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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감정 솔루션 3 차별

LNCK 2016. 4. 6. 13:34

◈크리스천 감정 솔루션 3 차별          38:6~11            스크랩, 출처

    

      

서론

여러분, <노예 12>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노섭 Northup 이라는 흑인 음악가가 나오는데,

음악가로 살다가 납치를 당해서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실존인물이랍니다.

 

노섭이 12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는데,

첫 번째 팔려간 주인은 매우 착했지만, 개인적으로 어려우니까 노섭을 팔아넘겼는데,

아주 포악하고 못된 주인을 만나서 짐승취급을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삽니다.

 

그러다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1장을 보냄을 통해서

이제 노예생활을 청산하게 됩니다.

 

그 영화의 내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도

노예라고 굴레씌워져가지고, 어떤 희망도 사라진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아픔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는 차별 아닌 차별, 은근한 차별들을 많이 겪게 되고요.

특별히 지금 전 세계적으로 차별의 문제가 폭동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차별이라는 것은, 한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 대한 차별,

이런 것들도 그 아이들에게는 평생 한이 되기도 합니다.

 

차별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상처로 남게 되는데,

그 상처를 어떻게 딛고 설 수 있는가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차별 받은 여인 다말

 

저는 이제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아주 극단적인 차별을 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38장에 나오는 다말이라는 여자입니다.

유다의 며느리죠.

 

그 여인은, 자기 남편이 죽으면서부터 인생이 너무나 비참해집니다.

그의 남편이 죽고 나서, 이제 그 시동생에게서 씨를 받아서

이스라엘 법에 의해서 자녀를 낳아야 되는데,

그 오난이라는 시동생이, 씨를 안 주고 땅에다 설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형수를 육체적인 쾌락의 도구로만 썼지,

정말 그 형을 위해서 자녀를 물려줘야 되는데, 그것을 거부한 것이죠.

그렇게 다말을 이용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악하게 보셔서, 오난을 죽이십니다.

 

시아버지인 유다가 보니까, 3남 셀라가 있었는데,

그를 다말에게 줘야 되는데, 또 죽을까봐

그때부터 다말을 '차별'하기 시작합니다.

 

다말을 친정으로 쫓아 보내버리고, 다시는 셀라를 줄 생각을 안 한 거죠.

이스라엘 나라에서 '과부'라는 것은, 희망이 없었어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가장 극단적인 차별을 받는, 비참한 인생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없는 과부는, 그의 인생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명의로 재산 등록이 안 되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차별당하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위대하게 하시는가요?

그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차별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차별 하는 일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십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야곱과 그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중에 37장에 요셉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38장에서 다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39장에서 다시 요셉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편집의 관점에서 보면, 37장에 요셉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유다와 그 며느리 다말 이야기가, 샌드위치처럼 그 중간 38장에 끼일 이유가 없습니다.

편집이 생뚱맞게 아주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쭈욱 진행되는데,

왜 갑자기 다말 이야기가 중간에 끼인 것일까요?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애굽 보디발 집과 감옥에서, 차별받고 있는 요셉이라는 한 소년을,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구원하는 인물로 만드신 것처럼

 

그 귀공자 요셉뿐만 아니라,

정말 시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시동생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있는 그 여자도,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수준에서 (쌍벽으로) 생각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요셉은 알지만, 다말은 모르지 않느냐?'

요셉을 통해서는 고대근동의 많은 사람들과 12지파를 먹여살리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차별받고 버림받은 이 다말을 통해서는

나중에 그 후손을 통해서 다윗 왕이 나옵니다.

그 후손 중에서 예수님이 나오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의 대역사는,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하면

요셉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차별받는 문제를 중요시 여기느냐?

성경의 흐름을 끊어서라도 '이 사람이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는 창38장이 아주 중요하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동안 교회에서 설교 들으면서

이 다말 며느리에 대한 설교를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낯부끄러워서 강단에서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럴 정도로 지금도 차별받고 있는 거죠.

다말의 이야기는, 완전히 묻혀져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다말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조차 사람들이 기억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다 심어 놓으셨습니다.

성경학자들이 의문을 가지면서, '성경이 잘못 편집된 게 아닌가?' 라고 오해를 할 정도로,

다말 이야기를 하나님은 그 중간에 놓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요셉과 동등하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얼마나 하나님께서 관심이 많은지,

그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을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죽고 오난이라는 시동생이 자기 의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과부를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고대근동의 모든 다른 나라에는, 과부도 남편의 재산을 법적으로 상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만 그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되면, 희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으면, 완전히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재산을 하나도 못 물려받으니까요.

 

그러니까 시동생 오난이, 자기 씨를 안 물려준 이유도,

형의 재산()을 자기가 나눠가지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슨 법을 만드셨나 하면, '형사취수제도'인데,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에게 씨를 남겨서, 형의 이름으로 대를 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난은 자기가 씨를 남겨도, 그게 내 아들이 안 되는 것입니다.

형의 아들이 되는 거고, 결국 형의 재산은 형수와 그 아들에게 다 돌아가게 되니까,

그대로 그 가문이 이어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악한 마음을 갖고, 그 재산에 대한 탐욕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하나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러니까 죽임 당한 것입니다.

 

다말이 잘못해서 오난이 죽은게 아닙니다. 그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거부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니까, 오난이 그렇게 행한 것을, 악하게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난을 죽이십니다.

 

38: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여러분, 차별 받는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시냐면,

그 차별한 자를 죽일 정도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도록 애를 쓰셔야 합니다.

나는 차별을 가볍게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이실 정도로 반응하십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차별 당하는 억울한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역사를 운행하시고 왕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이,

뭘 보고 계시냐면,

 

이불속에서 오난이 제대로 동생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사정을 땅에다 하고 있는지, 다말에게 씨를 남기려 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차별받고 멸시받는 한 여인의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셨느냐면, 그걸 성경에 기록해서 만인이 보게 하셨습니다.

 

오난이 그걸 상상이나 했을까요? 자기가 이불속에서 한 짓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그게 성경에 기록되어 역사에 대대로 남을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얼마나 차별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지

그것까지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너희가 한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차별하고 상처주는 것은,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차별당하고 힘들고 아플 때, 꼭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몰라요. 누구도 내 심정을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억울함을 다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들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구박받고, 자녀들이 무시하고..

자기 평생을 다 바쳤는데, 억울하고 분하고 상처받은 마음.

 

그러나 하나님은 이불속에서 진행되는 일들까지 다 보고계실 정도로

그 억울함을 갚아주시되, 죽이시기까지 하십니다.

한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의 예를 들어볼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에 가서 살 때, 거기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갈 때 사라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자기 아내라고 하면, 애굽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봐

'거기 가면 당신을 내 누이라고 하자. 그러면 좀 더 안전할 것 같다

 

그러면 여자란 이유만으로, 그런 대우를 받는 사라의 서러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을 사랑하니까, 남편을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바로의 가문 전체에 태를 닫아 버리셨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나서, 패역하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왕조의 대를 끊어버리십니다.

 

바로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그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는 선지자의 아내다.

네가 그녀에게 손을 대면 네 가문이 반드시 다 죽을 것이다.'

 

바로가 놀래서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서 책망합니다.

'너 왜 내게 거짓말했니?'

      

바로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오히려 사라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재산을 줘서 돌려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갈 때는 거지로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는 많은 재산을 얻어 올라옵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아브라함이 사라를 대할 때,

이런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 정말 하나님이 이 여자를 주목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실 줄 알았더니,

나뿐만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구나.'

 

사라가 없으면 아브라함의 사명은 감당 못합니다.

사라가 자기 하녀 하갈을 줬는데, 하나님께서 끝까지 사라를 통해서만 대를 잇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믿음의 여인 사라가 차별 받는 것에 대해서, 못 참으십니다.

 

그래서 애굽왕 바로로부터도 사라를 지키시고,

자기 여종 하갈로부터도 지키신 것입니다.

본처로서의 자기 지위를 빼앗기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차별받는 사람을 위한 의분이 있으시고,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께서 끝까지 차별받는 자를 사랑하시고,

위하신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런 사람을 통해서

즉 차별 받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나는 제왕들의 하나님이다. 나는 왕들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다.' 즉 차별 받는 자들의 하나님이다

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

너희들이 차별한 그 사람에게 한 일이, 곧 나에게 한 일이다.' 25:40

 

야고보서에도 똑같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셨고요.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경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7

 

하나님은 이렇게 차별대우 받는 자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왜냐면 사실은

가장 차별받고 멸시 받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펼쳐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다말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다윗 왕조를 다말을 통해서 이루기 원하시는데,

유다가 자기 생각으로 다말을 차별하면서, 씨를 안 남겨주니까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죽이려 까지 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나 하나님의 계획이 지금 차별받는 이 여인에게 있는데,

네가 그녀를 멸시하느냐, 쫓아내느냐?

내 나라는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다말이 없으면 나는 안 된다.

다말을 통해서 다윗이 나오고,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결국은 다말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차별받고 멸시받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차별하려 할 때

 

여러분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차별 받을 때는 이렇게 위로를 받으니까 차별 받아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너네가 나 건드려? 차별했어? 하나님께 혼 나겠구나'

그렇게 넘어가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 처리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차별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시고,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회개치 않으면 죽이기까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별을 받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럼 내가 차별했으면 어떻게 하죠?

내가 저지른 그 차별을,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까요?

그 차별을 안 하고 싶은데, 차별이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인간만 같은 종족을 차별하는 아주 독특한 종류입니다.

알랜 핀킬 클라우트 라는 유명한 저술가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를 보고 고양이라고 생각하지,

검은 고양이 흰고양이 얼룩고양이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개는 크고 작건 간에, 아무리 작아도 큰 개가 조그만 개를 쥐새끼라고 하지 않습니다. 개는 개일 뿐입니다.

 

인간만이 피부색깔 때문에, 학벌 때문에, 경제력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출신지방이 다르다, 출신국가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합니다.

인간만 유일하게 그럽니다.'

 

이 차별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피해를 당하면서도, 내가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 쉽습니다. 전부 다 차별하고 있거든요.

 

1. 첫 번째는, 선입관을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것은 너무나 적은 부분입니다.

사실은 하나님만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함부로 그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지금 유다는, 다말을 그냥 별 볼일 없는 여자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었어요.

그녀에게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은 상상을 못했던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의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보기엔 초라한 것 같고, 멸시 받아 마땅한 사람인 것 같아도,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실 그 때가 되면, 지금은 별 볼일 없는데,

그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되어서, 나를 구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선입관 속에 갇혀 있으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보시는가를 봐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것 중에 한 가지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2.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나도 차별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저 사람이 얼마나 괴로울까?'

이것을 잠깐만 생각해도, 굉장히 차별하는 마음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차별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그 생각에 머물러 있으려 하고, 강화시키려 하거든요.

내 차별을 정당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때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렇게 상대편 입장을 이해하면, 절대 차별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기억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차별 받을 때,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꼭 같이 덧붙여 하시는 말씀이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하십니다. 10:19

 

너희가 그때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았던 것을 기억해 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그때 얼마나 아픈 세월을 보냈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그 때를 기억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기억하고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과거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할 때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생각하고

내가 죄인이고 악하고 교만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잖아요.

내가 원래 잘나고 완벽해서 나를 구원하신 게 아닙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모습속에서, 과거의 나의 모습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대할 때, 차별할 게 아니라,

나를 대하듯이 따뜻하게 위로하고, 내가 힘이 되어주고, 격려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꼭 차별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멈추지 않는 이 차별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날 때는,

반드시 3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잠시 중간 정리 해 봅시다.

1. 그에 대한 선입관을 제거하라. 하나님만 그 사람을 다 아시고, 나는 그를 다 모르니까요.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엄청난 신비가,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2. 상대와 입장을 바꾸어 보라.

3. 기억하라. 내가 차별 받았던 과거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멸시하는 사람들,

뭐 굉장히 많은 권력이 있고, 돈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가 옛날에 얼마나 고생을 했고, 얼마나 가난했는데

거기에서 내가 이렇게 이루었다고..

 

그러면 지금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어야 됩니까?

동질감을 느껴야 되잖아요. 그런데 도리어 무시하기 쉽습니다.

 

자기 과거가 이랬다고, 그런 데서 지금 이렇게 성공했다 하면서도

정작 자기 과거를 기억 못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정말 여러분 마음속에 막 차별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날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차별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시는가 하면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차별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차별에 대해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마굿간의 짐승 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살았고요.

얼마나 멸시천대를 받았는지요!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는데, 그 당시 직업으로 최하위 직업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셨어요.

차별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셨어요.

 

마지막 예수님이 죽으실 때, 강도 둘과 함께 죽으셨어요.

양쪽에 죄인들 가운데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극단적인 차별을 받으시면서, 멸시를 받으시면서

가장 차별받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시고,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차별 받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십니다.

예를 들면, 막달라 마리아 같이 가장 더러운 귀신들렸고,

창녀였던 그녀를 통해서, 부활하실 때 제일 먼저 그녀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사도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어라'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그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임명할 때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차별받고 멸시받던 여인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도 그녀의 말을 안 믿을 정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나에게 나타났다고 소식을 전하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도 안 믿고,

더 못 믿을 것은, 부활하셨으면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왜 너에게 나타나시겠느냐?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신 것을 안 믿었습니다. 차별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요?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데요,

 

이게 얼마나 하나님께는 힘든 일이냐면, 일곱 귀신 들렸던 자입니다.

정신병원을 일곱 번 들락날락 했던 여자라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가 법정에서 증인으로서의 효력이 있겠습니까?

일곱 귀신이 들린 여자가 '부활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이 다 안 믿어도, 내가 그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너희가 차별하는 여인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것을 내가 선언하는 바이다.'

 

'나는 차별받는 여인, 반드시 중요하게 만들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성경 전체 스토리가, 차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존귀하게 하시는지..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차별 받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나를 통해 이루어지려나 보다' 그렇게 믿으시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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