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버리신 하나님 시22:1-11, 롬12:33-36, 막15:33-39 16.03.20 스크랩, 출처
◑서론
2천년 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부부가 이혼을 하면 자식을 서로 키우겠다고
양육권 소송을 벌이는 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부부가 갈라서면, 서로 자녀를 맡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새싹과 같은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요즘 언론에 연일 보도되고 있는 아동학대가 이런 배경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아동학대가 결과라면 밑바닥에 갈려있는 원인은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걸림돌로 여기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세상의 다른 관계는 다 변질되어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 어떠하든지 이 사랑만은 지켜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됩니다.
옛 어른들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천륜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대역죄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런 패륜을, 이런 대역죄를 저지른 분이 계시는데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식을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인간이 만든 최고의 수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아주 처참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들을 버린 패륜의 아버지가 어떻게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들을 버린 이 부도덕하고 패륜의 아버지를,
이 몰인정하고 낯설기 만한 분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거기에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배어 있기에, 우리는 이 분을 나의 아버지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신앙의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저는 종려주일 아침에
아들을 버리신 패륜의 아버지가 어떻게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지 신앙의 신비를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본론/ 이해하기 힘든 아버지의 부재 不在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절규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실로 충격적인 외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뚫어지게 들여다보아도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비통함 이외에는
다른 뜻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유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고 고백이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한 신학자들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야기된 심각한 사태를 불편해 하며
‘이 외침은 메시야 시편인 시편 22편 말씀을 인용함으로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려는 것’이라 풀이합니다.
구속사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감정마저 신학화 하려한다는 약간의 거부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이 외침은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자녀가,
정말로 견딜 수가 없어서 외치는 절규처럼 들려집니다.
이 외침은 우리를 너무도 당혹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을 스칸달런,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만 해석하면 이해할 수 없어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향해 “당신이 나를 버렸다.”는 원망조의 외침을 내뱉고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를 당혹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이 절규의 외침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이를 경건한 유언으로,
구약의 약속을 성취한 사건으로 대체하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아들의 거친 절규를 복음서 안에 고스란히 담아놓은 까닭은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이 말씀이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주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이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 말이 실제로 발설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는 이 불편한 구절을 성서에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가는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인 원시복음서입니다.
후대에 쓰인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가복음은 현장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토하며 숨져갔다는 사실을 결코 감추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하는 더 확실한 증거를 하나 더 제시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분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빠”라는 호칭 이외에는 그 어떤 호칭으로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성경 그 어디를 예수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른 곳이 있나 찾아보십시오.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여기서만, 십자가 위에서만 하나님을 더 이상 친숙한 말인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그냥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 하나님께 절망한 듯이 인격적 신뢰 관계를 제거해 버리고
단지 직책상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태껏 이런 적은 한 번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자애로우신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아들은 '아빠'라는 애칭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 아버지는 이 처절한 아들의 절규에 반응하지 않고
그냥 못 본 척, 모르는 듯, 숨어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아들이 그렇게 사랑이라고 정의했던 그분이, 자신과 하나라고 증거 했던 아버지가
이토록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버림이 모두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아들은 하나님 우편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고,
그 십자가로 인해 인간도 다시 잃어버린 낙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유와 화평을 위해 십자가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비유가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는데 적절하지는 않지만 도움은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어린 자녀가 너무 심한 고열로 인해 경기를 합니다.
체온이 40도를 오르내리며 깜짝깜짝 놀라며 자지러집니다.
갓난아이에게 열 경기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놀란 부모는 황급하게 아이를 들쳐 엎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체온을 제어 본 의사는 무엇보다 아이의 열을 떨어뜨려야 한다면서 아이를 발가벗기더니
응급실 침대에 눕혀놓고서 얼음덩어리를 갖다가 아이의 몸 전체에 문질러 댑니다.
낮선 사람들이 자기에게 달려들어 차가운 얼음을 문지르자
아이는 울부짖으며 엄마 아빠를 애처롭게 바라봅니다.
부모의 마음은 아이보다 더 속이 타 들어가지만, 아이의 애처로운 눈길을 외면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아이가 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버리시는 패륜의 하나님 아버지도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절규에 귀를 닫고 외면하는 것은, 버림이 장차 저의 영광이요,
우리 모두의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는 현실을 참으로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야 얼마든지 감내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를 버리시다니, 아버지가 이 고통 가운데 있는 나를 포기하시다니,
그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학대가 부모로부터 받는 학대 아닙니까?
세상의 모든 관계는 인륜인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만큼은 천륜 아닙니까?
그것도 시시한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아닙니까?
이 사건은 하나님이 천륜을 버린 사건입니다.
▲사실 아들은 이런 조짐을 벌써부터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전날 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름 짜는 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짜듯 아버지께 몸부림치며 간청했습니다.
얼마나 그 몸부림이 심했으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까지 표현했겠습니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픔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처절한 아픔 가운데서도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아들의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즐겨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아들과 아버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아들의 기도는 아버지의 침묵에 의해 거부당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어쩌면 고통에 대한 공포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더 큰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와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면 그것 하나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는 이 사실에 몸을 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골고다 처형장에서 아버지를 향한 절망적인 외침으로 생애를 마감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골고다에서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 계셨습니까?
아들은 골고다에서 아버지 부재不在를 경험합니다.
아버지의 도움과 간섭이 절실한 시간에, 아버지의 외면과 포기는 아들이 겪는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시간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다는 말입니까?
만약 집안에 자녀에게 참사가 일어났는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신다면,
얼마나 큰 일이겠습니까.
오늘 이 사건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사악한 인간의 손에 하나님의 아들이 살해당하는데
하나님은 그 어디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들의 죽음과 동시에 아버지의 죽음
▲그런데 이 수난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의 주변부 이야기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큰 수난 이야기인 동시에 격정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셨을까요?
자기 편하기 위해서였나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였나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당신의 아들을 버리셨습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사도 바울에게서 듣게 됩니다.
로마서 8장 32절의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의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 비유는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에서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습니다.
골고다 산으로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는 장면과 가장 유사한 장면입니다.
제물이 될 이삭은 장작을 등에 지고 손에 불을 들고,
아버지는 아들을 잡을 칼을 들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비수와 같은 말을 가슴에 꽂아버립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은 비수가 되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전에 자신을 죽이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이미 죽지 않았으면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을 올라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결단하기 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먼저 죽은 사건이 여호와 이레 모리아 산 사건의 핵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를 때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전에 하나님 자신이 먼저 죽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하나님이 먼저 죽으신 사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아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죽음은 단순히 아버지에게 바치는 한 희생제물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수난이요, 하나님 자신의 아픔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해 못할 하나님의 패륜행위는, 역설적으로 그분의 이해 못할 사랑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 죽음을 당하는 성자 안에 계셨고,
그 죽음의 아픔을 함께 감당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성령 안에서 아들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이 구원의 비밀이 깨달아져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동시에 용서와 구원의 사건이 되고,
또한 하나님의 분노의 사건인 동시에 사랑의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신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단면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바라보면 말할 수 없는 신비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서신서 말씀에서 경탄하면서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이렇게 주님의 지상의 삶은 십자가에서 종합이 됩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삶의 요약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부터 출발하는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실패의 사건이요 좌절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수난 당한 사건이지요.
그러나 부활과 승천으로부터 출발하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하나님의 승리의 사건이요 새로운 시작입니다.
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인간의 사건이지만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지만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사건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38절 말씀을 보면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이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백부장은 주님이 운명 하시는 사건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아들에게서,
또 그 아들을 버린 아버지에서 진정한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결코 아들을 버리는 패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와 기꺼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대속의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 그분은 결코 매정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모든 인류를 위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아들을 버릴 수 있는
큰 사랑의 아버지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버리셨고, 그 버림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버린 패륜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깊은 사연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 비밀이 서려 있는 고난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한 주간 하나님이 행하신 오묘한 구원의 섭리에 깊이 잠겨 보십시오.
하나님의 깊고 깊으신 섭리를 가슴 한복판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드십시오.
고난특별새벽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이 비밀을 깨닫고 전율로 떨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하고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십시오.
여러분!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은 버리고 온 인류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이 새겨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앞면을 보면 심판이지만, 뒷면을 보면 용서와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바깥을 보면 아들이 죽는 사건이지만, 십자가의 속을 보면 온 인류를 살리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역설인 십자가의 신비를 내 몸과 마음에서 아로새겨서
깊고 깊은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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