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의 고백 행20:17~38 16.05.01 스크랩, 출처
▲도입/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바로 오늘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마지막 이별을 하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또 교훈으로 남는지 모릅니다.
사도바울 일행이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다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미처 에베소에 들리지 못하고 이제 밀레도라고 하는 항구도시에 이르러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그가 3년 동안 양육했던 그 지역에서
이미 그 현지에서 예수를 믿고 변화된 리더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들을 불러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있었던 사역들을 회고하면서
그들에게 권면의 당부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고백과 권면을 다 마치고 난 뒤에
그 에베소 장로들과 함께 서로 부둥켜 껴안고, 함께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며 이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진정한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그 순수함,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이로써 오늘 본문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영적성장의 모델이 되지만
특별히 저와 같은 목회자들, 또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 리더쉽들에게
가장 중요한 본문이 되는, 그러한 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 이 말씀을 설교하기가 어렵습니다. 해석이 어려운 게 아니라
사도바울과 이들의 참 아름다운 성숙한 모습이
저의 모습과 너무나 차이가 있기에, 참 설교하기가 죄송한 말씀이죠.
<바울의 밀레도 작별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5가지 중심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1. 첫째는 “눈물”입니다.
19. 내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시련도 많이 당했습니다.
20.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했고
공중 앞에서 또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여러분을 가르쳐 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놀라운 기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사역지 보다도 가장 많은 기적이 나타난 지역입니다.
마술과 주술, 우상숭배에 가득했던 그 아데미 여신을 숭배했던 그 에베소에서
많은 거짓된 영들이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떠나갔죠.
심지어는 바울의 가진, 바울이 입었던 옷이나 앞치마 그런 물건에 닿기만 해도
병이 나을 정도로 놀라운 신비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바울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능력을
그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그런 기적이 있어야만 그들이 믿음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예요.
그토록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났지만
바울은 그때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많이 행했는지 너희도 잘 알 것이다."
그런 얘기는 하나도 없어요.
자신이 자신을 통해 나타난 그 능력. 그 기적. 그 놀라우신 그 표적들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습니다.
‘내가 에베소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기적이 나타나는지 너희도 알거니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그 능력, 나타난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겼는지,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놀라왔습니다.
바울 그분은, 자신이 얼마나 놀랍게 쓰임 받았는가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는 것을, 그들이 기억하기를 원했다는 거예요.
눈물! 이것은 바로 진정한 영적인 진실, 살아있는 양심의 증거입니다.
바울은 ‘눈물을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겸손과 눈물”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기억나는 분이 바로 돌아가신 방지일 목사님이십니다.
백세가 넘으셔도 설교하셨던 아주 강건하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책을 내셨는데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라는 눈물에 관한 책입니다.
꺼내서 훑어보면서 중요한 부분을 다시 읽어봤어요.
한국교회 최고령 목회자로써, 그분이 97~98세 되셨을 때
남미에서 어떤 선교대회가 있었는데, 저도 그때 미국에 있을 때 참석을 했어요.
그런데 젊은 목회자들도 매일 컨퍼런스에 참여가기가 힘들어서
때로는 졸고, 때로는 숙소에서 쉬고 그러는데
방목사님은 제일 앞에서 지팡이를 딱 쥐시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요.
이렇게 제일 앞에서 참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방목사님이 100세가 넘으셨을 때, 어느 출판사와 인터뷰를 하신 거예요.
"목사님, 이렇게 건강하신데, 무슨 비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입니까?" 했더니
목사님은 "제게는 특별한 건강비결이 없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건강비결입니까?”
재차 여쭈었더니 그제야 목사님은
“혹시 운동이 있다면, 심장운동이라고 할까요?”
심장운동이 뭔가 하면, 그분은 새벽 2시, 3시면 잠이 깨신대요. 일찍 주무시니까요.
그러면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시는데, 말씀을 찾아 읽으면
말씀이 서로 이렇게 연결되는 말씀의 오묘함을 볼 때
감격의 눈물이 막 솟구쳐 오른대요.
그리고 말씀 앞에서 통회의 눈물이 흘러나온데요. 새벽마다.
그럴 때마다, 이 눈물이 솟구쳐 날 때마다, 심장이 고동을 친대요.
그 심장이 고동을 치는 게 ‘나는 심장운동 합니다.’ 라고 표현하신 겁니다.
심장운동.. 그게 바로 건강의 비결이 아닐까요?
여러분 우리의 심장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성령 안에서 고동친다면
우리도 방지일 목사님처럼, 존귀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눈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죠.
어려운 고난 때문에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고,
성령 안에서 비전 때문에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다.
시편 126:5~6절에 보면, 이런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것은
농부가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게 아니죠.
이 농부의 눈물은 무엇입니까? 이 씨를 뿌리는 것은 고된 일이지만,
씨가 뿌려졌을 때 열매 거둘 미래의 비전, 그 미래의 비전을 바라보며
눈물의 씨앗을 뿌린다는 거예요. 그 눈물은 반드시 열매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에베소가 지금은 우상으로 가득하지만
이 눈물과 함께 뿌려진 이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을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온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가 그걸 보여주죠.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한 이 땅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눈물로 씨앗을 뿌렸을 때, 이 나라와 민족에 복음의 놀라운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고 방지일 목사님의 글 가운데 하나를 제가 인용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눈물은 거꾸로 흐릅니다. 눈에서 흘러 하늘에 가 닿습니다.
눈물의 사람이 되십시오. 눈물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이 흘린 눈물을 위로와 감사의 병에 담아주십니다.“
성경에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이 눈물을 회복하는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도 효과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성령안에서
영혼을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복음 증거를 위하여,
누군가의 구원을 위하여, 회복을 위하여, 저 북한 땅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할 때
그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이
자신의 눈물을 기억해주기를 원했다는 거예요.
◑2. 두 번째는 “성령의 강권하심”입니다.
행20:22 그리고 지금 나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성령의 강권하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에베소도 들리고 싶었을 겁니다. 그에게는 분명 사역계획이 있었어요.
▲사도바울은 철저한 계획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시 중심의 선교 계획을 세웠습니다. 회당 중심 우선,
회당에 먼저 가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로마가 닦아놓은 군사도로를 따라서, 그렇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마치 경부고속도로처럼 그 도로 선상에 있는 도시들에 차례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계획적인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또 자신이 방문했던 곳을, 다시 한 번 재차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는 그런 계획,
그래서 1차가 아니라 2차, 3차 반복해서,
적어도 두 세번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5장에 보면
"나는 다른 사람이 닦아놓은 터 위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그는 미전도 개척지역에, 늘 마음을 두고 복음을 전했어요. 이런 계획적 선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적인 여정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그의 계획을 뛰어넘는,
그의 계획을 갑자기 바꾸시는 성령의 강권하심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그가 사역하기를 원했지만
마게도니아 사람이 나타나는 환상을 통해서, 그를 유럽대륙으로 건너가게 하셨어요.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하던 그를, 지중해 서부로 넘어가게 하시는 사역으로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그를 인도하신 거예요.
▲여러분, 계획 없이 일하는 것이, 성령의 강권하심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일하면서 다 성령의 강권하심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성령의 강권하심이라고 말할 때는, 자기 계획이 분명히 있어야 강권을 경험하는 거예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라’
이 말씀은, 계획 없는 인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분명히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심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계획이 있어야 되요.
그 계획이 있어야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는 거죠.
아무 계획도, 생각도 없는데.. 어떻게 인도하심을 경험해요?
‘성령의 강권하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계획을 세워서 기도하는 가운데 했지만,
하나님이 그 계획을 바꾸실 수도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열려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가 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습니까?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입니다.
개역에 보면 “마음에 매임을 받아, 심령의 매임을 받아”로 번역되어 있어요.
둘 다 가능한 번역입니다. ‘성령의 매임을 받아’로 번역할 수 있고
‘마음에 매임을 받아’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지 않을 수 없는,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하는 그러한 성령의 강권하심.’
자신의 모든 계획을 다 내려놓게 만드는 그런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했다는 거예요.
주님을 따라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때로 우리를 성령께서 사로잡으셔서
새로운 일을 하게 하시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그런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을 보면
그분은 에베소서 강해 설교를 쭉 하던 중에
이제 주일 아침에 교회를 가려고 옷을 입는 중에,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오늘 에베소서를 설교하지 말고 영적 침체에 대해서 앞으로 몇 주간 설교하라."
아니 지금 에베소서 설교원고도 다 준비해놓고, 이제 가서 설교를 해야 되는데,
아마 주보에도 본문과 제목이 나왔을 텐데,
목사님은 성령님의 강권하심으로 설교 본문도 바꾸시는 거예요.
전 아직 그렇게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렇게 바꿔본 적이 없어요.
만약 앞으로 그런 일이 때로 있으면, 여러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영적 침체에 대해 설교하라!’ 그래서 영적 침체에 대해 몇 주간 설교했어요.
그게 지금도 책으로 나와서, 얼마나 깊이 있는,
spiritual depression (영적 침체)에 대한 고전이 된 책이에요.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
이미 유목사님이 여러 곳에서 간증하셨지만
제가 오늘 인용을 할 때 혹시 실례가 될까봐, 어제 통화해서 양해를 구했어요.
그리고 몇 가지 더 확인도 하고요. 무슨 내용이냐면,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부교역자로 섬기면서 대학원을 다닐 때였어요.
아마 Th.M(신학석사) 4학기를, 3학기까지 마쳤어요.
이제 한학기만 마치면 되는데, 사역의 우선순위가 자꾸 중복이 되는 거예요.
어느 날 목사님이 새벽에 기도하는데,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그 석사학위를 나한테 바칠 수 있느냐?"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한 학기만 더 하면 되는데.
"너의 그 학기를 나한테 바칠 수 있느냐?" 쉽지 않았겠죠.
그래서 고민하고 철야기도하고. "예, 바치겠습니다."
사실 요즘 학력 인플레가 돼서, 목회자도 대학원 수준의 졸업장이 있어야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예요.
그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요즘의 학사학위를 안 받는 것과 비슷해요.
목회자에게. "너의 학위를 나한테 바칠 수 있느냐." 결코 쉽지 않았을거예요.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은 ‘다 계속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나 유목사님은, 이 성령의 강권하심에 순종해서 "네, 바치겠습니다."
"그래 잘했다."
성령님께서 6개월 후에 부산의 어느 교회에, 34살 정도에 담임목사로 부임을 받으셨잖아요.
안산에 사역하시다 지금 선한목자교회의 담임목사로, 박사학위를 여러 개 받은 분보다 더 귀한분이죠.
이렇게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하는.. 그러한 영력이 우리 삶에 있어요.
▲저의 삶의 그런 것이 있었나.. 돌이켜 보니까,
제가 저희 교회에서 새가족 사역을 맡다가, 그때 새가족이 굉장히 많이 오시는 기간이었어요.
어느 날 순간에 성령님께서
‘이렇게 그냥 저희 교회 유명세가 좋아서 스스로 찾아오는 분이 아니라
정말 믿지 않던 성도들을,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서 모시고 오는 성도들이 더 많아야 되지 않겠나.’
그런 말할 수 없는 부담감을 제게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자진해서 담임목사님께 "새가족 부를 내려놓겠습니다."
정말 예수님 안 믿는, 그래서 온누리교회가 처음 성도들이 오는 성도들로
더 많아지는 교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새가족부 대신으로 시작한 것이 <맞춤전도 사역>이에요.
그래서 그 맞춤전도 사역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영혼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많은 보수를 받는 직장에서 갑자기 적은 보수지만
하나님께 직장을 옮기라고 하실 때도 있는 거예요.
▲이 성령의 강권하심, 우리의 계획과 생각을 뛰어넘는 그런 성령의 강권하심.
그 성령의 강권하심이,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강권하심은, 우리의 판단력이 마비시키는 게 아니예요.
우리 분별력이 흐려지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우리의 분별력이 더 올라갑니다. 더 판단력이 좋아집니다.
만일 성령의 강권하심이라고 본인은 말하는데,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러면
병원에 가보셔야 되요. 성령이 강권하시면, 판단력이 더 또렷해집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선택이에요.
"내가 선택한게 아냐, 이건 성령님의..." 그게 아니예요.
성령님께서 나를 강권하시되, 선택은 내가 의지로 결정하도록 하시는 거예요.
보세요. 사도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면
‘많은 결박과 환란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라고 성령님께서 강권하셨어요.
그러나 결정은 바울이 하는 거예요. "나는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간다."
이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여기 와있다." 가 아니라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하지만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결정과 선택은 바울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면 고난이 기다리고 하는 것을
바울은 ‘그러니까 가지마라’ 라는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하는 곳으로 결정했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세 번째 단어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3. 세 번째는 “사명”입니다.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기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있는 사명이 있다는 거예요.
자신의 생명보다 ‘내게 주신 그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그 사명’
그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지 못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죽을 건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같은 단어입니다.
왜 살아야 될지 모른다면, 무엇을 위해서 나는 죽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그 생명의 육신의 생명뿐이에요.
언젠가 이 세상에서 끝날 생명이에요. 육신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헬라어에서는 육신의 생명과 영적 생명을 두 단어로 구분해서 설명했죠.
우리는 다 똑같은 생명이란 단어를 쓰지만, 생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끝날 생명과 영원한 생명. 그 영원한 생명을 나에게 주었다면
이 땅에서 있는 육신의 생명은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는 거예요.
또한 그 영원한 생명을 수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자신의, 이 육신의 생명을 다해서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는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귀한일이지요. 이게 사명입니다.
사도바울은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위하여 살았던 인생입니다.
◑4. 네 번째 중요한 단어는 바로 “교회”입니다.
‘양떼’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교회’입니다.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떼들,
하나님의 자기피로 사신 교회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가치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교회, 이 가치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에 하나님의 그 아들의 고귀한 피값으로 사신 교회예요.
그 교회에 대한 사랑..
▲그런데 그 교회에는 늘 위험이 있어요. 어떤 위험입니까?
흉악한 이리 떼같은 거짓 선생들이 진리를 왜곡해서 자신을 따르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거짓 선생. 거짓 지도자와 아닌 것이 무엇이 차이가 있습니까?
거짓된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따르게 하지 않고, 자기를 따르게 해요.
자기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진리를 왜곡하는 겁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가르칩니다.
유사한 진리를 살짝 바꿔서, 진리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목적이 뭡니까?
자신을 따르게 하는 거예요. 양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숨어있는 이리떼들이
양떼들을 해치고 혼란케 한 사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30절에 보면 그 정확한 정의,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하게 하는 자들로부터 성도들을 지켜라."
하용조 목사님께서 목회자들에게 늘 당부한 게 있습니다.
늘 당부하신 말씀이 "목회자를 위해서 성도들이 있는게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서 목회자가 있는걸 기억해라." 항상 성도님들 중심이었어요.
"목회자를 위해서 성도들이 있는게 아니라 성도님들 위해서 목회자가 있는것이다."
자신을 따르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을 따르게 하고, 그리고 진리를 따르게 하고,
그리고 비전을 따르게 하는 거예요.
▲바울은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께 맡긴다’ 그랬어요.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이 교회가 은혜의 말씀을 붙잡아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말씀에 의지하고
모든 성도들의 그 말씀위에 기초해서 믿음이 자라갈 때 올바르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의 교훈,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 가보면 사람이 만든 규칙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위에 있어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은, 다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바꾸면 안 되요. 말씀의 진리 원리는 바꾸면 안 되요.
근데 사람의 말은, 때로는 시간이 지나가면 바꿀 수도 있는 거예요.
말을 바꾸라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제도와 규칙은 얼마든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가면, 상황에 따라, 문화에 따라
우리 다음세대에 바꿔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다음 세대들이
말씀에 맡겨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만들어놓은 규칙에 맡기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언으로 말씀을 물려주지 않고, ‘내가 세운 규칙이니 너는 평생 지켜라.’
그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시대에는 새로운 규칙을 따라 살면되는 거예요.
‘말씀에 맡긴다’는 게 그런 말씀입니다.
◑5. 다섯번째 핵심 단어는 "주는 것이 복되다."
33 나는 그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34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나와 내 일행이 필요한 것을 손수 벌어서 썼습니다.
35 이처럼 내가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약한 사람들을 도우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많은 필요가 있었지만, 받는 자로서가 아니라 주는 자로서 사역하기를 원했죠.
그는 손수 벌어서 그렇게 사역했어요.
당시 처음 믿는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를 연보로 받으면,
그것이 새신자에게 믿음의 장애물이 될까봐, 그들에게 주면 주었지
받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어요.
참 이 말씀을 보면서 ‘나도 손수 벌어서 일해야 되나?’ 그런 생각이 심각하게 고민 됩니다.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에 이런 자비량 목회 패러다임이 다시 돌아와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요.
너무 교회에 의지하니까, 이게 목회자/사역자들의 영성이 흐려지는 경향이 많아요.
저희 교회는 물론 교회가 전적으로 후원하는 목회자들도 있어야 되지만
왜냐면, 전적인 헌신이어야 되요.
일부는 그렇게 은혜가 있고, 은사가 있고, 실력 있는 목회자들인데 자비량 목회자,
또 이런 패러다임이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역하려는 이 사도 바울의 정신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주는 자의 spirit(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늘 받는 자의 spirit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나라의 경제가 어렵다 그러죠.
저는 잘 살자는 자체는 비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엇을 위해서 잘 살 것인가?" 그게 비전이죠.
우리나라 경제가 회복되려면, 이 비전을 회복해야 되요. 어떤 비전입니까?
저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런 비전을 우리나라 백성들이 가지면
한국 경제가 회복된다고 믿어요.
‘우리나라가 주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잘 살아야 되겠습니다.’
한동대학교 김영길 장로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 "배워서 남주자."
지식을 내가 쌓기 위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주기 위해서 배우게 될 때
그걸 올바른 교육의 비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기업이 어려우십니까?
"하나님 제가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잘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게 축복을 더해줄 줄로 믿습니다.
주는 자가 되기 위한 비전. 그저 많아지기 위한 것은 비전이 될 수 없어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나님, 이런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복된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경제 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도자들이 그런 비전을 제시할 때, 나라의 경제는 잘 살게 되어있어요.
단순히 잘 살기만을 원한다. 그건 비전이 될 수 없어요.
그런 욕망이 있으면 욕망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그러니 부정이 생기고.. 잘사는 그 자체로는 절대 비전이 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무엇을 위해서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잘 사는 가정이 될 것인가?,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마치는 말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런 비전을 심어줬어요.
-겸손과 눈물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성령의 강권하심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위해 헌신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런 교훈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정말 우리가 마지막 이별의 때에 이런 감격의 눈물. 감동의 눈물.
이런 진정한 사랑의 눈물로 우리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60대에 이르러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과 사역을 회고하며 나눈 이 고백을
우리의 마음으로 받고,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 교회안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진정한 사랑과 존경, 교제와 나눔.
이러한 비전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KBH
'분류 없음 >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음 세대는 우리의 희망 (0) | 2016.05.27 |
---|---|
영광의 행진 (0) | 2016.05.26 |
모세를 부르실 때 주신 3가지 표적 / Zac Poonen (0) | 2016.05.24 |
사도바울의 최고 열망 / T. Austin-Sparks (0) | 2016.05.23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 / 젠센 프랭클린 (0) | 201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