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이야기를 유심하게 관찰하신 분들은, 아주 역설적인 하나님의 선택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남이 아니라 차남을 선택합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차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 사이에서, 야곱을 선택하여 야곱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야곱 또한 셋째 아들 유다에게 장자권을 물려주고,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 축복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메시아의 혈통을 있는 다윗은 여덟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는 밧세바의 몸에서 난 아들이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먼저 된 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버리고
나중 된 자인 세리와 창기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완벽한 스펙을 갖추었던 부자 청년이 나중 된 자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을 잘못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을 편협하신 분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
복음의 진수를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이 가진 조건이나, 세상 질서에 의해서
장자권과 축복권이 자동으로 승계 된다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장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독점한다. 조건을 갖춘 강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손 들어준다.’
성서는 이런 사실에 대해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의 질서를 뒤엎어 놓습니다.
선택은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피라미드를 예로 든다면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강자요, 관계에서 갑입니다.
그리고 중간층에 있는 사람들은, 정상의 자리를 오르려고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맨바닥에는 실패자들, 희생자들, 낙제생들, 포기한 사람들, 소위 밑바닥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피라미드식 인생관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인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피라미드를 뒤집어 놓습니다.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복음은 맨 아래에 깔려 있는 사람을 맨 위에 올려놓습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남이 아니라 차남, 성공한 자가 아니라 패배자,
우등한 자가 아니라 열등한 자를 세우는 하나님의 선택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야기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질서를 따라 장남이라고 손들어 주고,
하나님이 인간이 가진 조건에 따라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뛰어난 자에게만 상을 준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야곱의 선택이야기가 복음인 것은,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불러서
복의 근원이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을 꼭대기에 세워서,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대부분은 복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창세기 12장은 큰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어 네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할 것이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그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49장 사이에는
복을 얻기 위한 치열한 투쟁과 갈등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경쟁의 이야기입니다.
복을 놓고 다투며 싸우는 그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복에 관한 한 자유로울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 살고 싶은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복은 누구든지 받고 싶어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이라 불리는 떡덩이에서, 작은 부스러기 하나라도 더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누어 먹을 떡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누가 큰 조각을 갖고, 누가 작은 조각을 갖고, 누가 남은 부스러기를 가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다툼과 분쟁이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일찍부터 일정한 규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떡 조각을 나누는 규칙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싸움과 분쟁이 계속되기 때문에 규칙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이것을 질서라고 말합니다.
누가 더 갖고 누가 덜 갖고 누가 가장 적게 가져야 하는지를 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장자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자에게 권한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장자의 권한은 많은 권한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다른 권한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고대사회에서 큰 아들이 갖는 권한은
사회적 법률적 제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골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먼저 태어난 아들은 행운을 잡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가 갖고 태어난 권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가장 좋고, 가장 크고, 가장 많은 몫을 차지했습니다.
큰 아들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큰 복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로 태어나고 싶다고, 어디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여러분이 만일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칩시다. 아니면 딸로 태어났다고 칩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받을 분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고대 사회의 일방적인 풍속이었고, 전통이었습니다.
성서는 바로 이런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쓰였습니다.
▲오늘 강단에 설교자로 서 있는 저 역시 이 땅에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부모님으로부터 장남 차남에 대한 차별 대우를 받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로부터 차별대우를 당했습니다. 겨울방학 때에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 댁에 갔는데
저는 그때 차남이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할머니는 하나 있는 것은, 무조건 저의 형님 장남 몫이라 했습니다.
닭을 잡았습니다. 날개도 두 개, 다리도 두 개, 함께 먹는데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닭 모래주머니가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모래주머니, 소위 똥집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할머니의 손이 먼저 닿았습니다.
할머니는 제 손을 강하게 밀치면서 하나 있는 것은 장남 몫이라고 형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세상에 차남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서러웠습니다.
닭똥집 하나에 세상의 모든 권리를 잃은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이 나서 신학교 기숙사에서 닭똥집을 한 봉투 사와서
혼자서 실컷 볶아 먹었습니다. 먹다보니 꼬리한 냄새 때문에 맛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겪은 차남의 작은 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살던 세계 속에서, 장자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불이익이 평생을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 세계관으로 보면 장남은 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나온 사람입니다.
나머지 둘째, 셋째, 막내는 은수저 혹은 흙수저입니다.
이런 문화와 관습적 배경 아래에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기록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야곱처럼 열심히 일하고,
무슨 일에든지 집요하게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라도 노력하면,
반드시 그 역경을 물리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장애가 많아도 불굴의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성공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도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흙수저가 금수저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세상의 경구를 확인시켜 주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형제간에 장자권을 두고 싸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이야기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차남을, 하나님은 약자를, 하나님은 을을 생각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아들 주변의 불행한 차남과 을을, 눈여겨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을 빼내어, 사람 구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특권을 가진 큰 아들의 위치를 뒤엎어버리고
특권 없는 아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여주신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담고 있는 복음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형인 에서가 아니라,
동생인 야곱이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수혜자가 되었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형인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주셨던 복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약자(을)가 노력으로 무엇을 쟁취하였다,
포기하지 않고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집안에 가만히 누워있어도, 텔레비전을 통해 더 생동감 있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강단에서 들어야 할 이야기는 야곱의 성공 드라마가 아닙니다.
오늘 무엇 때문에 대한 추위에 몸을 움츠려가면서 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복음을 듣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옳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차남에게,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에게, 하나님께서 을에게,
하나님께서 흙수저 물고 나온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3천 년 전 사람들이 들어야 했던 복된 소식만이 아니라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타령하면서 열등감에 빠진 사람들이 듣고 또 들어야 할 복 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세상 질서를 뒤집어서 복을 주실 분이 없습니다.
선물은 주는 자 마음대로입니다. 주는 사람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차남에게, 을에게 복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 이야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을 도덕적 관점에서 읽고 듣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 가지 도덕적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의 어떤 인물은 본받아야 할 모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인물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로 선정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애굽의 궁궐로 팔았던 놈, 놈, 놈입니다.
나쁜 놈, 비겁한 놈, 치졸한 놈입니다.
이런 인간을 본받다가는 아내들이 모두 다 집 나갈 것입니다.
야곱 역시 본받아야 할 모델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웅도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간사하고 이기적인 인간입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탈취하고,
외삼촌을 등쳐먹는 아주 비열한 인간 아닙니까? 성공을 위해서라면
명예도, 체면도, 인륜도 버리는 아주 고약한 놈입니다. 이런 인간 본받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도덕적인 잣대나, 위인전기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야곱과 에서 사이에 일어난 갈등도 도덕적 갈등이 결코 아닙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사이의 갈등도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의 갈등은 하나님의 복을 놓고 다투는 두 경쟁자 간의 갈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복을 줄 사람을 결정하셨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다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까?
도덕적으로 우수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아마 이 기준으로 복을 주었다면, 인간적인 면에서 쿨한 에서에게 복을 주셔야 마땅하지요.
성서를 도덕적인 눈으로 보면 놓치는 것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궁궐로 들여보낸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모르고 속은 애굽의 왕보다 도덕적으로 나은 것도 없습니다.
이삭이 이스마엘보다 도덕적으로 훌륭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보다 도덕적으로 훌륭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삭을 선택하시고, 야곱을 선택하셨습니까?
여기에서 세상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 걸려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난제를 어떻게 풀고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 난제에 대해 머뭇거림 없이 명쾌하게 말씀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 분발이나 수고에 달려 있지 않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남에게 권한을 주는 세상 질서를 그대로 따라 에서에게 복을 주셨다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에게 평생 금수저로 사는 복을 주셨다면,
갑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평생 갑이 되게 하셨다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장자의 하나님, 금수저의 하나님, 갑의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마저 가진 자와 강자의 편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어찌 되겠습니까?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입니까?
우리의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인습을 깨부수는 듯 한 말씀입니다.
차라리 도발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말씀하십니다.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갑이 을을 섬기리라. 금수저가 흙수저를 섬기리라.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기리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사회적 법률적 제도 자체를 완전히 뒤엎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과 인습과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그는 모든 전통적인 지혜를 전복시키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만든 질서를 뒤엎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의 삶은, 처음부터 쓰라린 갈등 그 자체였습니다.
출생 이전부터 하나님은 야곱을 갈등의 사람으로 작정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이 갈등으로 얼룩지도록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복을 전달하는 채널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는 고통과 다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
형님 에서와의 갈등, 아버지 어머니의 사이의 편애의 갈등,
그의 외삼촌 라반과의 갈등, 레아와 라헬 두 여인 사이에서의 갈등,
자기 자녀들 사이에서의 갈등, 심지어 하나님과의 갈등을 보여 줍니다.
야곱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갈등이 빚어집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만들고 있는 갈등은 야곱이 출생할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이 말씀으로 생긴 태생적 갈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많은 갈등을 겪었던 야곱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야곱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까?
그 이유는, 그가 겪었던 동일한 갈등을,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내가 세상에서 택한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은, 야곱이 처했던 갈등을 우리도 똑같이 겪는다는 것입니다.
장남이 권한을 독식한다는 세상 질서를 거부하기 때문에,
갑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세상 질서를 거부하기 때문에,
금수저가 모든 권한을 가졌다는 세상 질서를 거부하기 때문에
세상과 갈등하고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지혜와 인습을 뒤엎어 버립니다.
리브가 살던 시대에 인습적인 지혜는 먼저 태어난 아들이 항상 먼저이고,
특별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리브가가 살던 시대에 인습적인 지혜는, 남자에게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리브가에게 하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강한 의문 부호를 붙입니다.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의 권리에 대한 강한 도전을 합니다.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를 흔들어버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창세기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주인공은 야곱처럼 보이지만 중심에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주인공은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갈등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갈등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에 있는 배열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동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놓고, 다른 사람은 자동적으로 맨 바닥에 놓는 배열 말입니다.
교회에서 남자들은 자동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여자들은 낮은 자리에 놓는 배열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포도원에 들어왔으므로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하나님마저 내 손을 먼저 들어주어야 한다는 배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엄히 말씀하십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리라 혜택 받고 있는 자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섬기리라.
강한 자가 지체장애우를 섬기리라. 우등한 자가 열등한 자를 섬기리라.
남자가 여자를 섬기리라. 주인이 종을 섬기리라. 유명한 자가 별 볼 일을 없는 사람을 받들리라.
본토인이 외국인을 섬기리라. 금수저가 흙수저를 섬기리라. 갑이 을을 섬기리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우리는 이러한 파격적인 은총에 입을 다물 뿐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사람을 선택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일 솜씨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서신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는 바울의 고백이 새롭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하나님의 깊고 깊은 하나님의 선택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여!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조건이나 세상질서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남이라고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차남이라고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금수저라고 자랑하지도 말고, 흙수저라고 낙심하지도 맙시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섬기고, 주인이 종을 섬기고, 본토인이 외국인을 섬기고,
갑이 을을 섬기는 그런 세상 만들어 가십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온 땅에 드러내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