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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과 환란 중의 기쁨 P1 / John Piper

LNCK 2016. 5. 19. 15:21

위험과 환란 중의 기쁨 P1             1:20~21, 29                    영어 편역, 출처

 

Joy in Risk and Suffering (Excerpt) By John Piper              ☞ 위험과 환란 중의 기쁨 P2

    

 

 

기뻐하는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제가 지금 몸담고 있는 베들레헴 교회에

19801월에, 담임목사 청빙하는 선을 볼 때,

제가 오늘 본문인 빌1:25절로 설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본문과 그 메시지의 포인트는,

바울이 내가 죽을 것인지, 아니면 살아서 주님을 섬길 것인지 갈등하고 있었는데,

만약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갈등 가운데, 그는 스스로 결론 내리기를

내 소원은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머무는 것이 너희에게 필요할 것 같으면 나는 머물겠다.' 고 고백합니다.

 

1: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이 육신으로 머무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뭐가 좋습니까?

이어지는 25절에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너희 믿음의)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저는 그 후 수년 동안, 위 빌1:21~25절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성적으로 볼 때, 세계 최고 정상입니다.

그리고 고난 받은 면에서 볼 때도,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지적으로나, 체험적으로나, 그의 말은 신빙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기꺼이 살려고 하는 이유는,

너희를 기쁘게/행복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너희 믿음의 진보와, 너희 믿음의 기쁨을 위하여,

(즉 믿음으로 인해 얻는 기쁨으로 인하여,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이죠.)

내가 죽지 않고,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선 보는 설교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베들레헴 교회가 저를 청빙하신다면,

저는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목회를 하겠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기쁨의 신학 Christian Hedonism’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그런 성경적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적인(=초대교회의 전통을 계승한)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저는 초대교회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목회 하겠습니다.’

 

그 설교 시간에 제가 인용한 또 한 구절은 고후1:24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그래서 위 두 구절(1:25, 고후1:24)을 보시면,

두 구절 다 기쁨을 말씀하고 있고,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교회가 기쁨을 갖도록 목회적인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죽어도 괜찮지만, 삶에 아무 미련이 없지만,

그러나 사는 이유가 있다면, 너희의 유익을 위함인데,

그걸 구체적으로 말하면 너희가 주 안에서 얻을 기쁨을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기뻐해야, 주님께 영광이 돌려집니다.

 

빌립보서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 바울에게 성도들의 기쁨이 큰 이슈였는지

그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삶은, 믿음 가운데 기쁨으로 사는 사람만

그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신자 가운데, 기쁨 대신 분노와 불평이 가득하기도 쉽잖아요.

그런 사람은, 아무리 뭘 열심히 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영광이 안 돌려지죠.

주님께 영광이란 말을,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는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려 하나니 1:20 

Christ will be magnified in my body

 

살든지, 죽든지..

바울의 관심과 삶의 초점과 목회의 방향은

그리스도께 영광,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인데

거기엔 성도들이 기뻐해야그게 가능하다는 것이죠.

 

 

주님께 영광이라면, 내가 죽는 것도 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얼마나 간절히 소원하였는지

주님께 영광이라면,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나는 죽어도 괜찮고, 살아도 문제없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1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과연 이런 바울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존귀하게 되신다면, 나는 죽는 것도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45년 전에, 저 존 파이퍼는 이 구절을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역자의 사역은 과연 어떠할까요?

 

그럼 우리 각자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1


죽음을 각오한 사역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기도부터 한 번 이런 식으로 해 보십시다.

주여,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말게 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죽게 하옵소서!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제 삶은 물론이요, 제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부터 이렇게 한 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유익하다면, 기꺼이 제가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것은,

지금 여러분이 사시는 땅인 하와이를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잃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의 가족을 잃을 수도 있고요,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의 장래 모든 계획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라면,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괜찮고 아니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니 :23

그건 당연히 얻는것입니다. 이익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훨씬 가치 있고 비싸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라면,

세상의 가족, 토지, 건강, 목숨을 다 버려도

그게 손익계산상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1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만 얻는다면, 그게 내게 유익(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더욱 친밀한 교제, 그리스도와 더 연합으로 나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상실과 잃어버림이 있어도, 심지어 내 목숨까지 잃어버려도

이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21세기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거나,

   그 가치를 아주 낮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사람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삶입니다.

 

이런 신앙이 바로, 이제껏 제 평생 신앙의 목표였습니다.

제가 쓴 모든 책에는, 이런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설교에도, 바로 이 신앙 사상이 깔려 있는데요,

-, 세상 모든 것을 버려도,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더 이익이요,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를 존귀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나의 유익입니다.

내게 이익이 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건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복음은, 십자가 방식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오늘도 누군가의 고난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어져 나갑니다.

 

한국이 복음화 된 것도, 초기 선교사들과 신앙선조들의 순교와 고난이 있었기 때문이며,

만약 오늘날에도 한국을 통해 복음이 세계로 전파된다면,

거기엔 반드시 누군가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자기에게 유익(이익)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1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각오한 사람에게, 고난 쯤이야..

큰 문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때가 되어

병원에서 갖가지 호스가 연결된 침대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될 때라도

가족들은 울먹이며 아빠, 우리를 두고 떠나지 마!’ 하더라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1

 

우리가 일생을 그런 자세로 살면서,

정말 임종의 순간에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야!’ :23

그게 나에게 이익이야!’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항상 기뻐합니다.

 

고난과 위험이.. 사실 끔찍한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신다면

고난과 위험속에서도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가 다 잘 되어서 기뻐하는 일은, 불신자들도 똑같이 기뻐하는 것이고요.

크리스천의 기쁨은, 불신자들이 못 얻는 기쁨인데

그건 위험 가운데의 기쁨, 고난 속에서의 기쁨입니다. joy in risk and joy in suffering

 

여기서 말하는 위험이란, 복음을 전하다가 만나는 위험입니다.

행글라이더를 재미로 타다가 만나는 위험, 당연히 뜻하지 않습니다.

 

    잠시 이 설교의 주제를 요약하면, 1:20~21절에 근거해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존귀히 높였는데,

    그 과정에서 따르는 모든 손실, 상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잃는 것까지도

    다 이익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 그리스도를 존귀히 높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이었으니까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천원 잃지만, 천만원 버는 식이죠.

 

    그래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난, 위험..

    그것도 다 이익이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저 존 파이퍼는, 여기 참석한 호이 형제(아마 중국이나 베트남 지하교회 성도)만큼

고난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고난을 거론한 자격은 안 되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말한 바울의 고난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고후11:24절부터,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을 나열하고 있는데요,

-3번 태장으로 맞고

-셀 수 없이 감옥에 투옥되고

여러분, 한 두 번 투옥된 사람은, 자기가 몇 번 투옥되었는지 반드시 기억합니다.

그러나 너무 여러 번 투옥된 사람은, 자기가 몇 번 투옥되었는지도 기억 못하는 거죠.


-39대 채찍을 5번이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생각해 봅시다. 채찍 끝에는 보통 쇠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런 채찍으로 39대나 맞으면, 바울의 등은 아마 젤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한 번 이었습니다. 그 등이 회복되는데 아마 몇 달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두 번째 맞았습니다. 다시 등이 젤리가 되었고

그 상처가 회복되는데 또 수 개 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또 맞았습니다. 이제 상처가 잘 아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래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런 바울에게, 그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는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끔찍한 고난이라도

그것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가 존귀히 된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을, 조나단 에드워즈 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기쁨으로 여겼던 바울을, 저는 누구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저도 바울처럼,

여러분이 믿음 생활의 기쁨을 가지도록

즉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신자들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살고, 사역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이요,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지 않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제대로 전하게 되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실 것이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쁨은, 고난 가운데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성도는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사역 가운데, ‘기쁨이 없는 이유를 발견하셨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와 고난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사역 가운데는 기쁨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을 받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사실 우리가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참 어려운 기쁨이요,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하고,

여러분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르심의 실체를, ‘고난 빠진 영광’, ‘위험 없는 기쁨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역자로 부르심은, 십자가로의 부르심이요,

기쁨으로 부르심인데, 그것은 고난 중에 얻는 기쁨입니다.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도 주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초대교회 적이고, 성경적이며, 사도바울 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위험과 환란 중의 기쁨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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