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위에 피어오른 연꽃처럼 행16:16~26 16.06.01 출처보기
◑본문 설명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그 여인의 주인들에게 고소당해서 감옥에 갇힌 스토리입니다.
배경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다음 새로운 파트너,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원래 목적지는 아시아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아시아가 아니라 터키의 에베소라는 도시,
그 도시가 속한 주의 이름이 아시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가고 싶었다는 말은 *행16:6참조
이 아시아의 주도인 에베소에 가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실라는 에베소로 향했고
가는 길에 루스드라 에서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을 만나 합류합니다. 그 사람이 디모데입니다. *행16:1
그런데 성령님이 에베소로 가려던 저들의 발걸음을 막으셨습니다. *행16:6
에베소로 가는 것은 바울의 계획이었는데, 성령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계획이 충돌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나침반이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인생을 살면서,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늘 나를 내려놓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충돌했을 때
그는 기꺼이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라는 터키(아시아) 북쪽으로 가려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목마 들어보셨어요?
그 트로이 목마의 배경인 트로이(드로아)에서
바다 건너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타고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한 명이 합류합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이자 사도행전의 저자였던 누가가 합류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10절부터 잘 보시면
그동안 바울이었던 사도행전의 주어가 우리로 바뀝니다.
따라서 관찰자로 머물던 누가가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복음의 관찰자가 아니라
복음의 참여자들로 인해서 확장되어져 갑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그리스로 건너간 바울 일행은
마케도니아의 첫 성, 여기서 ‘첫 성’이란 가장 큰 성을 뜻합니다.
가장 큰 성이었던 빌립보에 도착합니다.
빌립보는 원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였던 필립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도시입니다.
원래는 야만인의 땅이라 불리었는데 나중에 로마가 이곳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퇴역군인과 현역군인을 단체로 이주시켜서, 그 곳을 로마와 같은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정부조직과 행정은 거의 로마와 같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야만인의 땅이라 불리던 곳에 군인을 이주시켜
신도시를 건설했으니 규율이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의 별명이 ‘리틀 로마’였습니다.
A.D 1,000년경에 대지진이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유적 발굴 작업으로 인해, 이 도시의 흔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지금 그 고고학적 흔적만 보더라도, 빌립보 도시가 얼마나 큰 도시였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로마와 같은 황금물질 사상이 만연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빌립보에는, 도시를 마주보고 있는 6,500피트의 팡가이온 산이 있습니다.
그 산에서는 매년 7,500파운드나 되는 금이 채굴되었습니다.
또한 이 도시에는 술의 신이라 불리던 디오니소스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3천석이나 되는 원형극장이 있었는데,
공연은 물론이며 맹수들의 싸움터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빌립보의 랜드 마크였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이 도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와 같이 황금과 부유함에 취해 향락이 넘쳐나던 곳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양극화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힘들게 살았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기도할 곳을 찾던 바울 일행은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녀가 옷감 장사 루디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루디아라는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
‘리디아에서 온 여자’라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행16:14절에,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purple 옷감 장사’라고 설명이 되어있는데
두아디라 시가 원래는 바울이 가려했던 아시아 안에 있던 큰 성이었고
그 성 옆의 작은 마을 이름이 리디아였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안성에서 온 여자 분을 ‘안성댁’ 이렇게 불렀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이 루디아가 가족들과 함께, 사도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할 곳에 가던 바울 일행은 또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 여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6절에 등장하는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입니다.
이 사람은 여러 주인에게 고용되어 돈을 받고 점을 쳐주던
일종의 상업 무당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치는 여종이 바울 일행을 쫓으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17
마치 대변인처럼, 이 사람이 어떤 사람들임을, 이 여종이 말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이걸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이 점치는 여종이 진짜 용하긴 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인들에게 큰 돈을 벌어줬던 것 같아요.
18절 보시면 빌립보에게 홍보도 되고 해서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점치는 여종의 행동에 대하여 바울이 심히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점치는 여종 안에 있던 귀신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쫓아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여종이 말한 ‘지극이 높으신 하나님(:17)’이라는 표현이
빌립보 사람들이 섬기던 디오니소스의 아버지이자 신중의 신이라 불리던
제우스를 말하는 게 아닐까 추정합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 ‘바울을 높여서, 교만하게 만들어서,
본연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게 하려는’ 귀신의 고도 전략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젊은 여인이 귀신이 들었는데
황금물질 사상의 노예가 된 그 주인들이 불쌍한 여인마저도 돈 벌이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매우 분노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귀신을 내쫓았다는 겁니다.
▲점치는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 때문에 매우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19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오니까 더 이상 그 여종을 돈벌이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19
이 표현은 황금물질주의 사상에 빠져있던 빌립보인 들의 단상을 보여줍니다.
비단 이게 빌립보의 문제이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한 단상이기도 한 것이죠.
저들은, 그 불쌍한 젊은 여인의 영혼이 귀신에게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기보다
돈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돌아왔는데도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저들은 분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끌고 가서 고발했던 것입니다.
▲그 점치는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장터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곳의 지역재판관들과 무장경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은 오래전부터 장터 옆에 아고라라는 광장이 있었는데요.
그 광장에서는 물건도 사고팔지만, 여러 철학적 논쟁들은 물론이며 재판도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고라에는 지역재판관들이 있었고
또한 그들을 호위하고 이 아고라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릭토르 라는 무장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릭토르들은 지역재판관, 즉 정무관들의 명령에 따라
체벌이나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들고 다닌 저 무기가, 회초리 여러 다발에 도끼 한 자루를 묶어 만든 파스캐스라는 무기였습니다.
여담입니다만 훗날 2차대전을 일으켰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만든 당의 이름이
파시스트죠.
그 파시스트라는 말이 파스캐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파시스트당의 심벌이 릭토르들이 들고 다니던 파스캐스였습니다.
▲눈여겨보셔야 하는 것은, 제가 앞서 설명 드리면서
이 전도 팀에는 바울과 실라 외에도 디모데와 누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절 보시면 바울과 실라만 붙잡혀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과 실라만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헬라인이었고 디모데는 어머니만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기에
이 고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죠.
당시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안 좋았기에
이들만 고발한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점치는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만을
지역재판관들에게 고발하면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라고 말한 것입니다. :20
그러고 나서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신고했습니다. :20~21
그 주인들이 알았던 겁니다.
이 죄목은 로마 식민지였던 빌립보에서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들은 유대인들이 이런 죄를 저질렀다는 그 말 한 마디 듣고
흥분하여 절차도 없이 릭토르들에게 저들의 옷을 벗기고 매로 치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발에 차꼬를 채우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깊은 옥’이라 했는데요. :24
로마에는 세 종류의 감옥이 있었는데 경범죄자들을 가두는 코모리오라는 감옥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보다 좀 더 깊은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내는 인텔이라는 감옥이 있었고
세 번째는 강력범이나 혁명가들, 반역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두는 플리아놈이라는 감옥입니다.
제가 대학 때 로마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때 바울이 갇혔던 지하 감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지하원형 계단으로 내려가 보니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작은 공간들이 칸칸이 만들어져 있고요.
로마는 또 밑에 지하수가 흐르기에 굉장히 습해서 잠시도 있기 힘든 그런 곳이었습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바울과 실라가 바로 그 플리아놈이라는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들은 어떤 법적 절차도 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릭토르의 어마 무시한 무기인 파스캐스로 매를 맞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고 다시는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은 그 깊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로마의 권력, 황금물질 사상에 얼굴을 감춘 그 악한 영의 세력이
이 바울과 실라를 땅 속 깊은 곳까지 완전히 밟아버린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요.
온 몸이 찢어진 채로 치료 받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내가 세상 자랑 다 버리고 복음 위에 내 한 인생 바쳤는데
매번 당한 것은 이런 아픔과 고통이라는 사실에, 저들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이 세상이 사도 바울과 실라를 완전히 이긴 것 같습니다.
완전히 삼켜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권력이,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이 팡가이온 산의 저 황금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바울과 실라가 저들의 발밑에 들어가 있거든요. 땅 속 깊은 곳.
◑그런데 여기서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25절 보시면 바울과 실라가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기도하고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울과 실라가 위와 같은 아픔과 절망을 느끼는 인격체라기보다
이러한 사람들을 기계적인 신앙인으로 느낄 때가 많습니다.
바울이니까, 실라니까 당연히 기도했겠지. 참았겠지...
그래서 바울과 실라 같은 사람들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이 노래가 누구 노래죠? 들장미 소녀 캔디의 위대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캔디를 아십니까.)
우리는 바울이 만화에나 나오는 그런 캔디 같은 캐릭터인 줄로 인식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파하구요, 절망하구요,
그래서 도대체 이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언제까지 살아내야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 통곡하며 따져 묻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절망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신 그 주님이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3절,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아멘.
설교를 듣고 조시는 분은 조금 계시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졸지 않고 저와 여러분의 삶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시편 118편 5절부터입니다.
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걸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원망도 되고 절망도 되었지만
그러나 이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나를 삼킨 것 같은 이 어둡고 깊은 땅 속, 이 세상이 우리를 잊고
모두 잠든 한밤중에라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내 편이 되어주시는 그 하나님이 그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제가 한 번은, 세계 땅 끝 마을이라 일컬어지는 포르투갈 로까 마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곳이 흔히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땅 끝이라 부르는 로까입니다.
오래전부터 유럽과 중동 사람들은 스페인 땅이 지구의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스페인 서쪽,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왼쪽에 있던 이 로까를
지금까지 세계의 땅 끝 마을, 혹은 유럽의 땅 끝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포르투갈 유일의 한국인 선교사인 강병호 선교사님을 만나기 위해 저기에 갔다가
강 선교사님이 저 곳에 저를 데려가주셨어요.
저는 가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저 곳이 땅 끝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는 제 인생의 마지막을 묵상하게 되고.. 이상하더라고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육체의 한계를 묵상하기도 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이 저 땅 끝에서 어떤 마음과 말씀을 주실까?’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까요. 땅 끝 마을의 커다란 십자가상이 바다를 향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밑에는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한 시인의 글귀가 기록되어있었는데요. 이런 글씨였습니다.
‘육지가 끝나는 이곳에서 바다가 시작된다.’
‘육지가 끝나는 이곳에서, 바다가 시작된다.’
저는 가는 내내 땅 끝을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깨달은 사실입니다.
이곳에서, 남들이 다 끝이라고 시작하는 곳에서, 바다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 마음에 그런 마음 주셨습니다.
‘아들아, 끝이 끝이 아니다. 네 육체의 한계, 네 능력의 한계,
네 인생의 벼랑 끝에 십자가를 세우거라.
그러면 거기서부터 내가 일하기 시작하리라!’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인생의 벼랑 끝, 땅 속 깊은 곳에서 절망하지만
늘 우리가 함께하시는 내 편 되어주시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거기서 세우고 그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했더라는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쫓았던 그 능력의 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하고 그 한밤 중 깊은 땅 속까지 하늘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요셉이 나옵니다. 애굽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 이름을 지을 때 요셉 많이 짓습니다. 그렇죠?
성경은 그의 인생을 향해 히브리어로 ‘짜라흐, 형통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언급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한 번이라도 형통하다고 해도 끝이 날 텐데,
세 번이나 한 인생을 향해 ‘형통하다’ 이 요셉이 얼마나 복 받은 인생입니까!
요셉이 그 언제 형통하다는 세 번의 말을 들었는지 아십니까?
국무총리 되고, 자기를 팔았던 형제들에게 다시 음식을 주게 되고
‘내가 요셉입니다’ 라고 말했던 그 때가 형통한 순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 때 두 번,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한 번,
하나님은 그 요셉을 향해 짜라흐, 형통케 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가 총리가 되는 것이 형통입니까?
성경은 절망 중에라도 하나님이 찾아가 주시는 인생,
어떤 절망의 골짜기에서라도 하늘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는 인생이 ‘짜라흐(형통)’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이런 형통을 맛보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일지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찾아가십니다.
그래서 그 깊은 땅 속에서라도 하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형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저들은 이렇게 기도한 후에 찬양했습니다.
가만히 보시면 상식적으로 순서가 잘 맞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힘들 때 기도합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늘 기도하는 분도 계시지만, 우리는 보통 힘들면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순서인데, 오늘 25절,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상한 것은 바울과 실라는 자신을 맨 것이 다 풀려나기도 전에 찬송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송’에도 놀라운 능력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을 찬양하라.’
구약에서 그렇게 많이 쓰이던 이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신약에서 종적을 감춥니다. 찾을 수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찾다가 찾다가 발견했는데
언제 발견되었나요, 요한계시록 19장에 가서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 그 배경이 어땠는지 아시나요?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와 여자의 후손을 가로막던 바벨론의 큰 음녀가
이제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제압당하고 난 뒤에,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척추가 꺾인 다음에
하늘의 24장로들과 천군천사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큰 우렛소리로 많은 물소리와 같이 외쳤던 것이 뭐라구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계19:1, 3, 4, 6
하나님을 찬양하라 했던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바벨론의 큰 음녀가
완전히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된 그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에
저들이 외쳤던 고백이 할렐루야라는 것입니다.
이 외침이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으로 요한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이 할렐루야라는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육신은 심한 고난을 당하고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커다란 절망과 아픔 속에 놓여있더라도
그러나 결국에는 승리케 하실 그 하나님을 나의 위로로 삼으며 나의 소망으로 삼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우직하게 걸어가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믿음의 선포, 승리의 선포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읽고 지나갔던 본문 속에 이런 비밀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비밀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권력과 디오니소스의 발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이 전쟁에서 이긴 자로 승리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26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세상이 흔들렸습니다.
저들을 가로막던 그 견고한 문이 모두 열렸고요.
저들을 묶던 모든 결박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지각이 움직일 때에 바울과 실라가 어떤 느낌이었겠습니까.
‘이제 난 죽겠구나, 이게 뭐지?’
그런데 그 땅이 통째로 움직이는 그 순간 속에서도
내 손과 발의 차꼬와 그 철문들과 나를 결박하던 그 모든 체인들이 끊어져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 번 열린 그 길로 복음의 길로 사명자의 길로
다시 걸어갔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울과 실라가 삼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 세상이 삼킬 수 없는 우리 주님이 저들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지하 감옥이라는 그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주님을 붙잡았고
끝인 것 같았던 내 인생의 절벽 끝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고 승리케 하셨고
앞으로도 승리케 하실 그 주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간절히 바라기를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로 절망하고 계신 분, 있으십니까.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의 문제 등으로
땅 속 저 깊은 감옥 같은 곳에 홀로 웅크리고 계신 분 혹시 안 계십니까?
그리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아무도 내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홀로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계신 분들. 우리 가운데 없으신가요?
간절히 바라기는, 이 세상 누구도 삼킬 수 없는
그 누구에게도 삼킴 받지 아니하시는 그 주님을 붙잡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겠노라 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여러분의 인생 벼랑 끝에 세우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을 찬양하실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우리 육체의 한계가 끊어진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흔들려, 왜 이렇게 뒤집어지는 것 같아?’ 라는
그 절망과 혼돈의 가운데서도
우리 손과 발에 묶였던 차꼬를 푸시고,
우리를 가로막던 모든 철문들을 여시고
저와 여러분을 감았던 모든 결박들을 푸시고
다시 사명의 길 생명의 길 소망의 길로 가게 하시는 그 주님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일제시절 독립 운동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셨던 백범 김구 선생님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자기가 직접 써서 접어서 늘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말씀이 한 구절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만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졸지 않으시고
내 인생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내가 누구에게 삼켜지리. 폐허가 되어버린 이 나라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방해하던 수많은 대적자들 앞에서도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한결같이 독립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 혼돈 중에도 이 말씀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그렇습니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주님만을 붙들고 그 분이 행하신 일들을 기대하며 찬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26절 말씀처럼 저와 여러분 인생 전부를 흔들어서라도
우리 손과 발에 묶였던 차꼬를 푸시고 우리 앞을 가로막던 절망의 문들을 모두 여시고
저와 여러분을 묶고 있는 모든 결박들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깊은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듯
저와 여러분 가운데 새로운 소망의 꽃을 피우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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