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에 머물려 행21:15~16 16.02.21 스크랩, 출처보기
◑먼저 은혜를 주시고, 행함은 따라오게 하십니다.
▲성경 내용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바르게 살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성경 내용이, 하나님의 그런 명령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성경은 인간의 도덕경이나, 윤리지침서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이행할 수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바르게 살 것을 명령하는 데는
대 전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먼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의 도시 하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먼저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고 부르셨습니다. 창12:1~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먼저 임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늙어서까지 자식이 없는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그 존재가 완전히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수태했습니다.
리브가는 어느 날 자기 태속에서, 쌍둥이들이 심하게 다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한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쌍둥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아직 태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사회는, 철저하게 장자 우선 사회였습니다.
아우들은, 장자를 섬기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쌍둥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기도 전에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장자인 형이 동생을 섬기게끔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속의 동생을 먼저 선택하시는 은혜를, 야곱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마저 서슴지 않던 야곱이
새로운 이스라엘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의 의지나 능력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11:45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완전무결한 거룩하심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렇게만 명령하셨다면,
죄인인 인간 가운데, 그 누구도 그 명령을 준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
레11:45절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는 은혜를 먼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구별해주시는 은혜를,
먼저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함으로 너희들도 너희들 자력으로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너희를, 나의 거룩한 자녀로 구별해 주었으므로
이제부터 너희도, 나의 그 은혜를 좇아 거룩한 삶을 살아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땅 광야를 넘어서, 거룩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말 ‘은혜’로 번역된 헬라어 ‘카리스’는
거저 베풀어주는 호의, 친절, 혜택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라면,
바로 그 은혜 때문에, 그 은혜를 힘입어서,
그 은혜에 이끌려, 그 은혜의 도우심(힘)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좇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특히 더 크고 더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자신의 의지를 다해서, 주님을 좇아 살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목숨을 거는 사역을 감당헀던 바울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행을, 눈물로 가로막고 나선 자기 일행과 빌립의 네 딸들을 질타했습니다.
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똑같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도
바울의 일행과 빌립의 네 딸들은
단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이, 결박과 투옥의 길이라는 이유만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눈물로 가로막았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습니다.
그 차이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에 기인했습니다.
바울은 평소에, 자기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전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 중의 괴수인 바울을
영원한 저주와 멸망의 심판대에 세우시기는커녕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사도로 세우시는 은혜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그 은혜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은혜였습니다.
우상의 도시, 하란에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
태속에 있는 야곱을, 언약의 자손으로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
비천한 노예들을,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먼저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동일하게
불가사의한 은혜가 바울에게 임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불가사의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온 삶을 드려서, 주님을 좇아 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교회에는 새신자만 10주, 성숙자반10주, 사명자반 10주
총 30주에 걸친 성경공부가, 매년 두 차례씩 개설되고 있습니다.
새신자반은, 초신자를 위한 반이 아니라, 신앙연륜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
정말 새로운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기 원하는 분들을 위한 과정입니다.
성숙자반은, 주님 안에서 좀 더 성숙한 신앙생활을 실천해가기 원하는 분들을 위한 과정이고
사명자반은, 바울처럼 생명이 있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서 사명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분들을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30주에 걸친, 그 성경공부에 참여한다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자기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신자의 새로운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달은 사람이
주님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성숙자로 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더 깊이 침잠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처럼, 자신의 남은 생을 주님에게 온전히 던지는 사명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
바울과 같은 사람을, 당신의 은혜로 계속해서 책임져주심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계속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행21: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여러날이 지난 후에, 마침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킬로입니다.
인생 말년에 접어든 바울이, 걸어간다면 사흘 길이었습니다.
그 먼 길에 오른 바울 일행의 수는, 오히려 더 늘어났습니다.
행21: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본래 바울 일행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와 디모데,
그리고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해줄 고린도와 마게도냐 각 지역 대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해서 바울이 가이사랴를 출발할 때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도 바울 일행에 합류했습니다. :16
그들 가운데는 특히 구브로 출신 나손도 있었습니다.
이때 나손이 왜 바울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는가 하면,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6
예루살렘에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던 나손이
바울과 그의 일행을 예루살렘에서 자기 집에 묶게 해 주기 위해서
바울을 따라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20:4절에 의하면,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매듭짓고, 고린도를 떠날 때,
바울의 일행은 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8명이었습니다.
그 8명에, 마게도냐에서 누가가 합류에서 9명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가이사랴에서 떠날 때,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까지 합류하였으므로
바울 일행은, 최소한 10여명이 된 셈입니다.
그들이 모두 한 집에서 머물기에는,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그런데도 나손은 그들을 모두 자기 집에 묶게 해주기 위해서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나손은 예루살렘에,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재워주고, 먹여줄만큼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나손은 부자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에 벼슬을 따기 위해서 올라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투옥당할 것이라는 것은,
선지자 아가보를 통해 이미 공개된 사실이었습니다.
지킬 것이 많은 부자는, 본래 따질 것도 많고, 눈치 볼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부자 나손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당하여
로마군에 넘겨질 것이라는 바울과 그의 일행을
그 누구도/무엇도 개의치 않고,
자기 집에 재워주기 위해서
바울을 따라 바울과 함께 가이사랴를 출발했습니다.
구브로 출신의 나손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본문의 시점에 왜 가이사랴에 가 있었는지는,
또한 가이사랴에서 나손과 바울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나손이 바울과 그의 일행을, 왜 예루살렘에서 자기 집에 모두 묶게 해 주려고 생각했는지는
그 동기나 과정에 대해서는, 본문이 전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본문이 주고자하는 메시지는, 그런 부수적인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울이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자신의 온 삶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숙소를 책임져주실 정도로
계속하여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계신다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이때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불과 일주일 정도만에 체포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로마로 압송당할 때까지, 바울은 계속 감옥(가택연금)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당도한 뒤에
체포당하기 전까지, 겨우 일주일 동안
그의 일행과 함께 머물 숙소를 책임져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백킬로나 떨어져있는 가이사랴에서부터
구브로 출신의 나손을 동원하시는 은혜를, 바울에게 베풀어주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바울에 대한 주님의 은혜는, 결코 단 일회적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짓밟던 폭도인 자기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바울이 자신의 삶을 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방금 우리가 본문을 통해 확인하 것처럼,
바울에게 필요한 세심한 부분까지 책임져주시는 은혜를 계속 베풀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중단 없는 주님의 그 지속적인 은혜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뜻과 마음을 다해 자기를 송두리째 주님께 던져드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바 대로의 위대한 사도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적용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먼저 입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삶속에, 날마다 계속해서 베풀어주고 계시는 주님의 은혜를
헤아려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계속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그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헤아려볼 줄 아는 눈을 지니지 못하면,
우리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사명자나 성숙자는 고사하고
일평생 새신자로도 살 수 없습니다.
▲2주 전 일입니다.
2부예배가 끝난 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도님이 제게 말했습니다.
‘자기 남편의 삶이, 회심이전의 저와 똑같았답니다.’
남편이, 과거의 제 삶처럼 엉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이 변화되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남편이, 100주년 기념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보자고 해서
그 날 처음으로, 우리 교회를 찾아와서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를 이동시키기 위해서, 먼저 나간 남편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남편의 변화에 대해서, 말하는 그 여성도님의 얼굴에는
감격의 생기가 역력했습니다.
저는 그 성도님의 감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남편이 엉망인 삶을 산다면,
가장 속상해했을 사람은, 그 남편과 한 몸을 이룬 아내입니다.
엉망이었던 남편의 삶이, 새로워졌다면
세상에서 가장 기뻐했을 사람 역시, 아내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감격과 기쁨이 아무리 컸다 할지라도
당사자인 남편의 감격과 기쁨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자기 삶을 새롭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그 남편이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겠습니까.
그 남편이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그는 일평생토록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누구보다 애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젊은 여성도님은, 예전에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마치 곁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남편의 삶이, 회심이전의 저와 똑같았다’고 말했는데요.
▲과거에 저는, 욥기25:6절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더기같은 인간, 벌레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1984년 8월 2일 새벽 두 시에,
스스로 제 생명을 갉아먹던 죽음의 수렁에서 제가 벗어났습니다.
그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제 능력이나, 제 힘으로 인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시고 전능하신 손이, 저를 그 수렁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도저히 헤쳐나올 수 없었던 그 수렁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은
제 둔한 재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때 그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가 수렁에서 한 번 건져내주시는 것으로 그쳐버렸더라면,
저는 엉망이었던 옛 삶으로 이내 회귀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나약함과 태만함과 무지함과 부족함과
온갖 잘못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당신의 은혜로, 저를 감싸 주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그 계속된 은혜 덕분에
오늘 이 시간에도, 저는 이렇게 강단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의지를 다해서, 주님께 충성하려고 하는 것도
언제나 저를 감싸주시고 계시는, 주님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그러나 언제든, 만약 제가 주님의 그 은혜를 외면한다면
저는 그 즉각 자만과 교만으로, 또다시 무너져내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자기 죄를 참회하는 사순절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매일 매 순간, 자기 삶속에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침잠하여 살았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롬8:3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십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은혜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말 ’선물로 거저주다’ 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카리조마이 가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 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조건없이 그저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놓으시기까지 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매일 매 순간
우리의 삶속에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시인은 시121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려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도, 길가의 나무와 꽃도
바람과 새의 노래 소리도, 내 곁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을 언제나 떠 받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지속적인 은혜에 의해,
죽음이 두려워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정도로 연약했던 아브라함은
강한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섰습니다.
하나님의 중단없는 그 은혜를 힘입어, 사기꾼같은 야곱은, 이스라엘의 서막을 올렸습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속에서 사도바울은, 2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가운데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있던 그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 은혜를 헤아려보는 눈을 지니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깨어있는 크리스천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우리 역시 ‘새신자’로 살아가는 감격을,
‘성숙자’의 삶을 영위하는 희열을,
우리 인생의 경주를 ‘사명자’로 완주하는 보람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신 그 변함없는 은혜로
야곱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해 주신 그 지속적인 은혜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겨우 일주일 머물 숙소까지 친히 책임져주신 그 섬세한 은혜로,
주님께서 항상 우리를 떠받쳐 주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기도/ 내가 주님을 잊고 있던 그 때에도, 주님의 따뜻한 은혜로
계속해서 나를 감싸고 계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그 은혜에 날마다 깨어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그 은혜를 헤아려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해 주십시오.
하늘의 태양과 달, 새와 바람소리,
길가의 꽃과 나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혜를 헤아릴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그 은혜속에서 날마다 새신자의 감격을 성숙자의 희열을
사명자의 보람을 누리며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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