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라 눅18:1~8 출처보기
◑본문 설명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따라서 사람도 무시했겠죠.
그래서 이 재판장은 ‘불의한 재판장’으로 성경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또 과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어떤 원한을 가진 과부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전체에 걸쳐서, 사회적 약자로 반드시 보호하고 돌봐야 될
3종류의 사람을 늘 얘기합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입니다.
이 세 종류의 인생은, 그 공통점이 누군가의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대상으로서 율법에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에, ‘과부’와 ‘원한’ 이라는 두 단어가 같이 등장할 때는, 이게 사회적 용어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사회 복지, 국민 복지’, ‘인권’, ‘차상위계층’
이런 단어가, 옛날에는 잘 몰랐지만,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회적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듯이 이때는 ‘과부’, ‘원한’
과부가 무슨 원한을 가졌다는 뜻이기 보다는,
이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할 때는, 누구나 이해하는 하나의 공감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공감대가 뭐냐면, 이 당시는 커다란 헤롯 성전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겠습니까.
이 건축 자금을 각출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서기관,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 관리들입니다.
그 각출 대상은 가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압박과 스트레스를 주면서, 서민들을 쥐어짰습니다.
여기에 일차적인 피해자들이 누구냐면, 과부들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인들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또 국가적으로 지어지는 이 엄청난 건축 프로젝트 때문에
엄청난 기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과부’ 와 ‘원한’ 이 두 단어는, 당시 사회에서 누구나 공통적으로 공감되던 구조적 악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 과부가, 그 원한을 가지고, 아마 매일 아침마다 재판장에게 가서
어떤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던 것 같아요.
눅18:2절,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매일 아침마다 자주 과부가 와서, 자기의 어떤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얘기를 하니까
이 재판장이 불의한 사람이지만, ‘도저히 못 견디겠다’
그래서 들어줘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본문 해석의 오해
그럼 우리는 여기서, 어느 쪽으로 자꾸 결론이 흘러가느냐 하면,
‘그러니까 기도도, 무조건 하나님 앞에 쉬지 말고 들이대야 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거야.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계속 기도하라’
그런 메시지가 본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자, 우리 한국 사람들은 왜 그런 결론을 자꾸 쉽게 내리느냐 하면,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은 오랜 5천년 역사에 뿌리 깊은 무속신앙이 누구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민속 신앙입니다.
특별히 기도의 영역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태기가 없을 경우에는, 할머니 세대는,
서낭당 같은데서 정한수 떠 놓고 목욕재개하고 백일기도, 천일기도, 그래서 정성을 드렸어요.
정성을 드리면 즉 지성이면, 하늘이 감동한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상관없어요.
내 필요를 채워주는 이라면, 몽달귀신이든지, 산신령이든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우상화 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방신 우상숭배 하듯이 섬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높은 선반에 위험하니까, 시퍼런 칼을 엄마가 올려 놓았어요.
그런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걸음마도 채 못 걷는 아기가
보니까 번쩍번쩍한 칼이 신기하거든요.
그래서 이 아기가 아침부터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해질 때까지
‘저 칼 줘, 줘, 줘!’ 하루 종일 엄마를 조릅니다.
그러면 엄마가 감동을 해서,
‘야, 너 참 대단하다. 엄마가 졌다. 칼을 줄 테니까 조심해서 갖고 놀아라’
라고 할 엄마가 어디 있을까요? 그런 엄마는 없습니다.
아무리 애가 간절히 저 칼을 갖고 싶어서 떼를 쓴들
매를 때려서라도, 애에게 주지 않지요. 그걸 들어줄 엄마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기도의 뿌리 깊은 공식을 하나 갖고 있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라는 공식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열정적으로 기도하느냐,
꾸준히 기도하느냐, 지속적으로 기도하느냐..가 일차적인 초점인줄 알고 있어요.
물론 기도 속에 그런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그게 기도의 우선적 가치가 아니란 말입니다.
◑1. 기도는 끈질김보다, “정당성”이 더 중요합니다.
자 여기보면, 이 과부는,
‘원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과부입니다.
‘원한’이라는 말이
3절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5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7절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는가
8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이 짧은 구절 안에, ‘원한’이라는 단어가 4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자, 이건 굉장히 문장법으로 볼 때, 썩 좋은 문장이 아닙니다.
(왜냐면 같은 단어가 반복되어 나오니까요.)
그런데 ‘원한’이라는 단어를 얘기할 때는, 이게 주로 윗사람이 갖는 겁니까,
약자가 갖는 겁니까?
‘원한’은 약자가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약자라도, 그 약자가 원한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원한의 내용이, 불의가 있으면 안 되고, 정당해야 됩니다.
정당해야 그게 원한이 성립됩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두고서, 원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재판장은, 불의합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이 무슨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면,
‘야, 못 견디겠다. 나를 번거롭게 하니,
‘번거롭게 한다’는 말은, 원어로 ‘눈 아래를 계속 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눈이 시퍼래져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겠지요.
이걸 괴로워한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이 과부가 매일 가서 어떤 원한의 문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런데 그는 불의한 재판장입니다.
그래서 ‘나를 번거롭게 하므로, 내가 괴롭게될까봐 들어줘야 되겠다’ 라고 결심했다면,
이 과부의 끈질김 때문입니까,
과부가 요구하는 내용이 정당했기 때문입니까?
답은, 이 과부가 요구하는 내용이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끈질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불의한 재판장이지만, 이 과부가 요구하는 어떤 내용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고, 안 들어줬다간 수치를 당할까봐 염려했습니다.
자, 끈질김이 우선적 가치입니까?
정당성이 우선적 가치입니까? 답은, 정당성입니다.
이것(정당성)이 우리가 기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우선적 가치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과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치 어머니가 기계라면, 로봇 같다면
애가 계속 요구할 때는, 시퍼런 칼이라도 죽든 살든, 줄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 어머니는 아이에게 생명과 사랑으로 만나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그걸 내어줍니까?
아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요구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이 아이가 요구하는 내용이, 정당한가/아닌가가, 엄마에겐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커피머신이 아니예요.
동전 넣고 ‘밀크커피’ 누르면, 컵이 내려와서 자동적으로 커피가 쏟아지는 그런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조성하신 분이고
우리의 안고 섬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격과 인격으로 사랑과 사랑으로 우리를 대면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가치입니다.
기도속에는 물론 끈질기게 기도해야 되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되고, 열심히 부르짖어야 되는 그런 요소가 들어있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기도가 정당성을 갖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성도는 세상에서 “원한”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자, 7절을 보십시다.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자 이제 주제가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비유로서 불의한 재판장의 이야기를 빌어서
기도가 무엇이 중요한가를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제 주제가, 7절로 넘어오면서,
예수님께서, 원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자, 못된 불의한 재판장도, 그 요구하는 조건이 정당성을 갖고 있을 때는 들어준다.
하물며 하나님일까보냐."
들어주시겠다는 얘기입니까, 안 들어주시겠다는 얘기입니까?
들어주시겠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어요.
7절,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택하신 자’는 저와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뭘까요?
여기서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정당성이 확보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택함 받은 자로서,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크리스천으로서 정당하게 말씀의 원리를 붙들고 산다면,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구경거리가 되고, 바보 되기가 쉽습니다.
고전4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미말에 우리를 구경거리로 두었도다’
구경거리란, 거기에 옳은 뜻, 진정한 가치가 있는가.. 이런 것에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
그저 ‘웃기고 있네, 볼만 하구만. 아니 예수쟁이들 왜 그렇게 살어?
조금만 비겁하면 편한데..’ 이게 소위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 대세입니다.
그럼 우리는 대세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의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의란, 성경적 가치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원리대로 순종하여 산다면,
손해보고, 고난 받을 일이 많이 생깁니다.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 뭡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나의 십자가를 지고 와서 내게 배우라.
이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어디 예수 믿으면 만수무강하고, 무병장수하고, 형통,
때마다 승진되고, 아이들 척척 대학에 합격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금을 정직하게 냈더니, 세무조사 들어오더랍니다.
거기에 뭐(구린 데)가 있다고요. 이게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대로, 말씀대로 살면
세상으로 나서는 순간, 여러분은 철저히 벌거벗겨져서 구경거리가 됩니다.
우리는 그 용기가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렇게 살면, 택한 자들이 이 땅에서 "원한"을 차곡차곡 쌓는 것입니다.
▲소천하신 주경신학자 박윤선 박사님이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분은 말이 어눌하고, 유창한 분은 아니예요. 참 오래 기억에 남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심각한 아픔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다가, 문 닫은 교회가 없어서 불행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붙들고 지키는데, 다 형통하고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문 닫은 교회가 없어서 불행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택한 자들의 원한입니다.
여러분, 장사해서 세금 제대로 내고, 이윤 정직하게 남기고
이렇게 장사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지금 대학생들은 캠퍼스 안에 컨닝이 독버섯처럼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한 죄입니다.
남들이 다 하더라도, 나는 안 해야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치른다면, 안 해야죠.
그렇게 해서 쌓아지는 스펙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신자들도 대세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세를 따르지 않고, 말씀을 지키며 사는 참 크리스천들은
원한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손해보기 때문이죠.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눅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뉘앙스 상,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겠다는 뜻입니까, 안 들어주겠다는 뜻입니까?
네, 그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뜻입니다.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 보니까, 문장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인자’는, 예수님
‘올 때에’, 재림하실 때
그때까지는 믿음이 있는 자를 찾으시겠다는 겁니다. (없다는 뜻입니다.)
뒤집어 보면, 인자가 재림하는 날까지 택한 자들의 원한이 부르짖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믿는 자를 찾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림 때까지 그 원한이 응답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러면 하던 기도마저 맥이 딱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기도 뭐하러 해, 응답이 안 된다는데..’
그래서 이 본문이, 왜 비유로 가르쳐지기 시작했는가를
1절을 보십시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기도를 하는데, 절대 낙심하지 말라.. 그 뜻입니다.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3. ‘원한’은 반드시 풀어집니다. 주님의 시간에!
기도하다가 왜 낙심이 되죠?
쉽게 응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심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응답이 안 되는 기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으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기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중요한 말씀이 던져졌습니다.
‘그럼 이게 뭐야,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 안 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냐?
정당한 기도인데도 말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응답이 안 될까요?
▲계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자기들의 삶의)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응답이 지금 아직 안된 것 같습니다.
제단 아래 하나님 말씀 붙들고, 그 증거대로 살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 지금 있습니다. 아직 그게 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피흘리기를 갚기를 언제까지 더디 하시렵니까?
그 성도들이, 대주재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대주재 ‘데스포테스’ 라는 말은,
당시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었어요. 그 로마의 중심은 황제의 보좌였습니다.
그 보좌를 가리켜 대주재 데스포테스 단어를 썼습니다.
사도 요한이 왜 이 단어를 인용했을까요? 멋지게 역사를 뒤집는 것입니다.
웃기지 마세요.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고 세상의 중심이 로마요, 로마의 중심이 보좌라고 생각하지만,
그 로마의 황제의 보좌는 3가지 개념이 있는데, 통치가 시작되고, 거기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모든 영광이 거기로 돌아갔습니다. 심판, 통치, 영광입니다.
이것을 사도요한이 그 단어를 빌려쓰면서 멋지게 뒤집는 것입니다.
‘아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대주재이시다. 모든 심판과, 모든 통치와, 모든 영광이 그분께만 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억울한 죽임당한 택하신 자들이,
아직도 응답을 받지 못한 채,
‘대주재여, 어느때까지 우리 피흘린 것을 갚아주기를 더디하십니까?’
이렇게 부르짖고 있어요. 아직도 기도 응답이 안 된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8:3절을 보십시다.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드디어 이제 향로의 향과 함께 성도들의 피맺힌 기도, 억울한 기도,
원한이 버무려진 기도가 올라갑니다.
:4 향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성도의 기도와 함께 올라간 향이, 제단의 기도가
제단의 불과 함께 땅에 쏟아집니다. 이것은 심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응답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지평 하나를 열어야 되요.
저는 우리 나라만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은 엄청난 기적과 부흥을 경험한 것은,
당대 사람들의 수고도 있겠지만, 그 뿌리를 알아야 됩니다.
60여년전 이곳에 이 교회를 설립해 주시고,
누군가 1세대들의 눈물과 밤을 새우는 기도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기도한 사람들은, 지금 다 역사의 무대 뒤로 지나가셨습니다.
그 분들은 꽃도 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열매도 만지지 못했어요.
그 분들은 역사의 무대 뒤로 지나갔지만, 그 기도는 살아남았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를 보면, 망할 짓만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5천년 역사속에 이렇게 흥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수출을 잘 해서, 핸드폰 많이 팔아서? 웃기지 마세요.
한국 선교 초기에 우리 선배들이 골짜기마다 메워가면서 찬송하며 기도하던 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초근목피 가난과 눈물을 곱씹으며 기도만 하다가 지나갔지만,
그 기도의 열매들을 지금 우리들이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난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광명의 빛을 보지 못하고, 지하에서 신음하며 기도하던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또한 100년 후의 우리 세대를 위해서, 지금 뭐해야 될까요?
가장 위대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의 지평을 새로 만들어야 됩니다.
기도는 세대를 넘고, 역사를 넘습니다. 국가를 넘습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낙심을 몰고 올 수 있습니다.
왜냐면 내가 지금 당장 열매와 만족을 얻으려고 하니까, 낙심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기도의 지평을 새로 열어야 하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기도라는 것은 나는 기도를 심다가만 떠날 수 있겠구나.’
그러나 그 기도가, 반드시 정당한 가치와 원리와 내용을 담은 기도라면,
반드시 응답된다는 얘기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이 본문이 말씀하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한 번, 이 말세의 끝에, 진리가 혼란할 때,
어둠에 잠들어가는 이 시대를, 기도의 부글부글 끓는..
그래서 저 에스겔의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고,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환상을 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만하다가 천국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정당한 역사의 가치를 가진 기도라면, 반드시 응답됩니다!
우리는 그 기도의 덕을 먹고 살고 있고요.
우리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1세대 선배들의 초근목피, 칡뿌리 먹어가며 소나무 붙잡고 부르짖었던
기도의 그 수많은 밤들이 있었기에,
이 민족이, 우리 세대가 지금 잘난 체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이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포기했던 기도, 손을 내렸던 기도가,
하나님이 붙드시는 두 팔에 붙잡혀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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