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글 뜨거워야 합니다 (강추)
The Anointing by T. Austin-Sparks.
"고후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기름부음이 왜 중요한가,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서
제 스팍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본론을 막 바로 살펴보겠습니다.
◑‘기름부음’의 의미, ‘내주’와 차이점
일부 사람들은 성령의 ‘내주’와 ‘기름부음’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기름부음’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그거라는 식이죠.
그래서 저 스팍스는, ‘내주’와 ‘기름부음’의 차이를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과 ‘성령님의 기름부음’은
물론 같은 성령님이지만, 그 특징은 다릅니다.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기름부음’이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인데,
매우 활동적이고 활발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기름부음’과 ‘성령님의 내주’는 같은 성령님이요, 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두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자리에 성령님이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시고, 임재 해 계십니다.
성령님이 그냥 늘 ‘내주’하시지만, 그것과 달리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시간, 그 때, 그 일을 위하여, 성령님이 특별히 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활동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름부음’입니다.
‘내주’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것이지만,
‘기름부음’은, 그저 우리와 함께, 곁에 계시는 것을 두고.. ‘기름부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활발하게, 강력하게 임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만 아니라 (내부적), 우리 회중 가운데서 (외부적) 역사하십니다.
이게 ‘기름부음’입니다.
*우리 주위에 늘 공기가 있지만, 그 공기가 강력한 바람을 이루어 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도 있겠지요. 본질은 같은 공기이지만, 둘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잠복되어 있는 것이 가능합니다. ‘내주’의 특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본인도 성령을 받은 것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지만, 사실 잠복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성령을 아직 안 받았다’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은, 신자들이 분명히 거듭났고, 성령을 받고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지만,
성령의 나타남과 외적인 표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아주 희소하게 나타납니다.
성령님이 그 속에 잠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이 있다 인정하더라도, 그건 정상적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령님이 자기 속에 내주하고 계신데, 어떻게 그렇게 수동적이며, 비활동적일 수 있습니까?
요즘 쓰는 말로, 성령님이 그 속에서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성령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계속 ‘비활성화’된 상태로 오래 지내는 것은, 분명 정상은 아닙니다.
*자기 심령이 약간 병들어있거나, 잠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성령님이 24시간/7일 동안 늘 ‘활성화’되어 있어서,
즉 ‘기름부음’가운데, 1년 365일을 계속 지내시는 분도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 설교의 주제는 “기름부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사모해야 한다”입니다.
그걸 인정하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으니까
24시간/7일/365일 동안 계속 ‘비활성화’ 즉 ‘내주’상태로만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펴서 읽어보시면,
‘기름부음’이 신구약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름부음 anointing’이란 단어가 나오는 곳에는
언제나 ‘활동 activity’이 따라 나옵니다.
다른 말로 어떤 움직임 action이,
사역 현장에, 봉사 현장에, 영적 전쟁의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기름부음’을 받고 제단에서 섬겼고,
왕들도 ‘기름부음’을 받고서, 나라를 다스렸으며
선지자들도 ‘기름부음’을 받고서,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도 ‘기름부음’ 가운데서 사역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4:18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위의 두 구절을 보십시오. ‘기름부음’이 있는 곳에 ‘활발한 사역’이 같이 갑니다.
‘기름부음’은 '내주'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은, 그 사람과 상호작용 가운데 역사합니다.
기름부음은 그 속에서 활발하게 일어나지만,
만약 그 사람이 ‘비활성화’되어있다면.. 기름부음이 활발하게 나타날 수 없겠죠.
왜냐하면 성령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영은, 육체를 통해서 역사하시지,
영 혼자만 역사를 못 하시거든요.
대개의 경우, ‘영’이 내속에서 역사하시면,
내 ‘육체’도 그 감동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만,
만약 ‘육체’가 계속 불순종하면.. 그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성령을 소멸’하게 되면서, 기름부음의 활발한 역사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내 속에서 ‘기름부음’으로 역사하시면,
우리가 반드시 그 성령님과 같이 가야 합니다. 장단을/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내 속에서 활동하시고, 활성화 하기를 원하시더라도
반드시 내가 거기에 장단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름부음’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원해야.. 그 분이 우리 속에서 ‘활성화’ 되십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다가,
단기 선교를 가서, 깨어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자기가 막 거기 가서, 전도하고, 아웃리치를 하니까,
자기 속에 내주하고 계시면서, 비활성화 하고 계시던 성령님이
마치 동면에서 깨어나듯이, 깨어나셔서 ‘기름부음’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과 우리는, 서로 장단을 맞추어, 보조를 맞추어 역사하거든요.
그동안 내가 비활성화 되어 있어서, 성령님도 비활성화 상태로 계시다가
내가 단기 선교 가서 막 전도하면서 활성화되니까, 성령님도 활성화로 바뀌시는 것입니다.
즉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그래서 성령님의 내주가 시작되었는데,
자기가 ‘비활성화’ 상태로 지내니까, 자기 속에 성령님도 ‘비활성화’로 계십니다.
그 결과 ‘자기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지’ 자기 스스로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잠들어 계신 성령님을 일깨워서 ‘기름부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는 데는,
전도, 아웃리치, 단기 선교, 구제 봉사..
이렇게 ‘자기가 크리스천 인 것을 드러내는’ 사역에 참가하게 되면,
자기도 ‘기름부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혀 색다른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도 놀라고, 가족도 다 놀라고, 교우들도 다 놀라는 것입니다.
완전 달라졌다는 것이죠.
성령님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지만,
우리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성령님도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여야, 성령님도 활성화 되어서, 기름부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요.
전도를 나가기 전에는 정말 자기가 다운되어 있었는데,
억지로라도 전도를 나가서, 은혜 받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사모하는 기도도 반드시 해야 하지만,
우리가 몸을 움직여서, 영적 전쟁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때 자기 스스로 놀랍니다. 자기가 무서운 성령의 군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자기 속에서 무서운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의 역사가 나타남을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24시간 일주일 내내 ‘기름부음’가운데 있을 수 없다 하더라도
‘잠복기’가 너무 오래 계속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패턴을 경험한 사람은,
설교자가 힘이 빠졌다 그러면.. 다시 또 설교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힘 빠졌다고 안 하면.. 성령의 잠복기가 더 지속되지요.
설교자가 힘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힘이 빠졌지만 다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자기의 영력이 회복됩니다.
자기가 활성화 되니까, 자기 속의 성령님이 활성화되신 것입니다.
찬양은사자도 마찬가지로, 힘이 빠질 때가 있지요.
그가 회복하는 길은, 힘 빠진 몸을 이끌고, 나가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활동적이며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활성화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내주’ 만으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성령님을 소멸시키는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움직이실 때, 바로 그때 ‘기름부음’이 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에 대한 아주 간단하고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가운데서, 날마다 더욱 활발하고 활기차게,
기쁘고 만족된 삶과 사역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런 설교의 위험은
-‘너무 기도로 기다리지만 말고, 일단 현장에 뛰어들면 기름부음이 임한다’
그래서 정말 아무 기도도 없이, 사역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자기의 강한 육신과, 육적인 힘만 넘쳐서,
사역에 아무 열매도 없고, 오히려 사역에 방해가 되는 위험도 있고,
-또한 ‘사역 현장이 최고로 중요하다’해서
매일 같이 현장에 뛰어들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교만에 빠져서
오히려 무너지는 위험도 있습니다.
이 설교는 오래 동안 성령의 잠복기를 가지고 계신
‘내주’하는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현장’에 뛰어들면
‘기름부으심’을, 그 미지근한 자기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라, 불을 끄지 말라는 말이죠.
이건 ‘내주’ 상태에서는 성립되지 않지요.
즉 ‘기름부음’의 상태, 성령이 활성화 된 상태에서만, 성립되는 말인데,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그 불을 소멸할 수 있다는 뜻인데요..
성령의 불을 소멸하는 일에 대해,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쓸데없이 말이 많고, 경박한 삶을 사는 것은 – 성령을 소멸하는 일입니다.
너무 세상일에 흥미가 많고, 잡다한 얘기를 많이 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매일을 가볍게만 사는 것, 이게 뚜렷한 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경박한 삶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나아가 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처럼 외식적인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세상을 무턱대고 즐겁게만 살려는 경박한 삶,
이게 무슨 죄냐고 반문 하겠지만, 사실 성령의 인도함에서 나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이건 다 세상 즐거움이거든요.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절제 self-control’입니다.
놀이가 필요하지만, 절제함이 없는 놀이
쇼핑이 필요하지만, 절제를 모르는 쇼핑
대화와 한담이 필요하지만, 몇 시간 계속되는 잡담.
친구와 만남이 필요하지만, 가사를 팽개친 채 몇 시간을 만나는 등
그런 경박하고 천박한 삶이, 내 속에 성령님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사람은, 늘 민감합니다.
놀이를 하고, 여행을 가고, 친구를 만나지만..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선에서 절제할 줄 압니다.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의 지시에, 자기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잠복된 신자가, 전도와 선교에 참여할 때, 성령님이 활성화되시죠.
즉 기름부음을 체험하는데요,
이게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곧 식어버리고 소멸되어버리는데요,
우리가 민감하지 못해서, 삶을 너무 경박하게 살며 절제하지 못하니까,
성령을 체험하면서도, 그걸 계속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번 돈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하는데,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늘 성령님께 민감하게 깨어있으며,
자기의 영적 컨디션을 조절할 줄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십시다.
First published in "A Witness and A Testimony" magazine, Mar-Apr 1956, Vol. 34-2, 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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