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2) 우상을 섬기지 말라 출20:4-6 15.09.06 출처보기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풀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2계명
십계명의 제2계명에 대한 강해를 하기 전에, 제2계명이 무엇인가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4절에서 6절까지로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제2계명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루터교는, 우리가 정한 1, 2계명을 합쳐 제1계명이라고 합니다.
대신 17절의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를
두 개로 나누어 십계명을 맞춥니다.
유대교는 또 다릅니다. 유대교는 2절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선언을
제1계명으로 하고, 3절에서 6절의 1,2계명을 합쳐 제2계명으로 합니다.
십계명의 규정이 서로 다른 이유는 성경에서 “제1계명은... 제2계명은...”
이런 식으로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제1계명과 제2계명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1계명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할 때,
이 ‘다른 신’에는 대표적으로 우상이 들어갑니다.
또 5-6절의 질투하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제1, 제2 계명에 모두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친수로 쓰셨다는 십계명이 왜 이렇게 혼란스러울까요?
▲그런데 십계명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중요한 십계명 또한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분은 좀 흐려졌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분명합니다.
5절과 6절의 해설은 제1, 2계명 모두에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제1계명과 제2계명은 분명히 다른 메시지를 우리에게 줍니다.
제1계명은 하나님 외에 우상을 비롯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2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되, 그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다소 새관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는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십계명을 마치자마자 20장 22절과 23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결정적으로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다른 계약 율법들을 받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자고 결의하고 아론이 이 일을 주도합니다.
그들의 금귀고리를 빼어 녹여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4)
다른 신이 아니라, 그 우상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우상 앞에서 했듯이 광란의 춤을 춥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진멸당할 뻔 했고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그들 앞에서 깨트려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고대인들에게는 우상이 없는 신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 보이는 신이 필요했습니다.
초대 교회가 복음을 전파할 때 당시 사람들로부터 무신론자라는 정죄를 받았습니다.
아니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은 신앙인들에게 무신론이라니요?
그것은 우상이나 형상의 신을 섬기지 않고, 보이지 않은 신인 예수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형상이나 그림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단지 돌덩이나 나무에 새긴 형상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탈레반이나 IS가 우상을 금한다고 하여
고대의 유물들을 때려 부수거나, 신앙인들이 불상이나 장승을 훼손하는 것은
미련하고 미개한 짓입니다.
현대의 인간은 합리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형상은 바로 그 존재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원시부족들에게서 그런 사고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유럽 화가가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가서 소떼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을 가지고 떠나려 하니 원주민들이 와서 “당신이 우리 소 떼를 다 가지고 가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합니까?” 했다 합니다.
예전에 무당이나 술사들은 적의 인형을 만들어 괴롭게 하면
실제 적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형상은 단순한 모형이 아니라 그 실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해』에서 제2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예속시키려는,
바꿔 말하면, 그를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무엄한 짓을 억제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종교의 이름으로 어떤 형상을 경배하는 것을 일체 금한다는 것이다.”(Ⅱ.9.17)
그래서 정통 개신교에서는 교회 안에 일체 장식물을,
심지어 십자가를 거는 것마저 금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그림들이나 조각상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이후에 신앙적인 교육 목적을 위해서 그림이나 형상이 다시 허용되었지만 말입니다.
우상숭배 금지를 가장 잘 실천했던 것은 이슬람교였습니다.
모스크 사원에 가면 아무런 그림들이 없습니다. 기하학적인 모자이크 무늬만 있을 뿐입니다.
이슬람교가 유럽을 장악했다면, 예술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신을 형상화하려고 할까요?
하나님은 어째서 자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실까요?
사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그 피조물인 나무나 돌로 새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전혀 자신과 닮지도 않은 것을 보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을 형상화하려는 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 신을 앞에 두고 예배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형상으로 만든 다음에는 통제가 시작됩니다.
자기나 자기 부족이나 민족만을 위한 신으로 만듭니다.
신과 가까이 하는 자가 권력자가 됩니다.
이 권력자가, 다른 사람들을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런 길을 갔습니다.
우상은 제국주의와 폭력과 계급질서와 관련됩니다.
이렇게 우상으로 매인 신은, 전쟁에서 지면 그 신 또한 사라지고 마는 운명이 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제한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서
금지 명령을 내리신 것이 바로 제2계명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매우 분명합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말씀만 들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신4:12)
모세도 하나님을 보긴 보았는데 그 뒷모습만 보았을 뿐입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
하나님이 거룩해서 못 본 것도 있지만,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형상은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대단한 게 그 안에는 아무런 신상이 없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만 있을 뿐인데 법궤는 신의 형상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발등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만 있을 뿐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놓고도, 낙성식 때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 바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입니다. 말씀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자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메시지는 있습니다.
자유나 상상력은 TV 보다 라디오가 더 큽니다.
코끼리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면 그 형상이 딱 규정 됩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코끼리를 설명하면 백이면 백 다른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규정할 수 없는 분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이 말씀은 공중에 흩어지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0-11)
유대인들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지나쳐서 말씀을 들고 묵상하거나 연구하고 있으면
그것이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난 후에도, 회당을 통해서 유대인의 신앙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란 것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형상은 금지되지만 이번에는 인간이 이성이나 교리라는 형상으로 하나님을 얽어매려 합니다.
이것이 교만이고 우상입니다. 교리가 우상입니다.
신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신을 제한해버립니다.
욥기의 투쟁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욥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 바로 ‘감추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라틴어로 Deus Absconditus입니다.
루터는 자기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하나님 존재 자체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다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성 안에 가두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우상화이고 하나님을 통제하는 행동입니다.
▲신앙인들은 이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 66권이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알 수 있는 충분한 것들을 다 제공하고 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시는 한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할지라도 ‘100% 이렇습니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가두는 시도 이것을 바리새주의라고 합니다.
바리새주의가 사실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을 자기가 통제하기 쉬운 존재로 만들었던 유대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상숭배 금지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신앙입니다.
낡은 옛것을 잡고 게으르거나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앞에 순종하려는 태도입니다.
불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학파의 스승)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이는 고정화되고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진리는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데, 인간들은 죽은 진리를 붙잡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과격하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교리를 만나면 교리를 죽여라”
여기서 말하는 교리는 낡고 인간을 얽매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가 죽어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뜻을 실어내는 말씀이 삽니다.
요즘 교회가 하나님을 우상처럼 받들어 섬기니 목사가 교주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교리와 자기 유리한 설교로 하나님을 장악합니다.
목사를 신성시 하고 교인들은 바보로 만드는 우상의 종교를 만들어버렸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설은, 우상의 종교에 대한 거부 선언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아무 효력도 없고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10:14)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조롱합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46:6-7)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사44:15)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만족합니다. 그것은 허상이고 허위입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세력들이 있을 뿐입니다.
실상은 죽은 것이고 부자유한 것이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어리석게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해서 우리가 어리석은 길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7도움도 되지 못할 존재 앞에 무릎 꿇는 것에 화를 내십니다.
참된 생명을 버리고 엉뚱한 데 가서 헛짓하는 것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매로 채찍으로 때리시는 분입니다. 5절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죄를 지은 자에게 저주하시는데, 당대뿐만 아니라 삼사 대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어떤 집을 보면 아버지의 잘못이나 병을 아들이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6절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삼사 대와 천 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저주나 좋지 않는 것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렵고 무자비한 아버지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상한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잘한 것은 돌에 새기고 잘못한 것은 물에 새기는 분입니다.
시편의 고백입니다.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천대의 복으로 갚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이미 복입니다.
거짓이나 우상이나 생명 없는 것에 현혹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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