 철수작전 때 많이 기도했습니다.

 

됭케르크 철수 당시, 날씨에 기적이 일어나서 영국군들을 구하였지요.

나라가 위기를 만나니,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요.

그래서 국가적 위기 때 옛부터 도움 되시고라는 찬송을 우리가 부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시편은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시편은, 대관식 같은 국가의 평온한 상황에서 기록하였습니다.

 

2편은 다윗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 기록한 것인데,

이를 읽으면 다윗이 아들이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읽을 수 있으며,

이로써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약속이 실현 되었지요.

(하나님)가 네(다윗) 아들이 왕이 될 때, 그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에서 말하기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많은 시편이 우리더러 경건한 삶을 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119편은 우리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는, 그 수많은 모든 구절마다 말씀의 동의어들이 나오는데요,

주의 법’, ‘주의 명령’, ‘주의 교훈’, ‘주의 율례’, ‘주의 증거들입니다.

119편은, 성경공부를 하라고 독려하는 시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편은 당신더러 기도하라고 격려합니다.

92은 사람들더러 안식일을 지키라고 격려하는데,

그건 주일 아침 11시를 지킬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1

 

주일날 아침 저녁으로 경배하는 법이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지요.

모두 아침 한 시간 반만 예배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사용하지요.

 

하지만 우리 이젠 안식일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세 율법의 일부분이고, 우리에게는 매일이 주일(주의 날)입니다.

 

어떤 시편은 일반적인 행동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룹 시편 35:12~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룹으로 연결된 시편을 살펴봄으로써, 이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몇 개가 함께 그룹으로 연결된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22-24편은 아주 중요한 그룹 시편입니다. 이건 마치 샌드위치와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있는 과일 잼(23)만 좋아하지, 겉의 빵(22, 24)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개의 시편은 함께 그룹으로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세 개를 십자가, 지팡이, 왕관이라고 부릅니다. *22Cross, 23Crook, 24Crown

 

이 그룹 시편은, 하나님을 구세주(22), 목자(23), 주권자(24)각각 다른 측면으로 나타냅니다.

 

22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3편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에 나와서, 먼저 구세주를 발견한 사람만이(22),

그분을 나의 목자로 부르는 것이지(23),

22편의 십자가 경험 없이, 23편의 목자로 모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23편만 따로 떼서, 자기 임의로 노래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비신자의 장례식이나 축구시합 할 때 이 시23편을 노해하는데,

22편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23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목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시24편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그는 만왕의 왕이요 만군의 주이시라

 

만약 예수님을 우리의 선한 목자라고 본다면,

먼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그 분은, 이제 다시 오실 왕으로도 보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분을 선한 목자로만 본다면, 그분의 다른 두 신분을 무시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이 세 개의 시편이 완벽하게 함께 그룹으로 배합되어 있습니다.

제가 <성경의 떨어져나간 잎사귀>라는 소책자 하나를 출판했는데,

거기에 제가 이 세 개의 시편을 현대 영어로 번역하였어요.

제가 몇 마디를 읽을 테니 들어보세요.

 

Psalm 22

 

My God my God why?

Why have you left me all alone me have of all people?

Why do you seem so distant, too far away to help me

or even to hear my groans?

Oh my God I shout in the daylight but there is no reply from you.

I haul in the dark but no relief comes.

It does not make sense because you are utterly good.

Our ancestors trusted you to the hilt

when indeed you got them out of trouble.

They appeal to you and reach safety.

When they relied on you they were never let them down but I,

I am treated more like a worm than a human being

with no consideration for men and nobody contempt from the mob.

Everyone looking at me makes fun of me, they put their tongues out,

shrug their shoulders and jeer.

He said the Lord will prove you right if he gets him out of this,

if the Lord is so fond of him let him set him free, if they only knew.

 

여러분,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분명히 이 시22편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한 마디가 무엇인지 아시죠? “다 이루었다

다음으로 시편 23편입니다.

 

Then Psalm 23,

 

The only God who really exist, the God of the Jews, cares for me as an individual,

like a shepherd for his sheep so that I will never lack anything I really need.

He forces me to rest where there is abundant nourishment

then He moves me on making sure I have constant refreshment.

He puts new life into me when I am exhausted.

He keeps me on the right tract to maintain His good reputation.

And even if I travel through a deep dark ravine where danger lurks in the shadows

I’m not afraid of coming to any harm because you are right there beside me

with your casual to guard and your crook to guide I fill quite safe.

 

 

Psalm 24,

 

“Fling wide the city gates, open up the old citadel doors, His magnificent, majesty is about to enter.

Who is this marvelous monarch?

The Powerful God of the Jews, the undefeated God of Israel.

Fling wide the city gates, open up the old citadel doors,

His magnificent, majesty is about to enter.

Who is this marvelous monarch,

the God who commands all the forces of the universe?

That is who this marvelous monarch is.

(So be quite for a while and think about Him.)

 

흥미가 있다면 이 소책자를 사서 보십시오.

이 세 개의 시편이 그룹으로 큰 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편을 응당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편> 23편만 따로 떼 내어서 읽으면 안 됩니다.

다음 단원에서 우리 다시 <시편>이 또한 어떠한 다른 그룹 시편이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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