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바라 봐 2 출20:8~11, 골2:16~17 출처보기
▲여러분,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계명이 먼저 선포되었을까요? 아니면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먼저 시켰을까요?
답은, 훈련을 먼저 시키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처음 도착을 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격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고 나서 애굽을 빠져나오면 모든 게 한꺼번에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당장 마실 것과 먹을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매일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규칙이 있었어요.
‘너희들이 만나를 거둘 때, 6일 동안은 매일 거두어라. 7일째는 장막에서 쉬어라.'
그래서 만나는 6일동안 내립니다.
대신 6일째는 다음날 먹을 분량까지 두 배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7일째는 쉬는 법을, 몸으로 익히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을 몸이 기억하도록, 삶이 기억하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재정하시는 가운데,
십계명 속에 이 안식일 계명을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순서를 보면, 안식일 법을 먼저 제정하신 게 아니라
그 전에 먼저 그들로 하여금, 이 안식일을 모든 삶 속에 녹여내고, 습관이 되도록
하나님은 훈련을 먼저 시키셨습니다.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삶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광야생활 전체가,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후세디 라는 이스라엘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식일은 시간의 지성소다.’
지성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1년에 1차씩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지고 들어가서,
그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백성의 죄를 속죄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여길 만큼 중요하게 여겼어요.
민15장에 보면,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러 산에 가다가 붙잡혔습니다.
이때 모세는 ‘죽이라’고 명하여, 공동체의 본보기로 삼습니다.
여러분, 그만큼 안식일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중요한 신앙의 주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겼을까요?
그것을 기억하여 왜 거룩하게(구별하여) 지키도록 명령했을까요?
◑안식일의 중대한 의미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안식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법조항을 만들어서 '이렇게 지키라'는데 일차적 초점이 있지 않고,
그날만이라도 ‘나만 바라 봐’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구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사실 모든 계명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구애가 담겨져 있습니다.
출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1절의 내용은, 뜻밖에도 창조의 기사가 소개되어 있어요.
6일 동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7일째는 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이 날을 기억하고 쉬어라..는 말씀인데요,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쉬셨다”는 개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쉬신 다음에, 그 다음날은 또 무엇을 하셨을까요? 또 일하러 나가셨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쉬었다’는 개념은, 휴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안식일이라는 전체 주제속에는 ‘휴식’의 개념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쉬셨다’는 쉼의 의미에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6일 동안에 천지창조가, 더 이상 인간이 손댈 일 없이 완전했고, 완벽했고,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7일째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쉬셨다’는 말 속에는
그리고 그 명령을 우리에게 내리신 것은,
매우 엄청난 메시지가 선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 창조는 인간이 더 이상 손댈 것 없이 완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만물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주장하시고, 경영하시고, 섭리하신다’
라는 신앙고백이 이 선언 속에, 이 명령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했던 세상이었는데, 에덴동산이었는데,
사탄의 유혹으로 아담이 넘어집니다. 그리고 이 땅/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탐욕과 욕심에 다 망가집니다.
환경도 망가지고, 빈익빈 부익부가 발생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모든 무질서가 시작되고
살인, 간음, 음란, 토색 .. 이러한 죄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증상으로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 66권 전체 주제가, 꼭 4단어로 구성됩니다.
성경 우리를 펴도, 이 4단어에 전부 걸립니다.
창조, 타락, 구속, 회복
성경 전체는, 결국 이 내용입니다.
이렇게 더 이상 손댈 것 없이 완전히 만들어졌던 세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망가지고 말았어요. 어떻게 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큰 주제(구속)를 설명하셨습니다.
신명기 5장으로 넘어갑니다.
신5: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놀랍게도 신명기 5장에 와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될 이유가 달라집니다.
천지창조의 기사가 없고, 대신에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로서
출애굽기의 구속의 기사가 대신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 타락한 인생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한 역사적 사건은, ‘애굽의 종살이’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죄의 노예가 되어서,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설명한 시대가, 애굽의 종살이하던 4백년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내십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을 때, 유월절 밤을 지납니다.
온 땅에 첫 것을 죽이는 장자의 재앙이 임할 때, 고센 지역에 모여 살던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너희가 곧 장자의 재앙을 맞이할 텐데, 어린양을 잡아 흘린 피를, 문설주에 발라
그 피가 묻어있는 집은, 이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갈 것이다.’
정말 그대로 했더니, 그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히브리 노예들의 집만 죽음의 재앙이 지나갑니다.
이게 유월절 어린양의 피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히브리노예들만, 그 구원받는 표로서, 홍해를 건넙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구원 속에는, 어린양의 죽음이 전제되었는데,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을, 안식일을 거룩히 기억하여 지켜야 되는 이유로서,
신명기에 다시 기록했습니다.
▲정리하면, 이런 뜻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되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분이 주권자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먹여 살리시고, 그분이 모든 것에 주인이 되십니다..를 선언하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의미가,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 속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타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란 날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겁니다.
7일에 한 번은 쉬도록 함으로써, 그날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렇게 두 가지 큰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안식일
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해서 기억할 것은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백성들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누구를 기다리며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겁니까?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소망하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날을 가장 잘 상징적으로 담아낸 날이,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은
거룩히 구별하여 지켜야될 안식일 속에 설명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리거든요.
6일 동안은 세상에 코박고 살다가, 자꾸 잊습니다. 잊을만하면 다시 안식일 날이 돌아옵니다.
그러면 다시 정신을 흔들어 깨워서, 이 만물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의 진짜 구원은 누구로부터 임하는 것인가?
이것을 자꾸 잊어버리지 않도록, 안식일이, 기억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는, 결국 안식일을 훈련하는 역사요,
그 훈련 속에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도록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어요. 실체가 오셨다 말입니다.
그러면 실체가 왔을 때는, 모형으로 쓰던 것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아파트 짓기 전에 먼저 모델하우스를 짓습니다.
그런데 아파트가 단지에 다 들어섰습니다.
그 후에는 모델 하우스를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모델하우스는 허물어 버립니다. 왜요?
그 모델하우스가 지향하고 있던 실체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역사 속에 안식일의 주제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안식일 날에 담겨졌던 메시야에 대한 실체를 봄으로써,
우리는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이 날은 폐지된 게 아니라, 완성된 것입니다.
자, 여기까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주일을 지키게 되었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첫날이기 때문에,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날을 지킨다."
단순히 그렇게 이해하시면 편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이면의 배경을 알고, 그 결론을 외워가질 때,
더 정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더 이상 안식일은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나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까지 안식일을 지켰습니까, 안 지켰습니까? 지켰습니다.
뭐 여러 성경을 댈 수 있지만, 시간관계상 한 구절만 찾으십시다.
행18: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했다.. 이것은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안식일마다!
그리고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날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 때는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다음인데,
아직도 안식일 날에 모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행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떡을 떼러 모였다’는 뜻은, 예배하러 모였다는 뜻입니다.
그 날이 ‘그 주간의 첫날’입니다.
이 날은, 안식일(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일요일)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날에도 모였고, 주일날에도 모였던 적이 이미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두 날이 다 가능했다는 얘기죠. 사도시대에.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복음을 전하는데요. ‘그 나사렛 예수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입니다.
이 분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해도
그 당시에는 기독교라는 게 아직 없었습니다. 전부 유대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도들도, 유대교 신자들입니다. 아직은요. 바리새인들처럼, 서기관들처럼.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겁니다.
‘이 분이 바로 그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핍박하고, 감옥에 집어놓고,
많은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해서 이때부터 유대교라는 공동체에서 기독교가 슬금슬금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부가 따로 안식일날 모인 것입니다.
자 그런데 유대교도 안식일날 모이고, 기독교도 안식일 날에 모였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외부에서 볼 때,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정권이 보니까,
‘저 사람들도 결국 유대인 아니냐?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데, 유대교 안에 한 분파가 아니냐?’
예를 들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 보기에는 통*교나, 우리나 다 기독교인줄 압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들도 교회라는 이름을 쓰고, 십자가 달고 하니까요.
그런 것처럼 이 유대교 안에, 기독교인들을 한 분파처럼 이해했어요.
이래서는 더 혼란이 일어나겠다 싶어서, 예배의 날을 따로 만듭니다.
‘같은 날 예배를 따로 드리니까 혼란이 일어나니, 예배드리는 날을 따로 만들자.
어차피 안식일을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 날을 붙들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마침 그 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로 기억하기도 좋습니다.
해서 ‘이 날, 우리 기독교가 예배를 드리자’ 해서
행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이렇게 해서, 슬금슬금 주일날, 소위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주일날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일날, 주일날’ 하는 표현이
그 시초가 누가 제일 먼저 쓴 표현일까요?
마르틴 루터일까요, 어거스틴일까요?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여기에 ‘주의 날’이 나옵니다. 이것이 주일이 최초로 불려진 날입니다.
아 그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그 당시 그런 종교적인 정황, 또 목회적 상황 때문에 예배를 따로 모이다 보니까,
부활하신 그 날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주일로 지키는 시초가 되었구나.
▲그러면 제가 여러분께 여쭤봅니다.
이런 시비가 가능했을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우리 조상들이 수 천년 동안 지켜오던 안식일인데, 의미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날만은 우리가 지켜서, 의미만 새롭게 하면 될 게 아니냐,
어떻게 그 날을 변동할 수 있느냐?’
만약에 누가
‘자 여러분, 우리가 주일을 수요일로 바꿉시다. 공간도 부족한데..’ 그러면
당장 난리가 날 것입니다.
‘자, 그래도 어떻게 안식일을 안 지킬 수 있느냐, 그 날은 우리가 날은 지키자. 날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무슨 소리냐, 날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 의미가 중요한 거지..’
해서 주일을 주장하는 사람과, 그래도 안식일을 고집하는 사람들 간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흔적을 바울서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기가 막힌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안식일, 절기,
이런 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래요. 장래 일은, 예수님 오시는 사건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몸입니다. 다른 것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허상에 불과하고, 실체(몸)가 중요합니다.
자, 그런데 이 당시에 이 날 때문에, 그 날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 라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 기독교 안에서 시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롬14: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 기록을 왜 했을까요? 바로 그런 시비 때문입니다.
‘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날이 갖고 있는 그 속에 메시지, 목적성, 방향, 가치, 이것이 중요하다.’
그 날을 중요시여기면, 그 날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보통 성수주일 이라고 말하는데,
성수란.. ‘거룩하게 지킨다’ 인데, 어떤 의미입니까?
이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지키는 것인데,
자, 그 분은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구약의 안식일이 처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날로서 동원되었다면,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교회의 신랑되신 그 분을 설레이며 기다리는 날로서 기념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이라도 구별해 놓지 않으면,
인간은 자꾸 세상 것에 파묻히고 욕망에 묶여서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날 만은, 모든 것을 다 중단하고, 신랑을 기억하여,
그분의 복음과 그 분의 생명을 의미있게 삶속에서 선포하고, 실현하는 날로서
이 날을 구별하여 지켜야 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로운 몸으로,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공동체(교회)에 나타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런 걱정도 없고, 저런 걱정이 없는게 평강일까요?
성경이 말씀하는 평강은,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평강이라고 얘기합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짐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부활의 주님의 첫 번째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바로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그 후에 평강을 선언하시고 나서, 예수님이 이상한 동작 하나를 하십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2
성경에는 하나님이 숨 쉬신 장면이 두 군데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코에 생기를 후~하고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흙덩어리가 산 영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타락이 임함으로써, 그 생명이 부서지고 망가지고,
깨어져버립니다. 죽어버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값을 지불하시고 난 다음에,
이 제자공동체에 오셔서, 하셨던 중요한 선언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듯이,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것은 재창조의 선언을 얘기합니다.
이 땅에 망가졌던, 모든 무너졌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질서를 회복하는 재창조의 역사를 얘기합니다.
recreation이라는 말이, 원래는 재창조라는 말입니다.
이 재창조의 사건은, 인간이 덧대거나 손댈 일이 없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얘기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매주 맞이하는 이 주일은, 어떤 그림으로 맞이해야 될까요?
아무리 문화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져도,
이 날은 여전히 안식일을 엄히 명하여 거룩히 구별하여 기억하여 지키게 하셨던 것처럼,
이 날도 역시 기억하여 거룩하게 하고, 구별하여 지켜야 되는 날로서
새롭게 다시 오실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 평강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평강을 선포하는 날로서,
이 날은 생명의 날로서, 다시 회복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날을, 무가치하게 무너뜨린 장본인들이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여전히 아담적 삶을 이어가고, 여전히 땅의 것에 목 매인 모습으로,
이 주일을 그냥 일반 날과 똑같이 구별 없이 하찮게 여기는 날로서 대접하다 보니까,
기독교의 가치가 무너진 겁니다.
명동에 가서 사랑하는 이에게 조그만 반지를 하나 사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반지가 하나는, 신문지 같은데 둘둘 말아서 포장되어있고,
하나는 까만 비로드에 금박이 둘린 사각 케이스에 반지가 넣어져 있습니다.
내용을 열어 보기 전에, 먼저 어느 쪽으로 손이 갈까요?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이 날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가 이 날 자체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되어야 됩니다.
‘하여간 저 사람들은 뭔지는 모르겠는데, 저 날은 목숨 걸고 하여간 교회에 가고, 지키네?
하여간 6일동안 싸우다가도, 그 날은 둘이서 안 싸우네?’
어쨌든 구별되는 날로서,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다 무너뜨렸습니다.
이 날은 뭐 쓸데없이 ‘자장면을 사 먹어야 되냐, 안 사먹어야 되냐?’ 이런 것 따지지 마세요.
그런 것 따지라고 이 날을 허락하신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날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 날 속에 담아내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 즉,
-다시 오실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 생명을 선포하고, 주일날 모든 육신의 생업을 중단하고,
그 중단이란, 나는 돈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라는 신앙고백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그런 "구별"이 있어야 됩니다.
그 날만은, 우리가 어려운 자를, 곤고한 자를, 핍절한 자를 찾아다니는 겁니다.
그들을 생명의 강가로 불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나 출애굽기에서나 아주 묘하게 공통적인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것은 집안에 종들에게도, 그 안식을 누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왜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종으로 매여 있었고, 쉼이 없었고, 고단했고..
그들에게 동일하게 주인의 안식으로 초대함으로써,
그 당시 고대사회는 쉰다는 개념이 종들에게 없었습니다.
신들에게만 있었던 개념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쉼으로 초대함으로써, 과거 우리 자리를 기억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셨던 그 초대로,
우리가 구원 받은 자리를 기억하여, 이 땅에 성경적 가치가 제대로 실현될 때,
사회적 정의가 진정하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도 이 말씀이, 또 주일은, 주말이 아니라
한 주를 시작하는 첫날, 첫 예배 ‘시간의 지성소’를 드림으로써, 나아감으로써,
주님 앞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분류 없음 >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계 / Charles Spurgeon (0) | 2015.11.06 |
---|---|
기한이 차서 죽는 복 / 찰스 스펄전 (0) | 2015.11.05 |
기름부음과 내주 / T. Austin-Sparks (0) | 2015.11.03 |
나만 바라 봐 1 (0) | 2015.11.03 |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 잭 푸닌 (0) | 2015.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