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 - 신자의 말 - YouTube
◈신자의 말 약5:12, 고전4;20 16.02.07설교스크랩, 출처
야고보는 "신자의 성숙한 삶"에 초점을 맞추어서 메시지를 계속 전개하는데요.
성숙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언어입니다. 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여러 부분에 걸쳐서 '말에 대한 교훈'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숙한 삶은, 결국 성숙한 언어의 삶이고
삶의 질을 바꾸는 것도, 결국 말에 있습니다.
◑맹세하지 말라
약5:12a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야고보서는 흩어진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특정 교회에 대한 편지는 아닙니다.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흩어졌지만 유대인들끼리 모여서 사는 작은 공동체.
여기에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맹세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맹세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이렇게 되니까
결국 야고보가,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 다른 어떤 것보다 강조를 하면서, 이제 야고보서를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본문 12절이 왜 들어갔을까 이렇게 생뚱맞아 보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입장에서, 이 부분이 한 번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을,
이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구약을 보면, 유대인들의 공동체 안에는, 오늘 같은 까다로운 계약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당사자들 간에 계약서를 쓰기 보다는, 쓰지 않고 이렇게 맹세를 했습니다.
맹세를 하면서 약속을 지켜왔던 것이죠. 일단 맹세는 곧 보증서류와 같았습니다.
맹세를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했던 거죠.
그리고 맹세를 할 때, 하나님 앞에서 했기 때문에, 증인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이 구약공동체, 고대사회에서의 흔한 계약의 방식이었습니다.
만약에 맹세하고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까지 거짓말에 끼어넣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맹세에 대한 양극단이 있는데,
무조건 맹세를 하면 안 된다 라고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특히 제세례파들인데, 이들은 재판정에서도 증인의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맹세를 하면 안 된다고 믿었는데
이유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킨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은 '어떤 맹세든지 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런 논리를 강조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맹세를 한 번 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된다..
예를 들면 '내가 만약에 다시 술을 마시면 팔목을 자르겠다'고 했으면,
잘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맹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맹세 자체보다
그 맹세를 하게 하는, 근본적인 정신(말의 정직)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맹세를 안 할 수 없습니다.
결혼식 때, 법정에 설 때, 목사/장로 안수식을 할 때 서약을 하는데
일종의 맹세입니다.
<야고보는 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우리가 좀 알고자 합니다.
▲1. 첫 번째는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맹세, 약속, 서약을 지킨다는게 쉽지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오히려 겸손한 그런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라는 단어는, 인간이 쉽게 쓸 수 없는 단어이죠.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말을 아껴서 사용해야 합니다.
너무 자신감에 차서, 거창한 공약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끔 큰 소리를 치고 나면, 나중에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때 너무 과하게 공약을 했구나.'
'나는 절대로 그 사람 같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봐야 압니다.
가끔 남을 흉볼 때가 있습니다. '자식 좀 잘 기르지..'
'나는 저런 자식은 용납 못 해' 자식은 알 수 없습니다.
살다보면 내 능력 밖의 일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말한 것을 지켜!' 그렇게 살 때 살더라도, 장담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어떤 것입니까? 호언장담입니다.
일종의 자기과시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 때,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을 보이려 할때, 우리는 장담을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장담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판판이 깨어지죠.
모든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호언장담입니다.
언제 장담을 하죠? 뭘 모를 때 장담합니다.
장담하는 말을 할 때,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자기'가 있지,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때, 주제파악이 안 되면, 호언장담을 하게 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은 시절에는 사람들이 좀 더 비판적이죠.
그러다가 나중에 날카로움이 점점 무디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이전에 내가 욕했던 모습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반드시''나는 죽어도''절대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나의 사전에는' 이런 너무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시험에 들거나 이미 자신이 거짓말 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공약을 남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거철에 정치인들은 공약을 하죠.
'옛날에 무조건 길 닦아 주겠다. 다리 놔 주겠다..' 단골 메뉴였습니다.
이런 말은, 자의식이 너무 강할 때 나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알면, 장담이 줄어들게 되죠.
너무 멋진 말을 많이 하려고 하면, 사기성이 짙어지게 됩니다. 말에 겸손해야 되죠.
자기의 자신감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강조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는, 사실은 교만으로 되어질 때가 많아죠. 호언장담을 하는 거죠.
교만은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을 수없이 공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장과 허세가 말을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겸손에서 진실함이 나옵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말을 아낍니다.
정직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말이 적은 편입니다.
그러나 무책임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말의 공해를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잘 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쉽게 말을 내뱉습니다.
그래서 말에 거품을 없애야 합니다. 허황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신자는 장황하거나 거창하지 않고, 담백하고 단순하고 진중한 언어를 써야 됩니다.
▲2. 또 우리가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속에 불신앙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맹세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믿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맹세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 자기의 맹세로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번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내가 이런 저런 일을 하겠습니다.'
'이 병만 고쳐주신다면, 이런 저런 일에 헌신해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 일종의 빅딜을 하려하죠.
우리 기도 속에 맹세, 혹은 서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없을수록 서원이 더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다급할 때는 감당하지도 못할 서원을 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고나면, 오리발을 내밉니다.
천국에 가면 아마 특별 전시실이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서원하고 안 지킨 서약들을 따로 모아 놓은..
약속을 남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할 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맹세를 많이 할수록, 신뢰가 떨어집니다.
자신의 말에 대한 신뢰가 낮을수록, 더 수식어가 붙고 강조법이 많이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의 말에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평소에 믿을만한 사람이라면, 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고, 맹세할 필요도 없고,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3. 맹세를 해서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만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움직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항상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도가 강할수록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맹세하다보면, 우리의 의도가 더 부각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가 하려고 해서 되는 일 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늘 살피는 태도를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볍게 맹세하는 일은, 자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나, 또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결론을 내리거나,
단정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왜요?
그 모든 것에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자의 태도를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쉽게 결론 맺는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기의 생각을 더 의지하는 불신앙적인 태도가 됩니다.
자 야고보다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 이 본문은 언어의 진실성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약5:12b
주님이 마5장에서도 비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하고 분명히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옳은 것은 옳다.
예스는 예스, No는 No라고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맹세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 입장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의 진실성이 약할 때 일어나는 현상들은,
뭔가 예스와 NO가 이중적인 그런 용법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려고 할 때
부모님들이 "필요 없다. 가져오지 마라" 이 말은 YES입니까, NO입니까?
며느리가 만약 NO라고 생각하면 큰 재난이 일어납니다.
"어머님, 이번 명절에 어떻게 갈까요, 말까요?"
"안 와도 된다"
이 말은 NO가 아닙니다. 빨리 오라는 말입니다.
YES가 YES가 되고, NO가 NO가 아닌게 문제입니다.
말의 이중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어에는 비언어적 요소가 언어적 요소보다 더 강하게 작용될 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말을 하는데, 그 말 안에 복잡한 그물이 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의를 파악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써야 된다면,
언어의 소통에 아주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진실성입니다. 오늘날 신자인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주제입니다.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면, 진실은 의심받게 됩니다.
◑신자의 삶에 진실성은 생명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인 우리가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진리도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사람이 진리를 말하면, 진리도 함께 도매금으로 거짓으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인격의 기초는, 진실성에 있습니다. 진실성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자기가 말한 것을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필립 부룩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격은 인생의 작은 순간에 만들어진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진실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친구와 약속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집안에서 아주 어린아이와의 약속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서약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서약이나 맹세를 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교회도 직분자들을 세울 때, 여러 가지 서약을 합니다. 참 조심스럽습니다.
왜냐면 그 서약을 자꾸 남발하다보면, 스스로 그 약속을 깨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헌신을 결단하거나 작정헌금을 하게 하는 경우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정직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얘기입니다.
진실하게 이야기하다가, 자기의 명예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때로는 재정적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이 밧세바와의 성적 사건을 은폐하고 살아갈 때,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 죄를 지적합니다.
그때 그가 오리발을 내밀면서, 나단을 도리어 위협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나단에게,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고 만약 말했더라면,
얼마든지 그 순간을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진실을 선택합니다. 죄를 시인하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왔던 명예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진실을 위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합니다.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다 받고 있던 그 순간,
나단의 지적 앞에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곤경에 처하면, 사람들이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이 지은 부끄러운 죄는, 그가 영원히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의 고발에 그는 무릎을 꿇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순간이 다윗의 인생에 가장 빛나는 부분입니다.
그가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 때가, 빛이 날 때가 아닙니다.
가장 진실했을 때, 그때가 다윗의 인생이 가장 아름답게 영롱하게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다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죄를 지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거짓됨인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일은, 악한 사람은 할 수가 없습니다.
정직함은 가장 영적으로 높은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생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실패를 가장 빛나는 역사로 바꾸어놓은 것이 바로 다윗의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정직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줍니다.
시편51편에, 다윗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주신 것은
그의 다른 위대한 업적보다, 그의 진실한 고백에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위대한 일보다, 진실함에 더 집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직하면 손해를 입거나 피해를 입는다는 생각은,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진실을 말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위험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이 가장 안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거짓이 위험합니다.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헌금을 했지만, 거짓말을 함으로써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신약에 초대교회에 거룩성을 훼손하는 이 거짓말을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실함을 중요하게 여기시느냐..를 잘 보여줍니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진실한 태도를 하나님은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약속을 쉽게 깨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공동체나 사회는 약속에 근거해서 돌아갑니다.
명시된 약속뿐만 아니라, 명시되지 않은 묵계적 약속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킴으로써 공동체가, 이 사회가 돌아갑니다.
만약에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서로 모두가 불행하게 됩니다.
신자들은 한 때, 우리는 이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한국 크리스천들은 세상 속에서 믿을만한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래되지도 않았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거짓말 하겠나?'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자는 아주 작은 일에 진실함을 지켜야 합니다. 작은 약속이라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시간 약속도 지켜야 합니다.
시간 약속을 마음대로 깨트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혼서약도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작은 약속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여행을 다녀올 때, 공항에서 세금신고를 할 때
신고품목에 성실하게 신고하는 것도 진실의 훈련입니다.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가를 물어야 됩니다.
여러분, 진실은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나, 사람이 있을 때와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홀로 있을 때 진실해야, 사람들 앞에서도 진실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진실을 점검받게 됩니다.
▲영적권위는 그 사람의 말에 대한 신뢰도로 결정됩니다.
그런데 이 권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향력있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그 분은 말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마 야고보가 이 부분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말한 대로 산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모습입니다.
말과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될 때, 비로소 권위가 붙고, 사람들은 존중하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쉽지는 않고 아주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한 대로 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3장에서 이미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왜요? 선생된 자들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 심판합니까? 많은 말을 했지만, 그 말을 자기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전4: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죠.
말과 행동이 따로 놀면,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위선하기기 쉬워집니다.
◑말의 질을 높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미 말을 다 잘합니다. 아는 것도 많습니다.
요즘 우리는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최고의 과제는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가 다루는 것처럼 실천입니다.
사람들은 말 잘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 말을 잘 하면, 사기꾼 같아 보입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맹세를 멈춰라. 이 말씀은, 말의 질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말의 질을 높이려고 하면,
첫째는 신중해야 합니다.
둘째는 말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책임지지 않을 것이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말에 신중하려고 하면, 혀의 통제가 필요합니다.
이미 야고보는 3장에서 혀의 통제가 거의 힘들다고 부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성령안에서 우리의 혀를 통제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의 훈련에, 이 말의 훈련에 침묵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언어훈련을 없습니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어집니다.
잠언에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그랬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나면, 그 말에 자신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모순을 겪게 됩니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자기의 말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모순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을 적게 하는 훈련, 말을 많이 하면 그 안에 거짓말도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덕보다 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이 들 때, 하지 않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길입니다.
우리는 말의 훈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묵상훈련과 침묵훈련입니다.
이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어는 습관입니다.
10년, 20년, 30년 살아온 언어의 습관이 있습니다.
내가 안 하려고 하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말이 튀어나와 버립니다. 실수하는 거죠.
이 습관을 바꾸는 길은, 훈련 밖에 없습니다.
무슨 훈련을 해요? 침묵훈련입니다.
말은 언제 흘러나오느냐면, 침묵을 통한 언어의 숙성이 되고난 다음에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침묵의 성화가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은 내 안에 든 것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어야 하는 거죠.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이 우리 안에 충만히 채워질 때,
그 말씀이 흘러나오게 되고, 침묵을 통하여 언어를 성숙시키는 작업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오늘 우리의 진중한 언어생활이
결국 우리의 영적인 영성의 과정에서 필수 중에 필수이고,
내 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훈련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거짓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도배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신자의 표지가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 우리가 언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까? 진실함 속에서!
거짓은 어두움이고, 진실은 빛입니다. 진실할 때, 우리가 참된 신자로 서게 됩니다.
진실함이 곧 파워이고, 영향력입니다. 정직함이 최고의 무기이고, 경쟁력입니다.
말의 신용도를 높이는 것이죠.
무슨 다른 신용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말의 신용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신뢰가 쌓이면,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여러분, 말을 하는데, 부연 설명을 하거나, 또 내 말에 대한 증인을 세운다면,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공해요 소음이고, 전혀 영향력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헛된 말을 삼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말한 대로 행동하라고 강조합니다.
진실한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공허할 뿐입니다.
말씀을 듣고 삶에 적용함으로 자신을 증명해 내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요즘 많이 질타를 받는 것 중에 하나는
'예수쟁이들은 말은 잘 한다'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삶을 살면서 말을 잘 하면,
'말은 잘 한다'는 비방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말은 정말 믿을 만하다.'
벌써 우리는 30년 40년 전에 이 땅의 신자들이 들었던 그 신용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어도, 신자의 말은 믿을 만 하다.'
말의 신용도를 높이는 일이, 우리 신앙에 큰 과제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면, 그 사업 속에서 우리의 말의 신용도를 높여야 합니다.
물건을 납품하는 날짜를 정했다면, 그 날짜를 지켜야 합니다.
직장인은 출근시간도, 일종의 약속입니다. 그것을 잘 지켜야 합니다.
신자의 말은, 그 자체가 보증수표가 되어야 합니다.
'계약서 쓸 것 없고, 당신이 말했으니까 그 말을 내가 믿겠다. 당신은 크리스천이니까!'
그 정도가 되면, 여러분 우리의 삶을 통하여 복음이 저절로 증거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자인 우리의 말을, 우리끼리 믿을 수 있는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것이고, 세상속에서 신자들을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무엇을 심판받습니까? 우리가 한 말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마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여러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심판 날에, 말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그냥 공중에서 사라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말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확하게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분, CCTV나 또 많은 핸드폰, 요즘 모든 게 녹음이 됩니다.
요즘 전화도 함부로 할 수 없고,
(*주/ 여러분의 안방에서 은밀하게 한 말도, 근처에 입주해서 24시간 녹음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확인 요망.
대중식당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옛날처럼 도청기 달지 않고, 전파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녹취록이 법정 증거로는 인정이 안 됩니다만. 목회자는 장차 이런 자료를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발달한 IT기술은, 사람이 언제 무슨 말을 했는지, 사람도 다 기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더 정확하게 가능하시겠죠.
그러므로 신자는 우리의 말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믿을만한 보증수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 수식어, 강조법이 붙지 않아도, 그냥 있는대로 말만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세상이 될 때,
우리가 말하는 진리를 세상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이루는 이 작업이, 우리의 평생에 신앙의 가는 길에 과제 중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행위이 이 갭을 줄이는, 이 격차를 줄여가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실천하고,
내가 행동에 책임지지 못할 것이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이 될 때, 우리의 진중한 언어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신뢰도를 높여가고,
실추된 우리의 크리스천의 명예를 이 땅 가운데 다시 세워갈 때,
우리의 삶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영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든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우리의 언어의 진중성, 신실함을 실천해가는 여러분들 되셔서,
우리의 언어가 생명의 언어가 되고, 창조의 언어가 되고,
또 우리의 모든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런 우리의 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세상에 우리의 모든 관계를 건강하게 이루어가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말의 공해, 말의 소음의 시대 속에서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깨어진 우리의 언어를 다시 한 번 회복하며
신자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추스를 수 있게 하옵소서.
말한 대로 행동하게 하시고,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일에
우리의 삶을 힘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진리이신 것처럼, 우리도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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