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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감정 솔루션 2강 “절망”

LNCK 2016. 3. 3. 13:26

크리스천 감정 솔루션 2절망            13:14~18, 17:1             출처보기

    

 

절망의 그 자리가, 사실은 하나님의 기회의 자리입니다.

절망의 자리가 아니고, 바로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입니다.

한 사람의 절망이, 그 시대에 희망을 열어놓습니다.

현실속에 있는 구체적인 아픔과 절망의 그 자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놀라운 비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 설교중에서

           

여러분, 고 강영우 박사님을 아시죠?

그분이 어쩌면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력을 잃게 된 것이

중학교 때 축구하다가, 축구공에 맞아서 그렇게 되었답니다.

 

그때 그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캄캄함,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리고 정말 비참하게

생계를 위해 구걸생활을 해야 되는 가운데, 큰 절망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그 분이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시고,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그밖에 미국에서 차관보에 발탁되어서,

장애인 정책에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기여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시력을 잃은 것이, 자기에게는 엄청난 특권이었다는 겁니다.

왜냐면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누구나 다 와서 부축해주어서,

자기가 그들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대편이 무장해제하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고..

그러다보니까 미국의 고위급 인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절망과 단점을 최대한 활용한 분이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또 다른 세계를 열어갔던 것이죠.

    

 

◑1. 절망의 자리를 무작정 떠나지 마십시오. 거기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롯이 떠난 다음에,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 됩니다.

이제 아무것도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인생이 되죠.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라’ 창13:14


절망에 처한 데서, 어디도 갈 데도 없고, 바라볼 곳이 없는 그 좌절한 인생에게

놀랍게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은, 절망에 처했을 때,

우리는 막 '왜 내게 이런 상황을 주셨나?' 하고 하나님과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 이럴 수 밖에 없는가?' 하며 자기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서 좌절하게 되고요,


계속해서 우리는 그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싸우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좌절하든지, 누구를 원망하든지..

그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지금 현실의 그 자리가, 자기에게 너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탈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탈출도 못하겠고, 괴로운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처방이 뭐냐면,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창13:14 

이 말은 너 있는 그곳, 네가 당하는 상처와 절망의 그 자리가, 의미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그 자리가 축복의 중심지라는 말입니다.


'네가 있는 그 자리, 그곳은 의미가 있다. 그 자리에서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이지,

'그 자리를 떠나라. 너는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다. 너는 너무 괴롭겠다.' 이게 아닙니다.

'너는 그 자리를 지키라'는 겁니다.


여러분, 절망을 경험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절망의 그 자리가, 사실은 하나님의 기회의 자리입니다.

우리 인간이 모든 것을 절망하는 순간에는, 진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는 순간이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밤새 그물질을 했는데,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절망의 자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 예수님은, 다시 그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떠나서 육지에서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제가 밤새껏 거기서 그물질을 했는데, 한 마리도 잡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로 가라. 네가 절망한 그 자리, 거기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자리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은 것이 많아서

한 배에 다 담을 수 없어서, 동료들까지 불러서 담았어요.

그러면 그 절망의 자리가,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절망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어떻게 인정할 수 있었겠어요?


인간이 절망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사실은 밤새 그물질을 했는데, 어떻게 한 마리도 못 잡을 수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물고기들을 다 명령해서,

그물을 잘 피해라고 흩어놓으신 거죠. 딴 데 다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절망한 그 자리는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섭리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희망이 없게 하시려고요. 왜냐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시려고요.


그러므로 내가 절망한 그 자리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절망한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영광을 맛보라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신가를 너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인간이 절망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래서 절망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영적인 눈이 뜨여지는 자리입니다.

놀라운 기회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 인물들을 보면, 전부 절망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직장생활 할 때,

'도저히 이놈의 직장 못 다니겠다. 저 인간 있는 한 내가 속터져 죽겠다'

그래서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면, 더 심한 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배 더 센 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이기지 않으면, 다른데 가서도 집니다.


여러분, 가정에서요,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 절망의 자리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뭔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어야 됩니다.

현실의 그 자리가, 문제로 끝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날 줄로 확실히 여러분은 믿으셔야 되는 거죠.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절망을 이기는 길은, 두 번째로

◑2.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제 너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서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바라봐라.’

네 자리에서 네 발끝만 보지 말고, 네게 상처를 준 그 사람만 생각하지 말고,

사방을 쳐다보아라, 사방에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여기저기서 너를 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놀라운 일들이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왜 자꾸 네 자신만 바라보고, 그 원수만 바라보고, 낙심하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당하는 그 절망은 한 가지이지만, 하나님이 너를 위해서 준비하신 일은 만 가지가 넘는다.

사방이 너를 위해서 축복하는데, 그 한 가지 때문에 절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뭐만 바라보았습니까? 선악과만 바라보았습니다.

먹지 말라고 금한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저 같으면 일단 다른 것 다 맛본 다음에, 그거 맛보겠어요. 더 이상 맛 볼게 없으면요.

그런데 꼭 절망적인 것, 안 되는 것만 생각하면서, 아담과 하와는 괴로워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저거 언제 따먹지? 저거 왜 못 먹게 했을까?'


지금 먹으라는 것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브라질에 아마존 밀림보다도 아마 더 많았을 것입니다.


지금 있는 이 세상의 과일은,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 가운데서 난 것이 지금의 과일입니다.

그러면 원래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텐데,

아니 그것 다 누리기도 벅찬데, 사방에 먹을 것이 널려 있는데,

'먹지 말라'한 그것만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사방에, 우리를 위해서 주신 축복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은 왜 보지 않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세요.


예를 들어, 요셉을 살펴보십시다. 요셉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어요?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다가, 웅덩이에 쳐 넣었다가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러면 노예살이가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그 노예살이를 열심히 해서, 간신히 주인에게 인정받아서 총무가 되었더니, 또 주인집 아내가 유혹했습니다.

아마 미스 이집트의 선(2등)은 되었을 것입니다. 시위대장의 아내였으니 얼마나 미모가 뛰어났겠습니까.

더군다나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있고,

그녀가 그렇게 매일 자기를 위로해 주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런 것을 다 물리치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어요.

절망에서 더 절망이잖아요? 이제 구구 하나 의지하고 믿을 이가 없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아도, 결과는 노예가 되었다가, 죄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자리에서 주님은 뭐라시면, "너 탈출해!"가 아니었습니다.

"네 꿈이 탈출이 아니라,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형들이 그렇게 안 했으면, 절대 요셉은 이집트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으로 유학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 언어를 익히게 되고, 노예생활하면서 단기간에요.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일이 뭐냐면, 사실은 애굽 전체를 통솔해야 되겠는데,

하필 노예로 팔려가도, 상인의 집이나 학자의 집으로 갔다면, 일이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온통 군인들만 가득한 집에 노예로 팔려왔으니,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겠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보낸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면 총리대신이 갑자기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애굽의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지휘체계를 알아야 되고,

총리가 되면, 것나라 전체를 자기 말 한 마디로도 움직일 수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시위대 장군의 집에 있으니까, 그게 가능한 겁니다.

요셉이 다 지켜 보았으니까요. 그 집에 들어오는 장군들, 다 누가 누군지 알게 되었죠.

사방이 요셉을 위한 특별과외가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감옥에 갇혔잖아요. 거기에 떡맡은 관원장과 술맡은 관원장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제공한다는 것은, 가장 믿을만 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바로의 최측근들이었습니다.

그저 술따라 주는 사람이 아니라, 모사요, 친구같은 사람입니다.


그 관원장은 요셉과 함께 있으면서, 요셉에게 맨날 자기 넋두리를 했을 것입니다.

'바로가 이럴 수가 있느냐, 사실은 이러이러하다.'

그러면서 바로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하면 미움을 받고, 어떻게 행동해야 인정을 받는지..

자기 넋두리를 통해서, 요셉에게 다 개인교습이 된 것입니다.


왕궁의 내부사정을 완전하게 교육을 받고 있는 겁니다. 감옥에 갇혔다고 생각했지만

이 모든 왕실의 교육을, 최고의 바로의 측근을 통해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이게 지금 절망의 자리잖아요. 노예였다가 죄수까지 되니까 얼마나 슬픕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너는 눈을 잠깐 들어서 다른 차원에서 바라봐. 너에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 사명이 있는데!"


그래서 요셉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총리가 되는데, 완전히 매끄럽게 일을 처리해 나갑니다.

하나도 거슬리는 사람이 없고, 문제되는게 하나도 없고, 요셉을 막는 사람도 없고, 실수도 안 합니다.

왜냐면 이미 노예살이하면서 군사조직, 군권을 다 장악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고,

그리고 왕실의 모든 법도와 애굽의 지식을 다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감옥에서 왕궁으로 가도, 문제가 전혀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막바로 총리가 되었으면, 며칠 있다가 총리 자리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실정을 해서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절망의 자리다' 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아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너를 돕는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믿음의 눈을 들어서 바라봐라. 왜 이런 상황속에서 낙심만하고 절망하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3. 절망의 그 자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던 소녀, 정말 절망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냥 아람 군대에 납치당해서,

노예로 복종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때리고 학대했겠습니까. 얼마나 절망입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라고, 거기로 파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이 소녀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엘리사 때문만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같지만, 사실은 사방이 내가 일할 장소로 바뀌어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가 아니고, 바로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들어서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섭리의 세계를 보기만 하면,

여러분의 절망은 사실은 절망할게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기회의 자리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다 버리고 떠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눈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어요.


그런데 결국은 한 제자는 팔아넘기고, 수제자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도망갔고,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처절한 고독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때 요17: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여,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가장 절망의 자리에서, 영화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 배신하고, 팔아넘기고, 떠나가고,

요셉처럼, 소녀처럼 가장 절망적인 자리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있고,

절망의 그 자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의 자리'인 것을 믿었어요.


여러분 그래서 현실속에 있는 구체적인 아픔과 절망의 그 자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놀라운 비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네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 사방을 좀 바라봐라. 절망만 보지 말아라.

이 절망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역사가 있단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정리하면, 여러분들이 꼭 이 세가지 원리를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1. 현실의 그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면 안 됩니다. 만약 떠나면 더 힘든 일이 생길 겁니다.

거기서 이기고 거기서 극복해야 다른데 떠나도 그곳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2. 바로 그 자리가, 사방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몰려오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전체를 바라봐야 합니다.


3.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아버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절망의 자리 때문에, 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나를 좀 영화롭게 해 주십시오.' 라고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타인을 절망케 했을 때는 어떻게?


그런데 이렇게 내가 절망의 자리에 있는 것은 괜찮은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절망을 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가해자도 아픔과 상처를 느끼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이든/의도하지 않았던 절망을 줄 때는,

정말 자기자신의 죄책감에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삼상1장에 엘가나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한나와 브닌나입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아이를 잘 낳았고, 한나는 아이를 못 낳았어요.

대신에 한나에게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이 있었어요.


그런데 브닌나가 한나를 절망케 합니다. 성경에 보면 브닌나 대적자가 한나를 격동케 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아기를 못 낳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혔겠습니까.


더구나 남편 엘가나가 한나만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브닌나가 복수심과 시기질투심 때문에, 한나를 무지하게 괴롭혀서 절망시킨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주어도, 한나는, 아기를 못 낳으니까,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나의 심정을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나를 저주하셨다.' 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아들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게 아니라,

'주께서 여종을 돌아보시고, 생각하시고, 기억하신다면 아들을 주십시오.

그러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아들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있는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이것이 한나의 기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나의 기도의 초점은, 아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 안 하시면,

아들이 있건 없건

남편이 나를 사랑하건 안 하건.. 자기에게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브닌나는 한나에게 절망을 줬어요.

이렇게 남에게 절망을 주었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교만하지 않아야 됩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게 절망을 줄 수 있거든요.


내가 일등하면 다른 사람을 이등 만드는 겁니다.

내가 수년동안 훈련해서 금메달을 따면, 수천명 남은 선수들은 절망하는 겁니다.

의도하지 않은 절망을 줄 수 있습니다.


브닌나가 실수한게 뭐냐면, 아기가 생긴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았어야 했어요.

', 한나에게는 남편의 사랑을 주셨고, 나에게는 자녀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랬으면 되었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이 있었습니다.

레아는 아기를 낳고, 라헬은 아기를 못 낳았을 때, 대신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라헬의 입장에서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니까, 레아 언니는 못 생겨서 사랑을 못 받으니까,

하나님이 대신에 아들을 주셨으니까 언니가 부러워'

그러면서 겸손하게 인정하고 축복하면 될 터인데, 맨날 남편을 덜덜 볶았습니다.


'나로하여금 자식을 낳게 하라'

그러니까 야곱이 화가 나서 '내가 하나님이냐, 왜 나에게 투정하냐?'


하나님께 고집을 피워서 애 낳게 해 달라고 해서

하나님이 불쌍해서 요셉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걸로 그냥 끝내야 되는데, 언니를 기어코 이기겠다고,

언니가 지금 여럿을 낳았는데, 자녀를 더 달라고 하다가, 둘째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내가 교만하지 않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편에 절망을 안 줄수 있습니다.

브닌나가 교만하지 않았으면, 한나에게 절망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남에게 절망을 주었을 때,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그에게 없는 것을 나에게 주셨을 때는, 그에게도 나에게 없는 것을 주십니다.


나에게 이런 것을 주셨는데, 저 사람에게 아무 것도 안 주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받은 것 같아도, 남이 못 받은 것을 내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나 남이 없는 것 같고 있으니, 공평하신 하나님은 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을 절망케 했어도,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그 사람이 나를 절망케 할 것도 더 많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게 복을 줬다고 해서,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을 절망케 했다고, 너무 자신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나 때문에 절망은 했지만, 그것이 절망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절망케 한 사건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한나를 브닌나가 만약에 괴롭히지 않았다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원통함 때문에 부르짖었다' 그랬어요.

그것 때문에 한나는 영통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서 한나가 얻은 것은, 하나님을 얻었어요.

그래서 사무엘을 낳는데 젖 뗄 때, 하나님께 바쳐버립니다.


브닌나가 괴롭히지 않았으면, 사무엘을 낳을 수 없었고,

사무엘이 안 태어났더라면, 사사기 말기의 완전히 영적으로 타락하고 절망적인 시대가 계속될 뻔 했습니다.

사사기 말기에 보면, 부족간에 서로 죽이고..

그런데 사무엘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가 가는 곳마다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이 놀랍게 영적으로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최초로 이스라엘에 왕을 세웁니다.


그 다음에 다윗을, 하나님의 택한 사람으로 분별한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조를 시작케 한 인물이 사무엘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절망이, 그 시대에 희망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녀의 고통, 한 여인의 서러움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것이 놀랍게 그 시대에 놀라운 희망이 됩니다.


한 여인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민족의 문제를 해결해 버립니다.

사실은 나는 절망이라 생각하는데, 내가 절망을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 시대 전체를 치유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절망하고 싶어도 절망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깊으시고, 너무 오묘하셔서

절망한 그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든든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역사를 이끄실 것이고,

그 분은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시니까

내게 있는 절망 속에는, 또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망을 당했건/절망을 남에게 안겨주었건,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을 섭리처럼!" 따라해 보세요. "사건을 섭리처럼 (받아들이세요)!"

저희 교회 표어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내용을 보면, 모든 사건은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앞에 일어나는 그 절망,

또는 다른 사람에게 절망을 준 것 자체로 인해, 절대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시면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실은 절망을 누구에게 좀 준 사람이 있어요.

세례요한입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냥 갑자기 예수님께 모든 인기가 다 돌아가 버립니다.

정말 절망을 안겨준 하나의 케이스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요한은, 자기의 절망을 준 그분을 오히려 높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고, 나는 그 분의 길을 예비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시느냐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11:11

상처 받지 않고, 서로를 아름답게 세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는 나를 절망케하는 사람의 등장이, 반드시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각각의 사명이 있는 것을 믿으시고,

끝까지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서로 축복하십시오.


브닌나가 한나를 축복하고, 한나가 브닌나를 축복했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레아가 라헬에게 '너는 예쁘다',

라헬이 레아에게 '언니는 자녀가 많잖아' 라고 서로 축복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서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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