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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복 선교사 이야기 / George Williams

LNCK 2016. 1. 20. 10:52

우광복 선교사 이야기                       출처보기

 




※공주 기독교 박물관에서 보내 온 정정 내용



아래 글 내용에 프랭크 윌리암 선교사님과 샤프선교사님의 내용이 섞여 있습니다.
윌리암(한글명: 우리암)선교사님은 우광복의 아버지이고

1906년 영명학교(남학교)를 세우신 분으로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명학교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보니

교장이었던 윌리암 선교사님은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십니다.


샤프 선교사님은 1903년에 한국에 오셔서

1905년 엘리스 샤프(한글명:사애리시)선교사님과 결혼해서

공주로 내려와 선교를 시작하셨고,


사에리시 선교사님은  1905년 명선여학교(이 또한 영명학교의 전신)를 세워

여성교육에 힘쓰셨으나

남편 샤프선교사님이 1906년 논산에 전도집회를 다녀오시던 중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상여집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돌아가시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1908년 한국으로 돌아와 명선여학교 교장을 맡아 여성교육에 힘쓰시고,

그 외에도 강경만동여학교, 논산영화여학교, 등을 설립하십니다.
샤프 선교사님과 사애리시 선교사님은 결혼 생활을 1년정도밖에 하지 못해

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사애리시 선교사님은 다시 한국에 와서는

어려운 한국인 여학생들을 양녀로 삼아 뒷바라지를 해주십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유관순 열사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쓰자면 한이 없어 이정도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인터넷에 떠있는 내용들이 다 비슷한데...

공주에 오셔서 직접 사진을 찍으신 분들도 계신듯 한데...

누가 설명을 했는지 참 마음이 아풉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우광복 (George Z. Williams, 1907~1994, 禹光復 아래 사진)

*정식 선교부의 파송을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아들로서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을 섬긴 의료선교사, 평신도 선교사였습니다. 군정 시절 미군 중령, 군의관. 통역사.


 

공주 기독교역사관을 방문했는데 공주대학교 총장님으로터

놀라운 선교 비사를 듣고 큰 은혜 받은 내용입니다

 

지금부터 100 여년 전 한 젊은 선교사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스) 부부가

미국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이 젊은 선교사부부는 공주를 선교 기반으로 선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1907년에, 인천에서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우광복 입니다. 영어이름은 조지 윌리엄스.


아버지 선교사는,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면서

한국식으로 우광복 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올리브 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아버지 프랭크는, 독립 운동을 한 연유로, 일제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선교사 사모님도 과부가 되어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2년후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 공주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공주에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고, 47년 간 사역하였습니다.


그런데 딸이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는데,

우광복 여동생 올리브가 11살에 죽어서 영명동산에 묻힙니다. (1908~1919) 

 

우광복은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나오고, 미국으로 갑니다.

그러나 다시 한국으로 옵니다.

 

인천에서 태어난 조지 윌리엄스는 영명학교 졸업 후,
조부모가 있는 미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쳤습니다.

 

▲그때가 바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 책임자로 다스릴 때입니다.

1945년 경이었죠.

그때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할 사람이 필요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아들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입니다.

우광복이 하지의 참모가 되어 정부수립에 관여 합니다.

 

그때 하지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우광복은 엄마와 상의합니다.

엄마가 추천해준 50명중 48명이 거의 다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정부 수립할 때 요소요소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웁니다.

 

특별히 문교부 장관에 기독교인이 되어 미신 타파를 시작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이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안에 군목 토대를 마련하여 하나님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들이 거의 기독교인들이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윤영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다음과 같이 주문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때 기독교인이 5%도 안 되는 때 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엄스 사모님이 추천해준 50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20년만에 5백만이 되고, 30년 만에 1천만 성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 했습니까?

미 군정 시절 우광복 Geroge Williams 이 추천한 50명부터 시작했습니다

 

우광복의 50명을 누가 추천했습니까?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윌리엄스 사모님이십니다.

 

이역 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 버리고    Frank Williams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          Oliver Williams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되신 사모님 때문입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 일기로 소천했는데 유언하기를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공주 영명동산에 묻혀 있는데,

내 동생 올리브 옆에 나를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참고로, 공주 영명학교는 영원한 광명 eternal light이란 뜻이며,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스가 1906년에 세운 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모태는 명선학당인데, 이 학교의 설립자는 엘리스 하몬드이며,

   이 학교에서 유관순이 1913년부터 공부했습니다. 즉 엘리스 선교사 밑에서 배웠던 것입니다. 

 

아마도 한평생 동안,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앨리스의 묘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공주시 영명학교 뒷산에 있는 우광복 선교사의 묘


지금도 공주시 영명중학교 연역에 보시면, 1906년 10월 15일에,
윌리엄스 선교사가 이 학교를 설립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뒷산에 가시면, 우광복 선교사의 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평신도 선교사로서
특히 해방 후 한국 건국기에,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던
한국 정부와 한국 교회의 산 증인입니다.

 

이런 의식 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나와서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줄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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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이승만 싫어해 귀국 막았다”               [중앙일보]  2011.08.15. 출처

 

미 군정 하지 중장 보좌관 조지 윌리엄스(우광복)가 증언한 "해방공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미 군정(軍政) 책임자 존 하지(John Reed Hodge·1893~1963) 중장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조지 윌리엄스(George Zur Williams·1907~94) 해군 중령의
‘해방공간’ 증언이 처음 공개됐다.

 

윌리엄스의 증언을 수집한 이는 이정식(80)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석좌교수.

조지 윌리엄스의 이름은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지만
이 교수는 윌리엄스 생전에 직접 면담을 통해 미 군정 초기 그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했다.
 

윌리엄스(우광복)와 이 교수의 만남은
1988년 6월 20일 미국 메릴랜드주 록빌 파빌리언(Rockville Pavillion) 호텔에서
영어로 이뤄졌다.

이 기록은 이 교수의 수많은 ‘현대사 파일’ 속에 묻혀 있었다.

 

▲증언은 해방 직후 한국사회의 혼란상을 보여 준다.
미 군정 초기 ‘준비 안 된 미군’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윌리엄스(우광복)의 증언에 따르면
“하지 장군이 이끈 24군단 1만여 명의 병사 가운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미군은 한 명도 없었다.”
의사소통이 안 돼 일어나는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한다.

 

윌리엄스가 유일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미군이었는데, 그는 본래 하지의 병사가 아니었다.
하지의 24군단을 호위하던 7함대 소속 해군 군의관이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하지의 군단이 인천에 상륙하던 45년 9월 8일
하지와 윌리엄스는 처음 만났다. 그것도 우연히.

 
이정식 교수
“인천에 내리기 위해 갑판 책임자인 육군 대령 하트먼에게 상륙 보고를 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하트먼은 한국인 3명과 말이 안 통해 애를 쓰고 있었어요.

하트먼은 이탈리아어·불어·영어로, 한국인들은 중국어·일어·한국어로 제각기 떠들고 있었죠.

그걸 본 윌리엄스가 하트먼에게
‘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싸운 지하 독립운동가이며,
하지 중장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통역해 주자

 

하트먼은 내게 ‘어떻게 한국어를 아는가’ 물었고,
‘저기 보이는 (인천의) 언덕 위 검은 지붕의 붉은 벽돌집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자
하트먼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후 하트먼 대령은, 윌리엄스를 하지에게 소개시켰고,
해군이 육군의 보좌관으로 특채되기에 이른다.

 

▲윌리엄스는 1907년 인천에서 태어나 14세까지 충남 공주에서 자랐기에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그의 증언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귀국이 늦어진 배경에 관한 것이다.

 

미 국무부에서 이승만의 귀국 허가를 빨리 내주지 않아 늦어졌다는 정도로 지금까지 알려졌는데,
윌리엄스는 구체적으로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1893~1971) 국무차관을 지목했다.

 

“애치슨이 부정적이었다. 애치슨은 이승만을 싫어했다. 이승만이 미 국무부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당시 무국적 망명객 신분이었으므로, 한국에 돌아오려면 국무부 허가를 받아야 했다.

 

윌리엄스는 또 “미 군정과 한국인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남한 전역을 돌며 여론 조사를 했다”며
“당시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우리 대통령’이라 부르며
그의 귀국을 바라고 있다는 내용을, 여러 차례 하지 사령관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백낙준 어린 시절 알고 지내 … 오세창과는 밤새 역사 토론  (배영대 기자)
윌리엄스와 한국인 인맥

 
백낙준(左), 오세창(右)
충남 공주시 공주영명(永明)중고교 뒷산에는 감리교 선교사들의 가족 묘지가 있다.
이곳에 가면 조지 윌리엄스(우광복)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유해 절반은 태평양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영명학교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유년 시절을 보낸 영명학교를 고향처럼 생각한 것이다.

영명학교는 선교사였던 그의 아버지 프랑크 윌리엄스가 1906년 세웠다.

1919년 3·1운동의 주역 유관순(1902~1920) 열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유관순 열사는 영명학교를 2년간 다니다 서울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윌리엄스는 이정식 교수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한국인 인맥을 소개했다.
미군정 경무국장(경찰청장)을 지낸 조병옥(1894∼1960) 박사는
영명학교 2회 졸업생으로 인연을 맺었고,

영명학교 교사 출신으로 ‘코리아 타임스’ 초대 사장을 지낸 이묘묵(1902~57)은
윌리엄스와의 인연으로, 하지 장군 통역관이 됐다고 했다.

 

연희대(현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1895~1985)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며,
윌리엄스와 백낙준의 부모끼리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서예가 오세창(1864~1953), 의학자 오긍선(1879~1963),
성악가 이인선(1907~60) 등도 언급했다. 의사인 오긍선을 통해 오세창을 만났는데,
오세창은 한국 역사·문화에 해박해, 밤새도록 토론을 즐겼다고 했다.

 

오세창의 조언을 자주 듣던 그가 미국에 초청하겠다고 하자
오세창은 나이가 많아 가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그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인선은 의사이면서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테너가 돼 해방 후 귀국,
이화여대 교수였던 윌리엄스의 어머니와 함께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La Traviata)’를 공연했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미 전쟁성(육군성)에서 일을 하는데,
잊혀지지 않는 보고서가 하나 있다고 했다. 하지 장군의 보고서였다.

“10년 내로 북한과 전쟁을 할 것 같다. 전쟁을 막을 방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애치슨은 그 보고서를 읽지 않았다고 했다.

윌리엄스는 “당시 국무부의 한국 데스크는, 한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해군 대위가 맡고 있었다.

미국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1950년 북한이 남침했을 때 미국은 속수무책이었다”고 회고했다.

 

 

◆조지 윌리엄스(1907~94)=미군정 초기 한국어를 아는 유일한 미군.
그의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1883~1962, 한국명 우리암·禹利巖)는
감리교 선교사로 1906년 공주에 영명(永明)학교(현 공주영명중고교 전신)를 세웠다.

 

인천에서 태어난 조지 윌리엄스는 영명학교 졸업 후,
조부모가 있는 미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쳤다.
미 해군 군의관 생활을 하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한국명은 우광복.


◆딘 애치슨(1893~1971)=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 외교를 지휘했다.
1933년 재무차관, 41년 국무차관보, 45년 국무차관을 거쳐 49년 국무장관이 됐다.
50년 1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선언은 6·25 남침을 유발했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냉전이 해체된 90년 이후 소련·중국 등에서 공개된 문서들은 6·25전쟁이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발발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