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FKG-eCYBet8
◑서론
▶앞에서 우리가 <욥기>에 두 플롯이 기술적으로 엉켜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플롯이고, 하나는 땅의 플롯인데, 둘 다 모두 변론입니다.
제가 1강에서 하늘의 플롯은 이미 얘기했는데, 바로 하나님과 사탄간의 변론이었습니다.
그 변론의 내용은,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가지 플롯이며, 그리고 긴장의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좋은 극마다 모두 긴장이 있는데요.
이 긴장을 푸는 열쇠는, 지금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늘에서 내기를 한 것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불쌍한 욥을 두고서 내기를 한 것을
책의 끝까지, 욥과 친구들은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욥은 피해자이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장난감’이지요. 주1)
이 사실을,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몰랐고, 이것은 독자들에게 ‘긴장’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긴장, tension : 소설에서 쓰는 용어. 긴장, 갈등을 점점 고조시켜 흥미를 유발함.
그래서 독자들은, 욥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고 싶어 하게 됩니다.
만약 당시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리고 진상도 알고 있었다면, 반드시 그에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과 친구들은 진상을 몰랐고,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그 문제(욥의 고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하나의 플롯을 가져왔는데,
바로 욥과 그의 친구들이 이로써 땅에서 변론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이 왜 다른 사람보다 더욱 많은 환란을 당하는가?’
그들은 욥이 남들 모르게, 매우 큰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이 남들이 모르는 무슨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기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가 옳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고, 그래서 긴장은 더욱 쌓여져갔고,
그래서 마치 실제로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긴장이 계속 더 고조되는데요,
드라마에서도 사람들은, 진상을 전혀 모르고 진행되지요.
그래서 우리도 실제로 어떤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도 전체 그림을 전혀 이해 못 합니다. *미래 일을 알 수 없잖아요.
▶하지만 <욥기>에서 몇 가지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물질적인 좋은 것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까?
-인간이 고난을 받는 것은, 모두 범죄 때문입니까?
욥기에서 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고난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고난을 다루는 것 같지만, 믿음을 다룹니다.
욥기가 제기하는 진정한 문제는, 설령 한 사람이 모든 게 잘못 되어가도,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계속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욥기가 던지는 진정한 질문이지요.
문제의 중점은,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진정으로 그분을 믿느냐?’로 귀결됩니다. *욥과 같은 상황에서요
사람이 복을 받고, 모든 일에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을 믿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일이 엉망이 되어갈 때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제입니다.
▶욥이 제일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제일 큰 고통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1) 그의 몸은 육체적 고통을 심하게 받았지만, 이것이 그의 진짜 고통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육체의 고통은 이길 수 있습니다.
2) 그럼 그의 고통은, 사회적인 고립이었나요?
그래요, 그는 외톨이가 되어서, 사람들은 그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고,
동네 친구들은 그를 못 본체 하며, 피해서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는 마을 끝에서, 고독하게 혼자서 잿더미 위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와서 말을 걸기 보다는, 그를 피해서 다른쪽 길로 걸어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환란을 당하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니까, 접촉을 피한 것이지요.
그래서 욥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진정한 고통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했고,
아마도 젊은이들이 잿더미 위에 앉아있는 욥을 비웃고, 농담을 했어요. *30:1
*잿더미 위에 앉은 것은,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의 표시
그게 욥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아닙니다.
3) 그에게 있어서 제일 큰 고통은, 정신적 고통이었을까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 정신적 고통일까요?
그게 정말 가장 큰 고통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4) 그가 제일 크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과 연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제일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기를 “내가 그 분이 어디 계신지를 알면, 내가 찾을 것을.. 23:3 *못 찾음
내가 그분과 대화 할 수 있다면.. *못 하고 있음
그분이 저에게 말씀해 주신다면..
그렇다면 내가 그분과 변론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찾지 못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욥에게 제일 고통스러웠던 일이었고, 제일 깊은 문제였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깊은 고통은, 불행을 통과해 지나갈 때,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는 것 같고, 다시는 나를 관심가지지 않는 것 같고,
나와 대화 하지 않는 것 같고, 다시는 나와 관계하지 않으려는 것 같고,
이러한 고통은, 믿음을 시험하는 제일 큰 문제이지요.
바로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것 같은 고통이지요.
▶좋습니다. 이제 서문으로 다섯 명의 등장인물을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유대인들은 ‘야웨’ 라고 부르며,
그분이 사탄을 대하시면서, 전체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십니다.
2) 두 번째는 사탄인데, 욥기에서 그는 “그 사탄”이라 불리웠으며,
사탄의 말뜻은 ‘고소하는 자’이고, 그래서 그는 “그 고소하는 자”입니다.
아직 “사탄”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회의에서, 고소하는 자로서 분명한 주체인 “그 사탄”이 등장합니다.
3) 세 번째 인물은 욥인데, 그는 선한 사람이며,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우리 함께 이 ‘두 마디’ 말씀을 유의해서 봅시다. *위 밑줄
하나님을 경외하면,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에서 ‘떠나는데’, *shun evil 악에서 확 돌아서는데
욥이 바로 이렇게 둘 다 행했습니다. *경외하고, 악을 떠남
하나님도 욥을 자랑스러워 하셨고, 그를 아주 만족스러워 하셨습니다.
하지만 욥은 재산이 있었고, 자녀들이 있었고, 건강했던 사람입니다.
후에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박탈되었습니다.
4) 네 번째 인물은 욥의 아내입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얘기해야, 남성우월주의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어리석은 여자라고 불립니다.
이는 그가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센스가 없다는 뜻이며,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녀는 욥에게 자살하라고 하였어요.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어요. 3:9
지금 욥은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데, 이때 ‘돕는 베필’이 제일 반대편에 섰습니다.
그녀는 욥을 못살게 구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첫 번째로 “욥의 위로자”가 되었지요. *비꼬는 말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게 좋겠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시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 사이에 진짜 갭이 있음을 봅니다.
그녀는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내가 당신 옆에 서서 항상 지지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어요.
그녀는 욥의 고통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욥을 멀리 하였지요.
저는 욥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아요. 이것이 부부관계가 깨지는 첫 번째 계기입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당신의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이다”라고 하였어요.
이 말의 뜻은, ‘나는 당신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남자로서 말하면, 아주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이지요.
5) 다음으로는 세 친구인데, 이 세 사람 모두는 나이 든 사람이고,
후에 나타난 엘리후는 그래도 조금 젊었어요.
이 세 친구 모두는 나이 든 사람들이지만, 연령은 서로 다릅니다.
이 대화에서 몇 가지 아주 재미있는 점을 볼 수 있는데요.
07:14~
▶세 친구들이 와서 처음에 한 것은, 저 파슨도 잘했다고 생각한 것인데,
욥의 곁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어요. 입을 열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고통 받는 사람에게 찾아가서는, 이것이 제일 좋은 위로이지요.
그의 고통을 논하지 말고, 단 그의 옆에 앉아만 있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욥을 피하였지만, 적어도 친구들은 그의 옆에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욥이 먼저 입을 열었지요.
만약 당시 욥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욥기의 나머지 이야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마 침묵을 참지 못하여, 반드시 그들과 몇 마디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욥은 입을 열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어요. 그는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서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내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죽어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내가 아기일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내가 오늘날 이런 고통을 맛보지 아니하였을 것인데..’
그는 과거에 자기가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그는 당연히 자살도 하지 못하지요. 왜냐면 자살은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맘대로 자신의 생명을 끝낼 수는 없지만, 그는 마음의 느낌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출생한 날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고,
자신이 태에서 임신된 것을 저주하였고, 자신이 태에서 죽지 아니한 것을 저주하였고,
자신이 아기일 때 죽지 아니하였던 것을 저주하였습니다.
욥의 이 한탄의 말이, 세 친구의 변론을 일으켰습니다.
◑엘리바스 8:40~
▶엘리바스가 첫 번째로 입을 열었고,
그는 제일 연장자이고, 제일 신사적이고, 제일 조심스런 사람입니다.
세 친구는 각 사람마다 각각 세 번씩 발언을 하였어요.
마치 ‘돌아가면서 하는 변론 round debate’과 같았어요.
하지만 저는, 엘리바스가 한 세 번의 변론을 한꺼번에 얘기할게요.
빌닷과 소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사람됨을 느낄 수 있도록, 설명하겠습니다. 괜찮겠죠?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들이 세 번으로 나누어 서로 대화했습니다.
엘리바스의 세 번의 도와주려는 발언에서, 그가 제일 연장자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신비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해결 방식은, ‘문제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발언의 요지는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였습니다.
당시의 정통교리는 한 마디로 ‘보상과 징벌의 원리’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과거 역사의 증거를 봐서, 또한 시대의 축적된 지혜를 통해서 확신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밤에 본 환상인데,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네가 징벌을 받는 것은, 네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심지어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기분 나쁘지요.
하지만 그의 말투는 신사적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욥,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이야.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자신이 무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기 때문이지.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그렇다면 이제 너는, 네 죄를 인정하지 않겠니?”
그가 아주 부드럽게 계속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죄를 범하였다.
나도 죄를 범하였고, 너도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네가 고통을 받는데, 네 죄를 인정하거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그래서 남자는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람은 고난과 슬픔을 피할 수 없느니라.”
▶욥이 말하기를 “그럼 왜 내가, 다른 사람보다 고난을 많이 받나요?”
엘리바스가 말하기를 “고통 받는 것은 좋은 훈육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여러분, 이런 말을 들어 보셨지요?
‘인간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 일단 고난을, 그 연단을 겸손하게 받으면,
다시 번영하게 되고, 다시 건강하게 될 것이다.’
엘리바스의 말투는 간절하며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네가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다 잘 될 거고, 결국엔 반드시 잘 될거야.”
이러한 충고는 매우 나이스하고, 조용하고, 신사다운 충고이지요.
하지만 욥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의 말투가 조금 강력하게 변했어요.
그는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고집이야”
그는 사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신앙을 까먹어가고 있다고 비난하였어요.
욥의 별 반응이 없자, 그는 분개했습니다.
그는 동정에서 → 풍자로 어투를 변했습니다.
풍자는 아주 위험한 일이고, 사람을 깔보게 됩니다.
▶이제 엘리바스는, 인간 본성의 타락성에 대한 자기의 신념을 되풀이 하였어요.
그는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성에 대해 강조하였어요.
바로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각 사람마다 극히 부패하였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고통을 받아도 원망할 자격이 없다. 악인은 번성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번성한다고 해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논리가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보셨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악인은 풍부를 누릴 수 없고, 설령 누린다 해도, 그 풍부 때문에 기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기 개인적 경험을, 마치 교리처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고,
이러한 논조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아요.
▶욥이 마지막까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엘리바스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였는데,
하나님의 초월성에 피할 것을 강조하였어요.
“하나님이 그렇게도 크고 위대하신데, 너를 걱정할 시간이 어디 있냐.
하나님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계셔서, 너의 일을 관리하지 못한다.
왜 그분을 끌어 들이냐. 하나님이 네가 선하게/악하게 살든지 관심가지지 않으신다.
네가 그렇게도 중요하냐? 우리의 하나님은 개인사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신다.”
이것이 첫 번째 위로자의 말인데,
그가 욥과의 대화에서 말투가, 빌닷과 소발로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두 사람에 비해서 신사적인 편입니다.
◑빌닷 12:38~
▶다음으로는 빌닷인데, 이 이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는 뜻인데,
누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비교적 젊어 보였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마 50대인 것 같습니다.
제일 연장자가 제일 먼저 발언을 했는데, 이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는 먼저 연장자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이는 예로부터 내려온 지혜로운 전통입니다.
늙으신 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인생을 잘 이해하지요.
하지만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빌닷은, 50대 정도이면서, 아주 ‘신학자’입니다. *비꼬는 말
그는 또한 고고학에도 약간의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새로운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며, 그는 극단적으로 전통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의 전통이다. 이것이 우리가 여태껏 믿어왔던 것이다.”
그는 온통 고리타분한 도덕률과, 뜻을 알 수 없는 말과, 판에 박힌 말을 하였어요.
그는 조용하지도 않았고, 신사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욥에게 화를 내면서, 욥의 대답에 쏘아부쳤습니다.
그의 늙고 가련한 욥에게 하는 말에는 동정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네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면, 너의 자녀가 반드시 죄를 지었을 것이다.
너의 모든 자녀가 죽은 것을 보니, 그들은 불운(벌 받은 것)임에 틀림 없다.”.
이것이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하는 위로입니까? 그가 이러한 말을 했는데,
참으로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겠네요.
그는 말하기를 “우주는 도덕률에 따라 자동적으로 운행이 되며,
인과 법칙이 자연계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도덕적인 인간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너는 죄만 범했기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네가 반드시 용서치 못할 큰 죄를 지었을 것이다.
나는 그 외 다른 답은 찾을 수 없구나.”
이래서 그가 욥과의 관계가 갈수록 긴장을 더해 갔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욥에게
“우리가 너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반드시 들어야 하느냐?”라고 하였어요.
빌닷은 인내심이 바닥났던 것이지요.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였어요.
그는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누가 능력이 있으면, 그 분이 하시는 일은 다 맞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뭐든지 다 옳다.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리타분한 논조입니다. “힘이 정의다”는 논리이지요.
그가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보다 능력이 크시다.
네가 그분과 쟁변하면 안 된다. 그래서 무조건 받아 들여라.”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근거로 변론하였듯이,
빌닷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는 근거로 변론하였습니다. 그게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이런 논리가 오늘 날에도 낯설지 않지요.
다음 주에 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여기 몇 명 목회자들에게, 이 주제를 강의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계속하여 그 전능성을 가르쳤고, 이것 또한 믿고 있는데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보다 능력이 크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쟁변하면 안 된다.. 라는 게 빌닷의 논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우리가 노끈에 매달린 꼭두각시로 변해 버린 식이지요.
모든 것은 예정대로 결정된다는 주장인데요.. *맞는 말이지만,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소발 15:21~
▶세 번째 친구(소발)의 나이는 더 젊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중년이었어요.
그는 셋 중에 가장 교리적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젊으면 젊을수록 교리적(교리를 신봉함)이라는 사실이지요.
마지막 발언자는 엘리후인데, 그는 겨우 십대로 여겨집니다.
그는 ‘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다 안다’고 해요.
오늘날의 현실도 바로 이렇지 않습니까?
<욥기>의 저자는, 인생을 정말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그렇게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온 것이지요.
왜냐하면 책의 메시지가 여전히 아주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중년입니다. 하지만 매우 교리적(율법적)이며, 예절도 없고, 거친 사람입니다.
그는 턱을 내밀고, 거만 떠는 사람이지요.
▶소발은, 욥을 ‘회의 방해자’로 비방하였어요.
‘회의 방해자’란, 의회에서 장광설을 길게 늘어놓아서, 의안 통과를 방해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욥, 네가 이렇게 많이 길게 말하는 것은, 다만 너의 죄를 감추는 것이니
당장 말을 중단하고, 올바르게 행하라”
그는, 전체 토론을, 모두 잡다한 잔소리 같은 말로 여기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톡톡히 책망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였어요.
그가 말하기를 “혹시 네가 의식적으로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너는 깨닫지 못하는 중에, 무의식 적으로 범죄한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그는, 끊임없이 욥을 모욕하며 말하기를
“욥, 넓은 길과 좁은 길 중에서, 네가 한 길을 선택하여라.
악한 길을 가든지 아니면, 의의 길로 가든지, 너는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는 ‘악인이 왜 부를 누리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인정했습니다. *욥이 과거에 부자였지요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믿었고,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정확하다고 견지했고,
욥이 반드시 극히 큰 악한 죄를 지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그의 부가 모두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소발은, 하나님은 전지全知하다고 강조했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네가 무의식중에 지은 죄도 아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친구는 각자 하나님의 어떤 교리를 주장하며, 자기 논리를 폈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변론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심에 틀림없다. 그게 바로 답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소발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도, 다 알고 계신다”라고 했습니다.
*‘욥 당신보다, 당신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신다’라는 뜻
소발도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들 각자는, 하나님의 어떤 한 일면을 강조하였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했지요.
사실 그들 세 친구들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같았어요.
그리고 그들 모두는, 현실을 자기들의 신학(교리)에 억지로 맞추려고 했는데,
이러한 방법은 너무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어떤 일부 특징을, 교리로 만들어서,
“이것은 틀림없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교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을 왜곡하여 자기들의 신앙(교리)에 끼워 맞추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완고한 편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교리에 천편일률적으로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우리는 명확한 교리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그걸 굳게 믿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적용 시킬 때는,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시죠?
어떤 때는 교리가 확실히 맞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어느 일면을 강조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죠. 그 반대 측면도 반드시 있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당신이 치료 받지 못한 것은, 당신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때때로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그 공식/교리가 맞고, 언제 맞지 않는지.. 그걸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만들어서,
‘믿음이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치료받는다’고 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오늘날 이런 교리가 아주 유행합니다. 이 교리가 온 세상에서 설교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교리가 편견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상처 주게 됩니다.
이게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진리가 아닌데도, 당신이 이 신조를 일괄적으로 적용해서,
사람들을 억압할 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상을 교리적으로 맞추면 안 됩니다.
현상으로 교리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요. *언제나 교리는 일부분 맞지만, 전부가/모든 경우에 맞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의 심경 19:00~
▶하나님이 마지막에 답을 주시겠다는 암시가 이미 있습니다.
욥은 총 10번 발언하였는데, 3번은 엘리바스에게, 3번은 빌닷에게, 3번은 소발에게,
1번은 엘리후에게 입니다. *엘리후에게 욥이 대답한 적은 없습니다. 나중에 교정하십니다.
만약 이 10번의 모든 발언을 한 묶음으로 읽고 연구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말하기를 “나는 회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머리가 터진다 해도, 사실이 아닌 것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 모두가 나더러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데, 하지만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나는 성심성의껏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려고 했고,
나는 참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이었습니다.
그의 10번의 발언을 보면, 그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갈수록 담대해졌고,
특히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갈수록 담대해 졌습니다.
그가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담대히 직언하였어요.
하지만 그의 심정은, 실망과 확신, 절망과 소망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욥의 기분은, 마치 환자들의 심정처럼 오락가락 하였어요.
여러분도, 어떤 때는 상황이 좋게 되면 희망을 품었다가,
어떤 때는 상황이 악화되면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이렇게 오락가락 하지요.
욥의 심정이, 이렇게 일정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하는 말이 아주 친밀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왜 저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괴롭게 하실 사람을 찾자면 많을 터인데, 왜 하필 저를 괴롭게 하십니까?”
그의 말투가 마치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남자 주인공 테비예 같아요.
만약 당신이 그 영화를 보셨다면, 테비예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의 말투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님, 지금이 메시야를 보내시기에 제일 합당한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가서 그분을 기다릴게요.”
테비예가 하나님과 아주 친밀하고 솔직하게 대화했는데, 욥의 어투가 바로 그랬습니다.
욥은 세 친구와 변론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변론하였어요.
그는 주먹을 하나님을 향해 흔들면서 말하기를
“주님, 저는 정말로 당신과 함께 법정에 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피고석에 앉혀서, 당신은 피고이고, 저는 원고 측 변호사이며,
그래서 재판정에 가져가서, 누가 승소하는지 보고 싶습니다.” 욥은 이렇게 참 담대해요.
그는 하나님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더러, 법정에서 원고(고소인)를 하시든지, 피고를 하시든지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우리 한번 똑똑히 얘기해 봅시다. 문제를 해결하게 변론해 봅시다.
정말로 당시니 입을 열어서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건을 위해 변론합시다.
만약 제가 무슨 죄를 지었으면 당신이 직접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제 자신이 무슨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무슨 죄가 있다면, 왜 제게 알려주지 않으십니까?”
그는 아주 풀이 죽었어요.
이는 하나님이 한마디도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말을 많이 늘어놓았었지요.
▶하지만 후에 욥의 심정이 안정되었을 때, *아래에 ‘불안정할 때’와 비교 요
그는 자신이 죽으면, 이 사건이 해결 될 것이라고 믿었어요.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내가 죽고 벌레가 내 살을 먹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때 자기 소송이 해결될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이 말 뜻은, 지금 생존해서는, 자기가 하나님을 법정에 불러내지 못하고,
자기가 죽은 후에 하나님을 만나면, 그때는 소송이 결판이 나서,
자기가 정당함을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걸 확신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자기감정이 불안정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그의 오르락 내리락 하는 심정을 보셨지요?
어떤 때는 그가 아주 확신하기를, 죽은 후에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확신이 되지 않아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라고 하였어요.
이렇게 소망과 절망이 교차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고난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진실한 표현입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 하지요. 어느 게 자기 진심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인간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 이 책이야말로, 정말 명작이지요.
▶욥기에는 욥의 뛰어난 발언을 기록한 두 장이 있습니다.
1) 한 장은, 욥이 지혜를 논한 28장입니다.
조금 후에 우리 함께 찬양 하나를 부릅시다.
찰스 웨슬리가 28장 전체를 가지고, 찬양을 만들었습니다.
♬은혜를 찾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지혜이다♫
이것은 지혜에 관한 찬송입니다.
어디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욥은 말하기를
“나는 지혜를 찾아 곳곳으로 다녔다. 마치 금은보화를 찾는 사람처럼 찾아 다녔다.
나는 지혜를 찾아 다녔다. 나는 지혜를 그 어느 것보다 더욱 원하였다.
나는 부자가 되는 것보다, 지혜롭고 현명하기를 원한다.”
욥28장은 아주 훌륭한 장입니다. 지혜를 노래했습니다.
욥은 지혜를 ‘사모할 만한 여자’로 묘사했고,
이것은 솔로몬이 잠언에서 지혜를 사모하라고 묘사한 것과 같지요.
<잠언>에서는 악한 여자를 ‘어리석음’이라고 했고, 선한 여자를 ‘지혜’라고 불렀어요.
젊은 남자들에게 지혜를 찾으라고 권고했는데,
이는 마치 인생의 배우자를 찾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2) 다른 한 장은 욥31장입니다.
보십시오. 이 31장은 남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장입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순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님, 내가 만약 당신의 법을 위반하였다면...”
여러분이 이 장을 읽으시면, 욥이 전에 산상수훈을 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써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법에 명철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주님, 만약 내가 여자를 음란한 눈으로 보았다면, 당신이 나를 징벌하십시오.
만약 내가 이 죄를 범하였다면, 저 죄를 범하였다면...”
이는 대부분이 산상수훈에서 언급했던 죄들입니다.
“주님, 만약 내가 이러한 죄를 범했다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입니다.
만약 그가 산상수훈을 읽었다면,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지켰나이다”라고 말했을 사람입니다.
◑엘리후의 변론 25:20~
▶여러분! 욥이 얘기를 다한 후.. 미안해요. 제가 앞에서 틀리게 얘기했어요.
욥이 엘리후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욥이 세 친구에게 각각 세 번을 대답했고,
그 외 한번은, 제일 처음에 입을 열어서 변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총 열 번 발언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얘기를 한 후,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말하기를 “소용 없다. (욥이 듣지를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 옆에 한 젊은 청년이 서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요.
왜냐하면 젊었거든요. 그는 젊어서 갖가지 가장 최근의 지식을 알잖아요.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기에 서서 변론을 다 들었던 것 같아요.
이때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말하니, 욥은 그를 상대하는 것이 아예 귀찮아서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혼자만 얘기를 하고 나서, 감사하게도 그냥 떠나갔어요.
▶엘리후는 스타일이 아주 다릅니다.
그는 아주 젊었고, 그가 본래는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했지만, 그도 반대자이었지요.
그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도 내가 젊었다는 것을 압니다. 나도 내가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러분, 그도 역시 욥을 비난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어른의 말을 인내심을 갖고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한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른 논점으로 일일이 욥을 반박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가 한 말이, 새로운 게 없었어요.
그도 욥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자기 말을 끝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어떤 때는 밤중에 환상과 꿈으로, 어떤 때는 질병을 통해서 구원하시는데,
바로 당신이 걸린 질병이,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죽기 전에, 당신의 심령이 고쳐지기를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은, 질병으로 당신을 돕고(징계해서 돌이키라고 하고) 계시거든요.”
이러한 말로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참으로 마음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상대하기가 아예 귀찮았어요.
그래서 엘리후도 마지막에는 가 버렸어요.
▶사실 우리도 볼 수 있는데, 이 세 친구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지만,
그들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단순한 진리를,
지금 욥에게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진리를, 모든 경우에 억지로 적용시켰기 때문에,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언급하며 말했어요. *transcendence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다.”
빌닷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했어요. *omnipotence
그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강조했어요.
소발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강조했어요. *omniscience
그들 모두는 절반만(일면) 맞게 말을 했지만,
이제 욥이 그들이 모르는 나머지 절반을 발견해 갑니다.
◑욥의 하나님과 쟁변 27:57~
하지만 여기에서 욥이 하나님과 쟁변하기 시작하는데,
이제 욥기의 마지막 라운드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건 다음과 같습니다.
▶1라운드: 하나님이 먼저 자신이 “창조주”되심을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지금 누구하고 쟁변하고 있는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이 구절 읽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정말 아주 좋아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욥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38:1~
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달라고, 앞서 36번이나 구하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입을 열었는데, 하나님이 입을 여시니, 즉시로 욥이 후회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유머적이면서도, 아주 멋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노래처럼 시적으로 말씀하셨어요.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네가 감히 무식한 말을 하냐. 나의 지혜에 대해 의심하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에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이 땅을 재어서 설계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불쌍한 욥이 작게 한 방 먹었어요.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께 뭘 여쭈어보면,
하나님이 도리어 당신에게 질문 공세를 펴실 것입니다. *욥의 경우처럼요.
그분이 당신의 창조주이시고, 그분이 이 우주 전체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네가 뭔데 나보고 네 물음에 답을 해 달라는 것이냐.
응당 네가 내 물음에 대답을 해야지.’
당연히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할 재간이 없었지요.
(욥은 36번이나 하나님께 말씀해 달라고 앞서 부탁했지만)
하나님은 단숨에 36가지보다 더 많은 질문을 욥에게 던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연속으로 쏟아내셨지요.
“네가 계절 따라 도는 별들을 지도할 수 있느냐?
네가 천체가 움직이는 법칙을 아느냐?
네가 땅의 자연 법칙을 결정할 수 있느냐?
네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태어났느냐?
너는 눈 저장고에 가 보았느냐?”
하나님은 질문과 질문의 연속으로, 욥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욥은 완전히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욥은 말하기를 “제가 무지하오니,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나는 손으로 제 입을 가립니다. *입을 다물겠습니다.
내가 한 번, 두 번은 말을 했지만, 이제 다시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고,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셨습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굳게 서라. 내가 묻는 말에 잘 대답하라.
너는 내가 불공평하다고 증명하고 싶냐?
너는 내가 틀렸다고 정죄하고, 네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바로 욥을 손가락으로 지적하셨어요.
욥에 연약함이 있는데, 사실 우리 모두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자기만 옳고, 하나님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참으로 놀랍게도 뻔뻔한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 저렇게 하실까?’
또 다른 사람들은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분보다 더욱 잘 할 것 같은데,
내라면, 세상을 그분보다 더욱 잘 관리할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고, 왜 저렇게 하실까?’라는 의심은
마치 ‘하나님은 틀렸고 내가 옳다’ 라는 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참으로 대담하게 하나님께 말하는데요, 참으로 얼굴이 두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라운드에서, 자신이 창조주 신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지 않고,
대신에, 두 가지 동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머 감각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베헤못을 생각해 보았느냐? 리워야단을 생각해 보았느냐?
너는 내가 왜 이 두 동물을 지었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하마, 악어, 또는 그와 비슷한 동물
듣고 보니 웃기지 않습니까?
인생의 이 큰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뜻밖에도 베헤못(하마)이라니요!
여러분은 베헤못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것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생긴 동물입니다.
그리고 리워야단(악어)도 역시 기묘한 동물이지요.
왜 하나님께서 지면에 악어를 창조하셨을까요?
이는 제가 참으로 알 수 없어요.
악어의 뇌는, 그 크기가 당신의 손톱만큼 작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악어를 훈련하지 못해요. 악어는 오직 본능적으로 행동하지요.
하나님이 왜 그런 악어를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이 왜 하마와 악어에 대해, 그렇게 길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분이 욥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하마를 만든 나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왜 그것을 만들었는지 너는 아느냐? 욥아, 너는 모르지?’
참으로 유머 적이지요. 욥은 벌써 이미 얻어맞아서 땅에 넘어졌고,
이 질문은 그냥 그를 항복시켰습니다.
“너는 왜 내가 왜 이 동물들을 지었는지를 알겠느냐?
욥아, 네가 동물세계의 일들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찌 더 심오한 도덕세계의 일을 이해하려는 것이냐? 말도 꺼내지 말라.
네가 뭔데 나하고 변론하려느냐?”
욥은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노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겠으니 너는 들으라.
내가 네게 묻겠으니, 너는 내게 대답할지니라.’
제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제가 스스로를 한탄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그가 다시 하나님과 함께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그분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젠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그와 대화를 하셨고,
이젠 그가 전에 하나님과 쟁론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과 대화를 하게 되었네요. 이것이야말로 제일 중요한 일이지요.
제가 당신께 질문/의심을 품은 것을 회개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 모두 다 알고 계시며, 당신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습니다.
제가 당시에 응당 당신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끝내 깨달았구나.
내가 다시 너에게 새로운 자녀들을 주고, 재산을 다시 돌려주겠다.
내가 가축, 낙타, 양떼를 되돌려 주겠다.”
이젠 욥이 이전보다 더 부유하게 되었고,
이전보다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 후로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를 엄히 책망하셨어요.
하나님이 엘리바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 세 친구가 한 말을, 절대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그 말들이 비록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다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욥이 마지막 라운드의 대화였습니다.
▶제가 발견했는데, 사실 하나님이 욥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시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사탄과, 욥을 가지고 내기를 하였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게 욥을 버리게 spoil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하늘의 상황을 알게 되는 것은, 욥에게 좋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순전히 믿는 동기를 방해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싶어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다시 하나님과 대화의 관계를 트기를 원했으며,
이것 또한 그가 제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욥이 사전에 알았었다면, 이 테스트가 그냥 안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욥이, 정말 하나님을 믿느냐’는 테스트였습니다.
‘욥,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너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내가 어떻게 우주를 통치하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인간의 교만은, 매 사건마다의 배후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질문하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는지, 제게 설명해 주세요.”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 ‘당신이 합당한 이유를 가지셨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게 해 달라’는 것이 됩니다.
이건 하나님을, 우리가 심판하는 식이 되는 거지요. 아시겠죠?
이런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하나님이 이 일이 일어나게 하신데 대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가르쳐 주시면,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당신이 왜 이 사건이 일어나게 허락하였는지를,
저는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의 위치를 창조주보나 높게 두는 것입니다. 제 말뜻을 이해하시죠?
그런데 하나님은, 욥이 “주님, 제가 당신을 무조건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신뢰합니다. 내가 당신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든지 모두 옳으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욥의 무죄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형 37:20~
여러분, <욥기>는 크리스천들에게 완전히 다른 느낌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인류의 고난에 대해 다른 가치로 보라고 합니다.
욥이 그리스도의 무죄한 고난의 모형(예표)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인이었지만, 마치 죄인처럼 고난을 받았어요.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고난을 사용하여,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일을 이루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어보기를 “나의 하나님, 왜 저를 혼자두십니까? 왜 저를 버리십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 모두는 그 이유를 알고, 예수님도 그 근원적 이유를 벌써 알고 계셨지요.
*그런데 당시 제자들은 몰랐지요.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셨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께 물어 보실 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까지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를..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침묵하셨지요.
아마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커서, 예수님은 잠시 정신을 잊어버리시고,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사건이 반드시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이유도 다 아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며,
묶인 자를 석방하여 자유를 얻게 하려 함이라..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십자가에서 이 점을 잠시 잊으셨어요.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에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하나님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때 하나님이 옳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후에 <욥기>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어떤 사람이 한 문장을 더 추가하였는데,
그러니 이건 오랜 후에 되어진 일이지요.
당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어떤 사람이 마지막에 한 절을 임의로 추가했어요.
우리는 헬라역본 성경을 70인 역이라고 합니다. 이는 70명 학자들이 번역했기 때문인데,
알렉산드리아에서 70명의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 추가된 한 구절은 이런 말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시는 사람들과 함께 다시 일어나리라.. 라고 쓰여 있다.”
네 이것(부활)이 바로, 욥의 마지막 순수성의 입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셔서,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리라고 믿습니다.
장래 언젠가는 법정 심판이 있을 것인데, 재판장은 예수님이시고,
전에 세상에서 살았던 악인과 의인 모두는,
그의 보좌 앞에 서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의 소망이 장래에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장래 어느 날에, 자기의 순수함이 반드시 확증될 것이며,
그게 공개적으로 심판대 앞에서 나타내 보여질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전 인류에게 적용될 것이며,
그때면 욥도 그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으켜질(부활할) 것입니다.
이 내용이 당신이 <욥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욥기를 큰 소리 내서 읽어 보십시오.
몇 사람과 함께 그룹으로 읽으시면 좋습니다. 마치 극본을 읽는 것처럼 읽으십시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서로 다른 인물들이 말한 것을 읽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욥 사이의 변론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대화하는 동안에는, 저는 고난의 답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아멘.
..................
주1)
장난감: piggy in the middle : 공 뺏기 놀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공을 던지면
다른 한 사람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공을 잡으려고 하는 아이들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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