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 전쟁이 주는 영적의미 갈5:17 출처보기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은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성도들의 영적 싸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말렉 전쟁도 성도가 싸우게 되는 영적 싸움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마시게 한 후에
아말렉과의 전쟁을 붙이십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난 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신약적으로 아말렉 전쟁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마귀로부터 시험당하는 모습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세 가지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뜻합니다.
이는 곧 육신의 소욕을 말하며,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싸움은 성도가 평생 싸워야 하는 신앙 가치관의 싸움입니다.
아말렉은, 장자권을 팥죽에 팔아버린 에서의 후손입니다.
성경은 팥죽에 장자권을 판 에서의 이런 모습을, 음행이고 망령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악에 속한 것을 말하며, 에서의 이런 모습은 육에 속한 자를 상징합니다.
성도는 마귀가 주는 땅에 것으로, 늘 시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와 생수를 마시게 하고 난 후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르게 하신 것은
신약적 의미로 성도가 성령을 받고 난 후 겪게 되는 신앙의 싸움을 예표 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으로서, 자기 안의 우상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 우상성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다가,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세상의 가치인, 떡과 싸워야 하는 싸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이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처럼 좇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재물을 가지고 성도의 마음을 땅에 붙잡아두는 시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 안에서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움을 하는데, 이는 아말렉 전쟁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대대로 싸워야 하는 것이므로 책에 기록을 하여서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싸워야 할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사사시대 내내 이방신을 좇다가 징벌을 당합니다.
이방신을 좇는 것은 떡을 좇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물질적 가치로 천한 것은 죽이고 값진 것은 남겨두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사고는, 곧 이 땅에 근거로 하는 뱀의 후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아말렉 전쟁은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 때 이겼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마귀가 주는 떡과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늘에 것을 소망삼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를 보고 땅에 지체를 죽이고 하늘에 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떡으로 시험합니다.
아말렉 전쟁은 영적으로는 우리 안의 우상숭배적 신앙과의 싸움입니다.
육신의 떡을 바라는 우상숭배적 신앙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습니다.
떡의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 때, 마귀가 주는 떡의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의 아말렉 전쟁 출처
하나님은 광야에서 일어난 아말렉 전쟁을 책에 기록을 하여서, 대대로 기억하고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세대 속에 신앙의 싸움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아말렉은 마귀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마귀가 주는 아말렉 전쟁은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의 아말렉 전쟁은 어떤 것으로 나타날까요?
◑아말렉과의 전쟁은, 내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는 사도들의 서신서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나온 말씀들입니다.
말씀마다 십자가 정신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말씀들이 비록 구약의 율법처럼 행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성도의 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는 은사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모든 서신서가 앞에서는, 복음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뒷부분은 교리를 삶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말해줍니다.
서신서 끝에는 항상 그 교리를 삶으로 실천한 성도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칭찬을 한 것도 다 이러한 연유 때문입니다.
교리가 나무라고 한다면 삶은 열매입니다.
올바른 교리는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성품적인 것과 사역적인 것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살아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나타나지는 것마다 성도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아말렉 전쟁도, 성품적인 것과 사역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품적으로는 육체의 소욕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것이고,
성령의 소욕은, 남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역적으로 육체의 소욕은, 복음을 자기 사욕을 위하여 악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성령의 소욕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과연 그리스도로부터 났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면
옛사람의 성품을 버리고 새사람의 성품을 입으라고 합니다.
삶의 지향성으로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삶에 가치관으로는 이방인과 같이 몸에 쾌락을 좇는 방탕으로 살지 말고
경건으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서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자연히 희생과 봉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과 행함이라고 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나무이고 행함은 열매입니다.
농부가 나무를 심은 것은 열매를 얻고자 함이듯이
하나님이 성도의 몸을 예수의 피 값으로 산 것은 성도의 몸에서 예수의 열매를 얻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의 생명을 피어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밭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을 몸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지금도 이루어가시고 앞으로도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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