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니오 요1:19-23, 약4:7-10 출처보기
※'나는 ~이다' 와 '나는 아니오'의 비교가 흥미롭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공관복음서라 부르고, 요한복음을 제 4복음서라 말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공통된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요한은 다른 시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이지요.
공관복음이 인간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인 차이와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도 나지만, 그 문체와 내용도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공관복음이 이야기체로 기록되어 있다면, 요한복음은 설교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공관복음은 특별한 설명이나 메시지 없이, 예수님에 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사건 뒤에는 항상 설교와 강론이 따라 다닙니다.
또한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공생애 마지막 해에 예루살렘에 한 번 입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적어도 3번 이상 예루살렘에 올라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 이다, 예수님
특별히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독특한 관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무엇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나는 “무엇이다.”는 말씀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나는 무엇이다.”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빈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고 난 후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자들은 다시 배고팠지만
내가 주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게 했던 모세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을 고치시고 난 후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빛줄기 한번 보지 못하고 흑암 속에 살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한 후에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세 번째는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길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이스라엘 민중들 앞에서 “나는 선한 목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뒤이어서 “나는 양의 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담을 넘고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목자라고 말씀한 것이지요.
다섯 번째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죽은 지 3일 된 나사로를 살리고 난 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죽은 나사로 한 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한 것이지요.
여섯 번째는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도마가 예수께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하나 밖에 없는 진리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일곱 번째 “나는 무엇이다.”는 요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그 유명한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요, 너희는 가지이다.”는 말씀입니다.
신자들은 예수께 붙어 있을 때에 저절로 열매 맺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아니다, 세례요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이렇게 증언하도록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1번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1등으로 여길 때 “나는 아니오. 예수님이 1등이다"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무엇이다.” 말씀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은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니오.”로 출발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부정을 통해서 예수를 드러내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 같아서
평생을 “나는 아니오.”를 외치며 살았던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신구약을 통틀어 아니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볼 때에도
가장 멋지고 단호하게, 자기 사명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례 요한에 대해 직접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난자 중에는 이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예수님 당시에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로마에 점령당해 나라의 주권은 이미 빼앗겼고, 사두개인들은 로마에 협력하여 권력 잡기에 바빴고,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의 종교 세계를 구축하여, 귀족 종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자동으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지할 하나님도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다 독점해 버린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된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착취의 수단으로 타락했습니다.
백성들은 이 흑암 가운데서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 말처럼 백성들이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말라기 선지자 이후 무려 4백 년 동안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이때 긴 암흑을 깨고 등장한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신약을 연 인물도 되지만, 구약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그는 여느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캄캄한 밤에 천둥과 번개가 소리치는 듯했습니다.
이 회개의 메시지는 온 이스라엘의 가슴을 떨게 만들었고, 눈물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강가로 나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영적인 권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여우같은 헤롯왕도 세례 요한의 말에 벌벌 떨었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궁궐을 빙빙 돌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데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습니다.
거기에는 임금도 종교지도자도 일반 백성도 매 한가지였습니다.
'회개하라'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이 정도가 아닙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인간적인 면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입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 중에 반 이상이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자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세례를 준 자이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세례 받은 사람, 자신의 영적인 제자인 예수님을 가리켜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리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사람의 성정을 가지고는 이런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구약의 엘리야처럼 불꽃처럼 살다가, 사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한 사람입니다.
사람 중에는 이만큼 헌신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올 때,
요한은 이미 온 백성들이 인정하는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말은 왕의 말보다 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모든 관심이 세례 요한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 인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뛰어난 선지자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메시야이다!" 말하더라도 백성들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본문 요1:19절 말씀을 보면 그 상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요한에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까?”
당신이 우리 조상 때부터 기다리던 그 사람입니까?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 보낸 바로 그 사람입니까? 하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유형의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요?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말했을 것입니다.
좀 더 영악한 사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더 많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이단들의 교주들이 바로 이 대목에서 다 걸려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달랐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람이 아니오. 나는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그 사람 아니오.
나는 백성들이 높여주는 그 사람 아니오. 나는 그 사람이 아니오.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나는 메시야를 세상에 소개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넘어가는 유혹입니까?
사람들이 나를 높여줄 때,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줄 때,
자신이 무엇이라도 된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나는 아니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시51편의 말씀은 다윗 역시 “나는 아니오!” 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높여주니까 너무도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왕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한순간도 은혜 없이 살지 못하는
자기 부인의 자리에 설 줄 알아야 죄의 깊은 심연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다윗은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고 높여주니까 자기 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남의 아내를 범하고, 자기 수하의 부하를 교묘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깊은 죄악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는 아니오!”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여
새로운 은총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올 때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갈릴리 촌사람,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요한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적 권위도 버렸고, 제자들도 버리고, 오직 빛 되신 예수를 증거 하는 일만 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에 대해 분명히 알았습니다.
또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니까, 무엇을 해야 되는지도 잘 알았습니다.
1981년 미국 대통령이 레이건이 취임하였습니다.
이때 나토방위 사령관을 지낸 알렉산더 헤이그라는 사람이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불과 몇 개월이 못 되어 불명예 퇴진하고 말았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 달 열흘 만에 정신이상 청년이 쏜 총에 맞아 병원에 후송되었습니다.
이때 헤이그 국무부장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부터 자신이 미합중국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미국 법에 의하면 대통령이 유고시에는 부통령이 권한대행을 하고,
부통령마저 사고를 당하면 하원의장이 권한을 승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헤이그는 국무장관이었지만, 대통령 보다 앞서가는 실수를 하다가 결국 해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신자는 예수보다 앞서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아니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버림받게 됩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고, 자신의 사명을 멋지게 감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먼저, 요한은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요1:6절 말씀은, 요한의 이름의 뜻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세례요한의 출생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지 아니 했으면, 이 땅에 태어날 수 없었던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눅1장을 보면, 세례 요한은 본래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하나님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습니다. 소리는 들리는데 실체가 보이질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고백했듯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의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자기에게 집중되어 오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놓는 역할을 성실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 선언입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세례요한이 주인공 같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보내진 사람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보내진 것을 잘 알았습니다.
심부름꾼은 주인의 심부름 잘 하면, 그것이 사명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꼴불견 중에 하나가 이방이 원님 행세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인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빛이신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로 인해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둠의 상태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그 빛을 소개하고 증거 하는 것이요, 빛을 방해하는 것들을 걷어치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누군가가 그 빛을 막고 있으면, 그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장애물을 없애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사람들이 맑은 눈으로 예수를 보도록 회개를 선포하고,
저들이 죄를 씻고 예수를 만나도록 했습니다. 자기 생명 걸고 이 일을 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 반 이상이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으로 인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한 평생 이 좋은 예수 믿고 살면서 여러분으로 인해 예수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해 본 일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 교회는 총동원전도주일이나 이벤트성의 전도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벤트성 전도는 2천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1980년대부터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의 증인이고, 온 삶을 다해 예수를 증거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를 전했습니다.
단순히 다른 교회에서 하는 이벤트성 전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실제로 내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말씀도 아니었고, 빛도 아니었고, 생명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는 말씀이신 예수, 빛이신 예수, 생명이신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요한은 길이 여기 있다. 빛이 저기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곧 길이요, 빛이다.” 선언하셨습니다.
빛이 여기 있다고 선언하는 사람과 내가 곧 빛이다 말하는 분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과, 스스로 길이라는 것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길 때 “나는 아니오!”라는 고백으로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습니다.
우리도 순간순간 예수님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싶을 때,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자만감에 빠질 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을 때,
세례 요한처럼 자신을 향해서 “나는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아니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야고보 사도의 고백처럼 주님 앞에 자기를 낮추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을 통해서 지고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이 깊어갑니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언제나 자기의 존재감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들 자신 아닙니까?
신자의 삶 속에서 분명한 것은,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면 예수가 감추어집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예수가 드러납니다.
끊임없이 내 속에서 내가 주인 되려고 할 때, 세례 요한처럼
“나는 아니오.” 고백하며 선언하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리하여 자신을 이겨나가고 주님을 드러내는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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