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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이사야 P1 / David Pawson

LNCK 2015. 11. 30. 22:38

 

이사야 P1                           영어 녹취록                              출처보기

      

도입 / 제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 3가지를 얘기 하겠는데,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은 아닙니다.

 

1. 1948, 베두인 족 한 양치기가 있었어요. 사해 북쪽의 쿰란지역인데,

그는 우연히 동굴 안에서, 자기 앞에 있는 낭떠러지 아래로 돌맹이 몇 개를 집어 던졌어요.

 

그런데 쨍그랑 소리가 나니까, 자기가 남의 집 집기 항아리 혹은 질그릇을 깨트린 줄 알았어요.

그래서 바로 뛰어서 도망갔지요.

 

하지만 아무 인기척이 없어서, 그는 되돌아 와서 그 동굴 속 낭떠러지 아래로기어 내려갔는데,

보니까 거기에 3피트(1m) 높이의 항아리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제가 지금 그 사해사본의 작은 모형을 가지고 있지요.

 

그가 그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니, 고대 두루마리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어요.

바로 후에 사람들이 부르는 사해 사본입니다. *Dead Sea Scrolls

 

이것은 아주 중대한 발견입니다.

거기서 발견된 구약성경 조각(사해사본)들 중에,

특별히 <이사야서>가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교계에서는 마침 RSV <이사야서>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Revised Standard Version

사해사본이 발견되었으니, 영어 번역을 잠시 멈추게 되었어요.

*번역의 토대가 되는 히브리어 원본이, 더 오래되고 정확한 사해사본이 발견되었으니까요.

 

이 사본이 중요한 것은,

당시 갖고 있던 다른 사본들보다, 연대가 무려 1천년이나 앞섰어요. *연대가 오래된 사본일수록 원본에 가깝지요.

 

그때까지 년대가 가장 오래된 이사야 사본은, A.D.900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해사본은 연대가 B.C.100년이니,

무려 원본에 가깝게 1천년이나 거슬러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B.C.700년경 사람

 

그래서 그들은, RSV 이사야서 번역을, 나중에 다시 고치지 않기 위해,

번역을 잠시 중단했습니다. *원본을 사해사본으로 바꿔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후에 그들은, 이사야서 번역을 거의 고치지 않았는데,

이는 이사야서 사본이 천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내용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작년이 <헨델의 오페라> 작곡 250주년이었습니다. *1741년 작곡

방송과 TV에서 자주 방송해서 모두들 아실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가사는 성직자가 썼고, 그가 가사를 쓰고 나서,

그 가사를 헨델에게 주어서 그더러 곡을 붙이라고 하였지요.

 

24일 후에 헨델은 그 <메시야>를 완성하였는데,

가사를 써준 성직자가 아주 기분 나빠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 긴 곡을 당신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작곡을 할 수는 없는데..’

그래서 그는 다시는 헨델에게 말도 하지 않았어요.

 

사실 헨델이 이렇게 빨리 곡을 붙인 것은, 성령에 크게 감동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라트리오 메시야>의 수많은 가사들이 이사야서에서 취하였고,

이로써 이사야서는 다시금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습니다.

 

3. 지금 성경은 장절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것은 영감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우리의 성경이 장절로 나누어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적어도 1,100년 동안, 장절을 구분하지 않은 성경을 사용하였었어요.

그들은 반드시 문맥에 의하여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장절을 구분한 사람이, 아주 재미있는 일 하나를 하였는데,

당시에 그들이 이사야서를 장절로 구분할 때, 이 점을 알고 했는지/모르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들은 <이사야서>66장으로 나누었는데, 성경이 총 66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사야>를 뚜렷이 두 부분으로 나누었어요.

전반부는 39장이고, 후반부는 27장이지요.

마침 구약 성경이 39권이고, 신약 성경이 27권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전반부 39장의 메시지가, 구약 성경의 요약과 똑같습니다.

나머지 27, 바로 40-66장의 메시지가, 신약 성경의 요약과 똑같습니다.

 

후반부는 세례요한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합니다. 40:3

다음으로 여호와의 종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자기 백성들을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고, 죽음에서 일어나고 높여질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위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지요.

마지막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내가 새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할 것이다.” *이렇게 후반부는 신약과 줄거리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도 결코 죽지 않는다로 끝납니다. 66:24

 

다시 말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 전체를 손으로 눌러 압축해서

한 권으로 만든다면, 바로 <이사야서>로 변하게 되지요.

이 책은 마치 성경의 압축판 같아요.

 

그래서 만약 성경 전체를 이해하고 싶으면 <이사야서>를 읽으십시오.

성경 전체가 이 한 권에 압축되어 있어요. 아주 놀랍지요?

 

더욱 신기한 것은 그들은 당시에 40~66장까지의 주제의 순서가

신약 성경과 똑같다는 것을, 아마 장 구분자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였는데, 매 부분이 9장씩이었습니다.

- 40~48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라이고,

- 49~57장의 주제는 주의 종이 죽임을 당하고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고,

- 58~66장의 주제는 미래의 영광입니다.

    

 

 

더 나아가 이 9장의 큰 덩어리들은, 각각 다시 주제별로 3장씩 3등분 됩니다.

그래서 후반부 총 27장을, 9장씩 3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각각의 9장은, 다시 3장씩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죠. *주제별로

 

그래서 큰 세 덩어리의 중간은, 49~57장인데,

그것은 다시 49~51, 52~54, 55~57장으로, 3장씩 명확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 중의 중앙은, 52, 53, 54장이 되는 셈이죠.

 

(그 중에서 한 절만 번호를 잘못 편집하였어요. 조금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신약(후반부) 부분의 제일 중간은 53장이요, *핵심53

바로 그 53장의 중앙 부분의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결국은 이사야서 후반부의 가장 중앙에 마침 이 구절인데, 아주 흥미롭지요?

이렇게 나눈 것은, 그들이 영감을 받아서 한 것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이사야>의 몇 구절은 우리의 귀에 아주 익숙합니다.    

 

어떤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난 후 자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남의 것을 아주 많이 베껴 쓴 줄 알았지,

사실은 그 명언들이, 바로 셰익스피어가 원래 출처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구절은 우리 입술로 항상 인용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 구절들이 너무 귀에 익어서 술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당신이 아마 붉은 양털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붉은 양털입니다.

 

 

 

여인이 양털을 염색하고는 걸어서 말리우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양털을 주홍색으로 염색하면, 다시 하얗게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1:18

여러분 모두가 과거에 이 구절을 인용하셨지요?

이에 조금 후에 다시 말하겠는데, 여기 앉으신 자매님들은 흥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우리 귀에 익숙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2:4

 

이 구절이 뉴욕 UN 본부의 바깥 화강암 바위에 새겨져있는데,

아쉽게도 그들은 구절 전체를 새기지 않고, 절반만 새겼어요.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면...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이게 전체구절이죠.

만약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절반이라도, 거기에 새겼네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14

우리는 성탄절에 이 말씀을 자주 듣지요. 그리고 헨델의 메시야 로도 많이 듣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9:6 -듣기-

 

 

또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26:3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40:31

 

좋은 소식을 전하며 산을 넘는 자의 발걸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52:7

 

주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강림하소서.” 64:1

이러한 구절들을 기도회에서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것을, 제가 들었어요.

 

이사야서의 어떤 장chapter들도, 아주 잘 알려져 있으며,

교회에서도 자주 과하게 많이 낭독하지요.

제가 교회에서 자주 인용하는 장을, 6군데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이사야6장은, 이사야의 소명에 관한 장인데,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내가 주님을 뵈었는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아쉽게도 모두들 끝나지 말아야 할 곳에서, 항상 끝나곤 하지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바로 여기까지만 읽습니다. 6:8

 

계속해서 나오는 진정한 중점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가 무엇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아야지요. 참으로 아쉽네요.

우리가 뒤에서 다시 나누겠습니다.

 

2) 35장에는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난다는 것을 얘기하며,

광야에 대로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3) 40장에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40:1, 3

 

4) 다음은 53장인데, 53장을 모르는 분 있으십니까?

교회에 다닌 지 몇 개월만 되면, 반드시 듣게 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5) 55,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고 하였지요. 55:1

이것도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들어 보셨지요?

 

6) 그리고 61장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한 첫 설교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포로된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등 같은 말씀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많은 구절들이 우리 귀에 익어서 부분적으로만 자세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절 번호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장절을 선택하여 읽어서, 오직 몇몇 구절에 대해 특별하게 익숙하지요.

하지만 <이사야> 전체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아주 비극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사야>의 몇몇 조각 구절에 아주 익숙한데,

구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도 우리가 그 조각 구절들에 더욱 익숙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사야> 전체에는 이해가 부족한데,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을 도와 드릴 부분입니다.

 

신약 성경에 아주 많은 구절들이 <이사야서>의 후반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아주 아주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망이 삼켜지고 이긴바 되리라고전15:54, 25:8

성령을 근심하게 (말라)” 하는 구절도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온 것이지요.

 

주 여호와께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며21:4, 25:8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1:3, 40:3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1:8, 43:9~10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2:10~11, 14:11, 45:23

 

이러한 구절 모두가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일 좋아하신 책이기에, 다른 어떤 책들보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더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바울도 제일 좋아했던 책이기에, 바울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하고 싶으면, <이사야서>를 이해하면 됩니다.

이 책은 당신에게 신약과 구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압축판입니다. 우리 계속하여 봅시다.

 

 

저는 이사야 이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경중의 대다수 저자들과 똑같이, 그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하나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해 많이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사야서>에서 온 것이고,

또 다른 부분은 유대 역사로부터 아는 것입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사야에 대해 많은 기록을 하였어요.

유대 전통 (문헌), 이사야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어요.

그래서 부분적 그림을 한 번 모두 맞춰봅시다.

 

그의 부모는 아주 경건했을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름이 아주 재미있어요.

예수님과 여호수아의 이름과 같아요.

아쉽게도 영어 번역으로 이사야(아이제이아)라고 하여서 그 연관성을 볼 수 없어요.

 

이사야의 히브리 본명은 이샤-야후인데, *줄이면 이사야

야후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샤구원 또는 구원하다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God saves

 

저의 동네에 조그만 우체국이 있고, 거기에 우편배달원이 있는데,

그의 성이 “Mr. Godsave”입니다. 우편배달원 하나님 구원씨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의 히브리어가 바로 이사야입니다. ‘이샤-야후

이 이름은, 예수님과 또한 여호수아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이 이름은 예언적입니다. 이사야를 구약성경의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는 복음을 가져왔으며, 좋은 소식을 가져 왔지요. 특히 후반부에요.

 

새롭다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단어이고,

전도서에서만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라며, ‘새롭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후반부에서 새롭다라는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오직 여기에서만 새롭다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창조,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였도다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의 복음입니다.

 

이사야는 모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성장했습니다.

이사야에 견줄 만한 선지자는 한 명도 없고,

유대인들은 그를 위대한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와 동등하게 분류합니다.

 

외적으로는 모세와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이지만,

내적으로는 이사야가 제일 위대하지요. *이사야서를 썼으니까요.

 

인간적 각도에서 보면 이사야의 출신이 좋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출생했고, 왕궁에서 자랐어요.

 

그는 요아스 왕의 손자이며, 그래서 웃시야 왕과는 사촌간입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그는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는 그들이 사촌간이기 때문이며, 평소에 만나며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왕실 성원이며, 명예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왕실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

선지자로서 사역을 할 때,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힘든 원인이 될까요?

 

저 파슨은, 그 배경이 그를 더욱 힘들게 하였으리라 봅니다. *선지자는 힘든 사역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전에서 그를 부르셨으므로,

사실 이사야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궁에서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고, 왕에게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많은 예언들이 정치적 이슈와 연관 되었어요.

 

특별히 그는, 세상의 권력과 동맹하는 것은, 거짓 안전이라고 예언했어요.

당시 북동쪽에는 앗수르, 남서쪽에는 애굽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의 예언에는 정치적 냄새가 풍겼는데,

이는 그가 바로 정권을 가진 왕궁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을 보면, 그의 아내도 여선지자였는데,   8:3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예언을 들어보지는 못합니다. *성경에 안 나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사야가 자신의 예언을 말할 때,

그 여선지자가 아마 분변해 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여선지자로 불렸으니까요. 8:3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맞고, 당신은 응당 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이 부부 모두는 선지자였고, 그들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혼자 대변인을 도맡았어요.

 

이사야는, 적어도 아들 둘, 혹은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아들 둘은 확실합니다. 제가 아들 이름을 알려 드릴게요.

하나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하였어요. 아주 긴 이름이지요. 8:1

아가야, 네 이름이 뭐니?’ ‘, 저는 마헬살랄하스바스 입니다.’

 

이 이름이 무슨 뜻일까요?

약탈이 속히 올 것이고, 빼앗김이 속히 올 것이다.’ *약탈에는 몸(포로)도 포함되지요,

 

사실 이 이름은 예언이었지요.

예루살렘이 적에게 약탈될 것이며, 보물들이 모두 빼앗길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건 나쁜 소식의 예언이었지요.

 

그런데 또 한 아들의 이름은 스알야숩이라고 지었는데,

이 이름은 좋은 소식의 예언이 담겨져 있었지요.

남은 자는 돌아올 것이다입니다.

 

그래서 이 두 이름이 바로 <이사야서>의 두 개의 큰 메시지입니다.

 

나쁜 소식은, 이사야서 전반부에 기록되었는데,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약탈되리라는 예언입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둘째 아들 이름에 담긴 뜻처럼,

이사야서의 후반부의 메시지인데, ‘남은 백성들이 귀환하게 된다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모든 것을 잃었지만, 여전히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부르심 장면이 아주 재미있어요.

그의 셋째 아들에 대해서는, 이건 그냥 하나의 추측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셋째 아들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확실히 남자아이 한명이 출생했는데, 그가 예언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사야의 아들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의 아이로 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의 셋째 아들이었다고 하며,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남자아이의 출생은 왕이 태어날 징조이고, 또한 이중 예언인데,

이는 오랜 후에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소명 받는 사건을 살펴봅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뵈었고,

그는 하나님의 거룩에 압도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사야가 하나님에 대해 독특한 칭호를 말하였는데, 아무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어요.

그 칭호가 <이사야서>에서 50번 나타났으며, 전반부, 후반부에 둘 다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독특한 호칭이지요. *“The holy one of Israel”

 

이 표현은, 이사야가 하나님께 붙인 독특한 표현인데,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이 그를 아주 깊이 놀라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을 보니 바로 자신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이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신의 입술이 깨끗하지 못함을 깨달은 것인데,

이는 더러운 언어를 사용했다는 뜻이지요. *성화되지 못한 신자 모두가 사실 그렇지요.

 

성경에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 정말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그는 한 가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천사가 날아 왔는데, 붉게 타고 있는 숯불을 가지고 왔고,

그것으로 그의 입술에 대니(지지니), 그 후부터 그의 입술에 상처가 남게 되었어요.

 

이것은 환상이 아니고, 실제 경험이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입술에 상처를 보고, 모두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어요.

그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지신 것이다라고 하였지요.

 

이로써 그는, 타서 상처가 생긴 입술로 전도하였어요.

그는 평생 이 입술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진짜로 있었던 사실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그의 예언/설교를 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정말로 선지자로서의 대가를 치룬 것이지요.

 

다음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물어 보기를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꼬?”

 

삼위일체 하나님이 여기에서 확연이 드러났어요.

내가는 한 위격, ‘우리는 두 분 이상의 위격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다음 소식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말씀을 전하라. 하지만 그들이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네 설교가 그들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너는 또한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크게 성공하는 설교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설교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 강퍅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설교를 사용해서, 백성들을 더욱 귀머거리와 소경이 되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듣고 회심하고 치유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은 매우 사람을 놀라게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열뿐 아니라, 또한 닫기도 합니다.

혹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리 밀어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욱 강퍅케 되거나

또는 더욱 부드럽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말이 아주 두려워지네요. 그렇지요?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듣고 나면, 마음이 더욱 열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기 오기 전보다, 여러분의 마음이 더욱 닫혀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경우, 그의 설교/예언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케 하고, 더욱 귀를 닫게 하여,

그들이 더욱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신약 성경이 <이사야서>에서 특히 이 구절을 제일 많이 인용하였어요.

예수님도 공생애 때 이 구절을 종종 인용하셨어요.

 

내가 비유로 말하겠노라..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믿고 치유될까 하노라 *믿지 않고, 치유 안 된다는 반어법인 듯

 

다르게 말하면, 그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숨기려 함이고,

말씀에 관심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도 이 구절을 인용하였어요.

그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니,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그때 그는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였지요.

 

그래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중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제가 가서 말씀을 전해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아무 반응이 없게 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겁니까?” 6:1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읍이 황폐하고, 땅이 극히 황폐하기까지 하라.

하지만 그래도 십분의 일의 땅이 남아있다 해도, (그들도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나무들은 다시 자랄 것이다” 6:11~13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40년을 전도했지만 백성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그의 임무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그는 결국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이러한 혹독한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 훌륭한 책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후에, 이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지요.

그가 사는 동안에, 그의 사역은 실패였어요. *화가 반 고흐가 그랬다지요.

들으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4사람들의 마음은 갈수록 강퍅게만 되어 갔습니다.

그가 사역한 40년 동안 내내요!

 

 

이제 이 책 배후의 지리와 역사를 봅시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먼저 <지리적 배경>을 살펴보겠는데, 이것은 우리가 익숙한 중동 지도입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페르시아 만, 힛데겔, 유브라데 강, 홍해, 지중해, 구브로 섬, 나일 강입니다.

 

이스라엘의 10지파가 북방에 있었고,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유다의 두 지파가 남방에 있었는데 수도는 예루살렘이지요.

 

이들 부근에는 작은 나라들이 있었고, 큰 나라들은 멀리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에서 보겠지만, 하나님은 먼저 작은 나라들을 사용하여

그의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래도 듣지 않으면

큰 나라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징계하였습니다.

 

작은 나라로서는, 북쪽에 수리아(아람)인데, 수도는 다메섹입니다.

그리고 요단 건너편에 암몬, 모압, 사해 부근에 에돔,

이 지역들은 트랜스 요르단의 산악 지대에 해당합니다.

 

지중해 해변 쪽으로는 블레셋이 있고,

하나님이 그레데(크레타 섬)에서 데리고 오신 사람들입니다.

사막 여기에는 아랍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작은 유다 나라에 대항하는 여러 개의 동맹 관계가 나타났는데, 흥미롭지요.

*작은 유다를 치려고 동맹하다니요.

예를 들면, 이스라엘 10지파가 뜻밖에 수리아와 동맹하여 자기 형제인 유다를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아주 엄중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형국에서 이사야가 유다 왕에게 가서 말하기를 *아하스 왕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하지만 우리는 두 지파밖에 안되고, 그들은 10지파에 수리아까지 합세했어요.”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를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7:14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죠?

제가 여러분에게 4개의 가능한 번역을 제시할 텐데, 어느 것이 맞는지 맞춰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와함께 하심이라. 넷 중에 어느 것이 제일 맞습니까?

 

시간이 없어서 거수로 표결 할 수는 없고,

답은 네 번째입니다.

 

중점은 우리에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함께 하시지,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우리 편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 남자 아기가 잉태될 때, 그 이름이 (임마누엘) 주어졌습니다.’

아하스 왕은, 10지파가 수리아와 동맹하여 공격해 와도, 그들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유다)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10지파가 북쪽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과는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유다)와 함께 하심이라

이것이 임마누엘구절의 유래입니다.

 

또 한 번은 블레셋이 아랍과 동맹하여 작은 유다를 공격하려고 하였어요.

이 동맹 사태도 아주 엄중했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유다 쪽에 서 계셨습니다.

 

여기는 앗수르이고, 수도는 니느웨입니다. 힛데겔(티그리스) 강기슭이고,

이것은 북동쪽의 강대국입니다.

 

아래 여기는 애굽이고, 남서쪽의 강대국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당시 작은 나라인데, 차츰 강성하게 되었고,

바그다드와 멀지 않은 곳인데, 당시에 이 작은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우리가 <에스겔서><다니엘서>를 볼 때, 자세히 살피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이 후에 아주 큰 위협이 되었지만,

이사야 시대에는 그 국력이 아직 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앗수르가 국운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제일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네 왕의 재위 시기에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므낫세 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웃시야 왕이 죽은 해에 사역하기 시작하였고, 6:1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재위 때 활동하다가, 므낫세 왕 때 순교하지요. 

 

 

 

다음으로 당시 어떠한 역사적 정황이었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정치 방면을 보겠는데, (도표의) 왼쪽은 왕입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입니다.

 

그들은 좋은 왕입니까 나쁜 왕입니까?

좋은 왕은 제가 녹색으로 표시했어요. *도표에

 

웃시야는 초기에는 좋은 왕이었고, 그는 왕위에 오래 앉았어요. 52년을 다스렸지요.

아쉽게 그는 마지막에 나쁜 왕이 되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문둥병으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좋은 왕이 나쁜 왕으로 변한 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좋은 왕은 싸우면 이기고, 나쁜 왕은 싸우면 지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상할 게 없지요. 하나님은 좋은 왕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왕을 이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쁜 왕하고는 함께 하시지 않아서

나쁜 왕들은 전쟁에서 패하였습니다.

 

첫 번째 공격은, 웃시야 재위 초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아랍 사람들과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였으며,

적군의 군사력이 강성하였지만, 유다가 승리하였는데,

이는 좋은 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웃시야 왕이 후에 나쁘게 변하였지요.

나중에 웃시야가 나쁘게 변하니, 앗수르가 공격해 왔고, 유다는 패배하였어요.

 

앗수르는 공격하고, 유다에 남지 않고 되돌아갔어요.

하지만 그 전쟁의 전황은 격렬했으며, 유다가 패배했습니다.

후에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비문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흥미가 있으실 겁니다.

고고학자들은 마침내 웃시야의 무덤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무덤 돌비석에 아주 명백하게 이것은 웃시야의 뼈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렇게 (우에서 좌 방향으로) 읽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찾아냈다니, 아주 흥미롭습니다.

비록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그래도 아주 재미있네요.

 

어떤 부조 하나가 앗수르 왕 산헤립을 묘사했는데,

우리가 뒤에서 다시 이 사람에 대해 자세히 얘기할 것입니다.

 

부조에서 그는, 왕위에 앉아서 피정복국 왕들이 인사를 하는 것을 받는 모습인데,

이것이 바로 앗수르 왕 산헤립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함께 요담을 보겠는데, 그는 좋은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있을 때 공격해 온 적들은, 모두 그에게 패배 당했습니다.

 

암몬이 공격했었고, 그리고 이스라엘과 수리아가 연합하여 공격했어요.

사실 그때 아하스가 왕이었는데, 그가 요담의 왕위를 계승한지 금방이고 얼마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담의 영향력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그래서 적들이 패배 당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아하스 왕인데, 이 왕은 재위 내내 극히 악했어요.

에돔이 공격하니 유다가 패배했고, 블레셋이 공격하니 유다가 패배했고,

앗수르가 공격하니 유다가 패배했고, 앗수르의 국력은 갈수록 강해졌고, 위협이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좋은 왕인데, 히스기야입니다.

블레셋이 공격했다가 유다에게 패배 당했고,

앗수르가 병력 185천명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어요.

우리가 뒤에서 보겠는데, 아니에요, 그냥 지금 살펴봅니다.

 

이때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가 북왕국에서 활동했고,

그들은 이사야와 동시대였습니다.

 

결국 앗수르 사람들이 공격해 왔는데, 그때는 아하스 왕 때인데,

예루살렘을 아직 공격하지 않고, 하지만 사마리아는 점령하였지요.

이로써 이스라엘 10지파가 BC721년에 멸망하였지요.

 

히스기야는 무슨 일을 했지요? 예루살렘이 포위된 때부터,

제일 심각한 문제는 물이었습니다.

 

이로써 히스기야 왕이 수로를 파서, 수원을 성 안으로 끌어 들였어요.

만약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반드시 그 수로 속을 걸어가 보십시오.

아주 기이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제가 처음 거기 갔을 때, 수위가 가슴까지 다달았고,

수로의 천장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아주 기이한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양초가 모두 꺼져서 캄캄하였는데,

수위가 가슴까지 다달아서,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곤 하였어요.

그런 수로 속을 반 마일이나 통과했는데, 큰 체험이었습니다.

 

후에 우리 교회의 몇 명 성도들과 함께 갔었어요.

그때 익살스런 성도가 우리에게 속임수를 썼어요.

 

그의 손에 횃불 하나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는 물이 아주 깊은 척 하면서, 자기 몸 전체를 점점 물속으로 잠갔는데,

나중에 우리는 그가 손만 내어 놓은 것만 보게 되었고,

그가 횃불을 든 손만 물밖에 보였지요. *물이 깊은 척 장난 침, 자기 다리 구부림.

 

고고학자가 수로의 중간에, 대략 절반쯤 되는 곳에, 새겨진 글씨를 발견했어요.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내었지요.

 

 

 

 

(그림의 돌에는) ‘히스기야가 수로를 파서, 물을 예루살렘으로 끌어들였다

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도시가 포위되었을 때, 비밀 터널을 파서, 물을 예루살렘으로 끌어 들여

식수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때 성 밖에 185천명 앗수르 군대들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36-39장까지 이 사건을 기록하였고,

<이사야서>에서는 이 석 장만, 이야기체(내러티브)로 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여러분들은 아마 이 일에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아래 부조 사진은,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가 포로를 앗수르로 끌고 간 장면을 묘사했는데,

사진에 보면, 이 포로들의 키가 모두 아주 작게 묘사되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포로들보다, 그 키가 두 배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앗수르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죠.

그들이 이 난쟁이들을 정복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185천명인 앗수르 군대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물리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185천명 앗수르 군대 모두가 죽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한 천사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영국의 한 고고학자가,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무수한 해골 잔해들을 발굴했어요.

그것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 바깥에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 그게 다 드러났습니다.

 

이 사진은 그다지 선명하진 않지만, 많은 사람들의 두개골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의 성벽 아래 누워있고,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드러났습니다(발굴되었죠).

    

 

 

그래서 히스기야는 좋은 왕입니다. 앗수르를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가 한 가지 큰 잘못을 범하였어요.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당시 작은 나라 바벨론이 사신을 보내어

히스기야 병문안을 하였어요. 하지만 이 병문안이 화를 초래하게 되었어요.

 

모든 게 그 위로 병문안 카드로부터 시작되었어요.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히스기야가 아주 엄중한 병에 걸렸고, 그는 죽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15년을 더 살게 하셨지요.

 

하지만 당시 힘이 아주 약했던 작은 도시국가 바벨론이, 왕의 문안 사절을 보냈고,

히스기야는 그렇게 먼 곳에서 의외로 자기를 관심가져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아주 기뻤어요.

 

그래서 그는 사신에게, 모든 궁전 보물과, 왕궁과, 성전을 다 보여주었어요.

이제 당신이 바벨론에 돌아가거든, 내가 얼마나 위대한 왕인지 말해 주시오.’

*당시 최강대국 앗수르 185천을 물리쳤으니, 뻐길만도 하지요. 그러나..

 

그때 이사야가 와서 히스기야에게 그 사자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나?’고 물으니

그들에게 우리의 모든 보물을 보여 주었어요

 

이사야가 말하기를 어느 날 바벨론 왕이 와서, 당신이 보여준 모든 보물들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이사야서> 중간에 이러한 극적인 이야기가 조금 끼어있습니다. *37~39

 

므낫세는 공포스런 왕이었습니다.

그는 사탄숭배에 빠졌고, 심지어 자기 친아들을 사탄에게 드렸는데,

바로 몰록 우상입니다. 그것은 사탄적인 우상입니다.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사탄숭배의 핵심입니다.

 

므낫세가 이사야를 아주 미워하여, 이사야더러 말을 하지 못하게 금하였고,

그래서 이사야는 그의 메시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주님께 감사한 것은, 그가 이것을 기록했기에,

우리에게 지금 <이사야서>가 있게 된 것이지요.

 

결국 므낫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사야를 죽였는지 아시죠.

 

그가 사람들에게 속이 텅 빈 나무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고,

이사야를 묶어서, 그를 그 나무 속에 넣고,

그리고 두 사람이 큰 톱을 가져와서 그 나무를 두 동강으로 켜게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대 역사 자료에, 톱에 켜서 죽은 사람은 이사야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사야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비교                         

 

<이사야서>가 제일 먼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책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있고,

그리고 이 전반부와 후반부 두 부분이, 뚜렷이 서로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를 지적하겠는데, <이사야서>는 다른 선지서들과 같이, 수집한 책입니다.

그 속에는 여러 시대에 선포된, 여러 다른 메시지들이, 이사야서에 한데 모아져 있죠.

그래서 연대기 순서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주제별로, 어떤 때는 순서가 없는데, 이렇게 내용이 뒤섞여 있습니다.

*요즘에야 편집이 가능하지만, 옛날에 두루마리로 쓸 때는, 작성 후 편집이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말하면, 전반부의 예언과, 후반부 예언의 성격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사야서가, 일직선적인 전개가 아니라서, 독자가 쉽게 내용의 흐름을 좇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직선적인 책의 전개에 익숙해져 있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전개 순서가 분명합니다. *소위 기승전결

 

하지만 <이사야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의 특징입니다.

 

전반부 39장과 후반부 27장의 성격이 아주 다르며,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 어린이(신학생)들에게,

후반부는 다른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가르칩니다.

 

그 저자가 누군지 모르니까 2의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두트로두번째라는 뜻인데,

그래서 그들은 2의 이사야서(두트로 이사야)로 부릅니다. *나중에 배격하는 이유 나옵니다.

    

 

 

전반부에는 나쁜 소식이 비교적 많고,

후반부에는 좋은 소식이 비교적 많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사람의 행위를 강조했는데,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말하였습니다.

후반부는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죄악과 징벌을 강조하였고,

후반부에서는 구원과 구속을 강조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는 공의를 강조했고,

후반부에서는 긍휼을 강조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와 긍휼을 동시에 둘 다 강조했는데, 다른 선지서들은 한 쪽만 강조했지요.

요나가 긍휼을 강조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반면에 나훔은 공의를 강조했지요.

아모스는 공의를 강조했고, 반면에 호세아는 긍휼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그 두 측면을 함께 강조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했고,

후반부에서는 미래의 좋은 소식으로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나타나지만,

후반부에서는 보다 넓은 각도에서 크신 하나님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만을 얘기했고,

후반부는 전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과 인접한 작은 이웃 나라들을 얘기했고,

후반부에서는 이스라엘과 세계 만국을 얘기했는데,

 

후반부에서 우리 영국을 언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섬 나라가 바로 영국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23:6

 

이사야 시대에 '베니게' 사람들이, 영국까지 와서 주석 광산을 캐었는데, *페니키아

당시 그들은 영국 섬이 바로 땅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땅 끝과 먼 섬나라를 얘기했는데,

바로 우리 영국을 가리키는 것이며, 후반부에서 우리(이방)를 언급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 하나님을 불로 형용하였는데, 이것은 심판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형용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팔을 높이 드셨는데, 이는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후반부에서 하나님이 팔을 내 미셨는데, 이는 구원을 말합니다.

 

전반부에는 많은 저주와 재앙들이 지배하지만,

후반부에서는 많은 축복을 논하였습니다.

 

전반부에는, 하나님을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자기 백성의 심판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후반부에는, 많은 좋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전반부는 중점을 유대인들에게 놓았고,

후반부는 중점을 이방인들에게 놓았습니다.

또한 만민에게 놓았습니다. 열방 nations 은 바로 이방인을 뜻합니다.

 

전반부에서 앗수르가 적이었는데,

후반부에서 미래를 논하였는데,

하나님이 바벨론으로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전반부는 포로되기 이전 상황을 기록하였고, 마지막에 결국은 포로되었고,

후반부는 포로 이후의 상황을 얘기했습니다.

 

<이사야>가 포로 이후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심하는 사람들은, 후반부는 포로 귀환 후에 다른 사람이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지요.

 

당신은 둘 중 하나인데, 하나님이 미래를 아신다고 믿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미래를 아신다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은 미래를 알지 못한다고 믿는다면,

'이사야가, 바벨론이 고레스에게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고 믿을 수 없지요.

왜냐면 이 사건이 이사야가 죽은지 1백년 후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둘 중 하나를 믿게 되는데,

하나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아신다고 믿어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 모든 사건을 예언으로 기록하였다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르신다고 믿어서

그 선지자가 이런 역사들은 미리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 보십시다.

이 문제가 지금 <이사야서>에 관한 제일 큰 논쟁꺼리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1 이사야1~39장을 기록했고,

2 이사야40~66장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또 어떤 신학자가 후반부를 또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제3 이사야가 마지막 10장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젠 세 명의 이사야가 있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것은 이 이론이 ()학교에서 이것을 복음의 진리라고 가르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론이 지금 널리 채택되어지고 있고,

그들 주장의 근거는, 문체와, 내용과, 어휘 구사가 1, 2, 3 이사야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이사야가 긴 기간에 많은 메시지를 주었다는 것이며, *그러니 다양할 수 있지요.

그 메시지들은 각각 다른 용도가 있으며,

어떤 것은 면전 지적이고, 어떤 것은 위로이며,

그래서 자연히 문체와 어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부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굳건히 유지하였습니다.

사실 이사야 후반부에서, 미래 역사가 아주 상세히 예언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게 제일 큰 논란이죠.

 

그런데 진짜 이슈는, ‘하나님이 미래를 아시느냐,

그 분이 미래를 계획할 수 있으시냐, 미래를 컨트롤 하시느냐,

그 분이 이런 사건들을 과연 발생하게 하실 수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믿음에 있고, 당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서를 선지자 이사야가 전부 다 기록했다고,

제가 믿게 된 또 다른 요인들도 있습니다. 3가지를 말씀 드릴게요.

 

1) 첫째는 전반부와 후반부 두 부분에, 많은 공통점이 있어요.

예를 들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묘사했는데,

이 단어가 총 50번이 나타났어요. 전반부에 25, 후반부에 25번인데,

어째서 이런 것일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누가 (2이사야가) 흉내를 내었다고 주장하지요.

 

2) 둘째는 <이사야서>의 후반부가, 성경에서의 제일 위대한 예언서인데,

어찌 저자의 이름을 잊고 언급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놀랍지 않습니까?

*전반부는 서두에 이사야가 자기 이름을 언급하였지요.

 

물론 위대한 예언도 무명의 선지자로부터 나올 수도 있지만요,
그런데 다른 예언자들은 다 자기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요.

*왜 제2이사야만 무명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이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무명으로 남아있으리라곤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가 반드시 이사야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3) 사실 예수님과 바울 모두가 이 책의 후반부를 인용하면서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기를...하셨지요.

솔직히 저는, 이 세 번째 증거로, 완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바울이 거짓말 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분들도 이것은 후반부는 이사야가 기록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이 내용을 설명드린 것은,

2, 3 이사야 저작설이 너무 많이 유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강의가 끝날 시간이 되었네요.

저는 <이사야>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점을 더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음 강의에서 다시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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