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3 고난의 공감 (사 53:1~6) - 이한영 교수 YouTube
◈고난의 공감 사53:1~6 16.03.23.스크랩, 출처
◑서론 '손자야, 인생은 고난이란다!'
▲고난주간에 부족한 종을 초청해주신 교회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할머니는 1910년 한일합방 되던 해에 태어나셨어요.
저희 아버지가 4살 때, 할아버지께서 일본으로 가시는 길에 병이 나셔서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셨어요.
그러다가 625사변이 일어나서, 비껴갈 수 없는 그러한 파란만장한 세월을 사셨습니다.
아마 저희 할머니 또래의 어르신들은, 똑같은 그런 격랑의 세월을 지내셨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아들 하나를 양지에서 잘 키우려고 굉장히 노력하시고
또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사셨습니다.
독자인 저희 아버지는, 딸 넷에, 아들인 저 하나를 낳으셨어요.
그래서 저희 할머니가 얼마나 저를 사랑해주시고, 머리를 많이 쓰다듬어 주셨는지
덕분에 제 머리 숱이 지금 많이 빠져 있습니다. 하하하
제 할머니는 원래 불교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평생에 매일 밤 철야기도를 하셨어요.
제가 어릴 때, 밤만 되면 이불보따리를 가지고
저를 데리고 교회에 기도하러 가셨어요.
저를 강대상 앞에 누이시던지, 추운 날엔 난로 옆에 누이시고
♬마귀들과 싸울지라♪찬송을 부르시고 기도를 드리셨어요.
할머니는 매년 두 세 번 성경을 통독하셨는데요.
그런 할머니께서 46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는데,
미국에서 돌아가실 즈음에,
그때 한국에 나와있는 제게 자주 전화를 하시면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 가지인데요,
"한영아, 너 성경 많이 읽고, 강단에서 헛소리 하지 마!“
"인생은 고난이야, 고난! 고난이 싫으면 가서 (무덤에) 묻혀!"
타락한 인류, 해아래 인생은 고난입니다.
여러분,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박식해도
산을 넘으면 또 산이고,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피해갈 수 없는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며,
그 고난과 우리가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봅니다.
◑이사야의 고난과 그 신비
인생이 신비인 것처럼 또한 고난도 신비입니다.
신비mystery라는 말은, 합리적인 정답이 없는 것입니다.
꼭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비는 초월적인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실체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묵상하며, 저는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그 초월적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 그 신비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금부터 약 2700년 경,
약 47년동안 긴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던 이사야가 기록한 본문입니다.
그는 조국 남유다가, 지금 고대근동의 거대 제국들에 포위당하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진 격동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반도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은, 초기부터 평탄치 못했습니다.
사6장에 보면, 스랍들이 모신 그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환상중에 보게 됩니다.
그 충만한 거룩에 비해서,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하고 부정不精했던지
본능적으로 고꾸라집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면서 자기의 부정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스랍들이 와서 그의 부정한 입을, 제단에서 가져온 숯불로 정화시키고
천상에서 소명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영광스러웠던지, 그냥 그 소명의 목소리를,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의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가거라. 그런데 가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굿 뉴스가 아니라, '가서 왕과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말씀이었죠.
아마 이사야 선지자가 그 순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소명은 영광스럽지만, 사역은 고난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일하다 보면, 신학생들이 1학년 때 특별히 개강 첫 주 때는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힘차게 찬양합니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 쯤 되면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유학가게 하옵소서♪로 바뀝니다.
소명은 영광스럽지만, 사역은 고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개인적이며 사회정치적인 환경 속에서
갖은 고난과 시련을, 그 받은 소명 때문에 겪게 됩니다.
결코 쉬운 사역이 아니었죠.
그는 생전에 같은 동포인 북이스라엘의 비참한 멸망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언했는데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노년에는, 앞으로 함락될 그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함락의 비전을 보게 됩니다.
또한 그것을 선포해야하는 정말 쉽지 않은, 어려운
그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요.
사7:3절에 첫 아들 이름은 '스알야숩'으로 나옵니다.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The remnant shall return
이는 바벨론 포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7장 본문을 자세히 살펴서 문맥에 따라 해석하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함락으로 인한 민족적 유배를 암시'합니다.
*앗수르의 포로에서,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뜻인 듯
8:3절에 보면, 이사야의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로 짓게 하십니다.
'곧 신속히 약탈될 것이며, 빨리 포획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사야의 고국인 남유다가,
지금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앗수르 제국도 멸망할 것이고,
*사7장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국의 연합으로 압박 받고 있던 중에
그 위쪽의 앗수르와 손잡고, 북왕국-아람 두 연합국을 대항하는 정황.
그 제국이 무너지면, 신흥제국인 바벨론이 일어나서
지금 겨우 살아있는 남유다도, 곧 멸망할 것입니다.
그 멸망의 임박성을 암시하는 의미가, 그 이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의 두 아들의 이름이 모두
남유다의 타락과 그로 인한 되돌릴 수 없는 멸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아들을 얻는다는 것은 가장 기쁜 일이었죠. 희망을 갖는 것인데,
그러나 이 두 아들의 이름은 절망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비극이었죠.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민족의 패망이 상기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고난이,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원하고 바라는 것(자녀)으로부터 올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좋은 소식보다는,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말보다는,
왕들과 그 백성을 향해, 그 타락의 현실을 지적하고요,
하나님의 심판을 항상 선포해야하는
아주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아주 인기 없는 그런 사명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탈무드를 읽어보면, 이사야는 노후에 므낫세 왕의 박해를 받아서
나무통 속에 넣어져서, 톱으로 반 토막으로 잘려져 순교한 것으로 나옵니다.
히브리서에도, 이사야의 죽음을 이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히11:37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비극적인 삶은, 우리가 절대 부러워할 것이 못 되죠.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살고 싶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제 아들들의 이름을 저주라고 불러주소서,
조국의 멸망을 선포하고, 반토막으로 제가 잘려 죽겠습니다.' 혹시 그런 분 있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년 동안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사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우리가 진정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사야서의 본문을 기반으로 작곡한 헨델의 오라트리오 <메시야>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이사야는 죽을 고생을 당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고난 받는 이사야의 상황을 우리가 읽으면서,
어떻게 우리는 일어서서 좋다고 박수를 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것은 '신비'입니다.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신비
이사야서는 아주 복잡한 역사문화적인, 또한 문학신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이사야서에 기록된 그 고난의 신비를
"공감"이라는 측면에서 한 번 살펴보면서
그 신비의 실마리를 부분적으로 한 번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인 1~39장은 영적으로 부패하고 강퍅해진
그 이스라엘과 열방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귀를 꽉 막고 있고, 마음을 완강하게 닫고 있는 백성들과 왕들에게
간절한 회개의 촉구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아주 중점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인 40~66장은
'남은 자'(히. 사리드 1:9)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를 아주 세밀하게 명시합니다.
전반부의 절망에더 불구하고, 후반부는 소망의 모티프가 되시는,
그 구원을 성취하실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 즉 그리스도의 도래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예고합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특별히 63~66장에서 밝혀지는 바로,
그 메시야의 아주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그런 구원을 바라보면서,
아주 소망가운데 그 당시의 시련을 인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야는 히브리어로 예샤야후인데, '여호와의 구원'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읽다보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아주 쉽게 풀 수 없는 난제가 하나 나옵니다.
이렇게 절망스러운 이스라엘과,
그리고 지금 고통가운데 있는 이사야가, 아주 자신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그 소망과 구원의 메시야가
44~54장에서, 너무나도 초라하고 나약하고 고난 받는
그런 종의 모습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나도 힘든데, 나를 구원할 자의 모습이 나보다 더 비참한 모습입니다.
*미스터리입니다.
특별히 41장부터 시작해서 53장까지, 하나님은 미래의 메시야를
17번이나 '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히 '에벧'
더욱이 그 종은 고난의 종입니다. the suffering servant
특별히 52:13~53:12절은 그 종의 고통스러운 모습과 고난을 적나라하게
아주 그래픽하게(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52: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이사야가 본 메시야의 모습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은
'상하였다'고 했는데
얼굴형태가 아주 알아볼 수 없도록 손상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는 나를 구원하러오신 분이, 얼굴이 다 손상된 분이십니다.
53:2절에,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좀 못 생기셨어요.
제 상상인데, 못 생기셨는데 구수한 아저씨 모습 같습니다.
53: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53:5절에 '그는 찔렸고, 상했고, 징계를 받았고, 채찍에 맞았다’
53:7절에 '그는 곤욕을 당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 사53장을 보시면
'그 분'과 '우리' 라는 두 단어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53:2절에 '그 분은 오히려 구속의 대상인 우리가 보기에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나를 구속하신 그 분이, 구속의 대상인 내가 보아도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자의 모습이, 구원을 받아야 할 나보다 더 형편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나를 돕겠다는 사람이 왔는데
보니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입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53:3절에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다'
53:4절에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느니라'
이사야가 계시를 통해 목격한 메시야는, 비참하게 고난 받는 초라한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런 분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며,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다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너나 잘 하세요!' 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비꼬았습니다. '너나 구원하세요!‘
마27:39~44절에 보면, 지나가던 자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리고 예수님 옆에 달린 죄수까지 모두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고 희롱합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합니다.
'남을 구원한다면서,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너나 잘 하세요’
▲물론 교회를 조금 다닌 사람들은, 이 고난의 종의 난제(미스터리)를
신학적으로 '대속의 고난'이라고 쉽게 이해합니다.
본문 사53장에 보면, 그 분의 고난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진 것이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 것이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한 것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습적이며 지식적인 이해에 앞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하셨다' 거기에 앞서서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필이면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오셨는지
그 성육신에 보다 더 본질적이고, 과정적이고, 인격적인 면들을
이 고난주간에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고민해 봤습니다.
왜 하필 그런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저는 이 고난의 종의 모습에서, 그 결과적인 대속에 앞서서
고난 받고 있는, 우리와 공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냥 '대속하셨다'가 아니고요,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시고...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서 그냥 초능력자로 단순히 우리를 호령하시고
'그래 너는 고난 받아라.' 또는 '너 고난 받고 있구나, 그러니까 약 먹어'
이런 식으로 방관하거나, 정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냥 천사들을 보내셔서, 간접적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의 자리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어요.
우리의 고난을 공감하시고, 똑같이 아파하시고, 아니 더 아파하시죠.
실제로 우리의 질고(질병)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함께 당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인으로 오시는 게 아니고, 종으로 오셔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정답이 아니라, 공감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지금 브뤼셀에서도 폭탄테러가 일어나고 있는데요
왜 이렇게 종교의 이름으로 잔인한 테러가 일어날까요?
그것은 모든 종교가 고난의 공감과 섬김보다는 *설교제목
뭔가 정답을 주려하는 것이죠.
눅13장에 예수님께서 18년 동안 몸을 펴지 못한 한 여인을 안수하시고 치유하십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을 내면서, 안식일날 일을 했다며 무리를 선동합니다.
안식일날 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답 이전에 그 여인의 고통, 고난을 공감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니? 얼마나 힘드니?'
▲우리가 자녀들 키울 때 어떻게 키우십니까?
정답을 줍니다.
'이거 하면 안 돼. 너 공부 잘 해야 돼. 게임할 시간에 공부하면 좋은데..'
'아빠 나 힘들어!‘
'힘들긴 뭐가 힘들어? 내가 어렸을 때는, 너보다 더 힘들었어!'
그건 정답입니다. 그런데 아마 예수님 같으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아들/딸아, 얼마나 힘드니?‘
저희 어머니는 제게 그러셨어요.
'한영아 얼마나 힘드니? 공부하지 마, 쉬어!'
여러분, 왜 정치계가 싸울까요? 정답 갖고 싸우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 먹고, '네가 악하고 내가 선하다.'
부부싸움도 정답의 싸움입니다. 공감할 때는 안 싸웁니다.
어떤 때는 어린아이들이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제가 한 번 아내와 정답 싸움을 했어요. 크리스마스 며칠 전이었는데
그래서 그냥 서로 말을 안 하면서, 전화로 서로의 주장이 맞다고 정답을 주장했습니다.
제 딸이 그때 한 13살 정도였습니다.
제가 우리 딸한테 그 문제를 나누니까
'아빠, 나한테 맡겨요. 내가 해결해 줄게요'
'아빠는 꽃을 하나 사세요. 그리고 엄마를 무조건 차에 태워서 집에만 데려오면
나머지는 내가 다 해결할게요'
'네가 어떻게?'
'아빠, 나를 믿어 보세요!'
그래서 제가 꽃을 하나 사서 아내를 맞이하러 갔습니다.
그때 아내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내는 공항에서 꽃을 든 저를 딱 쳐다보더니 '흥!' 하고 얼굴을 돌려버립니다.
제가 꽃을 들고 따라갔죠.
아내는 어떻게 택시를 타지 않고, 제 차를 탔습니다.
집에 와서 '띵동' 누르니까 문이 딱 열리는데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촛불들이 쫙 켜져 있고, 그 다음에 벽에 큰 종이에 가족사진을 막 붙여놓고
그 밑에 '헤어지든지 말든지 Break it up or make it up'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아내는 '아빠, 우리가 다투어서 분위기 깨지 말자!'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하룻밤 자고, 내일 또 아내가 그 문제를 끄집어낼 줄 알았는데,
아내는 다 잊어버렸더라고요.
여러분들, 정답이 정답이 아닙니다. 공감이 정답입니다.
▲이사야가 본 메시야는 단순히 고난 받는 자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고난을 공감하시고, 공유하시고, 우리같이 되어주셔서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며,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공감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경은 그 어디에도 고난 그 자체를 사모하고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아픈 것입니다. 그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왔을 때, 그럴 때 우리가 정답을 찾기 보다는
우리의 태도가 어때야 함을 분명히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프죠. 절망스럽죠. 탓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파하세요. 절망하세요.
또 어떤 사람들은 극복에 집착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반응을 넘어서, 이 고난 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의 신비, 이러한 반응들을 넘어서,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더 나아가 그 고난을 통해서, 고난 받는 자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공감하고,
그들을 섬길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믿음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사업이 힘든 사람들에 대한 "공감"
저희 아버님은 88세이신데, 어머님은 87세이고,
미국에 사시는데 1년에 한 번씩 봄에 한국에 오십니다.
아들 집에 오셔서 한 달씩 계시는데, 지금 와 계십니다.
그런데 오실 때마다 제가 느낀 게 있어요.
며칠 전에 제가 어머님 모시고 양평에 갔는데, 잠깐 휴게소에 차가 섰습니다.
어머니는 연세도 많으시고, 당뇨도 있는데
저는 생과일 쥬스를 사러 갔는데,
어머니는 도너츠 집으로 이렇게 가시더니, 많이 사오셨어요.
저는 우리 어머니가, 자기는 다 먹지도 않을 도너츠를, 왜 많이 사오는지 압니다.
왜냐면 그 도너츠 집에 지금 장사가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식당을 가실 때는 이렇게 보다가, 맛있는 집에 안 가십니다.
'야, 저기에 너무 차가 없다. 저기로 가자'
그 날도 그 도너츠를 이만큼 사오신 이유도, 마찬가지 이유였습니다. 그 집이 장사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 모습을 여러 번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목사인데, 맛있는 집만 찾아다니는데,
안 되겠다. 앞으로 나도 장사가 안 되는 집으로 찾아다녀야 되겠다'
오늘 점심 때 기회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식당을 찾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당 찾기도 쉽지 않았어요.
여러분도, 평소에 장사 안 되는 집을 좀 찾아다녀 보십시오.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기 위해서입니다.
맛집이 맛있어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누나의 고난을 통해, 내가 "공감"을 배우다
저희 집은 딸 넷에 아들 하나, 아들은 바로 저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릴 적부터 사랑을 무척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제가 넷째인데, 셋째 누나가 있습니다. 이름이 명자입니다.
명자 누나와 제가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미국에 이민가서) 고등학교 때, 타주에 가서 공부를 했거든요.
나이는 차이나지만, 제가 월반을 해서, 같은 대학에서 동급생으로 같이 공부했습니다.
명자 누나는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요.
저는 그냥 밤새도록 기타 치다가, 책 한 번 쓰윽 훑어보고 시험보는 스타일이고
누나는 책상에 딱 앉아서 10시간이고 계속 공부했습니다.
생물학을 누나와 같이 들었는데,
그 교수님이 여자 분이셨는데, 별명이 '마귀할머니'였습니다.
학점을 C이상 주지 않았습니다. 저도 C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누나는 A받았습니다. 아주 인물도 잘 생기고,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 하니까,
미국 남학생들이 얼마나 벌떼처럼 달려드는지, 제가 대학교에서 누나를 지키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누님이 시집을 갔습니다. 얼마나 귀한 누나입니까.
시집을 갔는데, 임신을 못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요.
1년, 2년, 4년 막 지나니까, 그 다음에 그렇게 임신을 원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안 주시면 그냥 안 주시는 대로 만족하며 사십시오.
너무 억지로 꼭 달라고 떼쓰거나 서원하지 마십시오.
우리 누나는 너무 애를 갖고 싶어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게 전화가 왔어요.
'한영아, 내가 백일 기도했는데, 드디어 임신 되었다.'
그래서 제가 마치 임신한 것처럼 기쁘더라고요.
그러고 한 3개월이 지났어요. 또 전화가 왔는데
'한영아, 내가 아파 죽겠어. 도끼로 내 다리를 자르는 것 같애'
제가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주말에 달려갔습니다. 보니까 누나는 아파서 어찌할 바를 몰라요.
저는 당시 인턴 의사였고, 의학적으로만 생각해 보니까
'혹시 척추에 암덩어리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차마 암이라고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누나, 내일 꼭 병원에 가. 그것도 대학병원에 가!' 그러고 비행기 타고 저는 돌아왔어요.
월요일에 누나는 병원에 갔더니, 산부인과에서
'너무 특별한 애기라, 자궁이 척추를 눌러서 아픈거라'고 진단했습니다.
누님은 그 말을 믿고, 이 하나님이 주신 아기, 백일기도를 해서 얻은 아기라서
그래서 이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타이레놀 같은 진통제 하나 안 먹고 통증을 견뎠습니다.
사실 그게 사이코마 라는 암 덩어리가 척추 뒤에서 뼈를 부쉬면서
척추의 모든 신경을 짓누른 것입니다.
여러분 이빨 신경 아픈 거 아시죠? 그건 상대가 안 되는 아픔입니다.
생뼈를 부수는 아픔입니다. 앞에 임신한 배는 불러오는 가운데요.
우리 매형이 막 "병원가자, 약 먹자" 그래도,
저희 누나 성격에 '하나님이 주신 아기야! 나는 타이레놀도 안 먹을 거야' 하면서 참은 것입니다.
8개월이 되어서 누나가 혼수상태에 들어갔는데요,
엑스레이를 찍어보니까 척추와 두 다리 남고 뼈가 다 부서졌습니다.
미국의사들이 놀래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혼수상태에 들어가고,
그 아이는 8개월 만에 조산시켜 빼냈는데, 살았어요. 그 아이가 금년 4월 30일에 시집갑니다.
누나는 혼수상태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의사들은 코카인을 섞은 강한 진통제를 주면서, 함께 치료방향을 의논을 했습니다.
결국 호스피스(편히 돌아가시게)로 방향을 정했는데,
의사는 우리 가족들에게 2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는 레이저로 목 척추뼈를 잘라서, 목 아래로 아무 통증이 없게 하자.
-또 하나는 전신마취를 시키자.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어서, 전신마취를 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날이 마침 7월4일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마취하는 날, 우리 가족들은 병원으로 새벽에 달려갔습니다.
전체마취를 하면, 4~5일지나면 폐가 스톱됩니다.
우리 가족들은, 그 전날 묘지를 다 마련하고, 장례식까지 다 준비했습니다.
병원에서 아버지가 제게 말했습니다.
'한영아, 네가 마취의사를 따라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누나 손 잡아주고 기도해 줘!'
'아버지, 가족들은 마취실에 같이 들어갈 수 없어요.'
'그래도 들어가봐!'
그래서 마취의사에게 사정을 부탁하니
그는 Why not just come in! 그래서 같이 들어갔습니다.
저도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간호사도 둘이 왔습니다.
막 마취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누나가 눈을 떴습니다.
제가 마스크를 쓴 상태로 '누나, 누나!' 불렀더니
누나가 '내가 배고파!' 했습니다.
그때 마취의사가 '그녀가 뭐라고 말합니까?'
제가 '(한국말로) 배고프다'고 그랬습니다.
마취의사가 '배고픈 사람을 마취하면 안락사가 됩니다!
일단 오늘 마취는 캔슬하고 내일 다시 의논합시다'
누나는 그 날 병실을 나와서,
그런데 27년을 더 살다가, 몇 해 전에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청중들 일동 박수) 짝짝짝짝!
여러분이 지금 박수쳐 주셨는데, 그 27년은 정말 고난의 세월 27년이었습니다.
1년에 6~7개월간 병원에 있었고, 소변 한 번 보려면 얼마나 힘든지요.
일년에도 몇 번씩 수술을 하고, 대장을 옆으로 빼내고
살이 썩고 뼈가 나오고, 그 다리가 계속 아프고, 걷지도 못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죽지는 않아요.
그 마취의사는 처음에 말하기를 '그녀는 일주일 정도 살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의사는,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였고 연세가 많아서요.
누나는 27년을 더 살았습니다.
의사가 일주일 산다고 했으니, 처음엔 그렇게 알아들었죠.
누나는 '내가 일주일 사는데,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겠다'고.
그래서 우리 매형이 누나를 업고 가서, 그 아픈 몸으로 교회를 청소하다가
27년을 계속 청소했습니다.
그 아픈 몸을 가지고, 또 아픈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루게릭 병 환자에게 찾아가서 전도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루게릭 병 환자는 고개밖에 못 움직이는데
우리 누나는 그와 대화를 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성 루게릭 환자와 이야기하는데,
눈빛으로 서로 소통하는데, 누나는 '지금 이 여자가 임신했다'고.
그래서 조사해보니까 임신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서도 전도하고, 거기 수인들을 섬기고
또 영어통역 해주러 다니고, 휠체어를 타고 사회복지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을 연결해주고,
한 가지 에피소드는, 복지비를 신청하러 구청에 가면
거기 직원이 '누가 도움을 받으려 왔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왜냐면 누나는 휠체어를 타고, 사회복지가 필요한 사람을 옆에 동행해서 다녔거든요.
저희 매형은, 누나(자기 아내)가 마치 오늘 처음 아픈 것처럼
27년을 똑같이 일관되게 누나를 사랑으로 간호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사랑해 주었는지요.
"매형, 휴가를 좀 떠나세요. 제가 누나를 며칠이라도 돌볼게요."
"아니야,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는데.. 나는 안 힘들어!
그리고 남이라도 다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하는데
바로 사랑받을 사람을 내 아내로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해?"
하루 이틀이 아니라, 27년을 그렇게 한결같이 아내를 돌보고, 한 번도 얼굴 찡그리지 않고, 사랑한다고..
우리 누나가 고개를 돌리면 이쪽에도 성경을 붙여놓고,
저쪽으로 돌리면 저쪽에서도 볼 수 있도록, 성경을 붙여놓곤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말했어요. "한영아, 너는 신학책 그런 것 그만 쓰고, 이런 책을 좀 써 보아라.
제목은 <이런 사람도 있다>이다. 네 매형에 대해서 책을 좀 써 보아라"
그리고 20페이지를 아버지가 손수 타이핑을 해서 제게 주셨는데,
그 원고가 10년동안 지금까지 제 서랍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매형은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랑이 싹 텄습니다.
여러분, 제가 어느 날 의사일 때 병원에 있는데
퇴근하는 길에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떤 소년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제가 한참 젊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누나가 아프니까, 공감이 가요.
'아, 쟤가 얼마나 아플까? 가족은 어떤 상황일까?'
그래서 병실로 들어가봤더니 한 16세쯤 되어보이는 소년인데,
암덩어리가 눈 뒤에서부터 커지니까, 눈알이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아무 느낌이 없이 제가 퇴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보자, 누나가 아프니까, 공감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집으로 와서 드러 누었는데, 잠이 안 왔습니다.
다시 옷을 입고 밤10시에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병실에 들어가니까, 어머니, 할머니, 그 소년이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제가 '얘야, 나는 네 담당의사는 아니지만,
나한테 누나가 한 명 있어.' 그러면서 우리 누나 이야기를 막 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 친구가 그 아픔 가운데서도 얘기를 들으면서 웃어요.
성령님께서 거기에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내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인생은 왔다가 가는 건데
정말 고난이지..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셨어.
그 분은 우리를 대속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어.
그 예수님을 영접하면, 너는 고난 받고, 나는 건강하지만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우리 함께 만나서 살거야.
너 예수님을 영접 할래?'
그랬더니 이 친구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할래요'
그래서 제가 그 할머니와 어머니께, '자 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같이 영접해야 천국에 같이 가시죠.
제가 혹시 기도해도 될까요?' 그러니까 기도해 달래요.
그래서 기도를 했어요. 제가 평생 해 보지 못했던 것을, 그 고난의 공감 때문에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어요.
그러고 나니까 그 방이 환해지는 것 같아요. 얼마나 기쁜지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자고,
그 다음날 새벽에 병원에 출근해서, 그 병실을 들러보니
그 날 새벽 3시에 소년은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다음에 천국가서 우리가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아파만 하면, 그것은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합니다.
고난에 대해 정답만 추구하면, 그것은 억압이나 폭행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조명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웃의 고난에 우리가 동참하면,
그것은 공감으로 승화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신비입니다.
정답이 아닙니다. 신비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서
열매를 맺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고난에 공감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신 주님!
그 십자가의 고난을 저희들이 이 고난주간 뿐만 아니라
남은여생에 항상 마음에 새기며, 저희가 고난 받을 때
주님께서 함께 고난 받으심을 생각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이웃의 고난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는
그러한 복된 저희들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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