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원칙대로 살기 P2 벧전2:21~22 출처, 편역
Living by Christ’s Principles by Zac Poonen
누가는 '예수님이 행하시고 to do 가르치신 to teach 것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행1:1
그것도 아예 공생애 시작 때부터요. 행1:1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120명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데요,
그들은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즉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시니, 예수님처럼
'행하고 + 가르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게 점점 희석되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행2장에 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면,
방언을 하고/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저는 방언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한 몸이 되며 하나가 되게 합니다.
진정한 교회를 이루게 하시는 거죠.
예를 들면, 120개의 쇠조각이 용광로에 넣어졌다가,
하나의 쇠로 만들어져 나온 것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완전히 서로 다른 제자들이, 서로 용납하고, 함께 동역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 하나가 된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요?
◑제자는 '아버지'를 보여 주는 사람
요14장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만족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14:9
아버지는 영이시고, 하늘에 계셔서 사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외모의 생김새를 보여준다는 뜻이 당연히 아닙니다.
내가 나를 통해 ‘아버지를 보여주겠다’는 뜻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예수님이 대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 등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은, ‘아버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요20:21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바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목적도
(우리는 지상명령, 복음전파와 구원만 강조하는데요)
저 푸닌의 주장은,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저 성경말씀만 가르쳐서 to teach 되는 게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사는 to do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속성, 인격,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나는 거듭난 신자’라고 믿으신다면,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즉 예수님께 파송 받으신 신자라고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성령이 주시는 도전이 무엇인지 이제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를 보았듯이,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라는 뜻은 아니지만, 오늘날 교회의 사명에 누락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 제 푸닌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복음의 빛을 잃고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목표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기준점, 표준 standard입니다.
우리는, 그저 설교하고, 구원받는 방법만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아주 깊이가 없이 얄팍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 성도를, 또한 교회를
무슨 목적으로 부르셨는지, 그 사명을, 그 표준을, 우리가 잃어버린데 있다고 봅니다.
1) 그건 그저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to teach
2) 우리 각자를 통해,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to do
천국의 모습을, 우리 교회와 가정을 통해 보여주고,
천국백성의 권위 있고 안정적인 삶, 즉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1)번은 어느 정도 하는데, 2)번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고
아예 목표, 표준으로 정하지도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오늘날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내가 정말 예수님의 양 맞습니까?
내가 정말 오늘 매일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즉 본받아 살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교회를 형성하고 있습니까?
그때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보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 교회들이, 이런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와 신자가, 이렇게 완벽하게 예수님을 닮아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정하고, 거기로 달려가는 것과
목표와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서 딴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그건 큰 잘못입니다.
저도 이제껏 수 십 년을 목회해 오면서, 여러 교회를 가 보았지만
정말 이 목표를 정하고, 그 방향으로 달려가는 교회를, 거의 못 보았습니다.
오늘날 나는, 무슨 목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저 내 한 몸 잘 되라고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아버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하루 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목표를 올바로 정하고, 거북이 걸음이라도 꾸준히 걸어가다보면,
내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수준으로 도달할 것입니다.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발자취를 따르라
신약성경 전체가 이 주제를 강조하는데,
우리는 이 시간 벧전2:21절 구절만 살피겠습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나를 믿으라’고는 아주 희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서를 주의깊게 읽어보십시오.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적은
아마 1~2차례에 불과할 것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종종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요.
그런데 오늘날 완전히 거꾸로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나를 따르라’는 강조하지 않고,
‘나를 믿으라’고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지식적인 믿음’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자기 머리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데요,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가, 아주 얄팍해지고, 깊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머리로, 지식으로 믿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to do 하라는 것이죠.
나를 본 받아 살아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 생활을 하라/누리라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일관적인 강조점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한 번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예수님을 머리로 믿고 있지는 않나요?
여러분은, 진지하게 자기 삶의 모든 부분에서, 진정 예수님을 따르고/본 받고 있습니까?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그 길로 가게 하시고, 또한 이르게 하십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 문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입니다.
leaving you an example for you to follow in His steps.
※그래서 찰스 셸던이, 이 구절에 의거 <In His Steps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책을 써서,
미국과 한국에서 한 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이
이 구절을 심각하게 요절로 외우고, 순종하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남 쳐다볼 것 없습니다. 나 자신을 살펴보십시다.
나는 평소에, 이 구절을 심각하게 묵상하고,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으로 부르신 목적이 뭐라고요?
‘그 자취를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영어로는 In His Steps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신자들은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못 누리면, 장차 천국에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그 자취를 따라갈 때,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살 때,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맛보는 것이고, 그가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 설명이 이렇게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벧전2:22
예수님을 본 받아,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 사는 삶이 어떤 것입니까?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즉 죄 짓는 일을 멀리하며, 말로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자취를, 발걸음을 날마다 따르지 않으면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예수님의 양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양떼가 아니면, 구원 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무리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지만,
사실 좁고 협착한 그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예수님처럼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르치지도 않고
아예 넓은 길, 넓은 문을 가르치고 있으니, 상황이 더 심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여러분만큼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는, In His Steps
그 발걸음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무슨 의미였습니까?
그건 예수님의 삶 life과, 사역 ministry의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분의 33년의 삶은, 경건하고 사랑하며, 겸손하고, 순결한 삶이었습니다.
2) 그분의 사역은 3년 반이었는데요,
그럼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위의 두 분야 중에 어느 쪽을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그 답은 1)번 ‘삶’입니다.
2)번 ‘사역’이 아닙니다.
만약 ‘사역’에서, 우리보고 ‘나를 따르라’하셨다면,
우리도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 각종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아무 것도 예수님처럼 닮아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따르라’하신 것은 ‘나의 삶/인격/성품을 따르라’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더러 ‘사역에 있어서,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삶과 인격에 있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부흥사들을 보면,
예수님처럼 무슨 신기한 기적을 일으켜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데요,
무슨 병자들을 벌떡벌떡 낫게 하고, 무슨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면에서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데요,
그 방향이 아주 잘못되기 십상입니다. 또 결국 거의가 잘못된 길로 갑니다.
정작 닮아야 할 예수님의 삶과 인격은 등한시하고, 도외시해 버리고
닮지 않아도 될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 행함은, 닮아서 베풀려고 하니까
마귀가 틈타든지, 자신이 교만해지든지, 거짓 기적의 소문을 퍼트리든지..
결국은 잘못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방향이 아예 틀렸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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