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깊은데서 2

LNCK 2016. 5. 16. 20:04

https://www.youtube.com/watch?v=95hqjHdpH9A 

깊은데서 2          시130:1-8절        깊은데서1         10.07.11 스크랩, 출처

 

◑늑대에게는 이런 속성이 있습니다.

 

첫째 평생 한 마리의 암컷과 사랑을 합니다.

둘째, 자신의 암컷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입니다.

셋째 자신의 새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싸우는 포유류입니다.

넷째 사냥을 하면 암컷과 새끼에게 먼저 음식을 양보합니다.

 

다섯 째, 제일 약한  상대가 아닌 제일 강한 상대를 선택해서 사냥을 합니다.

여섯 번째 독립한 후에도 종종 부모께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일곱 번째 인간이 먼저 그들을 괴롭혀도 인간을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늑대 같은 남자"라는 말은 굉장히 칭찬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늑대는 이런 면도 있습니다.

스스로 안전을 위협하는 외적을 격퇴하고 나면 서로 물어뜯고 해치는 내분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동물과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비교형태학의 시조인 로렌즈는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추위나 짐승의 공격이나 기근을 해결하고 나면

그때부터 공존하고 있는 이웃과 적대감정을 품고 서로 물어뜯고 해치면서

자멸의 길에 들어선다고 간파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도 늑대들의 삶처럼, 급격히 전락하고 있다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외부로부터 위협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내부적으로, 이익집단들이 각 계층들이 서로 많은 파이를 차지하려고

이웃에 대해 적의를 품고 해치면서 사회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보수와 진보의 이념에 대한 시각차이가 커지고 있고

4대강과 세종시문제로 인해 여와 야가 극도로 대립해 있는 모습니다.

 

이런 사회혼란은 민주주의가 정착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불가피한 혼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한국사회는

점차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가 되는 동물의 왕국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자연인, 즉 세상 사람들은

만인이 만인들에게 늑대가 되는 짐승사회를 연출하는 것이 당연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옥과 같은 나락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나치치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라고 하는 폴란드 바로위에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리투아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코우노에 살던 유대인들이 4만 명이 있었는데

한 3년간의 나치점령 하에서 90%가 나치에 학살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치하에 코우노(카우나스)지역 유대인들은, 지옥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2년 5월 어느 날 임신한 유대인들을 보면 즉각 처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유대지역을 순찰하던 나치 병사는 병원에서 임신한 유대인의 여성을 발견하고

근접거리에서 총을 발사하여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Kaunas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죽은 이 여인을 데리고 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는 진찰을 한 결과, 산달이 되었기 때문에

즉시 수술을 하면 아이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죽은 시신이라도 존중히 여기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수술을 해야 되느냐 하지 말아야 되느냐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코우노에 살고 있던 젊은 랍비인 에브라임 오시리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때 에브라임 오시리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시신에 손상을 가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요

만일 죽은 여인이 살아난다 하더라도 아기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시신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할 것이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랍비 오시리의 지시대로 수술은 실시되었고 아이는 무사하게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병사들이 병원에 들어오면서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독일병사들은 그 아이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 그 아이를 잡아 머리를 병원의 벽에 쳐서 살해한 것입니다.

 

랍비 오시리는 나치치하에서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던졌던

이런 수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과 질문들을 작은 종잇조각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서

깡통에 넣어 땅속에 숨겼습니다.

 

혹시 자기가 죽어도 그 글이 발견된다면

나치치하에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다행이 랍비 오시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1959년 뉴욕에서 히브리어로 이 글들을 모아서

<깊은데서>라는 책을 냈습니다.   *The Annihilation of Lithuanian Jewry

그리고 1983년 영어로 축약본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시대에 질의응답>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보면 랍비 오시리에게 나치점령 하에서 유대인들이 던졌던 질문들은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할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이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승화된 질문들을 던졌다는데 있습니다.

 

1941년 10월 한 존경받는 유대인 지도자가 랍비 오시리를 찾아와 자살을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내와 자녀들이 나치에 잡혀갔는데

그들이 처형될 날이 가까이 오고 있었고,

나치가 혹시 자기를 붙잡아다 아내와 자녀들이 죽은 장면을 목도하게 할까봐

그 전에 혹시 자기가 자살을 해도 되는 지를 물은 것입니다.

 

1941년 10월 말경에 한 유대인 가장이 눈물을 머금고 랍비 오시리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음식이 없어서 굶어죽기 직전인데

옆집 아파트의 가재도구들을 팔아 음식을 사먹어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지를 질문한 것입니다.

 

옆집에 살던 유대인 가족들은 모두 나치들에게 몰살을 당했고

그 친척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옆집에 들어가서 가재도구를 팔아 음식을 사먹어도 되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어쩌면 물어볼 필요가 없지요. 자기가 알아서 잘 하면 될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가장은

옆집의 유대인집의 식구들과 친척들이 남아 있지 않지만

옆집 가재도구를 팔아 음식을 사 먹는 것이

유대인의 율법에서 허용되는 것인지 안 되는 것인지를 알기 전에는 그 가구에 손을 대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랍비 오시리의 대답은 극히 상식적입니다.

자살을 허락해 달라고 한 유대인에게는 자살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옆집의 가제도구를 챙겨도 좋겠느냐는 질문에는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랍비 오시리가 어떤 대답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토록 힘든 지옥의 고통가운데 있으면서도 코우노 유대인들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치가 만들어 놓은 지옥의 깊은데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우노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를 힘쓰고 애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독가스 속에서 짐승처럼 학살되는 상황에서도

과연 무엇이 유대인들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게 만든 것인가요?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130편은 그 첫 단어를 통해서, 고통가운데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짖는 애가의

원형으로 간주될 만큼 교회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칮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원어에는 가장먼저 나오는 단어가 ‘깊은데서’입니다. 세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깊은데서'가 첫 단어이고,

 

-그 다음에 '내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개역성경에는 ‘부르짖었나이다’라고 과거로 되어있습니다만, 원문에는 현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르짖고 부르짖나이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여호와여’ 호격입니다.

 

그러기에 시편130편 단어의 첫 단어는 '깊은데서'입니다.

‘깊은데서’라는 이 첫 단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첫 단어는 시편130편의 전체시편을 요약하는 핵심단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면 누구나 체험하는 보편적인 체험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첫 단어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깊은데’는 히브리어로 ‘마아마킴’입니다. ‘마아마킴’은 5번 나옵니다.

다섯 번 나오는 이 깊은데서라는 단어는 물속의 깊은 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깊은 물속은 깊은 웅덩이와 깊은 수렁과 의미적으로 같이 씁니다.

그래서 깊은데 라는 것은, 물이 있건/ 물이 없건 간에

물이 있으면 깊은 물속이고, 물이 없으면 웅덩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깊은데’는 물속 깊은 데든, 함정으로 파진 깊은 웅덩이든지 간에

흑암의 장소, 깊은데 빠지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움이 지배하는 장소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깊은데’는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 외에,

자기 소리이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은 절대침묵의 공간입니다.

 

그러기에 깊은데 빠지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고대근동 지역이나 유대지역의 무덤은 함정형태로 생겼습니다.

동굴이거나 웅덩이식의 함정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데는 죽음의 장소와 유사하기 때문에, '깊은데'는 죽음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깊은데 빠지면 절대적인 침묵과 흑암과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깊은데 빠지면 인간은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인생을 오래 살면 살수록 "깊은 수렁에 빠진 경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대학입시에, 사업에 실패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다가 한 두 번은 차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닌 척 해도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일이잖습니까?

 

그래도 차고 차이고 하는 가운데, 시련의 깊은 수렁에 빠진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취직문제가, 고시만큼이나 어려운 현실 앞에서 실의의 빠져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랜 병으로 또는 부부의 갈등의 골이 깊어 위기에 봉착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부모와 자녀들의 불화로 그밖에 다른 어려움으로 인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움과 고독과 낙마를 경험할 때, 우리는 깊은데 빠지는 것입니다.

 

불경기의 분위기가 아직까지 감지되고 있는 요즘도

경기가 좋지 않으면 안을수록 깊은데 빠져드는 경우를 많이 체험하지요.

 

그러나 비록 환경적으로는 이런 깊은데 빠져있지 않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죄의식으로 인해 "깊은데" 빠져 있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도, 내가 절망의 웅덩이에 빠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그리스도 앞에 비추어보면

자신은 정말 구제받을 자격이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깊은 죄의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깊은 데는 환경적으로 깊은데 빠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처하는 원형적인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깊은데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130편은 깊은데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깊은데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1절에서

‘깊은 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시편기자는 아무에게나 마구잡이로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깊이 빠져 고통스러워하면서 분명한 외침의 대상이 있습니다.

‘당신께 내가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깊은데서 부르짖는 기도를 반드시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130편은 깊은데 빠졌을 때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부르짖으라는 것은 문제가 없는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깊은데 빠져있으면 깊은데 빠져있다고 인정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 살펴보면 경배와 찬양은 있어도, 경배와 애가는 없습니다.

형통함과 풍요가운데서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려는 세속적인 욕구 때문에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문제가운데 있으면서도 문제가 없는 척, 깊은데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져있지 않은 척,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치유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 속에 있는 깊은 문제를 하나님께 나와서 치유를 받기 전에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 선배와 대화를 나누고, 친구에게 문제점을 하소연하는 등

이런 일들을 반복함으로써

 

오늘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치유 받는 일을 게을리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심각하게 받아 드려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의 얼굴을 보니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데도

자식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니까 답답하지요.

 

그런데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놈이

자기 아버지께는 아무런 상담도 하지 않고

옆집에 있는 아저씨에게 심각하게 인생 상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가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러기에  루터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할렐루야’ 보다는

불신자들의 저주를 더 즐겁게 들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거짓경건으로 둘러싸인 위선의 말보다는

탄식자의 정직한 절망과 절규를 하나님은 듣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데서 하나님께 반드시 부르짖어야 됩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성공한 자가 멋진 성공의 결과를 가지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보람과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것은

"깊은 곳에 빠져있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깊은데 빠졌을 때,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1, 2절을 보면 ‘깊은 데서 내가 부르짖나이다 여호와여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편기자의 부르짖는 기도는, 깊은데서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이 소리는 간구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깊은 수렁에서 깊은 물속에서 부르짖으면 들립니까? 들리지 않습니다.

 

과연 깊은 수령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간구의 소리를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는 들으실 것인가요?

 

혹시 시편기자는 죽어가며 부르짖는 이 간절한 소리를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 듣지 못할까봐, 제발 자기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시편기자는 자신의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간구의 소리를 여호와께서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깊은데서 내가 부르짖나이다 여호와여’

목청을 높여서 반복적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깊은데서 내가 부르짖나이다 여호와여’ 만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깊은데서 함께하시거나

아니면 깊은데서 부르짖을 때 가까운 거리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깊은데서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 확신은 구약의 가장 중요한 구원사건인 출애굽사건에서 나온 것입니다.

 

출애굽은 백성들이 깊은 데서 부르짖을 때 생긴 사건입니다.

3:7-8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고 하노라’

 

이스라엘이 깊은 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호와하나님은 우리가 깊은데서 부르짖을 때, 그 소리를 듣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홍해를 마른땅으로 만드시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사야선지자는 홍해를 마른땅으로 건너게 한 것을

깊은 바다가운데 길을 내시고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걸어가는 하나님이시라고

이사야51장9-10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깊은데’나 시편130편에서 나오는 ‘깊은데’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 부르짖는 간구의 소리를 듣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분이십니다.

 

아니 더 나아가 바다 깊은데 들어오셔서 바다 깊은데, 길을 내어 그의 백성들을 건너가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일이 출애굽시 홍해사건에서 분명히 들어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민족적인삶이나 개인적인 삶에서 깊은데서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의 깊은데서 길을 내어 그의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깊은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히브리 성경 어순)

이 시편기자의 고백은 아무리 나약하고 비천한자라 할지라도

그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이야기하고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호와는 어떤 분이시기에 바다 깊은데서 길을 내고

구속 얻는 자들로 건너게 하시는 분이십니까?

 

시130편 기자는 여호와는 용서와 인애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4절과 7절을 보면 ‘사유하심이 주께 있나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이 있고

그에게는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하나님은 인자와 용서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깊은데서 부르짖는 그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깊은데 길을 내시고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우리는 용서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모세가 40일동안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십계명과 여러 가지 율법들을 받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사십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 앞에 대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이 민족을 다 쓸어버리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중보하는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34:6)

 

여러분 여호와하나님은 용서가 헤픈 분이십니까? 자식이 잘못해도 오냐 오냐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가 너무도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하나님이 죄악을 지켜보신답니다. 지켜보고 계신 분 앞에서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누구도 주님이 우리의 죄악을 지켜보신다면 아무도 그 앞에 설 수가 없지요.

그러나 시편기자도 죄악을 지켜보시고 죄악을 기록하시는 여호와 앞에 감히 설 수 없지만

여호와는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깊은데 빠졌을 때 여호와께 부르짖을 수가 있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다.’ :4

 

◑이렇게 깊은데서 부르짖던 시편기자가 갑자기 5-6절에서 희망을 노래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  :5~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

 

아직은 깊은데 있지만 아침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아침이 된 것이 아니예요. 아직은 깊은데 있습니다.

아직은 깊은데 있지만 거기서 부르짖는 주의 백성의 음성을 들으시고

하늘에서 내려와 통회하는 자를 용서하지고 깊은데서 길을 내어 건너게 하시는

그 여호와를 기다리겠다고 시편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길고 긴 어두움에서 경계를 서며 피곤한 파수꾼이 기다리는 것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인류역사상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을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다가 혹시 아침이 안 오면 어떡하나? 하고 고민하는 파수꾼 봤습니까?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태양은 떠오르기 때문에

파수꾼은 어두운 밤을 지내며 새벽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기 때문에

시편기자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자기 영혼이 더 아침을 기다린다고 노래합니다.

 

노예자녀로 태어나서 노예가 된 흑인들 1830년 8월 1일 노예해방을 맞았습니다.

‘그 전 날 밤 웨스터인디안 식민지의 노예들의 대부분이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수천수만의 노예들이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하고

자유롭게 되는 첫날의 아침의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산에 올라가 해방되는 날의 첫 여명을 보고 신호를 보내

계곡아래 있는 흑인노예들에게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날의 여명을 알려 주었다

전에는 그저 물건과 재산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히 살도록 만드신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이 되게 하는 첫 날의 아침을

한시라도 빨리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해방의 아침을 기다렸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도 없다고 한 역사가는 말합니다.

긴 흑인노예들의 암흑의 밤을 지내며 1830년 8월 1일 되는 전 날 밤 아침을 기다리는 노예들처럼

이제 그날이 지나면 태양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산에 먼저 올라가서 누구보다 빨리 바라보고 계곡 밑에 있는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산에 올라갔던 흑인 노예들을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흑인 노예들이 아침햇살을 기다리듯이 아침마다 자비와 긍휼이 새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편기자의 확신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편기자의 아픔이 점차 치유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소망하라고 권면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시편기자가 이제 고통에서 빠져 나와 소망으로 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 :7

 

시130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고대 스라엘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 산악지역에 있습니다.

유다산악지대의 꼭대기에 시온산 꼭대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전 이스라엘의 국토에서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은 수많은 작은 산들과 골짜기들을 넘어서

산악지방으로 와야 됩니다.

 

깊은 골짜기를 지날 때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바라보면서 순례자들은 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깊은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면서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이 깊은 골짜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깊은 골짜기와 눈물의 한숨을 지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은데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애가를 불러야합니다.

‘깊은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우리가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깊은 곳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깊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깊은데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깊음에 대해서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깊은데 빠져봐야 그 깊음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데 빠져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본 자만이

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이 깊은 곳에 빠져 있는 것보다, 얼마나 더 깊은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곳에 빠져보지 않고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어떻게 압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표면위에서 살아요.

우리 위가 얼마나 높은지 우리 밑이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2: 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깊은데서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본 사람이

그 깊은데 길을 내어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빠져있는 깊은데 보다 더 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깊음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깊은 곳에 빠진 상태에 있습니까? 그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망이나 생명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례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칼이라도 견디어 내는 승리의 백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