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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바라 봐 1

LNCK 2015. 11. 3. 11:21

나만 바라 봐 1                   20:8~11, 5:12~15                         출처보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20:8

 

 

 

 

 

주후 63년 경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그 침공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로마는 알고 있었던 거죠.

안식일 날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동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일부러 안식일을 골라서 공격한 것입니다.

 

비슷한 예가 주전 176년 경에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역시 같은 방식으로 공격을 했는데, 그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1967년에 발발한 6일전쟁도 그랬습니다. *3차중동전쟁

 

그런데 요즘은 안식일 날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안식일 날에는 자국민의 생명 보호를 위해서, 무기를 드는 법률로 개정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날이었어요.

 

성경에는 안식일 규정의 목적이 크게, 두 가지 등장합니다.

오늘은 안식일에 대한 서론 격으로, 이 대목을 설명 드립니다

 

20장의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권유나 부탁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1. ‘천지창조의 완성과 그 선언으로서의 안식일을 구별하라.

 

그런데 이 안식일을 지켜야되는 명령의 근거가 어떻게 소개되는가 하면,

11, 이는(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20장에 소개된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근거, 이유가 뭐냐 하면,

천지창조의 메시지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동안 세상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빚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7일째를 구별해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안식을 휴식과 쉼의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6일동안 일하셨으니까, 7일째는 쉬시고,

그 다음날은 또 일하러 나가시고..’ 이런 식으로 안식일을 이해하기 때문에,

일중독에 익숙한 한국 신자들은, 그 안식을 단순히 쉼의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쉼의 개념이 들어있어요. 자 그런데, 이것은 좀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6일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쉬었다는 말은,

휴식의 개념보다는,

사실 6일 동안의 천지창조가 더 이상 손볼 것 없이 완전하고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엔 어마어마한 신자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주제와 기초가 담겨져 있습니다.

1:1의 선언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자기 선언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만들었는데, 때문에 내가 주인이고, 나의 운영과 경영에 따라서

이 세상의 질서는 돌아갈 것이고, 그 중에 인생도 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안식일 속에 담겨진 가장 큰 명령은, 천지창조의 선언입니다.

 

그 천지창조라는 말 속에는 어마어마한,

우리 인생에 살아갈 원리와 질서가 담겨져 있어요.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의 피조된 존재라는 질서를, 안식일을 통해서 재확인해 가는 겁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사탄의 속성이 담긴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시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버립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옵니다.

그 죄가 들어오면서 땅이 타락하고, 천지창조가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엉겅퀴가 나고, 가시가 일어나고, 자연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심성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은 함께 여기저기서 사고가 일어나고,

천지만물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이 환경의 문제는, 단순히 제도를 만들고 시스템으로 극복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 환경의 문제는,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 하나의 증상들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천지만물의 피조물의 타락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음이 찾아오고,

인간의 병든 타락의 본성으로, 세상이 거칠 것 없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속에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는

사실 이런 개념조차 우리는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미세먼지의 독성이 얼마나 강한지,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은 나갈 수 있어도, 미세먼지가 오는 날은

외출을 삼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심각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무한 증식, 무한 생산, 이것이 인간의 탐욕의 결과입니다.

전부 병들고 죄가 들어온 증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신명기에는 이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어떻게 달라져 있는가 보십시다.

 

 

2. ‘죄의 노예에서 해방을 기억하고 지키라.

 

5: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15절을 보시면, 여기 신명기에서는 천지창조의 기사가 안 나옵니다.

안식일을 지켜야되는 이유가, ‘너는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애굽 땅의 종살이는, 죄에 묶인 인류의 그림입니다.

 

원래 히브리인들이 애굽땅에 들어갈 때, 종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총리 요셉 때문에, 그 시대 온 세상에 기근이 오자, 양식 때문에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을 알지 못하던 왕이 일어나더니

이 말은 요셉을 진짜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요셉의 모든 정책에 반하는 왕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히브리 인들은 노예로 전락합니다.

 

그 시대는, 고대시대이므로 일반인들에게나 노예들에게는

안식일이라든지 쉼의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오직 쉴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적 배경을 이용해서,

이 히브리 노예들을 안식으로 초대하고, 이것을 법제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신의 안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노예 40명당 하루에 생산 해야될 벽돌 수가 8만 장,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그 벽돌이 그냥 만드는 벽돌이 아니라, 그 속에 짚을 섞어서

처음에는 히브리 노예들에게 짚을 공급해 주었지만,

그런데 광야에 나가서 예배드리겠다는 식으로 이들이 한가한 소리 하니까

지푸라기를 공급해 주지 않고, 그들이 직접 가져다가 벽돌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업무량이 더 늘어난 것이죠. 끊임없이 가중한 짐이 어깨에 더해진 것입니다.

견딜 수 없었지요. 1~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고통을 알고, 질고를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고통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고통이 나에게 상달되었다.’

 

그리고 모세에게 가시떨기 불꽃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그것은 역사의 풀무에 불타며 고통당하고 있는,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을,

모세의 소명의 자리에서 보여주신 겁니다. 그만큼 힘들었지요.

 

그런데 신명기에 넘어와서, 그들을 안식케 하시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너희들이 애굽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것이 인류가 던져진, 숙명적 풀어내야될 과제였습니다.

지금도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쉬지 못합니다.

 

쉬면 남에게 뒤떨어질까봐, 돈을 적게 벌 까봐..

이런 미친듯한 욕망의 수레바퀴에 전부 떠밀려서,

어딘가 모르면서 무작정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게 인류의 문제입니다.

 

그런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하라

예수님도 오셔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짐은 쉽고 가벼움이니라.’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를 하나를 더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겠다는 자기 선언입니다.

 

 

◑구별의 목적 - 나만 바라 봐!

 

첫째는, 안식일을 기억하라

왜 기억하라고 하셨을까요?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가 사랑을 합니다. 그게 발전하면 결혼하고 싶지요.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다음 해부터 결혼 기념일을 꼭 지켜야 됩니다.

그거 잊어버리고 지나가면, 가정사에 풍파가 일어납니다.

자기 생일은 혹시 잊어도, 그 날은 잊어서는 안 되지요.

 

, 결혼기념일이 중요하죠. 인생 최고의 날이죠. 그날만은 두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왜 그날을 꼭 기억하며 지킵니까? OO

 

그 '기억'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어서, 지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 날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그 날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 날의 '주인공'을 기억한다는 관계 문제입니다.

 

날 자체가 중요해서 날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날의 주체가, 여호와입니다.

 

너희가 6일 동안은 세상에 골몰해서 살더라도,

한 주가 시작되는 첫 날인 이날 만은, 나를 좀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이걸 좀 더 부연설명한 대목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입니다.

 

, 제가 종종 이 거룩이란 개념을 여러분께 설명을 드렸는데, 다시 한 번 설명드립니다.

거룩이란, 홀리 홀리, 우리가 생각하는바 윤리적, 도덕적 무결점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거룩의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13절을 다시 보시면, 네 발을 금하고, 오락도 하지 말고,

또 네 길로 행하지 말고, 사사로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법조항 때문에, 안식일(주일) 하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 뭔가 하지 않고, 금하는 날로서 이해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 이 설교의 제목이 나만 바라봐!’입니다.

연인 사이에나 쓸 수 있는 표현이죠.

 

뭣도 금하고, 뭣도 금하라는 말은, 금하라는데 초점과 메시지가 있는게 아니라

나만 바라봐라는 주제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엄마가 어디 급한 심부름을 아이에게 시킬 때는,

너 한 눈 팔지 말고 똑바로 갔다와야 돼 그러죠? 그럼 한 눈 팔지 말라는데 초점이 있어요?

빨리 갔다 오라는데 초점이 있습니까?

빨리 갔다 오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이게 수사학적인 표현인가?

문자적인 해석이 필요한가? 이걸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법을 만들어 우리를 제약하고 금하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얘들아, 이날 만이라도 나에게 집중해다오

이렇게 하나님이 인생들을 향하신 사랑의 구애입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

 

제가 신명기 서론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십계명은 일관되게 하나님이 인생을 향하신 사랑의 호소입니다. 믿습니까?

나를 사랑해달라는 거지요.

 

오늘 이 말씀이 또 한 주간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안식일 날을 한 주의 첫날로 지킨다면,

히브리인들의 첫 것은 나머지를 항상 대표합니다.

 

일요일은 주말이 아닙니다. 일요일은 그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우리가 첫날을 이렇게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고,

성수(거룩하게 지킨다)한다는 것은, 나머지 6일도 내 날이 아니라,

주의 날로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또 한 주간,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날이 주의 날로 지켜질 수 있고,

그 분을 즐거워할 수 있는 복된 순종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