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부활절 요21:1-14 16.03.27 스크랩, 출처
◑디베랴 바닷가에서
오늘 말씀은 디베랴 바닷가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입니다.
인근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헌정된 도시가 있었기에 호수도 그렇게 불렸습니다.
디베랴 바다, 곧 갈릴리 호수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해저 200m에 위치해 있기에 연중 따뜻하고 주변엔 푸른 숲들이 있습니다.
요단강을 통해 사해로 물을 흘러내려 보내기에 물은 짜지 않고 깨끗합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유일한 식수원입니다.
이곳의 물로 사막을 옥토로 만드는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은 음모와 피비린내로 가득한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왔습니다.
본래 어부였던 그들은 원래 직업으로 돌아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빈손이었고 배는 빈 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더니
153마리나 되는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는 에피소드의 전말입니다.
다시금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이런 일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일어났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공생애 때,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허탕이었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오늘 말씀처럼 배에 잠길 정도의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의 제자로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상황은 다릅니다. 부활 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21:14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였다면 뭔가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부활을 경험하기 전이나 그 후나 똑같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3절에서 전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며 우르르 따라나섰습니다.
마치 이 모습은 할 일 없어, 아무 비전도 없이, 고기나 잡자는 태도입니다.
그 중에는 도마도 있습니다.
도마는 부활한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확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너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분명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나가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하며 전해야 될 것 아닙니까?
고기 잡을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밥벌이가 필요해 고기 잡으러 갈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은,
3절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 무기력은 또 무엇입니까?
부활절 이후에도 제자들은, 그 이전과 차이 없는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자들은 평생 동안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고난이나 죽음이나 반대를 무릅쓰고 부활의 예수를 전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이에 (요21장과 사도행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분명히 돌아가셨던 분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문들을 꽁꽁 닫아두고 두려워하던 제자들 공동체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의 몸을 직접 확인하기조차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나의 부활 신앙>으로 받아들이느냐.. 이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은 굉장히 영적인 복음서입니다
‘육적인 떡은 아무 상관 없고 영생의 떡을 먹어라’
‘그냥 물은 마셔도 또 목 마르다 영생의 물을 마셔라’ 하셨는데
부활사건 이후로 요한복음은 육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 요21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물고기를 구워놓고
조반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드셨을 것입니다
도마에게는 직접 자기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었던 자가 육체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여줌을 통해서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시대가 물러가고
성경이 예언하고, 하나님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새생명의 시대가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부활)을 민감하게 포착한 자들,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날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일임을 민감하게 포착한 자들
그것을 인정하는 자들, 즉 부활신앙을 살아내는 자들에게
진정한 능력이 나타나는 거죠
그렇지 못하고, 부활이 현실에 신자에게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들의 부활신앙으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자신의 신앙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이어지지 않으면
주님의 부활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제
봄은 왔는데 내 마음에 봄이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우울하고 겨울의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쓰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직 봄은 아닙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은 현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치면서도 부활의 능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는데
교회가 제대로 된 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여전히 죽음 앞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이 부활 신앙은 어떤 힘이 되고 있습니까?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부활 신앙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고 그래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과학적 논쟁이 매년 부활절마다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성경의 여러 근거를 들면서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쓸데없습니다. 신앙인들이 어떤 증거를 갖다 댄다 한들
그것은 우리의 주장일 뿐이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들이 가진 부활의 신앙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모습, 이 세상의 것보다 영원한 가치를 바라며 사는 삶.
부활이 주는 생명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더 탁월한 설득입니다.
실상 우리들에게도 부활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객관적인 사실로 증명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나의 것이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둔 분들, 불치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정말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도 무기력했던, 어부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진정한 부활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세 번 계속 나타난 이유도, 이런 이유도 있다고 봅니다.
부활신앙을 확실히 믿으라는 것이지요!
부활의 증거가, 오늘날 우리 얼굴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얼굴 빛에서, 죽음을 초월한 부활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의 사명이라 봅니다.
'나의 부활 신앙'이 정말 내 얼굴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불치병이나, 중환자실에 누워있더라도 말입니다.
◑부활신앙
이와 같은 일이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에게도 발생하였습니다.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장례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하소연하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1:21
그러자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고 말씀합니다.
마르다는 이 말씀을 한참 후에 있을 부활의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이 고백이 틀렸습니까?
우리가 믿는 부활의 교리를 지금 마르다는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을 미래로 넘겨버리는 이런 마르다의 이런 신앙을 책망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 26)
▲부활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표징으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소생의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의 기적입니다.
나흘이라는 시간은 잠깐 죽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면서 예수님은 부활의 때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난 나사로는 언젠가는 다시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인간은 죽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부활을 먼 미래의 사건으로 미루지 말고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현재의 부활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죽음 앞에서 외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이것이 현재의 부활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절망이나 두려움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으로 인하여 그는 기쁘고 생명력 있고 담대한 삶을 삽니다.
죽음의 우울이나 어두움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장차 주어질 부활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그 부활의 빛이 현재를 가득 비추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과학에서 찾기보다는, 우리들의 얼굴에서 찾기를 원합니다.
동일하게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죽음의 그림자 앞에 두려워하는 우리를 보며
그들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겠습니까?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던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래야 삶의 변화도 능력도 생깁니다.
부활절 이전에는 몸으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했고 거기서 능력이 나왔습니다.
부활절 이후에는 예수님은 이제 성령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또 밤새도록 수고하고도 빈 그물로 돌아오는 헛수고를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활한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순간 그들의 배는 고기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주는 압도적인 위력 앞에 현대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여전히 마르다처럼, 제자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부활절을 맞으며 내 안에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 생명이 우리 마음과 우리 가족과 우리 민족 위에 가득 드리워
죽음의 문화를 물리치시길 소망합니다.
◑153
부활신앙을 가진 자에게 열매가 주어집니다.
짧은 단화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사람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7절입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누구보다 예수님을 먼저 알아 본 사람은 이 애제자입니다.
우리는 요한이라 추정하지만 정작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제자'라 불릴 뿐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도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라 표현합니다.
교회사에서는 요한이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무덤에 먼저 도착했던 사람도 이 애제자였습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요20:4-5)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를 원합니다.
다만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으며 주님을 사랑했던 자로서만 남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이 애제자의 이름에 우리의 이름을 집어넣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후 부활의 증인이 될 우리들을 내다보며 그 이름을 빈칸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우리들의 이름을 대신 넣으라고. 사랑받는 제자는 늘 부활의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매우 급합니다. 예수님이시란 말에 겉옷을 두르고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마 다 벗은 채 어부질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주님을 만나 뵈러 가야하기에 옷은 입어야 하겠고
주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 노 저어 가는 것은 느린 것 같고.
베드로는 그래서 겉옷을 두른 채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는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는 이번에는 다시 자기 배로 달려갑니다.
그물을 끌어올렸습니다.
거기서 고기 몇 마리만 가져오면 될 것을 베드로는 고기를 일일이 세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무려 153마리.
153마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모나미 볼펜 153에 쓰인 숫자의 비밀을 풀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실제 잡은 고기 숫자일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사건이었기에, 베드로는 그 숫자를 세었고 정확히 기억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보다 의미심장한 해석들을 내어놓습니다.
어떤 학자는 당시 존재하던 바다에 살던 물고기의 종류가 총 153마리 라고 해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상징이지요.
누구는 요한 공동체이거나, (바닷가의) 일곱 사도들에 의해서 전도된 성도들의 수라고도 합니다.
숫자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물고기가 단순히 물고기만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그물이 가득할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부활의 능력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자신의 신앙조차 감당하기 버거웠던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부활신앙이 그들을 능력의 사람들도 바꾸었습니다.
▲11절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말씀도 ‘성도의 견인’으로 해석합니다.
주님께서 한 번 잡은 고기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한 번 주신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의 손을 놓을 때가 있지만
주님의 손은 결코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개혁교회의 기원이 되는 칼빈의 주요 교리를 다섯 개로 정리하고
영어에서는 이것을 T.U.L.I.P.(튤립)이라 부릅니다.
첫째는 ‘인간의 전적부패(Total Depravity)’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내용입니다.
둘째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입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가운데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셋째는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곧 예정된 백성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합니다.
넷째는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입니다.
이는 구원이 하나님 편에서 주권적으로 전적으로 주어지는 은혜, 곧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성하시고 선택하시고 불러주신 자는
평생토록 이 구원의 은혜에서 끊어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믿음의 든든함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실수하고 내가 연약하면 무너지는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를 붙잡고 있는 부모의 손처럼 결코 놓지 않습니다.
아이는 힘이 없어 실수할지라고 부모의 손은 실수가 없습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결코 그 손을 놓지 않겠다는 사랑의 의지입니다.
우리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 영혼을 흩으시지 않고 굳게 붙잡으십니다.
때가 되매 우리 잃었던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 안에서 마지막 순간에 평안히 우리 영혼을 내어놓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의지와 믿음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과 성실함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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