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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눅10:39, 왕하3:12 출처보기
Develop the Habit of Listening to God / Zac Poonen
◑시간이 더 많아졌는데, 오히려 더 분주합니다.
▲본문 눅17장에 보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농사짓고, 집을 건축하는 등의 일로
매우 분주할 것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 장사하고 농사짓는 일, 집을 세우는 일 등
이 일 자체로는 전혀 죄악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직업과 맡은 일에 충실한 자세는, 오히려 칭찬 받아야 될 일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 세상일들에, 너무 푹 빠져버린 나머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안중에도 없을 만큼
모두가 세상일에 푹 빠져 버리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탄은 성공한 셈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몰려들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그 사람들이 자기 삶에 푹 빠져 살게 했습니다.
그 결과,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관계가, 평소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것 없이, 나 자신을 한 번 살펴봅시다.
너무 바쁜 나머지,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간을, 거의 내지 못합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이, 비록 그게 죄가 아니더라도,
뉴스, 핸드폰, 스포츠, 쇼핑, 외식, 레저 등
우리는 거기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여러 가지 전자제품 과 가전제품이 발명되면서,
우리는 과거 사람들보다 엄청 많은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과거보다 더욱 시간에 쫓겨서 삽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동차로, 기차로, 비행기로 여행합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다녔던 그 길을,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아주 편하게 다니며, 엄청난 시간을 절약하고 있습니다.
가정주부들도, 옛날에는 세탁과 청소와 요리 및 설거지에 많은 시간이 들었지만,
요즘에는 기계의 도움으로, 많은 시간이 절약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 한 것은, 우리가 과거 사람들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내는 데는,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줄어든 게 아니라, 아예 시간을 거의 내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 일에 너무 빠져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루 중에 주님과 교제를 위해 내는 시간은, 잠시이거나 아예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내 삶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려면,
우리는 매일 주님 발아래에 앉아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의 마리아처럼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오늘날 설교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매일 듣는 습관을 가지고서, 설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결과 시중에 ‘주님의 말씀’은 소수이고,
대신에 ‘인간의 말’은 넘쳐납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왕하3:12)라는 말을
듣기가 참으로 힘든 시대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엘리사 선지자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신실한 종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며 친밀한 가운데서
그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사실은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자기 개인적 사견을 발표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병원심방을 가든지, 구역식구와 교제할 때도
내가 평소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서, 그때 받은 말씀을 나누어야지
그저 내 소견에 좋은 생각을 그에게 나누면.. 어쩌면 거부감만 주기 십상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출34:34
여호수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지시를 들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1:8
그리고 여호수아는, 자기가 들은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수1:10
사무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그 앞에 오래 앉아 기다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백성들에게, 자기가 들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삼상3:19~20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서 50:4절에 예수님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습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습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여기서 성경에 ‘학자의 혀’라고 나오는데,
원래는 ‘배워서 가르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학습자 또는 제자’로 번역합니다.
*instructed tongue(NIV), tongue of the learned(KJV) tongue of disciples(NASB)
위 구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침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셨습니다.
그렇게 배운 다음에, 먼저 들으신 다음에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 일을 ‘아침마다’ 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제자’로서 먼저 말씀을 배우신 예수님은,
그날 자기에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그 배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지 않고, 말씀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곤핍한 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다면,
하물며 우리야 더욱 아침마다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학습자의 혀, 제자의 혀’가 되어야 지요.
여기서 ‘혀’라는 뜻은, ‘가르친다, 대변인’이라는 뜻입니다.
잘 가르치려면, 먼저 잘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이 친히,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잘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침마다 ‘잘 배우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 입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오래 앉아있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오래 내야 합니다.
오늘날 한 가지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음성을 듣지 못한 가운데서
가르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없도다’가 되는 셈이죠.
◑그래서 본문에, 베다니 촌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아래서 그 말씀을 들었던 모습을 통해서
3가지 요점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1. 첫째로, 앉는다는 것은, 걷는 것이나 달리는 것과 달리
‘편히 쉰다’는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마리아가 ‘앉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안정되어 있고, 요동치지 않고 잔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우리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고백하지 않은 죄, 생활의 염려, 이 세상 것의 탐심 등으로
우리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그 옆에서 서성거리거나, 주위를 맴돌고 있거나, 뭔가 딴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바르지 못하고, 세상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또는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음성은, 고요해야만 들리는 음성이거든요. 세미하니까요.
약간만 시끄럽거나 분주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듣지를 못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 시46:10절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과 그 음성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잠잠히 있어야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누구의 발 아래 앉는다는 것은, 겸손의 자세를 뜻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의자에 앉으셨고, 마리아는, 그 앞에 땅바닥에 앉았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발아래에 앉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동등한 레벨에 앉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낮은 레벨을 택해서 앉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에게, 절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하고 겸손한 심령에게, 언제나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마11:25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아이들이라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3. 세 번째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아래에 앉는 것은, “복종”을 뜻합니다.
제자가 주님의 임재 앞에서 가져야 하는 태도는, 뭐든지 복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복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주시려고도, 말씀하지 않으시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마음의 소원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일이 있으시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거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요7:17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즉,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우리는 그 뜻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을 몇 달 동안, 또는 몇 해 동안 계속 읽는데요.
그저 읽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종교 행위에 불과하죠.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듣는 귀’를 닫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요?
그게 혹시 주님 앞에서 ‘가만히 있는 것 stillness’의 결여 때문은 아닌가요?
혹은, 그저 주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자세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혹은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에 순종치 않을 때도, 주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무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당신이 종이 듣겠나이다.”
그리고 성경을 열어서,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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