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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LNCK 2016. 2. 28. 21:33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16:1~6             16.01.21.스크랩, 출처  

 

 

작년 여름 즈음부터 우리 교회의 목양실 앞 로비에 열대해수어 수족관이 생겼습니다.

교역자들이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마련한 선물인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렬한 반응이

비단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 교인들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곳을 지나칠 때마다 반드시 한 번 어항 속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께서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을 창조하셨을까

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수족관은 처음 설치부터 시작해서

현재 유지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어항 관리에 대해서는 제법 내로라하는 반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들의 생사화복(?)

전적으로 제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수질을 물고기 생존에 적합하도록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과

매일 얼마만큼의 먹이를 주는 것이 적당한지를 제가 다 결정합니다.

그뿐 아니라 텃세를 부리면서 새로 들어온 물고기를 지나치게 괴롭히는 물고기가 있으면

그 놈을 잡아내어서 어항 안에 평화로운 이웃관계’(?)를 유지시키는 일까지도

다 저의 판단과 노하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물고기 쪽에서는 물론 저의 그런 역할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자신의 본능에 따라서 어떻게 해서라도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으며

또한 그 때문에 다른 물고기와 영역 다툼까지 치열하게 벌이고 있을 뿐,

그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곳에서 자기네의 머릿속까지 꿰뚫어보면서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온갖 것들을 정성과 사랑으로 베풀어주는

석목사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고기란 존재 자체가 사람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열등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똑같은 일이 사람하나님사이에서도 벌어지게 됩니다.

   타락한 이후의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알 능력도 없는존재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저 자기의 생존본능육체적 욕구에만 사로잡혀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의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켜 인생의 생사화복을 위시하여

   내세의 영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오직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사람이 자기 딴에는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100퍼센트 다 주장하고 계시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이 자유의지와 양심으로써 판단을 내려도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계획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16:1~4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어떤 일을 희망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할 본인의 자유처럼만 보인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으로 판단하고 계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라는 말은

실로 고귀하고도 강력한 인권 선언으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간에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데, 누가 어떻게 간섭하겠다는 것이냐?’

- 정말 아무도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 보이는 논리가 아닙니까?


옳든지 그르든지 내가 책임지면 되지 않느냐?

그러니 아무도 내 판단과 행동에 대해서 상관하지 말아라.’

- 실로 신이라 할지라도 건드릴 수 없는 고유의 권리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자유의지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카운터펀치가 날아옵니다.

바로 그처럼 사람이 자유롭게 마음의 경영을 하는 것 같아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라는 선포입니다.


여기서 우리나라말 번역에 말의 응답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내용적으로 결정’(decision making)을 뜻하는 말입니다.

네 마음대로 실컷 생각하고 꿈꿔라. 그러나 마지막 도장은 내가 찍는다.


네가 그렇게 마음대로 계획하고 끙끙거려도,

그 일의 결과는 바로 내가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 선언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분명히 양심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선과 악을 구별할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악을 따라가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선을 추구하는 양심을 발휘하고 사는 것입니다.


완전타락에 빠져 있는 인간에게 어떻게 이런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고

작동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반은총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5:45)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공평하게 내려주시는 은총인데, 그 중에 하나가 양심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신자들 중에서도 소위 법 없이도 살 사람’,

종교를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문제점은 바로 자기 보기에는이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양심적 판단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기준이 되면 당연히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다 옳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 자명합니다.


자기가 재판장이 되면 누가 자기를 스스로 정죄하겠습니까?

분명히 범법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최종 결론을 내릴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면 무슨 핑계나 변명을 대어서라도 합리화시킬 것이 틀림없습니다.

소위 인간의 양심을 최고로 내세우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양심선언이라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기때문입니다. :2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양심으로도 깨달을 수 없는 것들까지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자기 양심의 눈만으로 보면 모두 깨끗하여도

하나님께서 감찰하실 때에는 결코 깨끗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것이 곧 하나님 살아계심을 부인하는 교만, 십자가 대속과 구원을 믿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양심만 가지고서는 아무리 판단해 보아도 절대로 더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내 양심적으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다.’,

나는 예수 십자가 보혈 공로 같은 것은 의지할 필요도 없이 선하게 살고 있다.’라는 식으로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자신의 행사를 오직 여호와께 맡겨야만 합니다. :3

자기의 자유의지와 양심적 판단만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고

그것을 순종하려는 쪽으로 자신의 마음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질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전히 본인의 생각과 의지에만 따라가면 시행착오와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높고 깊게 모든 것을 예정해 놓으시고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면 절로 자신의 경영하는 모든 것이 다 형통하게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머릿속만큼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뇌의 작용까지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 권능으로 주장하시고

그 뇌가 내리는 모든 판단을 통해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나가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렵고도 경외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살아계신 진짜 하나님, 모든 주권을 한 손에 다 쥐고 계시는 절대자께서

실제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순전히 자기의지대로 판단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이 더 강퍅해지도록,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당신께 더욱 큰 영광이 돌아오도록 마음대로 주장하셨습니다.


바사 제국의 고레스도 자신의 선한 양심을 따라 유다 백성을 해방시켜주기로 결정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해방 칙령을 내리도록 그의 생각과 판단을 전적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야말로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오묘하기 짝이 없는 주권인 것입니다. :4

 

    테니스 경기를 보면 오버룰’(overrul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로 테니스 경기에서 공의 인아웃’(in-out) 여부에 대하여 일차적인 판정을 내리는 사람은 선심들입니다.

    하지만 코트의 중앙에 높이 앉아 있는 주심이 그 최종 판결의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심의 판정이 옳다고 인정되면 그대로 경기를 진행하지만,

    만약 주심의 판단에 선심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되면 즉시 오버룰을 선언하면서

    그 판정을 번복시키는데 그것이 그대로 최종판결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해서

마지막 도장을 찍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사람의 전 인생은 100퍼센트 다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지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만이 확실한 인생성공의 비결이며 만사형통의 보장인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대로 생각을 하고 자신의 양심을 내세우면서

하나님 앞에서조차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화자찬을 하더라도


그 모든 자기 판정에 대한 최종적 판결은

바로 저 지극히 높은 보좌에 좌정하고 계신 절대주권자 한 분뿐이심을 명심하는 가운데,

자신의 행사를 전부 다 여호와의 뜻과 계획에 맡김으로써

소원하는 모든 경영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이 도덕과 윤리를 자랑해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역사에 있을 뿐입니다.

 

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16:5~6

 

죄와 악의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사죄와 구원의 문제는,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인 과제입니다.

어떤 것이 죄이고 악이냐 하는 것을 따지는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와 타 종교들 간에 공통적인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죄의 방법, ‘구원의 길에 대해서는 완전히 차이가 납니다.

본문 역시 참된 기독교에만 있는 인죄론구원론, 또 다시 정확하게 선포해 주는 말씀입니다.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

즉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중한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 죄는 마음이 교만한죄라고 했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인데,

이것은 사람 자신을 존재 세계의 최고봉에 올려놓는 극단적인 교만이며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교만하게 행하는 자는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즉 그런 교만한 신성모독자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고

그런 인본주의 자들이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친다 해도

그 최악의 죄에 대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결코 사함을 얻지 못하고반드시 지옥영벌에 떨어지고야 말 최악의 중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무서운 죄악과 형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에 대하여 이어지는 6절은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 무엇인가 대가가 치러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종교가 다 일치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대속의 대가가 인자와 진리라고 했는데, :6

문제는 이것이 누구의인자와 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쪽의 인자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종교입니다.

즉 죄를 지은 본인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인자즉 무슨 선행을 베풀어 줌으로써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면, 그 지은 죄가 용서받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석하자면, ‘인자쪽은 그래도 말이라도 되지만

진리쪽은 해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사람 쪽의 진리가 어떻게 자기의 죄를 갚아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사람이 어떤 진리를 깨닫거나 도를 통하게 되면, 그 공로로 죄가 사해진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식한 사람은 결코 죄 용서받을 길이 없고,

오직 똑똑한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 쪽의 인자와 진리에 의해서

사람의 죄악이 속하게 된다는 뜻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즉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근간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만, 그 대속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은, 사람 자신의 도덕이나 윤리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발동하시는 인자와, 하나님께서 선포해 주시는 진리에 다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구원을 얻게 되고 나면, 6절 하반절에 나오는 현상이 곧 뒤따라오게 됩니다.

바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는삶입니다.  :6

 

세상 종교에서는 사람이 먼저 스스로 악에서 완전히 떠나 오직 선을 행하고

인자를 베풀어야만 그 공로로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용서와 구원을 먼저 받고 나면,

바로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여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전인격자가 됨으로서

자연히 악에서 떠나는 새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악에서 떠나려 하는 노력보다는,

무조건 용서 받고 구원 얻은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 경외의 신앙이

사람을 훨씬 더 강력하고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절로 악에서 떠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서는 죄를 논할 때 오직 윤리적, 도덕적인 죄만을 따집니다.

즉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행위만을 가지고 죄를 정의하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죄는 구태여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그저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윤리만으로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그런 종교는, 결국 신과 아무 실제적인 관계도 없고

사실상 신을 찾지도 믿지도 않는, 순전히 인본주의 종교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도 윤리적인 죄 역시 죄인 것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교만한 마음이야말로

죄 중에서 가장 큰 죄, 반드시 벌을 면치 못할 죄라고,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배우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그런 인본주의 종교들이 압도적인 세를 자랑하면서, 참된 기독교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에 의지하는 신앙은 전혀 없고

그저 인간 스스로의 착한 마음씨와 선한 행실만 내세우는 교만이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 덕목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외치는 참된 전도자들은

절대다수의 종교다원주의자들로부터

자기 혼자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종교 간의 화해무드를 역행하는 독선주의자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처럼 마음이 교만한 자들이

아무리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원사역을 비난하고 거역하는 자들이야말로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최악의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베풀어 주신 최고의 인자인 것을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천하 인간에게 예수 외에는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결코 없다는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불변의 진리임을 굳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교리이며,

따라서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이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할 인죄론과 구원론의 정수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함으로써만 죄 사함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통해 선포해 주신 복음의 진리를 믿음으로써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신앙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어린 아기의 생명이 본인에게 달려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 부모에게 달려 있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100퍼센트 부모입니다.

아기의 앞날은 아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상 아기란 아직 무슨 이성적, 양심적 사고자체를 할 수 없고 그저 동물적인 본능만 있을 뿐입니다.

그처럼 취약하고 무능력한 아기의 장래는

오직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하여 품고 있는 뜻과 계획에 다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기의 생존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아기는 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착함이라는 것이 아기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부모 쪽에서 자신의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

본인의 생명보다 자기 어린 아들딸을 훨씬 더 소중히 여기면서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손길 때문에

아기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면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기에게 있어서 불행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기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주도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아기는 자유스럽지 못하고, 부모에게 속박된비참한 인생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면서 전적으로 돌보아 주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아기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행복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섭리와 구원에 대해서 불만을 토하고 반항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따위는 자기 개인의 자유의지를 방해하고

자신의 양심적 판단과 행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으로부터 인간의 완전한 독립을 외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의지하기는커녕

순전히 윤리와 도덕만 있으면,

신 따위는 없어도 얼마든지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실로 부모없이도 자기 혼자의 판단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기와 똑같은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된 기독신자는 그런 신성모독자들의 지극한 무지교만에 호리라도 빠져들지 말고

모든 것이 오직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는 성경 말씀에 아멘으로 고백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과 완벽한 계획에 다 걸려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금세뿐 아니라 내세의 생명까지 100퍼센트 전부가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역사에 달려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믿어야만 실로 죄악의 포로가 된 종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자유로운 행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도 내세우며 자랑하는 자유의지와 양심’,

도덕과 윤리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서는 도저히 상대도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전지하신 뜻과 계획을 따라

자신의 경영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복을 받고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리를 통해 영혼구원의 은혜까지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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