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14.01.09 출처, 축약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이는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였고, 우리는 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이렇다 보니 예수님은 하늘에 것을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땅에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기차의 레일처럼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이루어서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이 개입을 합니다.
성령이 개입을 하시면 문자를 영으로 해석케 하십니다.
이러 할 때 성경의 진의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볼 때 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가 마치 선문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건 주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또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근심하면서 주님 왜 이러십니까?
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양을 먹이는 것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있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주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만이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하여 봅시다.
누가 예수를 믿느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에게 줍니까?
창세로부터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자기백성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 갑니다.
왜 찾아 가셨을까요?
이는 사랑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물음이, 베드로 더러 예수님을 사랑해 달라는 물음인가요? (아닙니다.)
스스로 답을 해 보세요.
나는 과연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 해 보세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것은 곧 우리에게 묻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자입니까?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서 도망을 간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이 찾아 와서 묻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왜 이런 질문을 하셨는지 탐구해 보십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서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21장6절
이는 장차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물고기 잡는 것으로 이야기 해 주시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서의 일을 다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가십니다.
이제 아버지께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늘나라로 가시지만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일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창세전 언약인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일은 중단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신 것도
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제자들을 통해서 대신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럼 우리는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달라집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진의는 다른데 있게 됩니다.
즉 베드로더러 양을 먹이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너는 내 양을 먹일 수 없다”는 다른 뜻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 하셔야 해요.
잘 보세요.
지금까지 일의 전개 과정을 잘 보세요.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정답이 나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고 나서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먹이고 난 후에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자들은 스스로 물고기를 잡지 못하였어요.
‘물고기를 잡는 것’은,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그럼 스스로 물고기를 잡지 못하였으면, 스스로 양도 먹일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물고기를, 예수님에 의해서 잡았다고 한다면
양도 예수님에 의해서 먹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 힘으로 양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 속에서 내 양을 먹이게 하겠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제자들은 밤새도록 물고기 잡는 것을 허탕을 쳤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물고기를 잡은 것과 같아요.
▶자 보세요.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물고기 한 마리를 못 잡았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잡았어요.
그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면
제자들은 ‘우리는 양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먹이게 해 주셔야지만 됩니다!’ 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베드로가 ‘예! 제가 먹이겠습니다.’ 그러면 안 되죠.
도리어 ‘우리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도와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너희들은 내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왜 이런 결말로 끝이 나는지 아세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할게요.
중풍 병자가 있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축구를 하라고 했어요.
이건 축구를 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축구를 할 수 없는 환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까?
‘당신 즉 중풍병자는, 축구를 할 수 없는 환자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의 전설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연못 가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 연못가에서 혹시나 병이 나을 수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38년 된 병자는 물이 동하여도 들어 갈 수가 없어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38년 된 병자에게는 물의 동함은 그림의 떡인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한계성만 더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찾아가서 묻습니다.
그러자 그 병자는 “주여 물이 동하여도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자기 가능성은 제로 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불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를 구원하세요.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의지하지 예수를 믿지 않아요.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하나 물이 동하여도 들어갈 수가 없는
자기 가능성이 전혀 없는 38년 된 병자 한 사람만이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에서 자기의 무능력함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말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베드로의 불가능성을 확인시키고자 함입니다.
베드로는 불가능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이
자기에게 얼마나 부당한 말씀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 할 때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록 베드로가 양을 먹이는 일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가르치고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내 양을 먹이라’고 선문답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난 후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된 앉은뱅이를 고치고 난 후에 곧 바로 터져 나왔어요.
사도행전 3장을 봅시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어요.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을 알아요.
이건 자기들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들 안에서 하신 일이란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행하였다고 하여도
그건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자기들 안에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과연 예수님을 사랑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린 예수님을 사랑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도 없어요.
우린 중풍 병자들이에요.
이 몸뚱이가 그렇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랬잖아요.
죄인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 뜻을 알고서도 그 뜻대로 살아낼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줄꼬!” 라고 탄식을 하였잖아요.
모든 신앙인은, 이 탄식의 바닥에서 출발해야 해요.
그래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고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들입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 말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말합니까?
죄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중풍 병자에게 축구를 하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어불성설이에요.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된다고 하면
그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에요.
오직 그 속에 죄가 없는 의인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오셔서 우리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더러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육신은 죄 아래 팔린 몸이에요.
이 몸뚱이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중풍 병자와 같아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들어 먹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죄를 먹고 마시는 일들을 자행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 졌다는 것은
곧 빛이 어둠에 비췬 것과 같아요.
빛이 어둠에 비취는 순간
어둠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는 것이 폭로 되고 말아요.
이처럼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에게 다가오는 것 자체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당하는 것이에요.
어! 내가 빛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나는 어둠이었네!
비로소 자기 실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빛 앞에 선 어둠이 토해내는 고백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이 이와 같아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결국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곧 어둠 속에 빛이 비추인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빛이시고, 내가 어둠이고 내가 죄인임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베드로에게 묻는 물음이, 그러한 의도의 물음이에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기를 밥 먹듯 하는 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너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이지만,
그러나 앞으로 성령이 오시면,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너는 못하지만, 네 속에 성령님이 너를 통해 하실 것이니
‘너는 내 양을 치라’ ..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진의를 올 바로 알 수가 있어집니다.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감정, (즉 마음)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야 해요.
이걸 성령의 감동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문자 속에 담겨진 내용을 볼 수가 있어요.
이럴 때 말씀은 성경이 문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숨결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 번 씩이나 묻습니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부인한 전력이 있어요.
그것도 예수님이 빤히 보는 면전에서 부인하고 저주했어요.
이런 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대답할 말이 없어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설령 베드로가 예수님의 물음에 ‘예~! 제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들
그것이 어찌 진정성 있는 대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대답을 해도 안 믿고!
대답을 안 해도 안 믿어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반대로 너는 나를 사랑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걸 들추어 추궁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너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면 무얼 말할까요?
자기 힘으로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할까요?
아니죠, 자기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겠지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장31~32절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은
베드로의 각오와 의지를 꺾고 힘을 무너뜨리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하는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사람의 각오나 힘으로 되지 않아요.
언제 믿음이 가장 좋은가 하면 내 힘이 없을 때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들의 힘을 거두어 가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인데, 예수님의 바쁘신 사역 중 한 가지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힘으로 저질러 놓은 모든 불상사와 사고들을
뒤처리 하러 다니시느라.. 아주 바쁘시다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세요.
이스라엘이 언제 타락하는가 하면 힘이 있을 때에요.
등 따습고 배부르고 살기 좋을 때에요.
우리 생각에는 복 받고 잘 살면, 더 잘 하나님을 섬겨야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그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복 받고 잘 살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난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신명기 31장을 봅시다.
신 31:1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 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를 하나 지어서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노래인가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망한다는 노래에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언약을 어기게 되는가 하면 먹고 배부르면 어긴다는 것입니다.
이건 악담이에요.
아니!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축원을 하고 축복을 하여야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축원이 아니라 저주를 하고 있어요.
어떤 저주인가요?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앙을 당하고 환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세요.
아니지요.
우리의 역사를 보세요.
여러분들은 언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언제 하나님을 멀리 합니까?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다가도 먹고 살만 하면 멀어지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그 어떤 인간도 등 따습고 배부르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잘 살아서 예수 잘 믿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몸이 편하면 몸에 종 노릇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은 몸이 좋고 편한 것은 못 이겨요.
우리 몸뚱이는 좋으면 더 좋은 것을 찾게 되고 편하면 더 편한 것을 찾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 몸뚱이에요.
성경을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역사로 기록을 한 것은
인간은 이런 종자들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폭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예수 잘 믿을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힘을 가질수록 하나님과 멀어져요.
죄인은 하나님을 싫어해요.
하나님을 싫어하는 본성을 가진 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에요.
설령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얻고자 뇌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 사랑을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 실존을 아는 자라야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가 있어요.
누가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자인가요?
자기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고, 예수를 부인 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은혜로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기 위하여 우리는 늘 실패하는 자리로 내려 갈 수밖에 없어요.
그 실패의 자리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폭로 당한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건 마치 법궤 위 속죄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과 같아요.
속죄소를 시은좌(施恩座)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법궤 속에는 3가지 불순종의 증거물이 담겨져 있어요. *돌판, 싹난 지팡이, 만나
그러니까 법궤 속에 담긴 3가지 증거물들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해요.
죄인을 말해요.
그런데 그 위에 흠 없는 제물의 피를 뿌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요.
용서가 임해요.
은혜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 와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고발하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주님의 은혜를 공급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철저히 부인된 자리에서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측면은, 양들을 은혜로 먹이자면, 은혜를 받아 본 자라야 해요.
가장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의 은혜를 많이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양들을 은혜로 먹여요.
법으로 먹이지 않고!
은혜를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자는 법으로 양을 쳐요.
그럼 양이 다 죽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몽땅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양떼를 맡기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자라는 것을 알고
이런 자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법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악당이 살고 있다는 것에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은혜만이 우리가 거하고 앉을 자리입니다.
그 은혜의 자리를 귀히 여기시고 올 한 해도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한 해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순간 순간 내 유익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고
나 살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법대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오니, 은혜로 지켜 주시고, 은혜로 완성케 하옵소서.
올 한 해에도 변함없는 은혜 속에서 강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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