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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최고 열망 / T. Austin-Sparks

LNCK 2016. 5. 23. 18:47

사도바울의 최고 열망                     3:10                   편역, 출처


An Apostle's Supreme Ambition by T. Austin-Sparks   

    

T. Austin-Sparks(1888~1972)는 영국 목사님이신데 

중국 사이트에 설교가 엄청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권능,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0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coming conformed unto his death" Phl.3:10

 

이 설교를 번역하기로 선택한 이유는, 설교 내용에 앞서

빌3:10절 이 설교 본문이 벌써 아주 무겁고 중대합니다.

어쩌면 설교자가 일평생 단 한 번도 설교하지 않고 지나칠 본문입니다.

이 무거운 설교 본문을, T. 오스틴 스팍스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하셨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서론 / 바울의 간절한 열망

 

위 구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주 예수님께 헌신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본문 빌3:10절에는 바울의 간절한 열망이 잘 나타나 있는데요.

우리 각자도, 이런 바울과 같은 소원 또는 ambition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주님을 알기 원했는데요.”

*한글 성경에는 이 부분의 번역이 모호합니다. 위 영어성경본문의 밑줄을 참조하세요.

 

사도바울처럼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직접 뵌 분이고, 그 음성을 친히 들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3층천에까지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신비를 체험한 사람이요,

그는 자기가 남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말할 만큼,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아주 잘 안다라고 말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알기원한다고, 위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안다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노스코/기노마이

부부사이의 친밀함, 아주 친밀한 관계 속에서의 앎입니다.

그저 지식적인 앎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팍스 목사님은, 이 설교의 제목을 바울의 슈프림 앰비션으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의 최고 열망이란 뜻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그저 단순하게, 평소에 모르고 지내던 사람을 한 사람 더 알기 원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주 친밀하게, 마치 부부가 알 듯이

그렇게 친밀히 알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그렇게 바울이 예수님을 간절히 알기소원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위대한 분이시다. 참으로 놀랍도록 크신 분이시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크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분, 평범한 분을

그가 그토록 간절히 알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바울처럼 간절히 더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위대한 분이시다. 참으로 놀랍도록 크신 분이시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크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별로 피부에 와 닿게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

내 삶에 체험적으로 그 사실을 모르니까.. 예수님을 알기에 내가 시큰둥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문 빌3:10절을 암송하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크신 분이신 예수님

더 알기를 열망하는, 그런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소원을 갖는 사도바울의 단계, 또는 T. 오스틴 스팍스 목사님의 믿음의 수준에

절반이라도 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론

 

그런데 사도바울이 간절히 알기 원했던 예수님은, 그 내용이 세 가지로 본문에 3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그 분의 부활의 능력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함(교제함)

-그 분의 죽음을 본 받음  .. 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 그의 부활의 능력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이 단계는 사실, ‘고난에 동참함죽으심을 본받음의 다음에 나오는 최종적 단계인데,

바울은 완성 단계인 부활의 능력, 본문에서 셋 중에 제일 먼저 쓰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절에서, ‘부활의 능력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하는데,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부활은, 육체의 죽음 이후의 부활을 뜻하지만,

현재적 부활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현재적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의 극적인 회심이 바로, 죽음에서 살아난 생생한 부활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죽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요.

그 중에서 가장 큰 죽음의 경험은,

아시아와 루스드라에서 당한 죽음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1:8~9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본문에서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인데,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처절하고 절박하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고, 인내하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그 사망의 고통, 그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서 다시 살아나는/부활하는 능력입니다.

 

물론 내 힘만으로는, 그 역경을 견디기 어려우나

성령님이 도와주시고, 은혜로 내게 힘을 주셔서

내가 죽음의 고통을 통과하고,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해 주시지요.


내 힘으로 그 사망의 고통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내주하여 계시는 예수님이, 내가 이기도록 도와주셔서, 내가 결국은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 라고 스팍스는 '부활의 능력'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르신 사람, 주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사역은,

무슨 역경이 오든지, 무슨 곤란이나 궁핍이 오든지

반드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78기 하게 되어있습니다. 자기가 고난을 피해서 도망가지만 않는다면요.

 

 

2. “그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고 함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유한 고난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건 오직 그리스도만 당하신 고난이고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남은 고난입니다. 1:24

물론 우리보고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지만,

그 십자가가, 그리스도와 같은 대속의 십자가는 아닌 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fellowship’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복음의 연고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고, 친밀하게 되고, 그 분을 알게 되고, 가까이 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거절을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곁에 가까이 오시게 되고,

그때 내겐 임마누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친밀히 알게 되는 길은, 그 분의 고난에 참여(코이노니아)할 때입니다.


오늘 나는 고난이 없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시절에 성 프란시스 같은 분은,

자원에서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고난을 환영하고 기뻐했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좀 더 가까이 교제하기 원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는, ‘고난을 좀 다른 각도로 보기 원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오만상을 찌푸리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케 초대하시는 기회, 특권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수준에 하루 아침에 올라가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끊임없는 말씀 묵상(3:10)과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는,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 뽑으신 자에게

모진 고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아무에게나가 아니라요.

 

사실 부활의 능력고난에 참예함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고난에 참예함이 없는 부활의 능력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고난에 참예함을 통해 부활의 능력을 맛본 분들은

어떤 큰 파도가 닥친다 하더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고, 토끼 눈을 크게 뜨고서 놀라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에 참예함과 부활의 능력이 경험을 통해, 몸에 배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사도바울의 수준과, 설교자 스팍스 목사님의 수준을 절반이라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스팍스 목사님도 노후에 극심한 질병으로, 늘 괴로워하셨다고 합니다.

열심히 말씀사역 하시는 종에게, 극한 질병을 주시는 것이죠.

또한 데이빗 윌커슨은 아내 그웬 사모님이 암에 걸려서,

데이빗 파슨 목사님도 사모님이 암에 걸려서, 오래도록 고생하셨습니다.

그 고난에 참예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친밀히 교제하게 하시는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열매는, 그가 겪은 고난에 비례한다는 명제가 있습니다.

소위 고난 비례의 법칙입니다.

 

찬송가 작사자 패니 크로스비 여사의 열매는, 그가 겪은 고난에 비례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의 열매도 그랬고요.

 

그러므로 우리는, 3:10절을 매일 묵상하면서

고난이 닥칠 때, 짜증과 불평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고, 교제하는 축복의 기회요, 특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3.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becoming conforming his death             


여기서 말하는 죽으심을 본받는다

스팍스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진짜 무슨 죽기를 사모해서, 늘 유서를 준비해놓으라는 뜻은 아니고요.

다른 것에서 바울은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세상이 내게 대해 못 박혔느니라고 말씀하셨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6:14

 

그리스도 중심적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다스리지 않으시는

그런 세상 모든 영역에 대해, 내가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능력을 내 것으로 체험하려면,

내 자아의 죽음, 세상에 대한 죽음(전적인 포기)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빠지지는 않지만, 세상을 은근히 즐기고 있으면서,

부활의 능력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친밀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내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마치는 말

1.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그 분의 가치를 모르니, 우리는 그런 소원이 아예 없거나, 아주 작은 것이지요.

나의 슈프림 앰비션 은 무엇입니까?

나도 사도바울과 같은, 오스틴 스팍스와 같은 소원을 갖기 원합니다.


2. 예수를 오래 믿어도, 임마누엘의 능력도 없고, 부활의 능력도 없으며,

아무 능력이 안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면,

고난에 참예함이 없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는 자기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냉정하게 고민해 봐야 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똑같이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똑같이 자랑하고 추구하면서

거기에 덤으로 부활의 능력, 그리스도를 친밀히 알아감까지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정말 세상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었으면 좋겠다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불평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전쟁만 하지 마시고

사도바울처럼, 그 기회를

그리스도를 더욱 친밀히 알아가는

그분을 더 알기를 바라는..

사도바울과 같은, 스팍스 목사님과 같은 큰 그릇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이런 구절만 묵상하지 말고,

앞으로는 빌3:10절과 같은 구절도 묵상하는

성숙된 그릇이 되기를 소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지 않아도,

내 몸 주위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부활의 능력이 내게서 우러나오고 스며나오는.. 그런 성숙한 그릇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