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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예레미야 P1 / David Pawson

LNCK 2015. 12. 14. 20:40

 

예레미야 P1               영어 녹취록            출처보기

 

개요

 

이제부터 대선지서를 보겠습니다.

대선지서라 부르는 이유는, 다른 선지서보다 분량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서>를 잘 읽지 않는 이유가 3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하는 것은, 예레미야서가 전부 52장으로 매우 깁니다.

 

1) 예레미야서보다 더 긴 책은 오직 이사야서인데, 모두 66장이죠.

에스겔서는 약간 짧은데 48장이죠.

이렇게 대선지서는, 연대 순서로, 또한 분량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

 

그래서 이사야서가 분량이 제일 많고, 맨 먼저 나오고,

다음에는 예레미야서는 그 중간이고,

에스겔서가 셋 중에 가장 짧고, 더 뒤에 나오죠. 물론 그것도 꽤 길지만요.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아일랜드 남부지방을 방문했었고,

거기에 있는 Blarney Stone에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마치 그래서 그의 선지자 은사를 그런 식으로 받았다고 말하지만     *전설이고요

그건 아니고, 그는 정말 많은 예언을 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40년 이상 동안

그래서 그는 굉장히 많은 예언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예레미야서가 깁니다.

 

이 사실은 두 번째 어려움을 이어서 우리에게 주는 데요.

첫 번째 어려움은 이 책이 40년이 넘는 세월의 설교라서 "길다"는 것이었고요.

 

2) 두 번째 어려움은, 이 책이 질서 있게 구성되어 있지 않는 점입니다.

연대적인 순서로 배열되지도 않았고, 주제별 순서로 써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다발로 묶어서 통에 던져 넣는 식으로, 뒤죽박죽 섞여서 쓰여졌지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순서 없이 쓴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아주 훌륭한 예언서입니다. 그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이, 이 책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예언했기 때문에,

나라의 상황이 변화됨에 따라, 그가 예언하는 자세도 후에 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예레미야서의 모순점을 찾아내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면, 그의 활동 초기에는, 그는 바벨론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바벨론을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것으로 불렀죠.

 

그러나 그의 활동 후반기에는,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조언합니다.

그게 남유다에 좋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점은, 그가 정치적 반역자로 불리게 된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3) 사람들이 그리 예레미야서를 좋아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이 책의 분위기가 우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안 들죠.

내용 이해도 어려운데, 내용이 침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이름의 영향으로 영어에 두 가지 표현이 생겼는데,

-하나는 예레미야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항상 젖은 담요같고, 평소에 우울하고,

어디를 가든지 침울한 분위기의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전자보다는 널리 쓰이지 않지만, 문학적인 사람들이 쓰는 말로

예레미아드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예레미아드란 애도시, 장송곡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련한 예레미야는, 부정적 이미지를 풍겨주었고,

그는 불쌍한 사람으로, 항상 부정적인 뉴스만 전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니죠. 예레미야는 놀라운 소식도 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새언약)도 예언합니다.

햇살이 비치기도 하고 구름이 끼기도 하듯이, 그가 양쪽을 다 전했는데

그가 이런 식으로 우울하게만 인식된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러나 신비한 점은,

비록 그가 구약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선지자 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여러분들이 제게 파슨 목사님은 성경 중에 누구랑 가장 닮았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예레미야입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제가 나름 성경을 전체로 강의할 때 참석하셨지만,

제가 그 강의 중에 두 번이나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강의 중에 너무 감정적으로 북받혀 올랐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 대해 너무 강의로 나눌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리즈 강의가 끝나고, 예언이 제게 임했는데,

제가 지역교회 목회를 그만 두고, 순회 설교자가 되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도, 이 책은 제게 너무 많은 것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장래에 이 선지자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적으로도 많은 흥미를 줍니다.

그는 자기 내면적 갈등을, 다른 어떤 선지자들보다 많이 드러내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정말 예레미야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 책을 깊이 탐구하면

여러분도, 그가 느낀 것을 똑같이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그를, 불평하게 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신적인 흥미도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하나님에 관한 정보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책을 열심히 탐구하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강의할 내용의 개요를 여기 도표로 만들었습니다.

 

 

 

 

 

1) 먼저, 그가 예언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필 것입니다.

그가 등장했던 시대와 당시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2) 다음에, 예레미야 라는 사람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의 배경이 어떠했는지..

무엇이 그를, 그런 선지자로 만들었는지..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과거 배경의 산물이거든요.

 

우리는 절대 혼자 떨어져 존재하는 외톨이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내 모습은, 내가 자란 배경에서 탄생된 것이며

또한 우리 조상의 배경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가 탄생된 것입니다.

 

3) 다음으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의사전달 기술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그저 말로만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다른 방법들을 동원했는데요,

연극을 하는데도 전문가였고, 그는 연기를 통해, 자기의 예언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마임(무언극)을 했고, 그의 마임을 통해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알아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문서 선지자(책을 남긴 선지자)였는데, 그가 말(예언)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쓰는 것을 멈추게 못 합니다.”

다행하게도 그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바룩이라는 대필자였습니다.

바룩이 그의 예언들을 받아 적었어요.

 

한 번은 여호야김 왕이 그의 예언책을 소도小刀로 잘라서 화로불에 던졌을 때도,

바룩이 그걸 다시 썼습니다.

 

바룩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예레미야서를 지금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어로, 행위로, 글로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 그 다음에 그가 전한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메시지는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그의 메시지는, 미가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매우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의 메시지가 다른 선지자들과 아주 다른 세 가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그 점을 이 강의에서 살펴보겠습니다.

 

5) 다섯 번째로, 그가 받았던 박해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는 아주 혹독하게 대우 받았는데,

그래서 자기가 전한 메시지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침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눈물의 선지자로 불립니다.

 

이 점에 대해선 예레미야 애가를 공부하면,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는 바로 그 장소(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로 썼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며 쓴 책입니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개요이고, 그 제목만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역사적 배경                           

 

당시는 주전 7세기 경이었습니다. 남왕국 두 지파가 거의 망해갈 시점이었고,

북왕국 열 지파는, 이미 앗수르에게 망했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을 주위로, 두 작은 지파만 겨우 남아있었지요.  

 

이 시기는, 이사야도, 미가도 이미 소천했고,

예레미야만 최후의 선지자로 남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닥치는 재앙을 멈추기엔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변화되지 않으면, 재앙은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그는 적당한 시대와 적당한 장소에 딱 맞게 보내진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은 이미 사라졌고, 남왕국도 망하려고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선한 왕도 몇몇 있었지만, 나쁜 왕들도 역시 있었지요.

 

예레미야가 살 동안에, 꽤 여러 왕들이 있었습니다. *므낫세부터 일곱 왕

그런데 그가 본격 활동할 때는, 선한 왕보다 악한 왕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떤 왕들은 석달 만에 속히 바뀌기도 했는데요. *여호아하스, 여호야긴 

 

그는 일생에, 그 일곱 왕들을 다 목격했습니다.

 

그는 므낫세 통치 때 태어났습니다.

므낫세는 이사야 선지자를 빈 통나무 속에 넣어서 톱으로 켜 죽인 인물입니다.

그 무서운 왕은, 자기 자녀를 귀신에게 제사로 드리기도 했으며,

예루살렘 거리를 무죄한 사람들의 피로 물들인 사람이었습니다. 므낫세 왕.

 

 

이 므낫세의 통치 때, 두 아이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요시야와 예레미야입니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로, 동시대에 함께 성장했습니다.

 

 

(므낫세가 죽고) 아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아몬의 짧은 통치 기간에, 예레미야와 요시야는 둘 다 어린 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므낫세, 아몬 후에 요시야는 8세에 왕위에 올랐고, 요시야는 선한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재위할 때, 성전 봄맞이 대청소를 할 때, 먼지 앉은 낡은 궤 속에서

신명기 율법책을 발견했지요.

읽어보니 하나님의 저주가 그 땅과 백성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요시야는 개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혁은 궁극적으로는 실패로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와 동시대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기 예언서에 요시야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열왕기서에도, 요시야 왕은, 예레미야를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예레미야는 깨달았지요. 왕의 명령에 의해 시행되는 개혁은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요 

개혁이 겉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아마겟돈에서 애굽과 전쟁하다가 전사하는데,

그 즉시로, 요시야의 개혁은 수포로 끝나 버리지요.

 

 

요시야가 죽고, 이제 악하고 약한 왕들만 남습니다.

그 후 네 왕 재위 때, 그게 계속 이어지지요.

그들은 다 악했고, 또한 연약했고,

 

바로 이때가 바로 예레미야가 주로 예언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의 설교들을 보면,

요시야의 개혁은 너무 약했고, 또한 너무 늦었음을 봅니다. *기울어가는 상황을 되돌리기엔 역부족.

 

그래서 현실은 정말 아무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의 절망감

또한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작은 소망사이에서, 오락가락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때라도 회개하고 돌이켰으면,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상황을 바꾸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의 초기 설교                       

 

이런 시대 정황에서..

제가 지금 막바로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아주 잘 인용되는 비유를 하나 설명할게요.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서, 토기장이를 보라고 명령을 받습니다.

 

이 비유는 찬송이나 설교에 종종 인용되는데, 대체로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찬송하기를 그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당신의 뜻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렇게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의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 것처럼 노래합니다. *주권을 너무 강조함.

 

이것은 거기서 예레미야가 배운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18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르신 것처럼 토기장이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토기장이를 관찰합니다

 

토기장이는 발로 돌림판을 돌리며, 진흙덩이를 그 위에 얹고서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잘 빚어지지 않습니다.

보니까, <아름다운 그릇> 만들기에 적당한 진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토기장이는 잘못 빚어진 그릇을 취해서, 뭉개서

다시 진흙덩이로 되돌아간 것이지요.

그걸 돌림판 위에서 다시 작업해서, 이번에는 <두껍고 투박한 그릇>을 만듭니다.

 

 

이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교훈을 깨달았느냐?

왜 그 진흙이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느냐?

그것이 토기장이의 잘못이냐, 진흙의 잘못이냐?

그 결과를 결정하는 자가 누구냐?’

 

답은 진흙입니다.

 

왜냐하면 진흙이, 토기장이의 원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거든요.

 

이것이 본문의 원래 메시지이고, 세간의 이해와는 정반대로 다른데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진흙덩이를 취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만드신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래 뜻과 거리가 멉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진흙을 취하여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흙이 거기에 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토기장이는, 투박한 모양의 그릇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토기장이 집을 보았느냐, 예레미야 야, 비록 지금이 최후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내 백성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변화된다면,

나는 그들을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어, 내 긍휼을 담아내게 하겠다.

그러나 그들이 변화되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내가 그들을 투박한 그릇으로 만들어, 내 심판을 담아내게 하겠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놀라운 선언을 똑같이 듣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면, 내가 회개하겠다. (뜻을 돌이키리라)’ *18:8, 10

한글 번역에는 내가 뜻을 돌이키리라’, 영어성경엔 ‘I (God) will repent’

 

여기서 하나님이 죄를 회개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짓지 않으시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뜻과 계획을 돌이키시는데요,

그들이 돌이키면, 나도 돌이키겠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면,

나도 내 뜻을 돌이켜 내가 내리려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리라.’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는,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dynamic relationship, 기계적이 아님

 

토기장이는, ‘이 진흙으로 이걸 꼭 만들고 말겠다, 저것으로 저것을 꼭 만들겠다

이렇게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큰 그림(구속사)은 있지만, 각론은 진흙의 변수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진흙으로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진흙이 계속 거부하면, 결국 같은 진흙으로 투박한 그릇을 만들 수밖에 없지요.

 

여전히 그들을 그릇으로 사용은 하시겠지만,

그 그릇 속에 하나님의 정의(진노)를 담아내느냐,

아니면 그 속에 하나님의 자비를 담아내느냐.. 로 달라지는 거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란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진흙도, 자기가 빚어진 모습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꼭두각시 인형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시는,

명령하신 것은, 무조건 그대로 되어져야 하는 폭군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호 협력하시고, 우리 반응을 원하십니다. *상호 인격적 관계

하나님은 그 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지만,

그걸 우리가 원할 때,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걸 원치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시는지를 보여내는 그릇example이 됩니다.

 

그 결정은 진흙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받은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두 번째 메시지를 주시는데요.

투박하고 못생기게 빚어진 그릇이 가마에서 구워져서 단단해지면,

그때는 더 이상 형태를 바꾸지 못합니다.

 

그때 토기장이는, 그 구워진 단단한 그릇을 들고서 힌놈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는 쓰레기 버리는 곳입니다. 그 게헨나에서 깨뜨려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너희가 마음을 계속 강퍅하게 하면,

너희는 다시 아름다운 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희를 깨뜨리실 것이다.’

 

이 비유의 메시지를 알아 들으셨습니까?

이것이 예레미야서 18~19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심오하게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그 하나님의 뜻에 잘 반응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잘못 반응하면,

결국 당신은 그 잘못된 투박한 모습으로 가마에 구워지게 되고

그 다음은 쓰지 못할 그릇이니까 깨뜨려 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심오한 교훈입니다.

 

자 당시 유다에는 연약한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고,  

상황은 악화에서 최악으로 더욱 나빠져 갔습니다. *bad to worse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예레미야는 희망을 얘기합니다.

이미 아주 늦은 상황이었지만,

만약 너희들이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하나님도 내리려던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키시리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레미야를 무조건 저주를 선포하는 침울한 선지자로 봐서는 안 됩니다.

그 상황에서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가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그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 전혀 희망이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설교할 당시의 시대상황 이었습니다.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이었고, 그는 결국 바벨론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자기 두 아들이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두 눈이 뽑혀져서, 소경이 되어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정말 비극적 결말이었지요.

그러나 그 형벌은 물론 영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70년 후에 회복되지요.

 

 

예레미야 라는 사람을 살펴봅시다.                     15:22~

 

그는 므낫세 재위 당시 태어났고, ‘예레미야라는 남다른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그 이름을 쪼개면, *+

첫 번째 부분(), ‘일으켜 세운다또는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이렇게 양방향으로 쓰는 말이 있습니다.

집을 세울 때는, 기존 건물 위에 세울 수도 있지만, 먼저 무너뜨리고 세울 때도 있습니다. 

 

, 히브리어는, 한 단어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데,

무너뜨린다세운다입니다. *둘은 포괄적으로 같은 뜻입니다

 

이런 그의 이름의 의미는, 장차 그의 사역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자로 불렀다고 하셨지요.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1:10

 

그리고 그의 이름 끝에 는 하나님이란 뜻이죠.

그래서 그의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무너뜨리신다입니다.

 

이것(세우고 무너뜨림)이 그가 40년간 선포한 메시지의 기본 형태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를 무너뜨리시고,

순종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 분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그는 아나돗에서 태어났는데, 오늘날의 아나타입니다.

제가 그 작은 마을에서, 몇 날 밤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숙소 지붕 위에서, 예레미야서를 읽었었지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와디 켈츠를 통해 여리고로 걸어서 내려가려는데, *와디 : 빗길, 건기에는 도로로 이용됨

출발 직적에, 그곳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저를 말렸습니다.  

 

그 지역에 정치적 갈등이 있어서, 사람들이 총을 내린 채 경비를 서고 있었고,

저는 예레미야 책을 다시 읽고서, 평소 제 강의와 반대되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어디를 가든지 너를 보호하리라

그래서 그날 아침에 위험한 길을 가버렸는데, 그건 아마 제가 성경을 잘못 적용한 게 되겠지요.

 

어쨌거나 예레미야는, 태어나기 전부터 선지자로 결정되어졌습니다.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모태에서부터 선지자로 정해진 세례요한처럼 말입니다.

태아도 이미 사람(인격체)입니다. *생물이 아닙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세례요한은 출생 3개월 전부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모친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6개월이 되었을 때,

메시야의 모친 마리아가 방으로 찾아왔을 때, 어머니 복중에서 기뻐 뛰놀았지요.

'메시야의 모친이 나아오신다'하면서요.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낙태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도록 합니다.

 

예레미야는 태어나서 수줍음타고 부끄럼 많은 십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 집안의 후손이었습니다. *세습되는 제사장 가문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삼상2:32 

그들은 모두 중년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일찍 부르셔서,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40년을 예언 사역을 했는데요, 10대 때 부름을 받고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언사역을 시작한 때가, 17세 정도로 여겨집니다.

그때 그는 매우 혼란스러워했지요.

 

여러분도 만약 17세 때, 하나님이 너는 트라팔가 광장에 서서, 런던 시민의 죄를 고하라

라고 명하셨다면, 역시 혼란스러웠겠죠?

 

그런데 오늘날 일부 젊은이들은, 그런 (하나님의) 지시에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살지만,

그러나 당시 예레미야는, 그 사명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1:8, 1:17 

 

그래서 설교자가 두려워 할 때는, 천정을 쳐다보거나 눈을 감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자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설교합니다.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1:8, 1:17 

 

*개역엔 그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로 번역,

그러나 KJV 및 히브리 성경은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번역

 

여러분은 벽시계를 쳐다보며 설교하는 설교자들을 아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회중들을 쳐다보며 설교하십시오.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면 내가 네 이마를 놋으로 만들어서

그들이 아무도 너를 죽이거나,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17~18, 여기엔 만약 네가 그들을 두려워하면, 그들 앞에 떨게 될 것이요포함 됨.

 

이것은 참으로 생생한 부르심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자기 집을 떠납니다. 왜냐면 아나돗의 제사장 그의 집안이,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3마일 떨어진 큰 도시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삽니다.

 

예레미야는 자연을 사랑했어요.

하루는 제가 이스라엘에서 버스를 타고 가이사랴까지 갔어요.

거기서 보니까 하늘이 황새 떼로 뒤덮혀서 시커멓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애에 그렇게 많은 황새 떼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이스라엘을 거쳐 아프리카로 날아가는 철새떼였습니다.

하늘은 빙빙 도는 황새 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새들은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8:7

이런 구절이 렘8장에 나오죠.

'황새는 그들이 움직일 때를 알지만, 내 백성은 알지 못하는구나..'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예레미야는 자연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계속 관찰했으며, 자연에서, 특히 새를 예를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조류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40년을 예언했는데, 동시대에 하박국, 스바냐,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레미야와 동시대 활동한 인물들입니다.  

 

바벨론이 침공해 왔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므로,

남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대항해서 싸우지 말고

그들과 화친하고, 항복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은, 그를 좋게 생각했지만, 남유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지요.

그가 사태를 달래서 누그러뜨리려 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지요. *호전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마침내 남유다를 정복했을 때,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말했어요.

우리가 네게 선택권을 줄 터이니, 바벨론으로 같이 가서 살든지, 여기 남아 있든지 네가 결정하라

 

좋은 제안이었지만, 이래 저래 예레미야는 고립될 것이 뻔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바벨론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한 유다백성들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남은 백성들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거기서 어떤 유다 사람들이 그를 납치해서, 나일강 상류의 거대한 섬으로 데려갑니다.

거기는 이미 언약궤가 옮겨진 곳이었습니다.

 

거기는 지금은 에티오피아 땅이지만, 나일강 상류에 있는 거대한 섬인데,

그 섬에서 언약궤가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혼자 쓸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픈 이야기이지요.

 

 

그가 예언한 방식을 살펴봅시다.                     

 

1. 그는 대언자로서 음성으로 예언했으며,

그의 예언은 대부분 시적인 형식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시와 산문을 구분해 놓은 성경을 갖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이 구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는, 문장이 짧고, 여백이 많습니다.

산문은, 신문 사설처럼, 문장이 빽빽하게 가득 적혀 있죠.

 

하나님이 산문체로 말씀하실 때는, 자신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어체로 말씀하실 때는, 자신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에 전달하기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 감정을 담은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시는 마음의 언어입니다.

 

대부분 예레미야의 예언은 형식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산문 형식으로 바꾸면, (예언 하다가)

산문은 그저 자기 생각을 (섞어서)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은 시어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감정이 어떠한지

여러분이 '산문'을 읽으실 때는, 거기에 담긴 '뜻'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순전히 하나님의 생각(뜻)을 알고자 하는 목적으로 읽습니다.

즉 순전히 지식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감정적/느낌의 책입니다.

 

사실 히브리 언어가 담고 있는 감정, 가장 잘 번역하려면,

이건 웨일즈 어가 좋습니다, 웨일즈 어는 매우 감정적입니다.

 

전문가에 의해서 제일 잘 번역한 성경은 리빙 바이블입니다 

리빙 바이블은 하나님의 감정을 가장 잘 번역한 영어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 산문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한 성경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감정/느낌을 가장 정확하게 잘 전달하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큰 소리로 낭독해서 읽을 때는,

우리는 리빙 바이블을 사용합니다.

 

그 성경은, 사람들의 머리만 터치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감정을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대언자였지만, 시로써 예언했는데,

시형식은 쉽게 기억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시형식은 하나님의 감정을 전달합니다.

이게 내가 느끼는 감정이야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진흙이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 문장에서 실망감이 묻어져 나오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지길 원하셨는데 말이죠.

 

2. 예레미야는 마치 무료 노천극장처럼 행위로도 예언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가서 강가에 오래되고 낡은 허리띠를 파묻습니다. *속옷

 

파묻힌 썩은 속옷으로 뭐하겠습니까?

그 행위를 통해, 그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 허리띠, 여러분이 입고 있는 속옷이라서,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낡았고 다 썩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파묻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한 번은, 그는 소 멍에를 메고, 무거워하며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이사야도 비슷한 행위 설교를 했지요.

이사야도, 벗은 몸으로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벌거벗겨서 데려가실 것입니다라고 예언했습니다. 20:3~4

하나님이 그 말을 반복하지 않으셔서 (우리에게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 번은,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토지를 팔려고 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바벨론이 점령하면, 토지를 다 뺏길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 가서 오히려 토지를 매입합니다.

어떤 예리한 사업가가 그랬던 것처럼,

주식시장이 붕괴될 때, 케네디 대통령의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땅을 샀습니다.

  

바론 로스차일드라는 유대계 은행가도 그랬지요.

어떤 사람들은 대담해서, 모든 사람들이 매각할 때, 오히려 사들일 적기로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팔 때 말입니다.

 

이런 일이 당시 예루살렘에 일어났던 겁니다.

예레미야는 가서 친척의 땅을 오히려 사들였습니다. *함락 직전에

 

그 친척은 땅을 팔지 못해서 안달이었지요. 그러자 다른 친척들은

너는 사면 안 돼. 이제 곧 무가치하게 될 터인데..’

 

그러나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투자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다고 나에게 말씀하셨고, 그래서 제가 지금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위로 그는 예언했습니다.

 

   1948년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북부에 한 아랍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아랍 사람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팔았고,

   유대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해서 팔레스틴 땅에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랍인은, 가서 자기 모든 돈을 오히려 유대계 은행에 예금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이 땅을 돌려주시는 중이고, 저는 제 돈이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이 아랍인은 자기 집에 계속 살았고,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복음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자기 믿음이 있는 곳에 두었지요.

   예레미야도 바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또 한 번은, 그는 책들을 돌에 매어 유브라데 강에 던지기도 했습니다. 51:63

그리고 물항아리를 자기 머리에 이고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이건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지요. 그건 정말 백성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3. 그래서 그는 연기자로서, 배우로서, 그리고 세 번째로 글로써 예언을 했습니다.

그의 예언이 글로 계속 쓰여졌습니다.

 

바룩이 하나님 나라의 작은 심부름꾼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기가 큰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받아 적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은밀하게 섬기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일하는 사람보다, 더 큰 상을 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말했습니다.

바룩아, 너 스스로 큰 일을 하려고 추구하지 말아라’ 45:5

 

바룩은 큰 일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고, 그걸 전달하는 일에 만족했습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예레미야의 예언은 사라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쁜 일입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저는 앵커 레코딩’(파슨 박사의 강의 녹화 전담팀)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녹화해서, 내보내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룩처럼 수고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각종 방송장비들을 다루는 분들인데,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나중에 공개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제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살펴봅니다.                26:44~

 

그의 메시지 중 많은 부분은, 다른 선지자들과 내용이 비슷합니다.

사실 다른 예언서들을 하나씩 읽어 가면, 곧 지루해지는 면이 있어요.

왜냐면 비슷한 옛날이야기처럼 들리니까요.

 

즉 우상숭배, 부도덕, 사회적 부정의 등을 공통적으로 다루지요.

또 나라가 기우는 것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예언서들이 다 똑같은 내용을 다루지요.

이 작은 두 지파로 구성된 나라의 부패를 다룹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은 것이란, 그런 죄악된 상황뿐이었어요.

 

폭력으로 가득찬 예루살렘을 보면서,

그래서 아이들이 거리에서 마음 놓고 뛰어놀 수도 없고,

노인들도 무서워서 집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예언서들이 다 이렇죠.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4가지 강조점,

그의 메시지가 제시하는 4가지 중점을 살펴보겠는데,

이것은 다른 선지자들도 똑같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4중점

 

-배도하는 백성 Apostate People

-임박한 재앙 Impending Disaster

-궁극적 회복 Ultimate Restoration

-대적이 받는 징벌 Punished Enemies

 

 

그의 메시지는 과거의 메시지와 똑같았습니다.

제 생각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그래, 새로운 게 뭐냐? 우리가 과거에 다 들은 설교이다.

예전에 설교자들이 오래 전에 다 말했던 것들이네

 

그때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했어요.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시고, 그게 어떤 내용인지 찾아보세요. *26:18~19

예레미야도 똑같은 예언을 했거든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거의 죽이려 했을 때, 장로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억하시오. 수년 전에 미가가 예언했을 때도, 우리가 죽이지 않고 그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1)

 

1. 첫째로, 그는 백성들이 배도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우상숭배와 부도덕이 제일 큰 두 가지 죄악이었습니다. 물론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시에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이를 제사로 바쳤습니다.

종교적 혼합주의가 있었습니다.

 

우상들을 하나님의 성전 안에 세워 놓았는데, *므낫세, 왕하21:5

하나님은 절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고 명하셨죠. 20:4

 

그래서 부패함과 깨어진 혼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특별히 지적한 것은

이런 현상에 제일 먼저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선지자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8:10, 23:16

 

특히 예레미야가 고통 받았던 것은, 그의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도 역시 선지자인데, 예레미야와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짜 큰 문제였고, 23장에 보면

그는 이들 거짓 선지자들을 조롱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하는구나.

 

너희는 너희 마음에서 지어낸 거짓 메시지들을

은밀하게 서로 퍼뜨리는 구나.

 

너희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라고 전하고 있다.

 

너희는, 그런 일은 여기서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는 하나님의 도성이요, 예루살렘이니까

 

계속해서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너희는 어떻게 감히 이 성전 건물이 너희 안전을 보장해 줄 것으로 믿고 있느냐?

너희들이 여기를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어 놓고서는!’

정말 충격적인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현대판이 있습니다.

제 책 <지옥으로 가는 길>을 보시면, 그 책에서 제가 지적했습니다. The Road To Hell

지옥에 관해 예수님이 경고하신 주된 대상은,

거듭난 신자들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아니라요.

 

그러나 저는, 많은 거듭난 신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지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자들은 지옥에 가지 않는' 것처럼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똑같이 대면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멸망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심판이 모두에게 올수는 있지만, 자기들에게는 임하지 않을 줄로 알았던 거죠.

그러나 바울도, 거듭난 신자들(초대교인들)에게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각성시켰습니다. 14:10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우리는 우리가 행함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이 거짓선지자들은 벌을 받게 될 것이고,

제사장들도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혼합종교축제를 지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각색 종교가 혼합된 예배를, 관용이라는 명목으로 드렸습니다.

 

그런 일이 지금 영국에서 정확하게 똑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교 종교분위기가 지금 어딜 가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길로 가지만, 결국 똑같은 하나님으로 산 정상에서 만난다는 주장이지요.

이런 것이 지금 학교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당시에 거기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일을 지지했고, 왕들도 지지했습니다.

모두가 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지요.

 

그는 예언하기를 여호야김이 죽을 때는, 애곡함도 없을 것이다.

그는 나귀와 같이 성밖 들판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22:18~19

 

그 일이 실제로 예언대로 일어났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호야김이 죽을 때, *예레미야의 예언을 칼로 잘라서 화로에 불태운 인물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밖에 버려졌습니다. 마치 죽은 동물처럼요. 무서운 이야기지요.

 

시드기야는, 그의 예언에 의하면, 너무 약하고 잘 흔들렸습니다.

그는 정치가들에 의해 휘둘리는 풋내기였고, 통치자가 못 되었습니다.

 

이 모든 예레미야의 예언들은, 내가 더 많이 읽고 연구할수록,

마치 내가 어제 신문을 읽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보십시오. 우리 영국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같은 예언적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이 배도하는 백성들은, 성적인 은유법으로 비유되기도 했는데, 매우 추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는, 배도하는 백성을, 신실치 못한 간음하는 아내로 묘사했는데,

그녀는 외간남자를 따라가듯이, 다른 신들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하나님의) 탄식의 본질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해서 예언하니까요.

 

호세아가 그런 은유를 제일 먼저 썼지만, 예레미야도 똑같이 썼습니다.

그는 예언하기를 너희는 하나님의 신부인데, 하나님의 아내인데,

그런데 지금 너희들은 다른 신을 좇아가고 있구나.

너희는 간음하는 여인보다 나은 게 없구나.” 참으로 생생한 은유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신실치 못한 아내를 두었을 때, 어떻게 느끼시겠느냐?’

만약 여러분이 그런 남편의 상황을 실제로 경험해 보신다면,

하나님이 느끼시는 감정을, 여러분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 중에 가장 두려운 말 한 가지는,

너희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도,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는구나.’ 6:15, 8:12

너희는 정말 수치심이 없구나. 죄를 짓고도 괴로워하지도 않는구나.’

 

하나님은 어느 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10지파와 이미 이혼했는데, 너희 두 지파도 이혼하기를 원하느냐?’ 3:8

이혼은, 신실치 못한 아내가 받는 합당한 벌입니다.

 

2. 임박한 재앙

예레미야의 예언의 두 번째 중점은, 다른 선지자들과 공통적인데,

임박한 재앙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너희를 벌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는, 두 가지로 맺으셨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면, 내가 복을 내리겠고

-너희가 불순종하면, 내가 너희를 저주하겠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때도, 그건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징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거죠.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에게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도 나타나지만,

똑같이 우리를 징벌하실 때도 나타납니다.

그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요, 그에게는 불의가 없나니라고 모세가 노래했죠.

*한국어로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쪽으로부터 재앙이 올 것이다.

열지파를 포로로 잡아간 앗수르가 내려오는 것은 아니다.

바벨론이 내려올 것이다. 북쪽으로부터 침략하러 올 것이다.

그 위험은 곧 닥칠 것이다.”

 

그는 살구나무 가지가 싹이 트고 꽃이 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봄이 온다는 징조인데, 살구나무는 싹이 트자마자 꽃이 피는나무입니다.

그는 말했지요. ‘살구나무와 같이 이 모든 일이 급속히 일어날 것이다.

너희는 바벨론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 궁극적인 회복

그의 설교의 세 번째 주제는 궁극적 회복입니다.

이 모든 저주스럽고 침울한 일을 넘어서, 그는 회복된 나라를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새언약을 맺게 될 것을 내다보았는데,

모세의 옛 언약은 이제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왜 두 언약이 있어야 되는지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옛 언약)은 사람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돌비에 새겨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마음에 새겨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렘31장에 보면, 구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언 한 가지를, 우리가 보게 되는데요, 이렇습니다.

 

그 날이 올 것인데, 내가 새언약을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맺을 것이다.”

이 언약은 유대인과 맺은 언약인데, 이런 사실에 기초한 새 언약입니다.

 

내가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고, 그들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에 대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모두 용서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죄를, 내가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제 생각에, 위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가장 감동적인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죄를 잊지 못합니다. 그 기억은 우리 속에 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은 죄를, 자신이 절대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실 때는, 여러분의 죄를 다 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기억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다 잊어버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죄를 용서하실 때는, 그 분은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길포드에서 어느 날 밤에, 예배가 마친지 한참 후에, 제가 교회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교회 바로 앞에, 한 약간 늙은 부인이 혼자 앉아있었는데, 진짜 울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서 그 부인 곁에 앉아서 말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부인

그녀가 말하기를 ‘30년 전에, 제가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요.

만약 우리 가족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저를 버릴 것입니다.

만약 제 친구들이 그걸 알게 된다면, 저는 친구들을 모두 잃어버릴 것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제가 간구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직 저를 용서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 당신은 정말 불쌍하군요.

30년 전에, 당신이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셨고, 그 죄를 다 잊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30년 동안, 하나님은, 당신이 그동안 뭘 자꾸 얘길 하시는지, 알지 못해 난처하셨습니다.’

 

그녀는 저는 그걸 믿지 못하겠어요.’

 

그때 저는 성경말씀을 여러 개 보여주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잘 아는 예레미야서 31장을 보여주었지요.

너희 죄를 내가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제가 하나님은 그것을 30년 전에 잊어버리셨습니다.

문제는, 당신 자신이 그걸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당신은 그걸 절대 잊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도,

우리는, 그들이 말한 것이나 행동한 것을, 절대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잊어버리십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그때 그 노부인은 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일어서더니, 교회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춤이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의 투 스텝 춤보다 훨씬 더 신령한 춤이었습니다.

기쁨의 춤이었고, 저는 그저 지켜만 보았지요.

 

그녀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으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제가 앉아서 지켜보는 동안, 문자 그대로 춤을 추었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춤을 추었는데,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걸 잊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런 말입니다. 어느 날 당신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하겠죠.

오 하나님, 이제 제가 주님을 뵙는군요. 저는 정말 그때 일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무슨 일?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것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용서이고, 이것이 새언약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과 맺으시는 언약입니다. 다 잊어버리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잊으시고, 그 분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시고,

그래서 모든 남자와 여자가 다 그 분을 잘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초자연적으로 거듭나면 이렇게 되죠.

 

하나님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날 밤에, 성취되었습니다.

이 잔을 받으라. 이 잔은 새 언약을 이루는 나의 피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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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약 100년 전에 히스기야 시대에 있었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도왔습니다.

그들이 기억한 말씀은 미가서 312절 말씀이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가3:12)

 

미가 선지자도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였는데

당시에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미가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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