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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문의 축복

LNCK 2015. 11. 18. 21:58

열린문의 축복              3:7~13                          13.03.17. 출처보기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은 교회입니다. 꾸중이 없습니다.

반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꾸중만 들었습니다. 칭찬이 없습니다.

 

8,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는 크고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3:17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교회를 바라보시는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가 크다고 하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가 작다고 하여 가볍게 대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가진 기준하고는 다릅니다.

 

크든 작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주어진 현실에서 충성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다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작은 달란트를 가지고도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다시 한 번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이런 빌라델비아 공동체를, 주님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주목해서 빌라델비아 교회 공동체를 지켜보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작으면 주님의 시선에서도 주목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부자의 이름은 알지도 못하지만, 오히려 거지 나사로의 이름은 알고 계신 분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튼튼한 양들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작다고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소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그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주님께는 더 감동이 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부족함을, 부족한 가운데서도 충성하고 있음을,

그리고 여러분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과 한숨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찬송 소리보다는, 한숨 소리를 더 크게 들으시는 분입니다.

저 양이 무슨 힘든 일이 있나?’

 

신앙의 열매가 특별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버티는 것만으로 주님께서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적은 수고를 결코 적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편 568절의 말씀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방황하는 것을, 주님께서 다 카운트 하셨다고 합니다.

나의 흘렸던 수많은 눈물은 주님의 병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책에 이런 방황과 고통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던 그 사랑과 충성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심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힘든 길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상 숭배가 만연한 사교 모임이나 축제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직업이나 사업상의 손해를 각오해야 했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지키다가, 고난을 받고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소수의 공동체였기 때문에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향력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점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며 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채근하지 않습니다.

잘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만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미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작은 교회 위에 쓰인 면류관을 볼 수 있는 것, 이것이 참된 영안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굳건히 지키고만 있으면 됩니다.

면류관을 잃어버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자조함입니다.

 

자신은 별 거 아니야 자기가 하는 노력이나 충성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라는 자기 비하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그 일을 매우 크게 보고 계십니다.

 

어느 난장이가 있었습니다. 이 난장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이 난장이의 아픔은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난장이가 잘 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두 발로 공을 굴리고 손으로 접시를 돌리는 재주였습니다.

그래서 이 난장이는 밤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공을 굴리고 접시를 돌립니다.

 

이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그 교회 주교 신부님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난장이의 곁에서, 난장이의 땀을 닦아주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지금 자기 하고 있는 충성을 결코 작게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 머리에 주님의 면류관이 놓여 있습니다.

 

 

열린 문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원래 그것은 다윗 집의 곡간의 열쇠입니다.

 

가장 강성했던 시대의 왕이었기에 그곳에는 온갖 보물로 가득합니다.

또한 이 열쇠는, 성전과 성문의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이 열리면 그 문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이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충성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축복으로 그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이처럼 충성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님은 열린 문의 축복을 주십니다.

 

1) 먼저는 전도의 문일 것입니다. 전도도 주님께서 열어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럴 때는 교회만 세워도 마구 몰려듭니다.

 

아마 한국교회의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이르는 성장이 그럴 것입니다.

해방 당시 30만에 불과하던 기독교 인구가 근 40년 사이에 800만에 이르렀습니다.

 

외국인들에게 이 수치를 보여주면 다들 놀랍니다.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문이 닫힌 곳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한국교회의 전도가 주춤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믿으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미 믿지 않아야 될 이유가 많고, 물질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서 굳이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지금은 불행히도 선교의 문이 닫히고 있는 실정이 아닌지 불안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2,30년 후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보편적인 추세가 그렇고 개별 교회들은 다를 것입니다.

주님은 소아시아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지만

전도의 문이 열리는 축복은, 빌라델비아 교회에만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의 충성됨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그들이 작은 것에 충성한 보답으로 이제는 더 큰 것을 주시려 하십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우리 교회에도 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2) 둘째는 기도의 문입니다. 기도의 문도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합니다.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는 곳에는 영적인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곳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은혜와 은사를 받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울 왕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믿음도 좋지 못한데 사무엘이 있는 라마나욧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얼마나 강력했던지, 그 땅을 밟았던 사울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합니다.

사울이 앞서 보냈던 세 명의 사자들도 이곳에 이르자 예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삼상19:24)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라마나욧에 기도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문이 닫히면 그것처럼 힘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싶으면 성령의 은혜가 있는 곳에 가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성령의 은사 중 할 줄 아는 것이 방언입니다.

방언을 대학교 1학년 때 받고는 지금껏 하고 있습니다.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는 너무 좋아서

그때까지 좋아하던 껌 씹는 것을 잃어버렸을 정도입니다.

걸어가면서도 방언을 했어야 했으니까요.

 

사울처럼, 모르는 사이에 예언/방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한 곳에 가면, 쉽게 불이 붙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기도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 잘하시는 분이나 그런 모임에 있으면, 기도를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도의 문이 열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셋째는 축복의 문입니다.

7절에서, ‘다윗의 열쇠는 다윗의 곡간의 열쇠인데,

거기는 축복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질의 복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26:12-14)

 

이삭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일 정도로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물을 세 번이나 양보했던 소위 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부자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은 부자되기 힘들다는 속설이 있잖아요.

그런데도 이처럼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이를 통해서 성경은

모든 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노력도 중요합니다. 자기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하여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에 맞는 능력이나 달란트를 타고 나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시고 기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말라기서의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3:10)

하늘의 문을 열고 닫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물질의 문을 열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혹시 주시지 않는다면,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겠지요.

아니면 물질보다 다른 어떤 가치가 더 소중하기에, 주님은 물질의 축복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주어진 대로,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전의 기둥

 

하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여러 축복을 말씀을 주셨는데

그 중 아주 유쾌한 복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서 떠났던 자들이 돌아오는 복입니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그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핍박을 피해서 유대인의 회당으로 피했던 자들 중에 일부가 돌아오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자기들의 잘못을 빌게 되는 장면입니다.

회당과 교회 사이에서 주저하던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떠났던 형제가 돌아오는 것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될 것입니다.

자기들이 올바른 길에 서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꿈꾸었던 복이 바로 이런 복이었습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그들은 이것이 역전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사야 49:23,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주님께서 우리 대적을 발아래 무릎 꿇게 하시며

우리의 길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에 있어서

그 문제나 당사자가 무릎을 꿇는 그야말로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인정하게 만드십시오.

사람들은 일관성 있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결국에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들 빌라델비아 교회는, 기둥 같은 사람들입니다

.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개의 교회가 등장하지만 기둥 같은 교회는

이처럼 작지만 충성되게 자기 길을 간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마치 아시아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빌라델비아 (작은) 교회가 기둥이 되어 받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 성 프란시스가 중세를 받치던 기둥이었습니다.

그가 청빈과 선교 운동을 벌이고 이 운동에 대한 인준을 받기 위해서

로마 교황청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란시스의 운동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회의 인준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황청이 있는 성 요한 성당이 무너져가고 있는데

그것을 떠받치고 있던 사람이 바로 성 프란시스였습니다.

 

이 꿈을 꾼 후 교황은 성 프란시스의 운동을 허락합니다.

프란시스가 중세의 기둥이었습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전의 기둥은 가장 튼튼합니다. 지금도 성지 순례나 고대 유적들을 돌아보면

벽체나 건물 형태들은 다 사라지고 기둥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문화 유산 1호라는 파르테논 신전이란 곳도 가면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기둥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둥 같은 존재로 삶을 사람들은

바로 이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고 믿음을 변치 않고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맡은 자리에게

기둥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기둥 같은 존재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에도 기둥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에도 기둥 같은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2:9)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될 자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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