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써머 영어 번역, 출처
A GOLDEN SUMMER by A. K. Curtis
*1727년에,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분열과 갈등에 대한 회개가 있었고,
또한 성령님이 마치 사도행전의 오순절처럼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래서 당시 모라비안 공동체는, 해외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하고,
또한 매일 24시간 릴레이 연속기도회를 시작해서, 그 중보기도회는 이후 100년 동안 계속됩니다.
이 모든 역사가 일어난 1727년 여름을, 나중에 사람들은 “골든 써머”로 부르는데요,
한 번 세부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진젠돌프 백작(1700~1760)은 독일 작센 지방의 귀족으로서
당시 보헤미아(체코)에서 가톨릭의 박해로, 독일로 탈출한 개신교 교인들, 소위 모라비안들을
자기 영지에 받아들여서, 그들의 지도자가 된 분이죠.
어떤 기록에 보니까, 당시 약 4백명의 모라비안이 진센돌프 아래서
1722년 헤른 후트 공동체를 조직했다고 합니다.
1727년 5월 12일, 진젠돌프 백작은 자기 모든 공동체에, 3시간 동안
‘성도의 연합의 축복’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공동체의 사람(모라비안)들은, 애통하며 자기들이 과거에 서로 다툰 죄를 고백했으며,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단순함으로 살기로 서약했습니다.
그러자 헤른후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역동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해 1927년 여름은, 모라비안 공동체에 ‘골든 써머’라 불렸는데,
나중에 사실은 개신교 전체에 ‘골든 써머’가 되었습니다. *golden summer
여기서부터 개신교 해외선교가 시작되고,
그 일원인 피터 뵐러가 런던에서 요한 웨슬리를 감화시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등
정말 ‘한 알의 밀알’ 같은 역사가.. 1827년 여름에 일어났고,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해를 ‘골든 서머’(황금의 여름)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 해에, 진젠돌프 백작이 설교한 이후로, 모두가 회개하고,
사랑과 평화로 공동체가 하나로 연합되었을 때,
거기서 놀라운 해외선교의 역동성이 분출되어져 나왔던 것입니다.
분열하고 다투던 공동체가, 사랑과 평화로 하나가 되었을 때
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 같은 느낌이 감지되었습니다.
즉, 어떤 부흥의 기운을 예감한 것이지요.
▶터닝 포인트.
1727년 8월 5일, 진젠돌프와 14명의 형제들은,
밤을 새우며 서로 대화하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8월 10일,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있었던 오후 예배에서
로더 Rothe 목사가 하나님의 임재를 크게 경험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던 중에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전에 해 보지 않았던 강력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회중들도 감동을 받아 모두 울었고,
그 회개와 눈물, 그리고 찬양과 경배는, 그날 밤 자정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로더 목사는 헤른후트 공동체를
8월 13일 성찬예배에,
자기가 목회하던 교회인 베델스돌프 교회로 초대합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베델스돌프 교회 근처에 있었습니다.
8월 13일, 진젠돌프 백작은 헤른 후트의 모든 가정들을 방문해서,
이 성찬예배를 준비할 것을 당부합니다.
당시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에서 일어난 가톨릭의 신앙박해를 피해
독일로 피난 온 개신교인 난민들이 헤른후트(즉, 진젠돌프 백작의 영지)에 모여 있었는데,
그해 여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악됨과, 현실적 도움과,
지금 자신들이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가련한 처지임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연합예배 시간 동안에, 그 모라비안들은 정말 고통과 탄식가운데 기도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처지도 최악이지만,
고향 땅 보헤미아에는 동료들이 여전히 무서운 핍박을 받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연합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진젠돌프 백작은, 회중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참회의 고백을 기도드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모라비안 공동체는, 진정한 성도의 교제 가운데로
견고히 연합되었습니다.
진젠돌프 백작은 그 날 8월13일을 되돌아보면서
‘마치 오순절처럼, 성령님이 회중 위로 가득 부어진 날’로 회상했습니다.
▶예, 100년 동안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자, 사도행전의 첫 번째 오순절처럼
헤른후트에서 형제와 자매들은, 땅끝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난지 2주 후에, 24명의 모라비안 형제, 24 명의 모라비안 자매들이
함께 하나님께 언약하기를, 매일 하루 한 시간을,
밤낮으로 기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자기들 모라비안 공동체를 위하여, 또한 모라비안의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밤낮으로 릴레이로 기도하기로 언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팀이 되는 거죠, 형제 팀과 자매 팀.
이렇게 각 팀에 24명씩, 1명이 1시간씩, 릴레이로 연속기도를 계속하기로 한 것입니다.
무려 “1백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모라비안 공동체 교회는,
이 ‘한 시간 중보기도’를 계속해서 24시간 이어갔습니다.
그 기도회가, 사실은 역동적인 모라비안 선교의 큰 자원이요,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험지로 복음 들고 나갔던 모든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그 중보기도와 함께 시작되었고,
그 중보기도와 함께 마쳐졌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의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기도이었습니다.
그들 모라비안들은 “하나님의 행복한 백성들”로 알려졌는데, "God's Happy People”
그들은 18세기, 그러니까 아직 개신교회에서 해외선교가 태동도 되기 전에,
선교회를 조직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러니까 개신교 선교의 시초를, 18세기 말 윌리엄 케리의 인도선교로 잡는데,
즉 그를 인도로 파송한 영국교회를 개신교 선교의 시작으로 보는데,
모라비안들은 그보다 무려 50년 전에, 해외선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모라비안 공동체, 이 단체가 너무 작아서, 세상의 많은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최초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두 명의 젊은 형제들이었는데,
인도 서쪽의 섬에 복음을 전하러 갈 때,
그게 필요하다면 노예가 되어 팔려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섬에서, 선교사는 받아주지 않고, 노예는 받아주었으니까요.
1727년 소위 ‘골든 써머’ 부흥이 일어난 지 15년 안에,
헤른후트에서 버진 아일랜즈, 그린란드, 터키, 아프리카의 골드 코스트,
남아프리카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파이오니어 선교사를 파송한 것입니다.
당시 그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견뎌야 했고,
또한 그런 과정에서 많이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교지에서 죽자마자,
즉시로 다른 사람이 자원해서, 선임 선교사를 대신해 가서, 계속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 그것은 절대 꺼지지 않는 불길이었습니다.
이들의 불길은 크지는 않았지만,
큰 불길을 일으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에 소위 ‘1차 영적 대각성’이란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부흥운동의 주역은 요한 웨슬리였는데,
이 웨슬리가 회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바로 모라비안들이었습니다.
한 번은, 웨슬리가 대서양에서 풍랑이 칠 때, 사망의 공포 속에서
태연히 모여서 찬송하는 모라비안 신자들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는가 하면,
결정적인 경우는, 웨슬리가 영국 올더스게이트에서
피터 뵐러라는 모라비안 선교사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때 피터 뵐러는,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늘의 빛이 임하면서, 크게 회심하게 됩니다.
이때 피터 뵐러는, 웨슬리보다 9살이나 어린 26세였다고 합니다.
그후 웨슬리는 감리교를 조직해서, 본격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선교를 감당하고,
또한 부흥운동을 이끌게 되는데요,
그 웨슬리를 거듭나게 한 사람들이, 바로 모라비안 이었던 것이죠.
나중에 웨슬리는 독일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직접 방문해서
모라비안 공동체의 시간표, 그들의 구제 활동, 그들의 학교 운영 방식등을
직접 배워 와서, 영국에서 그대로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피터 뵐러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 분이 영국에 선교사로 오신 이후부터,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는지요.
그런 분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마 두 번 다시는 오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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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사 피터 뵐러
출처 http://blog.naver.com/chmanmin/220405557735
존 웨슬리는 1738년2월1일 영국 딜 항구에 도착,
3일 저녁 런던 도착 후 오글도프와 조지아 이사들을 만나
조지아를 떠나게 된 사유서를 제출하고 선교사 임명장을 반환하였다.
웨슬리는 옥스퍼드를 떠난 이후 조지아에서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이
실패로 끝났다는 좌절감과 소피아의 연애 사건으로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런 절망가운데 있을 때 친구 허튼의 집에 여장을 풀고 있을 때,
독일에서 막 돌아온 모라비아교 목사 피터 뵐러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웨슬리에게 복음주의 신앙을 가르치고 회심까지 이끌어준 영적교사이다.
뵐러는 웨슬리보다 아홉 살 어린 26세였다. 둘은 친숙하게 되었고,
오랜시간 우정을 나누게 된다.
옥스퍼드를 함께 여행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웨슬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뵐러가 한다.
특히 “형제여 당신은 당신의 모든 철학을 버려야 합니다”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는 웨슬리에게 모든 종류의 자연신학과 인본주의를 버리고
오로지 성경에 있는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만을 붙들라고 충고한 것이다.
또 뵐러는 웨슬리에게 마음속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하며,
이것을 소유해야만 진정한 구원을 얻을 것이라 가르쳤다.
웨슬리는 뵐러와 대화가운데 자신이 무엇이 없는지를 깨달았다.
즉, “나는 위대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뵐러는 계속해서 웨슬리에게 성경으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할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교리를 말한다.
웨슬리는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뵐러의 대답은 “먼저 회개하고 그 믿음 얻기를 구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순간적 회심이며,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하는 구원의 확신을 동반한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확신이라 강조할 때 깊은 감동을 웨슬리는 받는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이런 믿음을 소유한 살아있는 증인이라 할 만한 세 사람을 데리고 와
간증을 하게 한다.
그러나 아직도 웨슬리는 순간적 회심의 교리를 부인하고 수용하기를 거절하였다.
◑요한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회심
출처 http://blog.naver.com/chmanmin/220406648890
웨슬리의 순간적 회심을 의심과 거절을 뵐러는 이해시키려고 설득한다.
사도행전을 살펴본 결과 사도시대에도 모든 회심의 사건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도 웨슬리가 수긍하지 않자 뵐러는 또 다른 세 사람을 데리고 와 간증을 하게 한다.
그러자 마침내 “이제는 나의 논쟁은 끝났다. 주여, 믿음 없는 나를 도와 주소서”하고 외친다.
웨슬리는 비로소 “그리스도만을 나의 유일한 칭의와 성화와 구속의 주님으로서 신뢰하는 그 믿음”을
얻을 때까지 기도하기로 결심한다.
또 뵐러는 웨슬리에게 살아 있는 신앙의 진정한 열매는
성결과 행복(holiness and happiness)라고 설명하자 웨슬리는 매료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성결과 행복은 웨슬리가 지금까지 추구하는 신앙의 진정한 열매였기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뵐러가 가르치는 것이 새로운 복음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으로 여겼던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사모하게 되었다.
뵐러는 5월4일 아메리카로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 5월1일 존 웨슬리와 다른 국교회 성직자들과 함께
“우리의 작은 신도회”를 설립하여 웨슬리에게 지도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후에 페터레인에서 모이게 되었고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의 중요한 초석이 된다.
뵐러가 떠나자 웨슬리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조지아에서의 경험과 자신의 실패가 마음을 짓눌려 있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먼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체험한다.
찰스는 질병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자신의 죄 사함과 건강이 회복되었음을 체험한다.
형 웨슬리는 동생의 체험이야기를 들었고 함께 기도를 하였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찰스가 영혼의 평화를 얻은 후에도 웨슬리는 3일간을 더 영혼의 고뇌 속에 있었다.
드디어 1738년 5월24일이 되었다.
그는 새벽5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 하였다.
정오쯤 되어 또 다시 성경을 펴서 읽고, 오후에 성 바울 성당에 가서 성가를 듣고 많은 위로를 얻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8시45분 아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네튼톤 코트(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신도회의 기도회에 갔다.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때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다.
즉 성령의 감동에 의해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을 하였다.
이날 일기를 보자“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영원히 제거하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자신이 마음에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어 그곳 신도회 회원들은 웨슬리를 데리고 동생 찰스에게로 갔다.
그들은 만나서 기쁨으로 찬송가를 부르다가 기도하고 헤어져 집으로 갔다.
이같은 웨슬리의 회심은 메도디스트 역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교회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회심의 본보기로 이야기 되고 있다.
여기서 웨슬리가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는 표현은 “warmed"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따뜻해 졌다, 따스해졌다, 또는 마음이 감동되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날씨나 물체의 온도 또는 사람의 마음이 따뜻할 때나 깊이 감동될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이는 불은 불이되 화학적인 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느낀 경험으로서 사랑의 뜨거움이다.
웨슬리는 뜨거워서 접촉하면 델 수 있는 정도의 뜨거움을 의미하는 “hot"라는 단어나,
실제 불이 붙는 상태를 의미하는 "fired"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웨슬리의 뜨거움은 영적인 불이며 심정에 붙는 사랑의 불이다.
즉 웨슬리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속 깊이 깨닫고 감동하였으며,
바로 이런 인격적인 사랑의 감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warmed"를 사용하였다.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는 말은 ‘내 마음이 이상하게 뭉클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웨슬리는 왜 가슴이 뜨거워졌을까?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줄곧 신앙과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1725년에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기로 거룩한 결심을 한 이후에는
“완전 성화”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고 걸어왔다.
그러나 조지아 선교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후
자신은 도덕적인 노력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성화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웨슬리는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충분한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만족시킴으로써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선행을 많이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고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이것은 당시 영국 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신학적인 경향이었다.
이런 웨슬리에게 5월24일 경험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나를 위하여 피 흘리셨다”
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꼈다.
웨슬리는 회심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성화를 이룬 다음에 칭의를 얻는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순서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으나
이제는 그 순서를 바꾸어서 먼저 믿음으로 칭의(이신칭의)를 얻은 다음에야
성화가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웨슬리의 회심은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바꾼 사건이었다.
이는 오직 은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복음주의 전통의 신앙이고 개혁가들의 전통인 것이다.
웨슬리의 회심사건은 뵐러가 줄곧 설명하고 설들하고 하였던 것들이
머리로 이해해 보려고 하였지만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의구심이 가슴으로 느꼈던 사건이다.
즉 머리로 이해 안 되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비로소 이해하였다.
마음속의 경험이 먼저 온 다음에 이성적 이해가 따라왔다.
가슴으로 체험하니 머리도 풀린 것이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신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회심은 교회사적으로 사도 바울, 어거스틴의 회심함께 위대한 회심이다.
우리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
때로는 지식이 하나님 만나는 경험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
경험이 지식보다 먼저이다. 구원의 은혜는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경험하여 얻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웨슬리는 회심을 경험 한 후 친구 허튼의 집에 모인 기도회에서 벌떡 일어나
나는 5일 전까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웨슬리는 친구와 주변 사람들은 광신자라고 말한다.
허튼의 부인은 이 사실을 웨슬리의 형에게 편지를 보내 알리자,
형이 동생 웨슬리에게 편지하기를 도대체 지난달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말이 무엇이며,
모든 인간의 선행의 업적을 버리고 오로지 믿음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게 무슨 괴상한 소리냐고 따지면서
즉각 어리석고 파멸적인 열광주의를 버리고 제 정신을 차리라 촉구한다.
그러자 웨슬리는 형에게 답장을 한다.
그 편지에 그리스도인 됨의 정의를 두 가지 조건으로 설명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첫째, 죄를 용서받고 더 이상 죄에 의하여 통치를 받지 않고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며,
둘째 마음속에 성령의 증거를 소유하고 성령의 열매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지난달까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 없이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불쌍한 사람에 대한 모든 선행도,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고난도 다 소용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런 은사가 없다면 힘을 다해 두해야 한다고 형님에게 가르치듯 말한다.
웨슬리의 마음에 붙은 신앙의 불은 영국 땅과 온 세계로 번져 나가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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