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칼집에 꽂으라! 요18:10~11 13.04.07. 출처보기
요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지금 이 장면은 잘 아시는 대목입니다. 어떤 순간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지금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계신 주님 앞에 가룟 유다가
체포조를 이끌고 나타나서 배신의 키스를 합니다.
졸고 있던 제자들은 혼비백산 다 달아났는데
그래도 베드로는 끝까지 주님 곁에 남아 자기가 지니고 있던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렸습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폭력입니까 정당방위입니까?
누구도 베드로의 이런 행위를 탓하진 못할 겁니다.
죄 없는 스승을 지키려는 제자의 충정입니다. 무고한 자의 실존적 저항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그 와중에도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장면은 주님이 그 귀를 다시 붙여주시며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최소한의 자기방어도 용납하지 않으신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것은 주님이 당신의 평소 소신을 끝까지 관철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 눈은 눈이 아니라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주님의 평소 소신입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이것을 철저히 관철하셨습니다.
세계는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와 보복을 일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도 너무나 엄중합니다. (2013년4월 설교)
북한이 당장이라도 도발할 기세입니다. 세계가 한반도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접수되십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하셨습니까? 평온할 때 하셨습니까?
배부를 때, 신변 위협이 없을 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상대가 빼 든 칼 앞에서 목을 내대며 하신 말씀입니다.
솔직히 배부를 때야 무슨 비단 같은 말을 못하겠습니까?
모두가 환영하고 만사형통일 때는 어떤 말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긴박한 상황, 상대가 빼 든 칼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주님 앞에 무한한 경외를 표해야 합니다.
▲사실 이래서 주님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러나 이러한 감미로운 선율이 점점 격렬해 지다가
절대 보복하지 말고,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쯤 되면 ‘아예 네(성도) 목숨을 내(예수님)게 다오’ 라는 말과 같기에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떠나고, 주님을 배신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산상보훈을 가진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사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언제나 원수 사랑을 가르친 예수의 말씀을, 정면에서 비웃어 온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절대 악과 타협하거나
불의에 눈 감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가장 치열한 투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기를 해치려는 자를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최후의 순간까지 빌었습니다.
끝끝내 죽기까지 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따라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말씀은 이상이나 관념이나 궤변이 아니라
그대로 그분의 삶이요 존재 자체였습니다.
▲왜 우리가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야 합니까?
마26:52절에 보면,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를 지키겠다고 칼을 뽑았는데, 왜 칼 때문에 망합니까?
이게 바로 칼의 비극입니다.
칼은 칼을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보복 행위를 미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이나 영화가 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배치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복수심은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면 싸움이나 살인이 되고, 그게 집단화 되면 테러나 전쟁이 됩니다.
피는 반드시 피를 부릅니다. 이는 이를, 눈은 눈을 부릅니다.
요즘은 아무도 참지를 않습니다. 아무도 남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안 참고, 자식도 안 참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안 참습니다.
모두가 자기 감정과 분노대로 칼을 뽑아 막 휘두릅니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붙었다 하면 막장으로 갑니다.
끝장으로 갑니다.
그러나 칼을 쓰면 반드시 그 칼에 망합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이것까지도 참으라고 하십니다.
정당방위로 생각되는 그것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정당방위를 마치 자기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는 그 어떤 폭력, 명분의 전쟁도,
그 어떤 피의 보복도 정당화 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꼭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근본적으로 칼을 부정하셨는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렇게 이해합니다. 주님이 무조건 칼을 부정하셨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은 집총을 거부합니다.
집총 거부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이 맞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주님은 맹목적 무저항이나 비폭력을 가르치시진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눅22:36절 말씀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기 직전 최후의 만찬석상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이제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산 위에 가셔서는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고 하시고,
어째서 조금 전 산 아래에서는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은 결코 칼 자체를 나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는 말씀은,
아예 칼을 갖지 말라거나 칼을 버리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무장하라고 하십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빛납니다. 칼집에서 뽑히면 칼은 흉기가 됩니다.
겉옷은 유대인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합니다.
다만 칼을 칼집에서 뽑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칼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 정의와 질서와 위엄과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한 번 뽑아보면, 제 힘으로는 다시 못 꽂습니다.
그 칼에 희생된 사람들의 칼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을 뽑아 한 번 피를 묻힌 사람은 항상 칼을 뽑아 들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은 사되, 절대 그것을 뽑지는 말라는 게
주님 교훈의 요지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진정한 강자입니다.
반면에 툭하면 칼을 뽑는 사람은, 정말 비열하고 나약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쉽게 칼을 뽑습니다.
지금도 피 묻은 칼을 칼집에 꽂지 못하고 불안에 떨며
그 칼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우리가 칼을 뽑으며,
칼을 뽑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결국 나는 희생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나는 수난 당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손해 보기 싫고, 당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는 것은 수난과 희생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길을 가야 죽지 않고 삽니다. 칼을 쓰면 망합니다.
자기는 살겠다고 희생당하기 싫다고 칼을 뽑아 휘두르면 망합니다.
여러분, 개인 재산목록 제1호인 겉옷을 팔아 반드시 칼을 사되
그 칼을 절대 뽑지 말라는 주님의 이 역설적 가르침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야
이 나라의 안보문제가 해결되고, 긴장국면이 해소될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온 세계의 운명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듣기 http://youtu.be/nIgjnBm8V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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