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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중독 율법중독

LNCK 2015. 11. 1. 13:54

카카오톡 중독 율법중독               7:1~6              13.07.29 출처보기

 

 

 

아래 설교는, 6절 말씀처럼율법보다 더 새 계명인, ‘복음의 성령의 법가운데

즉,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신앙생활 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율법 폐기론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으로 요약되죠.

그 말씀도 율법 폐기론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래 설교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카카오톡에 중독된 요즘 사람들

 

카카오톡이란, 스마트폰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모바일 앱입니다.

이전의 핸드폰에 문자가 있었다고 하면,

요즘 스마트폰을 통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새로운 문자통신 시스템이 바로

카카오톡이라는 겁니다.

 

이 카카오톡이 다른 점은 언제 어디서든지 간에 단순히 문자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사진이나 동영상이나 심지어는 음성까지도 전송할 수가 있다는 것이 아주 큰 차이점이죠.

 

그래서 이전의 문자보다 요즘 청소년 사이에서는 스마트폰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카카오톡을 굉장히 많이들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카카오톡을 사용함에 있어서

부작용이 아주 크게 나타나는 점이 두 가지 있어요.

 

스마트폰의 문제점이 지적될 때마다 언급되는 건데, 대화의 단절중독이라는 거예요.

 

식당에 가서 앉아있거나 교실에서 바로 옆에 있어도,

옆에 있는 짝과 대화를 하는데 얼굴을 마주보고 직접적인 대화를 하지 않고

요즘 젊은이들은 카카오톡을 통해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면서

인격과 인격이 부딪히는 대화의 현장이 사라져버리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중독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여중생이 하도 스마트폰만 들고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엄마가 스마트폰을 빼앗았더니, 이 여학생에게서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손이 떨린다는 겁니다, 마음이 안절부절 하고 안정을 못합니다.

 

그래서 이 카카오톡에 빠져 지내는 것이 중독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점점 더 지배적으로 나오고 있는 겁니다.

손이 떨리고 집중이 안 될 정도니 중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핵심단어는, 대화의 단절중독이에요.

 

 

그런데 율법이 카카오톡과 똑같은 효과를, 우리에게 발휘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믿음과 율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는 맥락에 있어서

율법은 사도바울에게는 모든 법의 대표입니다.

 

, 민법 상법 형법 그 외에, 관습법 규범 회칙이라든지,

아니면 자기계발 방법, 골프 치는 법, 운전하는 법,

이 모든 법의 대표로서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율법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 6절에서도 조문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낡은 조문.

 

낡은 조문이라는 게 곧 문자라는 얘기에요.

모든 법이 다 문자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계발서를 읽어보면, 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정말 법조문처럼 되어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인간은 모든 주어지는 법들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도,

이 법이 없으면 손이 떨리고 집중이 안 돼서

도저히 무슨 일을 해나가지 못하는 중독에 걸려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이 왜 대화의 단절을 초래하는가 하면,

지금 내가 행위를 해야 될 때에 그 행위를 해야 되는 그 현장을 지배하시고

다스리고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서 바로 내 앞에 와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내가 어떻게 행위 해야 되는가를 묻는 대신에,

우리는 계속 카카오톡의 문자를 들여다보듯이 문자화된 법들을 찾아서 헤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해야 될까, 저렇게 행동해야 될까를 위해서 법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도 이 법이 없으면 꼼짝을 못하는

이상한 중독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음식점에서 얼굴을 마주대하고 직접 입으로 말하면 될 것을, 문자로 주고받습니다.

옆에 앉은 짝과 얼굴을 돌려서 마주보고 대화하면 되는데 문자를 주고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면,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내가 죽을 때까지 정해놓으시고

내 인생을 쳐다보고 계시며,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선한 방향으로 이끄실 준비가 되어계신 하나님이 앞에 계시는데도,

 

그 하나님께 아무도 묻지 않고 대화하지도 않고,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대화의 단절을 초래한 상태에서 문자를 찾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오늘 율법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냅니다.

 

율법에 관한 언급은 우리 기억하고 계시는 대로,

3장에서 본격적으로 한번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3장에서 율법을 언급한 맥락과

지금 이 7장에서 율법을 언급하는 맥락이 조금 다릅니다.

 

3장에서는 율법을 왜 언급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기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밝히면서, 율법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인생에서 신경 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나님 마음에만 들면 되는데, 그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무엇이냐를 얘기할 때 율법 No! 믿음 Yes!’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율법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바로 앞에서 이진법 원리의 오리지널이라고 하는 제목 하에서 함께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실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것이 바로 내가 죽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때,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금 내 마음은 죄적인 존재의 구조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죄적인 존재의 구조란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에 계시는 하나님을 빗나가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지나쳐서 몸에 가 달라붙었습니다.

몸에 가 달라붙어있으면서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의 대상들이 있을 때,

그게 가족이든 돈이든 일이든, 목사님들이면 목회나 교회건축, 이런 것들에

몸이 만나는 사물과 상황과 사람에 대해서 마음을 꺼내 내줍니다.

 

이게 바로 죄악 된 상태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지나쳐 간 상태,

하마르티아, 빗나갔다는 뜻 아닙니까?

 

이렇게 마음이 몸에 붙어있는 상태가 죄악의 존재구조인데,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할 때,

내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으므로 몸을 떠나게 됩니다.

 

몸을 떠나게 되면서 마음이 제로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서 켜진다고 그랬어요. *이게 바로 제로원의 원리(0.1)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 켜지는 이 일만

일어나면 끝나는 것이냐, 아니에요.

 

여전히 몸이 이 세상에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몸을 쥐심으로 내 몸이 의의 병기가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렇게 의의 병기가 되었을 때 내 마음은 뭐하고 있느냐?

 

순종의 모드로 유지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보시기에 선하신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내 몸을 손에 쥐시고 사용하실 것이다, 내 마음은 순종의 상태를 유지하면 된다.

이런 얘기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에 율법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율법 얘기를 합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아니라 할지라도

율법을 행동을 위한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율법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과연 율법이 행위를 위한 원칙이 될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는 겁니다.

 

3장에서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를 따졌다면,

여기서는 율법이 우리가 행동하고 행위 하는 원칙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이 율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모세 율법만이 아니라

확장해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법을 다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의 원칙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복음 이전에는 한 마디로 모두가 다 법을 따라 갔다는 거예요,

이 법이라는 것은 모세 율법뿐 아니라 형법 민법 상법 규범 사회관습,

자기계발의 원칙, 또 단체의 회칙이나 강령, 이런 모든 법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게 될 경우에는, 더 이상 이러한 법을 따라 살게 되지 않고

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얘깁니다.

 

너무 위험한 발언처럼 들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복음을 믿게 될 때에.

 

말 그대로 이해하자면 혁명적인 말씀이고 선언입니다.

 

그래서 모든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어떻게 비유를 드느냐 하면,

남편이 살아있을 때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면 간음이 된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나면 그 남편에 의한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므로

이제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더라도 절대 간음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남편으로 비유된 것이 율법이라는 겁니다.

, 율법이 내게서 죽었다는 얘기에요.

 

모든 이 세상의 법들이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내게서 죽어야 정상이다 이겁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구조가 깨어진 겁니다.

 

죄적인 존재의 구조가 깨졌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제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빗나가서 몸에 달라붙어있던 상태였는데,

이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이제는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있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이때 모세 율법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법이 내게서는 죽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을 필두로 해서 세상의 모든 법은 왜 필요한 겁니까?

내 마음이 하나님을 비껴가서 내 몸에 붙어있을 때에

내 마음이 그 몸을 움직이는 게 행위입니다,

 

그래 내 마음이 몸을 쥐기는 했는데, 어떻게 행동을 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법을 찾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내가 골프 클럽을 손에 쥐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 골프 클럽을 쥐고 공을 쳐야 되는데

어떻게 쳐야 되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누가 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래서 골프 클럽을 들고 도끼 휘두르듯이 머리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찍어야 되는 건지,

아니면 야구방망이 휘두르듯이 휘둘러야 되는 건지,

아니면 탁구채 잡듯이 해야 되는지, 배드민턴 채 휘두르듯 해야 되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골프채를 손에 쥐기는 했는데 알 수가 없을 때

골프채를 휘두르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와서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그 법대로 할 때 공이 맞아서 나가게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마음이 내 몸을 쥐었습니다.

내 몸을 쥐고 자식을 키우려고 하는데, 이건 뭐 어떻게 키워야 되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버드대학 입학시키는 방법이라는 책을 읽게 됩니다.

, 운전대를 손에 쥐었는데 어떻게 운전하는지 모를 때 운전하는 법을 읽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몸을 쥐고서 움직일 때

그것이 자식을 기르는 일이건, 골프를 치는 일이건 운전을 할 때건, 공부를 할 때건,

목회를 할 때든, 가정을 이끌든, 사업을 이끌든, 모든 일을 할 때 법을 찾습니다.

 

내가 몸을 쥐기는 쥐었지만 어떻게 해야지, 성공적으로 잘 행위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이게 바로 죄적인 존재의 구조에서 나오는 일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렇게 죄적인 구조가 너희인줄 모르고 살았으니, 너희가 한번 이대로 움직여봐라,

그러면 너희가 좋다고 하는 모든 걸 다 주겠다, 돈 성공 형통 너희가 좋아하는 것 다 줄게,

이 율법만 지켜봐라!’ 그런데 안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주어지면서 우리가 전부 알게 된 것은,

이게 다 하나님 뜻과 어긋나는 마음의 정욕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세상의 법이라는 것들이, 다 내 마음의 정욕과 사욕을 어떻게 잘 이룰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으면서 나타난 일이,

마음이 하나님께 가서 붙었으므로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는 것에 대한 답은

그때그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고 알려주시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 몸을 의의 병기로 사용하시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까

이제부터는, 자꾸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의 법,

이 세상의 원칙과 방법들을 찾아 헤매지 말라는 거예요.

,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 하라는 얘기에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복음과 부활을 전하다가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갑니다.

 

이때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다시는 예수이름으로 아무것도 전하지 말라고 얘기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의 권면은 곧 유대사회에서 가장 높은 최상의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 앞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이 출장 가셨으면 모를까

하나님이 지금 살아서 내 삶의 현장 여기에 와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다른 법을 따를 수 있고, 문자화된 법을 찾아 헤맬 수 있겠느냐?

 

누구에게 법을 듣고 그대로 행동하겠느냐 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살아계시므로 나는 하나님에게만 듣겠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4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내 마음이 몸을 쥐고 있을 때 모든 법이 필요했다는 거예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법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율법이 내게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함께 죽었을 때, 내 마음이 몸을 떠나버렸으니까

이제 율법과 이 세상의 모든 법이 몸을 붙들고 있지 않은 내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어져버린 겁니다.

 

의미가 없어져버렸으니 율법이 내게서 죽은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이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몸을 쥐고 있지 않으므로,

이 세상의 율법과 율법에 준하는 모든 법과 원칙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세상 법으로부터도 자유 해도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실 것이 있기 때문에.

 

, 위험한 발언이지요?

 

근데 그냥 마구잡이로 행동할 것을 허락하는 건 아니라는 얘깁니다.

 

6절에 뭐라고 하냐 하면,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무슨 말일까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한다는 얘기는

이제는 더 이상 문자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영이란 성령을 말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마음이 알게 되는 일이

성령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지금 여기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해야 될 것인가를 어떻게 누가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를 위해서

책을 찾아서 자기계발의 법을 찾고,

믿음이 없는 목사님들은 목회의 부흥을 위해서 목회자 세미나를

이 여름에 쫓아다니면서 난리를 치고 있을 때,

 

나는 지금 내 옆에 계신 하나님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마음을 드리게 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다 알고 계신 성령님께서

내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시고 계획을 알려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니까,

그 성령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면 된다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지키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중독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하나님을 비껴서 몸을 붙잡고 있는 죄적인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게 깨졌다면 더 이상 우리는 문자화된 율법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마음이 드려진 상태에서 하나님마음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그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마음에 넣어주시는 대로 우리는 행동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아버지, 카카오톡을 통해 문자중독에 걸린 젊은이들처럼

문자화된 법에 중독이 되어 살던 우리가

온전히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게 해주시고,

오직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성령님을 통해 대화로 듣게 되면서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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