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교회 눅9:23~24 출처보기
◑모험으로 사는 인생
▲인간에게는 두 가지 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위험을 추구하는 ‘모험의 본능’이고,
-또 하나는 안전을 추구하는 ‘반복의 본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본능이 늘 갈등하면서, 때로는 모험이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안전의 본능이 더 앞서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두 가지 본능을 주심으로, 때로는 일을 하며,
때로는 안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1) 만일 안전을 추구하는 그러한 본능이 없이, 모험의 본능만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메뚜기처럼, 정처 없이, 방향 없이, 목적 없이,
그렇게 뛰어다니는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만일 모험의 본능이 없는, 안전만을 추구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세상은 조용하겠지만, 문명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생육하며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그 하나님의 명령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조용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안전하지만, 반복과 반사적인 그런 본능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동물들의 많은 행동이 있지만, 그 동물들의 행동은 다양하지만,
다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본능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는,
모험의 본능,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모험의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모험가이시죠. 성경은 모험의 책입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때,
하나님은 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모험의 절정은, 바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모험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대신 할 수도 있는 존재를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왜 자신을 대신할 수도 있는 존재를 창조하시는 모험을 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모험의 이유입니다. 사랑이 모험을 가능하게 한 동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모험으로 창조된 이 세상,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이 모험,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이 모험의 본능은,
인간의 인간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명령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땅에 번성하여 충만하라’ 이 명령은
인간에게 모험의 본능이 없으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결혼도 모험입니다. 너무 많이 따지면, 결혼 못 해요.
모험으로 결혼하는 겁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모험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도 다 모험입니다. 인생은 다 모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모험 속에 살아가도록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했고, 그리고 비록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인생이지만,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우리는 여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안전이란 우상과 같다. 위험을 피하려는 것은, 정면으로 위험과 맞서는 것보다 안전하지 못하다.
인생은 대담한 모험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분은, ‘사람이 추구하는 안전이 때로는 우상과도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대담한 모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때로 믿음은, 위험해 보이는 선택을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말씀을 따라가는 것,
그 당시 문화로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모험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가는 것, 그렇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법적인 보호가 있고, 외교부의 보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갈대아 우르의 문화를 떠나서, 가나안 땅에 있는
이방민족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누가 보장을 하며, 누가 도와줍니까?
그것은 그의 가족들 전체를 위험으로 내모는 매우 위험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 여기시고,
그 믿음이, 오고 오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표준이 된 것이죠.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우리 믿음이라면, 우리 믿음 또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더 위험한 인생을 살았죠.
바벨론 한 복판에서 그는 바벨론 궁중에서 나오는 음식을 거절했죠.
이방 문화를 거절했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선택입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위험한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매우 위험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리아가 ‘내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거야? 그렇게 영광스런 여인이 되는거야?’
그런 영광을 바라고, 순종한 게 아닙니다.
마리아에게 요구된 것은, 그 당시 문화로서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자신의 정혼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오해 받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 마리아의 아멘은, 그 당시 상황에서는
너무나 위험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4:20
어부가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생계를 다 버린다는 겁니다. 문자 그대로 그물을 버린 것입니다.
상징적인 게 아닙니다. 작정헌금 한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직업을 문자 그대로 내려놓은 것입니다. 자신의 생계를 다 포기한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른 겁니다.
▲사도바울이야말로, 그 믿음의 길을 가면서, 가장 큰 위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가 겪었던 위험을 자신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가 처했던 위험에 이 깊이와 넓이와 그 충격을 보십시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특이했던 것은, 몇 번 맞은 것을 정확하게 숫자를 세고 있습니다.
‘뭘 5번, 3번 태장, 1번 돌에 맞고’, 어떻게 이걸 다 정확하게 기억했을까요?
그러나 우리도 한 번 돌에 맞으면, 평생 잊어버리지 못하고, 정확하게 셀 것입니다.
이것만큼 어려운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 히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험한 사람들의 행적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갔던 이들은,
모두 다 위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위험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그 위험을 뚫고 나가는 매우 위험한 인생이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생을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후기-기독교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 어떤 일보다 위험한 일입니다.
옆의 분에게 ‘지금 굉장히 위험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라고 얘기해 주십시오.
여러분, 성령님께 진짜 순종하면, 매우 위험한 길을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충만을 구하지 않는 성도들이, 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위험한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잘 아니까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구하다가,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갑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면, 능력 받고 증인이 될 것 같으니까 두려워서 다 알고,
요나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줄 알고, 자기가 알아서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지요.
제가 젊었을 때 그랬습니다.
여러분.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동체는 ‘교회’입니다.
많이들 웃으시네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마이클 프로스트 라는 선교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실험 정원이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이 세상의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위험보다는 안전, 담대함보다는 조심스러움,
사명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가 처한 상황은, 마치 바벨론 포로시대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소위 후기-기독교시대라 그러죠. 포스트 크리샌덤 시대라 그럽니다. post-Christendom
이 시대는, 교회가 이 사회에 중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를,
크리샌덤 시대라 한다면, 이제는 그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가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교회의 영향력 속에 있던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후기-기독교시대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유럽을 보십시오.
어떤 학자가 쓴 글을 보면, 이런 비율로 만일 유럽의 교회가 줄어든다면,
2037년도에는 감리교는 전무하게 되고,
웨일즈에 있는 교회는 2020년에 다 물을 닫고,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2033년에 마지막 교회의 문을 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교회의 문을 닫을 날이, 유럽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당은 문화재가 되고, 다른 용도로 팔릴 것입니다.
물론 그 날이 오지 않겠지만, ‘남은 자’가 있겠지만, 그만큼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스코틀랜드의 한 목사님이 찾아와서
자기 도시에 1천5백년 된 교회가 있는데, 이걸 좀 사 달라고,
이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가 몇 십 만 불에 팔리게 되었으니,
한국교회가 좀 사 달라는 것입니다.
미국 개신교 숫자는, 인구가 2억9천5백만 중에서 2천2백만 명,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미국도 후기-기독교시대입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 라는 단어를 못 쓰는 나라가 되어버렸죠.
개신교가 이제 핍박받는 종교가 되고 있습니다.
동성애 문제를 비롯해서 성경적 가치관을 실현하기 어려운, 그런 국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바벨론 포로시대와 같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점점 더 아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의 약화, 교회의 소멸은 마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 우리가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요?
저는 두 분의 선교학자의 글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먼저 핸드릭 크뢰머 라는 선교학자의 글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위기 상태에 있으며, 교회의 가장 많이 부족한 것은
그 사실을 가끔씩만 인식한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별로 고난을 겪지 않았으며, 그것이 곧 성공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교회는 참된 본질과 사명을 충분히 살아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언제나 필요로 했다. 위기와 마주치는 것이
곧 진정 교회다워질 가능성과 마주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스 큉 교회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지평을 찾지 않고, 거처를 정하려는 교회,
즉 바깥에서 끊임없이 진을 치지 않는 교회는, 사명에 충실하지 않는 셈이다.
확실성을 향한 우리 열망을 내려놓고, 위험한 일을 감수하며, 실험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위험한 교회가 되지 않으면, 이 바벨론 포로시대와 같은
후기-기독교시대에 교회는, 완전히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반면에 핍박받은 중국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서구사회는 이런 후기기독교시대에 교회가 소멸되고 있지만,
반면에 중국교회를 보십시오. 중국 공산당의 오랜 핍박 아래 있었던 중국교회는,
지금 어떠합니까? 중국교회의 성도들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북경에서 한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추산하기를 약 1억2천만 정도라고 합니다.
3~4천만명이 삼자교회 성도들이고, 8~9천만이 가정교회라고 합니다.
그것은 추산입니다. 실제 숫자는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2020년대는, 아마 2억 정도가 될 것으로 봅니다.
거의 미국의 인구와 맞먹는 2억명, 상상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중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했습니까?
이렇게 수많은 성도들이 부흥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핍박이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오래 동안 그 교회들을 핍박했습니다.
정부에 협조적인 삼자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는,
3가지 제재로 그들을 통제 했습니다.
-허가되지 않은 모임, 50명 이상은 모일 수 없게 했습니다.
-허가되지 않는 교회 건물도 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허가되지 않고 지도자 훈련도 할 수 없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제재가
오늘날의 중국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50명 이상 모일 수 없기 때문에, 20명 이상 모이면
세포분열하듯이 분열해서 분립해서 또 다른 교회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건물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정마다 음식점마다 개인적인 공간마다
숨어서 그렇게 모임을 해야만 했습니다.
공식적인 학교나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토착화된 지도자들이 양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단의 위험에 빠질 위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성령충만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매년 많은 중국에 성도들과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집회를 가지죠.
특히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유학생, 교포, 동포들이 많이 참석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뜨거운지 우리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령이 뜨거운 역사가운데, 그들이 모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도행전적 교회를 보라고 하면, 중국 가정교회일 것입니다.
그들은 조직도 없고, 제도화되지 않고, 교회법이 뭔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신학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번에 홍콩에서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 성도들의 세미나>가 있어서,
제가 가서 섬길 때, 저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의 제도를 배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저도 강사로 부르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하던 대로 그냥 하십시오.
신학교도 많이 세우지 마십시오.
그냥 말씀 읽고 그냥 전도하고 그냥 제발 지금처럼 사십시오.
교회 건물 세우고, 교회 제도 만들고, 교단 만들고, 신학교 만들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서구교회처럼 능력을 잃어버린 그런 교회가 될까봐 두렵습니다.
여러분, 서구교회의 제도를 본받지 말고,
그냥 주변에서 뭐라고 그러든 그냥 말씀 붙잡고 그냥 가십시오.’
제가 잘 얘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제도를 다 없애라는 뜻이 아니고,
제도화의 위험과 부작용을 답습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제도만 있으면 되죠.
신학교도 너무 많이 세우지 말라고,
신학교 많이 세워서 공부만 많이 한 서구교회를 보면, 박사는 많은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박사님들이 많이 나와서, 예수님이 쌍둥이였다느니..
이런 이상한 소리들을 하고요.
여러분, 중국의 지하교회는 매우 위험한 교회입니다. 매우 위험하죠.
‘저렇게 신학공부 안 하고, 이단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저렇게 제도가 갖춰지지 않아서, 목회자가 없어서 제대로 될까?’
우리가 염려할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장 사도행전적 교회는 북한의 지하교회 아닐까요?
여러분, 서구교회는 몰락해가고, 공산권의 핍박속에 있었던 교회들은
왜 그들은 그렇게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가요?
교회는, 언제나 고난을 통해서 세워지고, 고난을 통해서 순수해지고,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된다는 것이죠.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위기는 뭐냐면, 고난이 없는 것이 위기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 서구교회의 위기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 볼 일이 없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희생할 이유가 없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오히려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이 포스트크리샌덤 시대에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목숨을 내걸고 예수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점점 냉랭해지는 것입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세례문답을 할 때, 한 가지를 꼭 묻는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그게 세례문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진짜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험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제목
그럼 어떻게, 위험한 교회가 될 수 있나요?
정부가 우리를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지 않습니다.
요즘 사회가 교회를 향하여 비판하는 것을, 핍박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그건 귀담아 들어야 되는 거지요.
핍박이 없는 이 시대 속에,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어떻게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위험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핍박과 제약이 있는 상황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건물을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제도가 없는 것처럼, 지도자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그 제한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제약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후기 기독교 사회에, 몰락해가는 교회에
이 침몰해가는 그런 배에서 함께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격한 단어인지 모르지만 ‘위험한 교회’라는 설교제목을
제가 오늘 정한 것입니다.
<그럼, ‘위험한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 첫째로, <거룩한 절박함이 있는 교회>입니다. 거룩한 절박함!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마치 예수님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런 거룩한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막2장에 보면, 이 거룩한 절박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건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예수님이 그 집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나 하면, 집안에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웃에 있던 한 중풍병자를 4명의 친구들이 들것에 메고 옵니다.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뚫습니다.
‘아니, 들어갈 수 없으면, 기다렸다가 나중에 사람이 좀 빠진 다음에 오든지..’
아니면, 다음에 예수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포기하든지..
그럴 수도 있었는데요.
지붕을 뚫은 것, 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입니까.
4명 중에 어떤 사람이, 그 아이디어를 냈는지 모르지만,
나머지 사람이 당황했을 겁니다. 누가 변상할 건지,
또 실내의 어떤 사람이 부상당할 수도 있는 문제..
어쨌든 지금 사람들이 모여 있고,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데,
천정에서 뭐가 후두둑 떨어지면서,
아마 지금 우리 집회 장소에, 천정이 후두둑거리며 뭐가 떨어지면,
다 밖으로 나가서 대피하실 것입니다.
그런 위험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지붕을 뚫는 결정을 하게 했을까요?
바로 절박함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지붕을 뚫은 4명의 친구는,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할지, 설명해주는 좋은 모델이 됩니다.
우리도 지붕을 뚫어야 되는 겁니다.
제가 맞춤전도집회 시작할 때, 이 본문을 갖고서 많이 기도했어요.
가족 중에 믿지 않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지붕을 뚫어야 한다고요.
지붕이 막혀 있으면, 땅굴이라도 파야 된다고요.
그랬더니 강원도에 사는 어떤 믿지 않는 아버님을,
‘아버지 점심 드시러 가시죠’ 하면서 차에 태우고, 그냥 서울로 내달린 것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교회에 오실 이유가 없으니까, 욕을 먹든 말든, 쫓겨나든 말든,
저 강원도에 사는 아버님을, ‘아버님 식사대접 해 드릴게요’ 하고는
그냥 서울로 달린 것입니다.
‘야 어디까지 가냐?’ 대답도 잘 안 합니다. 지붕을 뚫는 겁니다.
그러고 차에 내려서 보니까, 거기가 교회라는 것을 알고, 아버님이 노발대발 하시는 거죠.
‘아버님, 올라가시면 멋있는 식사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오신 길에, 식사라도 하고 가셔야죠.’
그래서 식사 정성껏 대접받고, 그날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어떤 40대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는,
저희가 처음에 서툴러서, 남편의 회사로 초청장을 보낸 것입니다.
회사에서 남편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함부로 자기 연락처를 줘서, 교회에서 연락 오게 했다고.’
그래서 부인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저희들이 막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려고 했다가, 도리어 부인이 집에서 쫓겨나니까요.
우리는 지붕을 뚫어야 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뚫었는데, 사고가 나는 겁니다.
저희가 금식하고 기도했을 때, 며칠 후에 남편이 괜히 미안해지는 것입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내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나님이 그의 양심을 움직여주셔서, 결국 전도집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한 번 쫓겨날 일이 있으면, 쫓겨나야 하는 겁니다. 지붕을 뚫는 사건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사건이 몇 번 있었어요. 그때 예수님 믿은 분이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선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이 지붕을 뚫어야 합니까.
지붕을 뚫는 교회, 위험한 교회이죠. 한 영혼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라면,
그 지붕을 뚫는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 비용을 지불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죠, 4명의 친구들은.
한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붕을 뚫어야 되는 겁니다. 위험한 교회입니다.
‘명량’이라는 영화에, 마지막 대전할 때, 그 되돌아갈 집을 불태워버립니다.
여러분, 거룩한 절박함, 어쩌면 주님의 교회는
우리가 되돌아갈 다리를 끊어버리는 그러한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배를 불태우고, 집을 불태우고, 지붕을 뚫는 그런 교회,
그런 위험한 교회가 되어야, 이 바벨론 포로시대와 같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위험한 교회일 줄로 믿습니다.
◑2. 위험한 교회는 <선교적 사명감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선교적 사명감!
책을 읽다보니까, 어떤 역사가가 이런 흥미로운 지적을 했습니다.
‘과거에 북아메리카에서는 여행객을 가리킬 때 '트레블러' 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트레블러 대신에, '투어리스트' 라는 단어로 바뀌었습니다.
트레블러의 뜻은, ‘돌아다니면서 고생하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입니다.
다른 문화권에 가서, 고통을 받으며 그 문화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때로 희생당하기도 하는, 그런 트레블러!
사람들이 그 단어를 싫어하니까, 그 의미를 알고 싫어하니까,
투어리스트 라고 단어를 바꾸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쳇바귀 돌듯이 빙빙 도는 사람, 안전하게 돌아다니다가
쇼핑 좀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
여러분, 교회가 트레블러가 아닌, 투어리스트가 될 때,
교회는 힘을 잃어버리는 거죠. 예배를 잘 드리면 좋은 교회일까요?
멋진 교회는 될 수 있어도, 위험한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되, 선교적 사명감이 없다면,
매주 예배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종교인들로만 가득 채울 것입니다.
만일 우리 공동체가 이 선교적 사명감이 없다면,
아주 멋진 사교클럽으로 끝나고 말 겁니다.
우리 모든 프로그램과 제자도도 이 선교적 사명감이 없다면,
어쩌면 율법주의적이고, 때로는 신비주의적이고, 도피주의적인 프로그램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것을 이끌어가고, 움직이는 것은 선교적 사명감이 되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다워지지 못합니다.
트레블러가 아닌, 투어리스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명을 함께 수행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함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필요합니다.
내 능력과 내 힘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고, 서로를 도와줘야만 됩니다.
투어리스트는 동료가 필요 없어요. 모르는 사람들과 단체 여행 갑니다.
투어리스트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자기 속마음을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까.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까? 피상적 관계만 맺고 돌아오는 겁니다.
우리 공동체가 유사 공동체,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냥 겉모습만 나누는 그런 공동체가 되는 이유는,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붙잡아줘야 되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피상적인 공동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공동체가, 선교적 사명으로 하나된 공동체라면,
거기에는 진정한 나눔이 있고, 깊은 속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상처가 있으면 치유하고,
연약함이 있으면 강하게 하고, 서로를 붙잡아주는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교회 예배가 좀 능력이 없어졌다. 그렇게 얘기하는 분이 계세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저희 교회가 선교적 사명감이 약해졌든지,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그 분이 선교적 사명감이 없든지.
예배를 아무리 순서 바꾸고 갱신해도, 선교적 사명감이 없으면, 예배는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명보다 교제에 더 신경을 쓰는 공동체는, 결국 둘 다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교제가 잘 되어야 우리가 사명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아닙니다.
진짜 교제는, 사명이 교제를 만듭니다.
위험한 교회는, 선교가 우리의 교제공동체, 예배, 사역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교회가 위험한 교회입니다.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머 라는 분이, 남아프리카의 한 부족에서 행해지는
성인식 통과의례에 대해서 쓴 글에 대해서 읽은 내용입니다.
이것은 음덴보 라는 부족이 소년에서 성인으로 전환될 때,
그 남자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성인(의례)식을 연구한 겁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성인식 직전에, 그 마을에서 다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프리카 정글이니까, 열매도 따 먹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아이들끼리 함께 생존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몇 주마다 한 번씩 방문해서 돌아보고,
실제 그들이 함께 도와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보호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함으로써, 그들은 안전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한계상황, 시련에 그들이 부딪히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들이 거기서부터 지혜를 얻고, 서로를 의지하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그들이 남자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13살까지는 엄마 품에 있다가, 이제 성인이 되기 전에
그 통과의례를 거치고 난 다음에 돌아왔을 때는, 남자로 변화되어 갑니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학자는, 이러한 경험을 가리켜 ‘커뮤니타스’라고 불렀습니다.
‘커뮤니타스’는 한계적 상황의 극심한 시련 속에서,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보통 커뮤니티(공동체)라고 말하는데, 그것보다 그 강렬한,
사명으로 하나된 공동체를 ‘커뮤니타스’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선교학자는 아이디어를 얻어서 이렇게 적용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커뮤니티가 아니라 ‘커뮤니타스’가 되어야 한다.
이 ‘커뮤니타스’를 경험하는 것을, 교회안에서 가장 많이 보는 사례가 단기선교입니다.
단기선교를 갔다 오면, 다들 영적 전사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교회봉사도 아주 뜨겁게 합니다.
‘저분이 저런 믿음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커뮤니타스’를 경험하면서, 영적 군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까닭은,
많은 선교사님들, 오늘 나와서 찬양한 선교사님들은, ‘커뮤니타스’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선교사님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단기선교를 갈 때,
그 성도들도 ‘커뮤니타스’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 안락하고 자유롭고 평안한 환경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선교지에서
‘커뮤니타스’를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 찬양사역자들이 저 시골 오지에 있는 작은교회에 가서,
찬양을 불러주고 아웃리치를 갔다 오면서,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커뮤니타스’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커뮤니티 처치가 아니라 ‘커뮤니타스 처치’가 될 것입니다.
하목사님께서 2천명 선교사 파송, 1만명 사역자의 비전
정말 아직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전입니다.
CGN TV,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지, 정말 저는 자다가도 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당하기 어려운 비전이, 우리교회를 ‘커뮤니타스’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만 했다면,
아마 저희교회가 선교사 파송 많이 안 하고, 선교후원금 많이 안 보내고,
CGN TV 안 했으면, 서울 시내에 큰 교회 건물 10개는 지었을 것입니다.
저희는 강대상 스크린이 LED 번쩍이는 화면도 아닙니다.
아직 프로젝트인데 철사 줄로 매달려 있습니다.
아직도 옛날 것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프라이드가 있습니다. 커뮤니타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동료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이는 곳에 많이 투자하기 보다는, 선교사역과 CGN TV를 통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더 멋진 세상을 통해서,
저개발국가를 구호하고 돕고
또 우리 한동대학교, 몽골국제대학교, 많은 선교기관들을 돕는 일에,
우리 선교사님들 후원하는 일에, 성도님들이 비전헌금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 후원하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요청이 있습니다.
일주일에서 몇 건씩 곳곳에서 요청이 들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이걸 어떻게 감당하나? 염려가 되지만,
그렇게 이러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저희 교회가 커뮤니타스가 되는구나’,
우리가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사명이었다면, 우리는 벌써 교만해져서,
사명감이 아닌,
그저 우리끼리 좋다고 생각하고, 즐기는 교제의 모임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2천명의 선교사, 하목사님때부터 지금 누적 파송은 1800명이 넘었습니다.
저는 그 비전을 이렇게 재해석하고 싶습니다.
‘지금 활동 중인 파송선교사가 870여명인데, 2천명 선교사의 비전을,
보내는 숫자로 치는 게 아니라, 액티브한 선교사가 2천명이 되는 비전’입니다. 더 무거운 사명입니다.
보니까 핍박이 없어요, 우리가. 우리는 핍박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됩니다.
하나님 주신 원대한 비전이, 우리에게 마치 핍박처럼 여겨질 만큼,
우리 스스로 한계적 상황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전을 향해서,
우리가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단순한 커뮤니티가 아니라, 커뮤니타스가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로서, 사명감으로 서로 하나되는
순도, 예배팀도, 어린 자녀들도, 다 사명감으로 하나되는
그냥 예배만 드리는 자녀들하고, 아웃리치를 갔다온 자녀들하고 차원이 다릅니다.
마치 일반사회에서 군대 갔다온 자녀들이 철이 들어서 오듯이
군대가 마치 커뮤니타스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한국사회에서요.
그래서 하목사님은, 여성도 다 군대보내야 된다고 주장하신 적도 있습니다.
자매들도 더 사명감으로 뭉친 강한 십자가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뭔가 그런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희 교회는, 모든 모임마다, 우리 자신이 아닌 사명으로 불타오르는,
그런 위험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위험한 교회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왜 모든 것이 위험해 보여서 두려워합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가가란, 십자가 위에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떤 종교지도자가 와서 죽으라고 도전한 지도자가 있습니까?
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여러분의 형통을 위해서
이런 교훈을 따르면, 너희는 잘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가지,
어떤 지도자가 ‘예수 믿고 죽으라’고 도전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믿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너희의 옛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눅9:23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러분, 모두가 왜 안전을 추구합니까? 자기 생명을 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안전해 보이는 길,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길을 선택하면,
그게 위험한 길이다.
그러나 위험해 보이는 길이지만, 너희의 생명을 나를 위하여 잃어버리는 길은,
그것이 위험해 보이지만,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여러분, 가장 안전한 길은, 우리가 가장 위험해 보이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여러분, 가장 안전한 삶은,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삶입니다.
여행을 갈 때, 가장 안전하게 가려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다니면 안전합니다.
빼앗길 것이 없기 때문에 안전하고,
빼앗길 것이 많은 사람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잃어버릴 게 없이 사는 것이 좋습니다. 값진 진주를 가진 사람을 아시죠?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값비싼 진주 하나를 사서, 자기 품에 숨기고 사는 사람.
겉은 허름하지만, 자기 속에는 자기 모든 소유보다 훨씬 더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그는 낙심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외로워하지 않고,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인생을 걸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장 안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거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진정으로 유일한 혁명가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는데,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위험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위험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잃어버릴 게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모든 생명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했기 때문에요.
그는 이 세상에서 강도의 위험을 당하든, 배가 파선되든, 매를 맞든지,
자신의 육신이 부서지는 위험에 처해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위험한 교회는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처하는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위험한 교회'입니다. ←설교 제목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에 대해 못 박힌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얼마나 위험한 사람입니까. 죽는 것을 유익하다고 말하는 사람.
누가 이 사람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죽는 것이 유익한 줄 믿으십니까?
모인 분들 중에, 삼분의 일만 믿으시네요.
‘죽음이 나에게 유익이다.’ 이러한 각오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여러분, 제일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죽기 밖에 더하겠어?’ 하며 달려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감당 못합니다.
그래요,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들은 ‘죽기밖에 더하겠어?’가 아닙니다.
‘살기 밖에 더하겠어?’
우리는 죽어도 사는 인생인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기 밖에 더하겠어?’
그러면 때로 죽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살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뭘 두려워하겠습니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여러분, 믿음의 삶은 영적인 모험입니다. 모험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안전하고, 안일한 삶의 집착하는 것을 죄로 여기고 회개해야 합니다.
▲한 이야기가 제 마음을 움직여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블란딘 Blondin 이라는 한 유명한 프랑스 줄타기 곡예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어느 날, 블란딘은 수천명이 모인 자리에서, 외줄타기를 합니다.
캐나다 쪽에서 미국 쪽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외줄타기로 건넙니다.
요즘도 그런 곡예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1894년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블란딘이 외줄을 타며, 캐나다 쪽에서 미국 쪽으로 안전하게 건너왔습니다.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습니다. ‘블란딘! 블란딘!’
블란딘이 이제 군중을 향해 소리칩니다.
‘여러분, 저는 블란딘입니다. 여러분 저를 믿으십니까?’
군중들은 외쳤습니다. ‘네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제가 제 어깨에, 한 사람을 태우고
이 외줄을 타고 폭포를 건널 수 있으리라고 믿으십니까?’
그랬더니 군중은 ‘우리가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분만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온 군중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 졌습니다.
아니, 믿는다고 고함쳐놓고, 그러면 누가 내 등에 업혀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지나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왔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는 블란딘의 메니저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믿습니다!’ 해 놓고,
그러면 누가 내 어깨에 타서 함께 건너시겠습니까? 했을 때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게 뭡니까?
우리가 다들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진짜냐? 그러면 누가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래?’
그러면 조용해지는 거죠. 믿는 게 아닌 것입니다.
진짜 믿는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정말 믿는다면, 그것은 위험해 보이지만, 가장 안전한 선택인줄 믿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걸음인줄 믿습니다.
▲잭 런던이라는 분이 쓴 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먼지보다는, 차라리 제가 되리라
나는 메마른 찌꺼기가 되어 꺼져가느니
차라리 찬란한 불길 속에 타오르는 불꽃이 되리라.
나는 생기 없이 목숨만 부지하는 행성이 되기보다
차라리 당당한 유성이 되어
내 모든 파편들이 장엄히 빛나게 하리라.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
나는 존재를 연장하려고
나의 날들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나는 나의 시간을 사용하리라.
저희 교회 창립 3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가 위험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위험해 보이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전도를 향한 거룩한 절박함이 가득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선교적 사명감이 교회의 모임모임마다
우리 가슴을 사로잡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경험하는,
참된 믿음의 모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런 위험한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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