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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시편 Psalms 2 / David Pawson

LNCK 2015. 10. 10. 08:27

vimeo.com/469965146

www.youtube.com/watch?v=BqhGvPF63uM

시편 P2                영어 녹취록             출처보기

 

그룹 시편

 

1강에 이어서 그룹 시편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룹 시편은, 함께 그룹으로 같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배경정황 속에서, 본문을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앞서 우리는 22, 23, 24을 같이 그룹으로 읽어야 함을 얘기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96~99입니다. 그 시편들은 모두 공통된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왕이시다입니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본문이고,

이 몇 개의 시편은, 그룹으로 함께 놓고 보아야 합니다.

 

또 다른 그룹시편은, 113-118인데, 히브리어로 “할레오 (찬양 시편)이라고 불립니다.

이 시편들은 유월절 때 함께 그룹으로 불려집니다.

 

그 중 시118편은 우리도 자주 사용하는데,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118:24

 

하지만 이 날은, 구약시대의 유월절 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날은 주일 Sunday 이나 다른 어떤 날에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유월절을 지칭하는 날입니다.

 

이 시편에 하나님께 주님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부르짖는데요. 118:25

이 말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우리를 해방하소서입니다.

 

여기에서 구원하소서(해방하소서)’의 히브리어는 호산나인데,

아쉽게도 오늘날에 우리는 호산나를 천국의 인사말 hello 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호산나는 해방을 요청하는 외침입니다.

호산나!’ 유월절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실 때,

군중들이 그에게 향하여 호산나라고 외쳤지요.

 

당시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 자기들을 로마인의 통치에서 건져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눈에 비극적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문으로 들어가신 후,

오른쪽(로마 관정 쪽)이 아닌 왼쪽(성전 쪽)으로 향하시자,

군중들의 함성은 멈추었고, 찬물을 끼얹듯이 조용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다음 행동은, 손에 채찍을 드시고

로마인들을 내쫓은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성문으로 들어가면, 로마군대의 본부가 오른쪽 길에 있었고, 성전은 왼쪽 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실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땅에 놓고 외치기를

호산나! 호산나!” 했습니다. ‘지금 우리를 구원(해방)하여 주소서란 뜻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크게 실망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그들은 이렇게 외쳤지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가 이용 가치가 없게 되었으니, 민족 해방의 투사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한 것입니다.

미안한데, 제가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시118편에서 온 찬양 시편입니다.

유월절 때 민족의 해방을 달라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다음으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인데, 120~134편입니다.

이 시편들은 올라가는 노래로 불리는데, 즉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산꼭대기의 조금 움푹하게 패인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순례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올라간다알리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들은 이스라엘로 이민 갈 희망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알리야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예루살렘으로 향해 올라가시겠습니까?”라는 뜻이죠.

이 시편들은, 원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121, 저와 제 아내에게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저의 아내의 눈에 암이 생겼는데, 당시 생명까지 위험했습니다.

 

병이 아주 엄중했고, 의사들이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사투를 했습니다.

아내가 병원에 있을 때, 제가 주일날에 할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시편> 121편으로 인도하셨고,

저는 거기서, 매 절마다 모두 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어요.

 

내가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121:1

여러분이 예루살렘을 향해 걸을 때, 만약 눈을 위로 향하여 들면 아주 위험합니다.

그러면 바로 넘어질 수 있는데, 그 길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위로 올라갈 때는, 눈을 항상 반대로 땅을 보고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121:1

그러므로 주여, 제 발을 지켜봐 주실 줄 믿습니다.” 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3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키시는 자라고 얘기했습니다. :4

지키시는 자라는 단어가 히브리 원어에는 눈꺼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눈 속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십니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2:8

여호와께서..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32:10

 

우리 눈에 눈동자 형태가 마치 한 알의 사과 같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마치 눈꺼풀이 눈동자를 보호하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 4, ‘이스라엘의 지키시는 자이스라엘의 눈꺼풀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우리 몸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어서,

뭐가 눈동자에 살짝 닿기만 해도, 눈꺼풀이 순간적으로 내려와서 쾅 닫히지요.

 

이게 시 121편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주일 날 즐겁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기에 앉으신 한 두 분도, 그 자리에 있었지요.

제가 한 구절씩 모두 설명하면서 설교했지요.

 

태양 빛에 의해 눈이 상할 수 있는데, 달빛에 의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야외에서, 보름달 빛 아래서 잔다면, 맹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동 광야의 달은 아주 밝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지키시는 자입니다.

낮에는 해가 나를 상하지 않게 하시고, 밤에는 달이 나를 상하지 않게 보호해 주십니다.

그날에 제가 이 시편을 설교하고 나서, 설교한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병원으로 갔어요.

 

하지만 주님을 믿은 지 2개월이 된 젊은 간호사가 저보다 한걸음 앞섰어요.

그가 제 아내에게 이 구절을 주었어요.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몇 주가 지나서, 붕대도 감을 필요도 없이, 저희 부부는 캐나다에 가서 로키 산맥에 올랐어요.

후에 암이 다시 발작하지 않았어요. 주님은 정말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래서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은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그룹은 146~150인데, 이 다섯 편은 모두 할렐루야 시편이며,

할렐은 찬양, ‘는 야웨를 가리킵니다. 합치면 하나님을 찬양하라이지요.

 

이 다섯 편 모두는, ‘할렐루야로 마치며, 모두 주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150편의 이스마엘 버전은 비파를 치며 찬양하리라는 인데,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이 살아있는 경배찬송은 바로 시편에서 취한 것입니다.

 

저는 이 현대판 시편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래로 쉽게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룹시편 정리

22~24: Cross, Croak & Crown

96~99: God is king

115~118: Passover

120~134: Songs of Ascent

146~150: Hallelujah

 

 

 

 

시편의 유형 Types of psalms 6:35~

 

그룹 시편을 끝내고, 이제 시편의 종류를 보겠습니다.

제가 서두에서 “please 시편”, “thank you 시편”, 그리고 “sorry 시편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 종류의 형식이 아주 뚜렷하고, 그 형식이 내용과 잘 부합되는데요.

 

1. 애가 시편 lament psalms

애도시가 있습니다. 보통 애가라고 부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슬픈 노래이지요.

자기 속마음이 표현되는 것이지요.

저자가 어떤 불행을 만나서 슬퍼하며, 그 슬픔에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이런 애가에는, 자기 연민의 감정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시를 읊음으로써), 치유 받습니다.

 

자기 연민에 깊이 빠져있다가도, 이렇게 노래하며 하나님께 그 슬픔을 드러냅니다.

주님, 제 마음이 너무 아프고,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때는 중병에 걸려서 마음이 혼란스러운데,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영적으로 침체됩니다. 그렇지요?

 

저는 수술을 몇 번 받았습니다.

그때 입원할 때마다 많은 경건서적들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퇴원할 때, 거의 그대로 들고 나옵니다. 읽지 못합니다.

 

수술하고 나면 아주 몸도 힘들고, 영적으로 메말라집니다.

그 사실을 건강한 사람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상태가 별로 안 좋아지지요.

 

어떤 시편들은, 질병으로 마음이 혼란하거나,

불공정하게 대우를 받아서, 자기 마음이 심란한 것을 슬프게 노래했습니다.

 

인생은 당연히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데,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로써 아주 쉽게 스스로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는데요.

자신이 응당 더욱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능력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승진하거나,

혹은 나의 아이가 죽었고, 다른 사람들의 아이는 아무 일 없을 때,

우리는 그 불공평 때문에 아주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런 심정을 노래한 시(애가)들이 있습니다.

 

이 애가 시편의 형식은 모두가 똑같습니다.

리듬이 아주 느리고, (시에 맞춘) 음악도 장송곡 같으며, 마치 장례식장에서의 노래와 같고,

음악 리듬이 매우 무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특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어떤 시편은 밝고 기쁨으로 살아있지만, 어떤 시편은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런 애가들은, 동일한 5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

-불공평한 일에 대한 원망 불평,

-하나님이 자기를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

-하나님이 개입하여 달라는 간구,

-찬양의 서약 만약 저를 구원하여 주신다면, 반드시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

 

모든 애가 시편은 이러한 5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서 시 전체를 읽어야 하며, 단 몇 절만 빼서 읽으면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시에서의 심정은 점진적입니다. 그리고 균형이 있는데요, *슬픔과 신뢰의 균형

만약 당신이 애가의 첫 부분만 본다면, 자기 연민/슬픔에 푹 빠진 것을 봅니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에는 모두 내가 참으로 지금은 당신을 찬양할 수 없지만,

만일 당신이 나를 구원하여 주신다면, 나는 반드시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슬픔과 신뢰의 균형을 갖고 있지요?

 

우리는 모든 일에 주님을 찬양할 필요는 없지만, *for everything

모든 일 후에는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in everything (살전5:18참조)

 

저는 성경이 우리에게 모든 일에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아무 일에나 주님을 찬양할 수 없지요.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께 서약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황이 나쁜 상황으로부터 좋게 전환되면 그분을 찬양하면 됩니다.

그래서 애가 시편은 보통 서약하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감사하겠습니다는 서약

 

2. 감사 시편 gratitude psalms

개인 심정을 묘사하는 시편은 대다수가 애가입니다.

하지만 또한 많은 감사의 시도 있는데, 이는 문제에서 구원을 받고 난 후 기록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한명만 와서 예수님께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예배나 모임을 가지기 전에 기도회를 가집니다.
하지만 한번은 제가 남아공의 어느 교회에 갔었는데,

그들의 기도회는 예배가 끝난 후에 하였어요.

저는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왜 이렇게 예배를 마치고 기도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어서이다라고 하였어요.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우리의 모임 중에복을 달라고 합니다.

그분더러 우리와 함께 해 달라고, 그분더러 역사하여 달라고 하지요.

하지만 마지막 찬양을 부르고 나면, 모두들 집에 돌아가느라 바빠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남아공의 이 교회는, 모임을 가지고 난 후,

미안해요. 남아공이 아니고, 뉴질랜드입니다.

그 교회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다시 교회로 와서, 주님께 감사하는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제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주님께 주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부탁하는 기도를 하지요.

그 일 후에는 보통 감사하는 기도를 잊어버리곤 하지요. *급한 불은 껐으니까요

 

감사의 시편도 아주 특별한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4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모든 감사의 시가 이런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선포인데, 주님을 찬양하려 한다는 선포입니다.

-둘째는 무슨 일로 주님을 찬양하는지를 서술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이것이 첫째 부분이고,

두 번째는 그가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나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즉 무슨 일로 주님을 찬양하는지를 선포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간증하는 것입니다.

간증을 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어떤 시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구원 받은 모든 백성들은 말하기를...”

 

만약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을 주시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말하시고, 나누십시오.

오늘 아침에 강의 전에 우리가 바로 이렇게 서로 간증하였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시에서 세 번째 부분이고요,

 

-네 번째는, 앞으로도 계속 찬양하리라는 맹세인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계속해서 찬양하겠다는 맹세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종류마다, 모두 고정적인 형식이 있습니다.

 

3. 참회 시편 Penitence psalms 11:55~

세 번째 부류는 참회의 시입니다. 이 부류의 시는 많지 않고, 비교적 적습니다.

51편이 제일 뚜렷한 참회시 입니다. 참회시도 고정적인 형식이 있습니다.

 

형식이 있는 것도 좋은 면이 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예배 시편에는, 아주 좋은 형식이 있어서, 균형을 갖추고 있는데요.

 

만약 우리의 예배가 준비 없이, 즉석(에드리브)으로 드린다면

어떠한 형식도 없이 자유롭겠지만, 사실 형식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형식자유 사이에 균형이 있어야 되지요.

너무 엄격한 형식에 치우치면, 예배가 딱딱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자유스러우면, 예배가 뒤죽박죽이 되지요.

그래서 두 개 모두 필요하며,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하지요.

 

제가 발견했는데, 우리가 충분한 준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충분히 준비한 가운데서, 자유롭게 예배드리는 것이지요.

이때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여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아무런 준비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성령님더러 자유롭게 사역하여 주십시오.’고 하면,

보통 아무런 역사도 안 일어나지요.

 

때때로 진정 급할 때, 하나님이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끔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예배에 준비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아무 준비 없이 성령님이 역사하시기만 바라는 것을

저는 은사주의의 방만한 의식 charismatic ritualism’이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포할 때, 합당한 의식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애가, 감사시, 참회시에도 모두 형식이 있었습니다.

 

시편을 사용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올바른 예배 형식을 형성하게 도와줍니다.

마치 피아노를 배울 때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반드시 끊임없이 도레미파솔라시도의 형식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런 연습은 너무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동작 같지만, *음악 같지 않지만

하지만 오래 동안 연습하고 나면, 생각하지 않아도 칠 수 있게 되지요. *자유가 나옵니다.

 

저는 예배도 이렇다고 봅니다. 기계적인 동작을 통해, 예배 의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식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걸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나중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할 때, 그는 어떤 형식에 갖춰 기록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형식이 생겼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형식은, 시의 균형과 병행과 아주 좋은 모양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특별한 분류 Special Categories 13:55~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몇 개의 특별한 특징의 시편을 봅시다. 모두 네 부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룹 시편’, ‘시편의 유형을 살펴보았는데요,

이제는 다른 각도에서, 시편의 특별한 분류를 살펴보겠습니다.

 

 

1. 왕의 시 Royal Psalm *제왕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왕의 시편입니다. 이는 놀랄 게 없습니다.

이는 다윗이 자기 삶의 정황에서 이 시편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래는 목동이었고,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기록했지요.

하지만 그가 후에는 왕이 되었고, 그래서 왕으로 살면서 왕의 심정을 시로 기록하였습니다.

 

2편은 왕의 즉위식을 묘사했고, 제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국 국가가 몇 개의 시편 구절을, 편집해서 인용하였어요.

 

왕의 시편들을 모두 함께 놓고 보면, 영국 국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여왕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에게 승리를 주십시오.” *영국 국가

 

그리고 또 하나의 시편은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십시오

영국국가 중에 여왕에게 승리를 주소서가사가, 이 구절이 여기서 따온 것입니다.

 

영국 국가가 <시편>의 구절로 훌륭하게 구성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일하게 다른 것은, 바로 영국 여왕이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의 여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가사는 여왕에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영국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나라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이 택한 나라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택하셨지요.

 

전에 미국이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고,

아마 많은 영국 사람들도, 자신들이 선택받은 나라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영국의 어떤 분파는, 소위 영국-이스라엘 주의 Britain-Israelitism’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영국이 아주 특별한 민족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영국이 특별한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의 영국 상황을 보십시오. 아주 명확하지요?

 

하나님은 오직 한 나라만 선택하였는데,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다른 모든 나라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남아공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당시 자기들이 중동에서부터 걸어서 트랜스바우에 왔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묘사한 여정이, 자기들 이야기랍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거의 신앙처럼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나라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택한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이방인입니다. 이 점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뿌리에 접붙혀졌기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 나라이고, 특별한 나라가 아닙니다.

 

왕의 시편들은 이스라엘 왕들을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장래에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우리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시편은 여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45편인데요,

시에서, 자신이 왕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당신도 응당 이러한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왕실의 가족이며, 당신이 장래에 예수님 보좌 옆에 앉게 될 것이며,

그래서 당신은 왕실 가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백성들의 생각에는, 왕실 가족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욱 존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처럼 아무렇게나 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왕실 가족(왕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왕의 시편에서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사자와 유니콘’(영국 국가 문장↓)이 시22편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유니콘: 뿔 하나인 짐승

초기에 영어 번역 성경에서 유니콘으로 잘못 번역했는데, 이는 유니콘이란 짐승이 아예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초기 번역본에서 시편 22편에 사자와 유니콘으로 번역했어요.

영국 국가의 문장이 이 구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22: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유니콘을 한국어로는 '들소 뿔'로 번역. 현대 영어판 성경들은 유니콘대신에, ‘들소로 번역.

 

그리고 캐나다도 한때 자신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라고 생각하였어요.

전 지구에서 캐나다만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자칭했는데, 이것 또한 시72편에서 온 것입니다.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72:8

 

캐나다의 영토가 태평양에서부터 대서양까지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 권세인줄 알고, 자신들만 아주 특별한 줄 알고,

자신들만 주님이 택하신 다스리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지요.

 

이렇게 많은 나라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선택한 특별한 나라라고 생각하면서,

시편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2. 메시야 시 messianic psalm

하지만 다윗은 당연히 이상적인 왕의 모범이지요.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비록 그가 전에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다윗의 한 다른 후손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의 시편, 유대인들에게 메시야 시’, 또는 예언적 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다음으로 논할 두 번째 부류의 시편입니다.

 

히브리어 메쉬아, 영어로 머사이어로 발음하는데,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즉위할 때마다 모두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이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영국 국왕과 여왕이 즉위할 때도 기름 붓는 의식이 있습니다.

24가지 약초와 오일을 혼합하여 만든 기름이 왕에게 부어집니다.

 

하지만 기름 붓는 의식은, 원래 이스라엘 왕들의 전통입니다.

기름부음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바로 메시야이고,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는 한번만 나타났었습니다. 바로 시편 2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통치의 결박에서 애써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비웃으십니다.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가 나타나는 구절은 2:2절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메시아와 비슷한 말(‘기름 붓다’), 구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여러분이 만약 시편을, 예언시의 관점으로 보면,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데,

신약성경이 시편 구절을 20곳에 인용하였어요. 그 모두가 다윗 자손의 예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함께 살펴보겠는데, 제가 몇 구절만 골라서 얘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아들이라 선언하였노라2:7

하나님이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게 하셨으니” 8:6

하나님이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16:10

그가 반드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고 손발에 못이 박힐 것이다.

그의 옷은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가져가지만, 22:16, 18

그의 뼈는 하나도 끊어짐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는 거짓 증인들에게 고발을 당할 것이고

아무 이유 없이 미움을 받을 것이며,”

그가 한 친구에 의해 배반당할 것이고,”

그가 쓸게 탄 포도주와 신 포도주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가 자기 대적을 위해 기도할 것이고,”

그를 판 자는 반드시 직분을 다른 이에게 주게 될 것이다.”

그의 원수는 그의 발등상이 될 것이며,”

그는 멜기세덱 반차의 잇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가 모퉁이돌이 될 것이며, 주의 이름으로 오실 것이다.”

 

제가 읽은 위의 신약구절 모두가, ‘메시야 예언 시편에서 인용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2:30참조.

왜냐하면 그가 누군가(메시야)를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다윗이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시하셨습니다.

다윗의 손과 발에 못 박는 사람이 없었고, 다윗의 옷을 제비 뽑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시편 22편에서 말하기를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22:그들이 나의 손과 발을 찔렀느니라.” 22:16

 

22편에, ‘나는 ~ 이다라는 위대한 선언이 한 가지 나오는데,

나는 벌레이니다입니다. 22:6

 

여러분, 예수님의 나는 ~라는 선언의 다른 것들을 아시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라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기를 나는 벌레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벌레처럼 대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언이고,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아들이 큰 고난을 겪게 될 것인데,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사람들이 그의 옷을 제비 뽑고,

그의 손발이 못에 찔리고, 사람들이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하나님더러 너를 구하여 보라고 하여라고 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메시야를 예언하는 말씀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 모두가 메시야 시편입니다.

 

다윗이 직접 친히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미리 알았습니다.

 

3. 지혜시 wisdom psalm

 

세 번째 부류의 시편으로, 지혜의 시편이 있습니다.

이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에서 기록한 시편입니다.

조용하게 삶을 돌아보고, 묵상한 후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시는 잠언과 아주 비슷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되는 지혜로 가득합니다.

 

지혜의 시편으로 노래를 부르면 아주 좋아요.

이 시는 위기 속에서 부르는 시가 아니라, 우리에게 지혜를 저장하게 합니다.

 

성경은 당신이 더욱 똑똑해지라고 도와주진 않지만,

당신을 당신이 더욱 지혜롭도록 도와줍니다.

 

똑똑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 이 둘 중에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똑똑하면 더욱 많은 돈을 벌게 하지만, 지혜는 당신더러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많은 책들이 당신을 똑똑하게 도와주지만, 성경은 당신에게 지혜가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에서의 지혜는 두 방면이 있는데, 첫째는 사람의 옳은 행실이고,

두 번째는 인생의 모순입니다. *모순에 대한 답을 줍니다.

지혜는, 이 두 가지 방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도록 도와줍니다.

 

먼저는 옳은 행실을 보겠습니다. 시편은 지혜시로 시작하는데요, 1편이 바로 지혜시입니다.

1편에 인생에게 두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불의한 사람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자의 길입니다.

당신이 어리석은 자가 될 수도 있고, 지혜로운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결말에서 말씀했던 두 길처럼 말입니다.

하나는 넓은 길인데, 이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고,

다른 하나는 좁은 길인데, 이 길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시편은 시작부터 두 갈래 길을 지적하며,

그래서 시편은 의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읽는 책이지,

악인들과 함께 앉고, 걷고, 서는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 개의 동사가 아주 재미있어요.

악인과 함께 걷지 말며, walk

악인과 같이 서지 말며, stand

악인과 함께 앉지 말라고 했는데, sit

이것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이해되시죠?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그와 대화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게 발전하면 그와 함께 서게되고, 관계는 더욱 깊어지지요.

더 발전하면 그와 함께 앉게되고, 이제 그와 완전히 친구가 되지요.

 

1편은 우리에게, 악인과 같이 걷지 말며, 앉지 말며, 함께 서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근주자적(붉은빛에 가까이 하면 붉게 되고),

근묵자흑(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선택이 당신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선택이 됩니다.

악한 친구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15:33

 

이상은 옳은 행실의 지혜입니다. 다음으로는 인생의 모순에 관한 지혜입니다.

73편은 전형적인 하나의 지혜 시편이며, 여기에서 인생의 모순을 논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큰 모순이 무엇일까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바로 나쁜 사람이 잘 풀리고, 좋은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73편이 바로 이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기를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한 것도, 쓸데없는 일이었고,

선한 삶을 살려고 싶었지만, 이것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왜요?

 

그가 말하기를 악인은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죽으며,

많은 불의의 돈을 벌었고, 법적 제제도 받지 않으며, 기쁘게 매일을 보내며 사는구나.”

 

당신은 이런 문제로 갈등하지 않았나요?

혹시 당신에게 주님을 믿지 않는 이웃이 있는데,

그가 하나님을 아예 마음에 두지 않고, 경건하게 살지도 않지만,

그가 아주 기쁘게 살며, 인생을 누리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전도해서 주님을 믿게 하기가 아주 어렵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보다 더욱 행복하게 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루 종일 괴로워한다. 그리고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의로운 삶을 살고 싶지만, 이것이 너무 어렵다.

주님을 믿지 않는 이웃을 보니 그들은 기쁨으로 만족하고, 장수하고

죽을 때도 행복한데, 참으로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그가 후에 답을 찾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파멸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그러나 나는, 최후에 영광 가운데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편 중에 소수의 몇 개의 시만 사후의 삶을 논했어요.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죽은 후의 삶에 대해, 그다지 확실히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가끔 한 번씩 언급됩니다.

 

저자는 말하기를 죽은 후의 삶을 생각하면, 그들을 부러워할 것이 없다

이 깨달음이, 그 모순을 해결하는 지혜였지요.

 

만약 당신이 현세만 생각한다면, 인생은 불공평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어려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들 중 하나가 이건 불공평해요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그 말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사람의 자기 얼굴에 쓰여져 있습니다.

40세 이상인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제 말을 듣고 여기에 앉으신 어떤 사람들은 웃으시는데요. 그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거울속의 자신을 싫어한다면, 웃음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40세 이상이 되어야 진정한 인격의 아름다움이 생기고,

40세 이하의 사람은 그저 육신의 외모가 멋질 뿐이지요. *인격미가 아니라요

 

생스터 라는 감리교 목회자가 있는데, 한번은 교회에서 미인 선발대회를 진행하였어요.

모두들 처음에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60세 이상만 대회에 나갈 자격이 있었어요.

 

그가 의도하였던 바는, 사람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인생의 후반부에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어요.

 

인생의 전반부에서는, 그 얼굴은 타고난 것이고,

나머지 후반부에서는, 자기 얼굴은 자기가 가꾼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늘 생각하면서 살면,

그것이 당신의 얼굴에 나타나게/조각되게 됩니다.

 

한번은 지역 병원에서, 저를 좀 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거기 환자 한 사람이 신부가 필요하다고 말하였어요.

 

그래서 제가 목사라고 하였지요. 목사도 괜찮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보니, 그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제가 듣기에 당신이 신부님을 찾았다던데, 무슨 이유입니까?”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대하시지요?”

제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가 말하기를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제가 당신이 전에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으시군요.”

 

그가 말하기를 네 없습니다. 저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제가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96세입니다.’

 

그의 옆에 수많은 어여쁜 간호사들이 세심히 그를 섬기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도 그는 불평하여 원망하기를 하나님이 왜 나한테 이렇게 대하시느냐

 

여러분들도 듣고서 지금 웃고 계시네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평생 인생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그들의 시선이 현세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세를 생각하면, 당신이 부러워하는 그 사람과, 크리스천인 당신의 인생을 바꾸시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처럼 되고 싶습니까? 그들은 지금 미끄러운 경사면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습니다. 73:18

*미끄러지면 뜨뜻한 곳으로 빠지는데, 결국 언젠가는 미끄러집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가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영생을 생각해 보고, 그는 놀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기자는 일상을 살면서, 인생은 매우 불공평하다는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성전에 들어가서 미래를 보았을 때, 모든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시입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도, 시편을 읽지만,

우리는 평안할 때에도, 지혜 시편을 읽으면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4. 저주시 Imprecatory psalm 28:55~

 

네 번째 마지막 부류, 저주 시편이 해석하기 제일 힘듭니다.

(제가 저의 성경을 먼저 꺼낼게요.)

저는 시편을 읽을 때, 이 저주시가 나오면 보라색 펜으로 밑줄을 긋습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보라색이 아주 많지요? 여러분도 성경을 읽으면

이 저주시 구절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시편은, 저주로 1절부터 끝절까지 아주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몇 구절을 읽을 테니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합니까?’ 139:21

나를 둘러싼 내 원수들의 악담이, 도로 그들의 머리로 돌아가게 하소서.’ 140:9

뜨거운 숯불이 그들에게 떨어지게 하시고

그들이 불속이나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하소서.’ 140:10

 

그들의 뼈가 꺾이게 하소서. 그들의 이가 뽑히게 하소서’ 3:7참조.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7

 

이런 저주의 시는 참 무서운 것이지요.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시편이 바벨론에서 기록한 137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시를 노래로 부르지는 않았어요.

 

137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내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시편이 구절구절 연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주의 시편은 기독교적이 아니지요.

여기에서는 대적에 대한 용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저주의 말을 한 사람은, 자기의 저주의 죄에 대한 용서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이 이러한 시편을 노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시편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가 6가지로 말씀드릴게요.

 

1) 첫째는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만 있고,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으며,

신약을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 완전히 기독교적이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제가 첫째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는 저주를 하는 것이 죄가 되지만,

그들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이 저주시편은 예수님 이전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지만 두 번째로, 그들이 적어도 아주 정직하였는데, 이것은 기도할 때 보탬이 됩니다.

 

당신이 마음으로 할 말이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께 다 말씀드리십시오.

마음에 할 말이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안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에 할 말이 있으면, 정직하게 하나님께 다 드러내십시오.

 

어떤 여인이 심한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그 여인은 계속하여 고통을 받았고, 심한 장애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목발을 짚고서, 천천히 걸어 다녔으며, 이렇게 20년동안 아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자기 현실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침실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였다고 저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저주 후에 자기 발이 카펫에 걸려 넘어져서, 자기 침대에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의식을 잃었고, 그렇게 몇 시간 동안 혼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가 정신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고,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그의 눈을 부시도록 비추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줄로 알았고, 그래서 주님 앞에 이른 줄 알았습니다. *눈이 부셔서

 

이 때 그가 무서워 떨었는데, 갑자기 자신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심히 저주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햇빛이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여기는 나의 침실이고, 내가 아직 살아 있네.’

이 사실을 알고, 그는 크게 안심했습니다.

 

이때 그는 자기 몸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침대로부터 뛰어 일어났어요.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지요.

절뚝거리던 다리가 자유롭게 활동하고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바로 거리로 뛰어나가서 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수퍼에 가서, 수퍼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말했어요.

내가 하나님을 저주하였는데, 하나님이 저를 치료하여 준 것을 보세요!”

 

우리는 절대로 이 여인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인은 하나님께 정직했고,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정직히 표현했습니다.

 

저는 저주 시편을 읽을 때, 이 사람들의 정직한 표현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자기의 진심을 하나님께 알렸고, 솔직하게 다 얘기했습니다.

*믿는 관계, 정말 친밀하고 부모 같은 분께만 그렇게 솔직할 수 있지요.

 

그분께 당신의 마음의 느낌을 감추지 마십시오.

만약 그분께 화나면, 솔직히 그렇게 알리십시오.

 

하지만 제가 경고하는데, 하나님과 말로 쟁론해서 이기지 못합니다.

하박국을 읽으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약간은 따질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을 말로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굴복당하죠.

 

3) 세 번째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인데요.

그들의 원수가 또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원한 때문에, 하나님께 복수해달라고 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항상 말하기를

 

주여, 나의 원수가 또한 당신의 원수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대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이 세우신 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자들은, 당신의 대적들이고,

그들은 나의 대적일 뿐 아니라 당신의 대적이기도 합니다.”

 

신약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대적은 당연히 혈과 육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정사와 권세자(악한 마귀)입니다.

 

여러분도 그들을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힘껏 마귀를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마귀)을 미워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미워해야할 한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사랑해야 한다고 항상 들어 왔지만, 미워해야 할 한 영역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미워하시는 자들을 미워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마귀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4) 네 번째는 그들 구약성도들은 죽은 후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약성도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심판의 날, 또한 천국과 지옥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현세에서 악인들을 징벌하여 달라고 구하였던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구약의 신자들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똑같이 한 곳으로 간다고 보았는데, 바로 음부(스올)입니다.

거기는 대합실과 같은 곳입니다. 기차 대합실이 아니라요.

그들은 거기서 사람이 마치 그림자(영혼)처럼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스올에서요.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현세에 원한을 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세를 확실히 믿지 않았으니까요, 어렴풋하게만 스올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 금생에서 악인을 징벌하여 달라고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하신 하나님께 정의로 심판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5) 여러분, 이 다섯째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복수하려 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이러한 가르침이 있지요. 바울이 롬12장에서 말씀하기를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라. 그가 반드시 악인을 징벌할 것이니 너희는 스스로 복수할 필요가 없다

 

이 저주 시편들에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복수해야겠다는 곳이 한 곳도 없

,

모두 하나님께 복수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복수하고 싶으면, 반드시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분이 반드시 당신에게 잘못한 자들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당신이 복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6) 마지막으로 신약과 구약이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시편의 저주시와 비슷한 기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기도하기를

주여, 언제까지 기다려야 우리가 흘린 피를 갚아 주시겠습니까?”

 

이러한 신약의 기도가, 구약의 저주시와 다른 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있습니다. 이것이 순교한 크리스천이 하늘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천상의 저들도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의로 갚아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데,

보복은 이렇게 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자기가 직접 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저주의 시편에 도덕적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저도 이러한 기도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반드시 성경과 동일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정의를 세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처리해 주십시오.

 

우리는 압니다. 어느 날에 하나님이 반드시 원수 갚아주시고,

또한 장래에 최후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이고,

장래 어느 날, 모든 잘못이 올바로 교정될 것입니다.

모든 죄가 징벌 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반드시 그 명예가 회복될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장래에 심판하는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앉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주의 시편이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도덕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며,

그래서 정의는 응당 바로 세워지게 되며, 악은 반드시 보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아주 균형을 잡아 줍니다.

예를 들면,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내적 속성하나님의 외적 행하심에 대한 균형,

, ‘하나님이 누구신가?’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가?’ 둘 사이의 균형을

시편에서 잘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창조사역과 구속사역 사이의 균형,

우리가 이러한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시편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목자, 싸우는 자, 재판관, 아버지이시며,

또한 만물위에 계시는 왕이십니다. *이쪽 저쪽 다 보여줍니다.

시편이 하나님에 대해 아주 완벽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은 개인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매일 자기 전에, 시편을 한 편씩 읽으십시오.

어떤 시편은 자기 전에 읽기에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죽을 때, 만약 당신이 시편을 몇 편 외우셨다면,

임종 시에 아마 유용하게 쓰여 질 것입니다.

당신이 연약하고, 죽어갈 때, 시편이 당신의 심정을 잘 하나님께 표현해 줍니다.

 

시편은 또한 공적인 장소에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시편을, 전부 다 1절부터 끝절까지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만 떼서 보는 것이 아니라요.

왜냐하면 매 시편마다 완전한 형태의 기도와 찬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적 시편 찬양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금방 불렀던 현대어로 번역된 시편찬송처럼요.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고, 우리의 피난처이시라

이 시편 찬양, 우리를 도와 시편의 의미를 잘 깨닫게 합니다.

 

현재 많은 시편이 찬양으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면서, 교리를 배웁니다.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을 더욱 알아갑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과 직접 관련 있습니다. *찬양은 본래 신앙의 고백입니다.

 

시편은 당연히 노래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시편 음악적이며 *곡조의 배합이 있고

그리고 음악적인 지시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기오놋인데요, 저도 그 말뜻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제가 앞에서 말했는데, 히브리어 시편 psalm”이라는 단어가 활 튕기는 소리이며,

현악기나 숨으로 부는 악기와 연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가대 지휘자에게 음악적 지시어를 주고 있는 시편은, 55개나 됩니다.

셀라는 아마 쉼표이거나, 혹은 한 음key 올리라는 뜻이거나,

혹은 더 크게 부르라는 뜻이거나, 혹은 개인적인 감동으로 알아서 부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제가 나중에 영광 중(천국)에 들어가면 그 뜻을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겠지요.

 

우리가 하늘에서도 계속 찬송하겠지요.

성경 마지막 권(계시록), 많은 시를 기록한 것을 주의해 보셨나요?

거기엔 음악이 가득하고, 시편찬송이 넘칠 것입니다.

장래 하늘나라에 가서는, 우리가 다른 어떤 일보다, 찬양을 많이 부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사람들의 흔한 오해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래 하늘에서 주일아침예배만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일도 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늘에서는 주일예배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면 각각의 합창곡을 수 천 만 번이나 반복하여 부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러면 지루하겠네요.

솔직히 말해서, 만약 하늘에서 이렇게 한다면, 저는 거기 가기를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늘에서 하는 다른 일들도 있습니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거기도 둘러봐야 할 것이고요,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될 것이며, 현재 우리의 이 세계보다 더욱 흥미로울 것이며,

더욱 좋을 터인데,

 

그 좋은 일들 중에 한 가지가 찬양 부르는 일이며,

하늘의 아름다운 음악은, 천국이 가장 매혹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 찬양을 부를 때마다, 천국의 영광을 맛보기로 여기서 약간 체험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오는 역사의, 지상에서 약간 맛보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찬양 부를 때,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저의 집에 녹음테이프가 있는데, 젊은이들이 할렐루야 합창을 부를 때,

천사들이 그들의 찬양에 함께 부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은, 연속하여 끊임없이 부르는 천사들의 찬양 중에 조인할 뿐입니다.

천사들이 24시간 지구를 돌면서 부르는 것이지요.

 

하나님께는 항상 찬양과 노래가 주위에서 감싸고 드려지는데,

우리가 매번 부르는 찬양이, 그 중에 잠시 일부분으로 참여하는 셈이 됩니다.

 

이 찬양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며,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이 찬양은 땅에서도 계속되지만, 계시록에서 보면, 이 찬양은 하늘에서도 계속되며,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찬양과 통치와 능력을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돌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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