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입대할 아들에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차려주는 식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유월절 만찬’은 그런 암울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식탁이 결코 아니라,
실상은 ‘예수님과 반드시 다시 만나서 영원히 함께 살 약속’을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신자들은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라는 말보다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열두 제자들과 문자 그대로 ‘한솥밥’을 먹는 식구로서
3년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오셨는데,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이들과 ‘유월절 식사’를 함께 나누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만찬은 그날 밤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초청해 주시는’ 식탁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는’ 식사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신자들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하)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뜻깊고 은혜로운 성례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런 까닭에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전 11:27)는 엄중한 경고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성찬식에 참여하는 성도는 이 예식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진실한 마음자세로써
그 떡과 잔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고 또한 우리에게도 지키라고 명하신
이 ‘주의 만찬’의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이제 고난주간과 정사기념예배를 맞이하게 된 오늘 종려주일에
저는 일견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이 식탁에 담겨 있는 깊은 감동력과 뜨거운 공감대가
과연 무엇인지를 여러분과 함께 되새기고자 합니다.
◑1.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주님’이심을 진실로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즉 이 만찬을 베푸신 ‘주인’이 누구신지부터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막14:17~21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유월절 식사 도중에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실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 중의 한 사람’, 즉 삼년 동안이나 그처럼 가까이 지내왔던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폭탄선언’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심히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께 “내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의 ‘내니이까?’라는 말은 ‘제가 혹 그 배반자가 될 사람입니까? ’라고 염려하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어 성경에 “Surely not I, Lord?”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처럼 “저는 아니지요?”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우리 열둘 중에 하나가 주님을 파는 일이 생긴다 해도,
설마 그 말씀이 저를 두고 하는 말씀은 아니지요? 그렇지요?’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른 열한 제자들은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되물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능청스러운 것은 가룟 유다의 반응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6장 25절에 보면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이미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짜놓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가룟 유다도 따라서 시치미를 뚝 떼고
“내니이까”라고, 즉 “저는 아니지요?”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룟 유다의 말에는 다른 열한 제자들의 말과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마 26:22)라고 물었지만,
오직 가룟 유다만은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때쯤 와서는 예수님을 다들 ‘주님’(Lord)이라고 불렀지만,
가룟 유다만은 아직도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 사회에서 ‘랍비’도 최상의 존칭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지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극존칭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호칭할 때 ‘주’라고는 부르지만
결코 ‘랍비’라고 부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견 사소한 차이 같지만, 열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것과
가룟 유다만 ‘랍비’라고 부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 예수님을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게 된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 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입버릇처럼 그저 ‘주님’이라고, 그야말로 하나님을 호칭하는 이름으로밖에
달리 부를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똑같이 삼년 동안 모시고 배우면서 살았지만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여전히 그저 좀 ‘훌륭한 랍비’ 정도의 존경의 대상밖에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함께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이제 함께 예수님과 마지막 저녁 식탁을 나누는 자리에까지 왔지만,
그 만찬을 베풀어 주고 계시던 예수님을 아는 정도와 믿는 수준에 있어서
다른 열한 제자들과 가룟 유다 사이에는 그처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결정적인 차이였으며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한쪽은 최악의 배반자로 전락하고
다른 쪽은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한쪽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더 좋았을 뻔했던 저주받은 인생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재림하실 예수님과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영원한 축복의 잔치자리까지 같이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외견상으로는 모두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듯이 보입니다.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당에 나와 성도의 회중 가운데 앉아서 같이 찬송하고 같이 기도하는 등,
바깥세상의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 무리에 들어 있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그야말로 ‘한솥밥’을 먹고 있는 사이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의 잔치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먹고 마실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상교회의 ‘성찬식’에 초청해 주시는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똑바로 알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에 초대를 받은 자라면 더더욱 그 ‘주인’(host)을 지극히 높여 받들 줄 알아야 마땅합니다.
즉 그 주인을 오직 ‘나의 주님(Lord)’으로 고백하면서 그 식탁에 앉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훌륭한 인격자이시고 고매한 철학자이시지.’라는 정도,
‘예수님 그 분은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성인이시지.’라는 정도로는
그 ‘주의 만찬’에 초청을 받은 기쁨과 감격을 결코 제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가룟 유다조차도 가졌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랍비’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는 할지라도
그야말로 ‘주의 살과 피를 범하는 죄’를 저지르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주의 만찬’에 초대받을 만한 자격을 제대로 갖추어서 초대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님에게서 비겁하게 도망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부끄러운 죄인들이었음에는
그 첫 성찬식에 참여했던 제자들과 오십보백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고맙고 황공스럽기 짝이 없는 식탁에서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은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죄인의 구세주’로,
‘나의 현세와 내세의 생명까지 온통 주장하시는 유일한 주님’으로 분명히 믿고 고백하면서
그 떡과 잔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의 군주인 로마 황제에게 쓰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순교까지 당했을 정도로 고귀하게 여겼던 칭호,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붙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바로 그 ‘주님’이라는 칭호로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 성도만이 그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만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나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주님’으로 확실히 믿고 고백함으로써,
그처럼 높고 고귀하신 성자께서 나같이 낮고 천한 죄인을 초청해 주시는
실로 은혜로운 성찬식에 늘 감사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곧 ‘나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이신 것을 확신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이제 그 만찬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막14:22~25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그 특별한 만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고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떡과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뀌게 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은유(隱喩)적으로 하신 비유일 뿐이었습니다.
떡을 떼시고 나누어 주신 것은 예수님의 살이 우리를 위하여 찢기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따라서 나누어 주신 것 역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우리 죄를 위한 대속(代贖)제물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이 성립되었다고 24절에서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약속이 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명령하시고 사람은 그것을 순종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다 그 율법을 준행하는 일에 실패만을 거듭했고,
그처럼 그 언약을 스스로 파기해 버린 죄로 인하여 사망의 벌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의로써는 도저히 구원언약을 성립시킬 길이 없었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전과는 아주 딴판의 언약을 새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 쪽에서 율법을 준행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 쪽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라는 것이었고,
따라서 ‘사람 쪽에서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지 못하면’
그 다음으로 ‘하나님 쪽에서는 영벌의 저주로 갚는다’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사람 쪽’에서의 조건은 아예 없어져 버리고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무조건적으로 구원해 주시는,
참 희한한 언약을 만드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언약이 성립이 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그 사람 쪽의 조건을 전부 다 ‘대신’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고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언약,
사람 쪽에서는 아무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도 없고
그저 일방적으로 사람에게 유리하기만 한 ‘새 언약’이 성립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하여 바로 이 ‘새 언약’의 은혜와 감격을 맛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이 고마운 ‘새 언약’이 없었더라면
저나 여러분이나 이 고질적인 죄악으로부터 헤어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도 불순종하고, 용서해 주시면 또 죄를 짓던 영적 악순환이
어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던 악습이겠습니까?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거듭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그저 먼 옛날 어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다른 민족의 모습으로만 보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무력하고 못난 꼴을 보이는 데에 있어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날의 우리들이나 정말이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침마다 각오해도 저녁마다 또 부끄러워지는 날들이
저와 여러분이 지내고 있는 하루하루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 고질적인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까닭에
실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래, 너희들이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아도
본성이 그러니까 결국 안 되지.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서
너희들의 지난날의 모든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한꺼번에 다 해결해 주겠다.
이것이 바로 나와 너희들 사이에서 맺는 새 약속이다.”라고 선언해 주신 후에
십자가를 향해 가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대속을 통한 새 언약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지옥 저주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즉 그 언약의 ‘조건’은 순전히 예수님 쪽에서 다 해결해 주시고
우리는 순전히 그 언약의 ‘혜택’만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정말 고맙고 감격스럽기 그지없는 ‘새 언약’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은혜로운 새 언약을 세워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잊지 않고 잘 기억하게 해 주는 ‘기념물’까지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곧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가 받게 되는 ‘떡과 포도주’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주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25)고 하셨을 때,
그 ‘기념하라’는 말은 ‘기억하라(remember)’ 혹은 ‘상기하라’는 뜻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진열해 놓고 구경만 하는 기념물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받아서 먹고 마심으로써
그 대속의 은총을 자신의 심령 속 깊이 인처럼 새겨지게 하기 위한 아주 특별한 기념물인 것입니다.
더 솔직히 말해서 저나 여러분 모두는 본성적으로 얼마나 둔감한 사람들입니까?
이런 은혜로운 ‘새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그리 쉽게 뭉클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 몸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간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무슨 감동은 고사하고 그저 멀뚱멀뚱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당신의 십자가 앞에서조차 무심하게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떡을 한 조각 떼어 주시면서 “이것을 받아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떡이 저의 이 사이에서 씹히고 가루가 되어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갑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내 몸이다.”라고 일러 주십니다.
‘너 배고프면 밥 먹어야지? 너 하루라도 밥 안 먹으면 살지 못하지?
밥이 너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위장에서 소화되고 영양분과 에너지가 되어야만 네가 살 수 있지?
나의 살이 바로 그처럼 너의 생명을 살리는 양분이 되기 위해서 찢겨야만 했다.
지금 네가 씹어서 삼키고 있는 그 떡이 바로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먹여 주는 내 몸이다.”라고
저의 온 몸이 전율에 떨면서 기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시면류관 쓰신 머리와 못 박히신 손발과 창에 찔린 허리를 보면서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일일이 포도주 한 잔을 건네주시면서
“이것도 받아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포도주의 향기롭고 달콤한 액체가 제 혀를 자극하면서 기분 좋게 목구멍 속으로 넘어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내 피다.”라고 또 상기시켜 주십니다.
“너 목마르면 물 마셔야 살지? 하루는커녕 몇 시간만이라도 물을 못 마시면
갈증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지?
그때 물 한 잔 마시게 되면 정말 시원하고 상쾌하고 온 몸 구석구석에 생기가 나게 되지?
너는 내 피를 바로 그렇게 마셔야만 한다.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네 영혼은 당장 말라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새 언약의 즙을 가지고 너의 목을 축여 주는 것이다.”라고,
그 고마운 보혈의 공로를 저와 여러분의 뼛골에 사무치도록 기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씹을 맛’이 가득 담겨 있는 떡을 받아먹으면서도
그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단맛을 못 깨닫겠습니까?
이처럼 ‘진한 액체’로 채워진 잔을 받아 마시면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곧 ‘나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차가운 머리’로만 기억하지 않고 ‘뜨거운 심령’으로 감지하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제가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하다가 어떤 작은 예배당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예배당의 아래 강단에 ‘THIS DO IN REMEMBRANCE OF M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1장 24절 하반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인데,
흥미로운 것은 ‘Do this’라고 하지 않고 ‘This do’라고 되어 있는 어순이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전자가 맞는 것이고 실제로 최근의 영어 성경들에는 다 그렇게 번역되어 있는데,
그 강단에는 좀 어색하게 보이는 ‘도치법’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King James Version’에 따른 것으로서 ‘This’ 즉 ‘이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찬식은 참된 교회라면 반드시 시행해야 할 필수적인 ‘이것’이며,
진실한 신자라면 꼭 그 의미를 바로 깨닫고 참여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이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제단에는 천주교처럼 신도들이 엎드려 입을 맞추는 화려한 성물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예배당 뜰에는 불교나 이슬람교처럼 높고 거대한 석탑 따위의 기념물도 전혀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떡과 포도주’라는 참으로 소박한 기념물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또한 너무나도 신비하기 짝이 없는 기념물입니다.
우리는 그 떡을 받아먹음으로써 예수님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주님’이시라고 뜨거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잔을 받아 마심으로써 나의 모든 부끄럽고 더러운 죄를 깨끗이 대속해 주시는
우리 구세주의 무한하신 사랑을 인격 깊숙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기독신자에게 무슨 ‘예수님 사진’ 같은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교회 마당이나 강단에 무슨 ‘예수님 동상’ 따위를 세워 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성찬식’만으로도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예수님과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을 만큼 가깝게 앉아서
실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금요정사기념예배’와 다음 주일의 ‘부활절’을 통해서도
바로 이 ‘떡’을 받아먹고 이 ‘잔’을 받아 마시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함께 고백하고
그 ‘십자가 대속’에 진심으로 감사드림으로써, 장차 저 ‘천국의 주의 만찬’에서도 영원히
‘주와 함께 먹고 마시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분류 없음 >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 (0) | 2016.03.31 |
---|---|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0) | 2016.03.28 |
내가 왕바리새인 입니다 / 허운석 (0) | 2016.03.24 |
인생의 3가지 십자가 (0) | 2016.03.22 |
예수님의 피 값 (0) | 2016.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