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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순종과 하나님의 은혜

LNCK 2016. 8. 8. 08:39

요나의 순종과 하나님의 은혜   3:1~10      16.07.24.출처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의 모습을 보면,

참된 회개와 변화의 기적이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회개와 변화가 일어날 때의 특징>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회개가 일어납니다.

 

요나 3:5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요나를 통해서 전해지는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은 "사람이 하늘 나라로 날아가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날개가 필요하다.

하나는 믿음이요, 또 하나는 회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믿음과 회개는 항상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에는, 반드시 회개가 그 안에 일어나야 되는 것이죠.

 

회개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또 믿어야만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회개가 어느것이 먼저냐?" 라는 논쟁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가 있어야 믿음이 온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먼저라고 우리는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곧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라고 할 때는

우리의 삶의 길을 나의 생각, 나의 의지, 나의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역사가 동반된다는 의미이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라는 것은

곧 '나의 삶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라고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간단하게 하나님을 믿어서 회개했다이렇게 표현했지만

이 말씀 속에는 회개에 있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을 갖췄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 다섯 가지 요소가 꼭 들어있어야 합니다.

 

1) 첫째는 죄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이듯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는 언제나 빛이 비춰집니다.

빛이 비춰지면 나의 허물, 죄가 발견되는 거예요.

 

2) 두 번 째로 그 발견된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슬픔이 없는 회개는 마치 산모가 그 고통없이 자녀를 낳으려는 것 같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에 동반되는 슬픔에 두 종류가 있죠.

-자신이 받을 형벌을 두려워서 슬퍼하는 것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받을 형벌이 두려워서 슬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긋난 삶을 살고 있다..라는 것 자체를 슬퍼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 자체를 슬퍼하는 것.

내가 죄 자체를 미워하며, 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3) 세 번째는 죄를 자백하는 것이죠.

이 자백confession이라는 말은, "함께 동의한다." "인정한다." "함께 말한다." 라는 의미지요.

함께 말하는 겁니다. 누구와 함께 말합니까?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는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저는 죄 안에 이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저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을, 내가 함께 동의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4) 네 번째는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청교도 목사 리차드 벡스터는 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오래 더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죄의 뿌리는 더욱 굵어지고 깊어집니다.

가지를 꺾을 수 없다면, 그 가지가 나무가 되었을 때는, 어떻게 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속히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5) 회개의 마지막 단계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죄에서 떠나는 것은 회개의 절반입니다.

회개의 나머지 절반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회개하고

또 회개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 믿음을 강하게 해주는 이 사이클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말씀을 믿을 때 회개가 일어나고,

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더 깊이 믿어지고

이렇게 믿음과 회개는 서로 사이클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믿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죠.

그들 가운데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믿음이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 가운데 말씀에 대한 믿음이 찾아왔기 때문에 회개가 일어난 거죠.

이런 역사가 바로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가

우리의 삶의 변화를 결정짓는 거죠.

 

내 안에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태도가 문제가 있는 것이죠.

 

 

2. 진정한 회개의 역사는,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 혹은 사역자의 순종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더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나3:3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때 니느웨는 통과하는 데만 걸어서 3일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였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요나가

3장에서 순종해서 니느웨로 가고 있습니다.

 

요나의 순종은, 뼈아픈 징계와 대가를 치르고 경험하여 나온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굴복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일을 어렵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이는, 하나님이 그냥 버리시고 "네 갈길 가라.'

그렇게 버리시고 순종적인 사람을 찾아서 쓰시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스로 요나가 갔다면 "더 이상 나에게 필요 없다. 네 갈 길을 가거라.

다시는 내 앞에 얼굴을 보이지 마라." 그렇게 요나를 버리시면 될 일인데

하나님은 왜 폭풍을 일으키시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요나를 기어코 가고야 말게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찾아오셔서 끝까지 보내신 것은

요나가 꼭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이 필요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나에게 지금 하나님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기어코 순종으로 바꾸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분이 아니라

도구로 쓰시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불순종을 변화시켜서 순종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을 통해 역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불순종의 영들을 통해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공중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 한 이후로

이 세상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을 통해 사단이 통치하고 있는거예요.

 

사단은 절대로 스스로 세상을 통치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통치해봐야 어떤 영향이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는 나무와 바다와 산과, 또 자유의지가 없는 동물들을 통치해봐야

어떤 세상의 영향력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만물의 통치권을 부여받은 인간을 다스리고

인간에게 영악함을 줘야 세상을 진짜 정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단이 어떠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합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을 통해 역사합니다.

 

조금 심각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면

사단에게 협조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 나는 사단과 통행한 적 없는데.. 사단과 내통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넓은 의미에서 보면 다 협조하고 있는 거예요.

 

왜요? 불순종의 그 마음을 사단이 이용하는 거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가신 이유는

이 순종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속에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게 하는데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순종할 때, 순종을 통해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 대상, 그 지역, 그 사람들 가운데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순종의 상태에 따라서 절대 의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하시지만

우리의 순종 때문에, 말씀의 능력이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요나가 니느웨에 전한 메시지의 내용은 아주 짧고 단순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다."

히브리어로 보면 다섯 단어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그 전체 메시지는 요나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요나가 알고 있어요.

 

왜 가라고 하시는지, 이 경고를 주심으로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요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래서 불순종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니느웨의 영혼들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경고를 전했다면

다섯 단어만 이야기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40일 후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 (이것으로 끝)"

사랑이 있다면 뭔가 좀 많은 단어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40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기에 당신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에 대한

좀 뭔가 그 어떤 멘트들이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근데 니느웨의 메시지는 아주 간결하고 심플했어요.

"40일 후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

 

니느웨에 전한 이 말씀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서 전하는 그 간절함은 부족했지 않았나... 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4장에 보면, 요나의 마음이 나오거든요 사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4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나는 분노했고 불평했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가다가 바다에 던져지고

죽음의 위기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회개하고 순종의 길을 가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온전한 순종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또 하나의 근거가 뭐냐 하면, 3:4절에 보면은

이 성읍을 통과하는 데만 3일이 걸리는 큰 성읍이라 그랬는데

요나가 가서 전하는 것은,

요나는 성읍안으로 들어간 첫날에 선포했습니다.

 

'첫날에'라는 단어로 '첫번째 날에'라고 우리말 번역을 했습니다만,

개역개정에서 '하루동안 다니며'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양쪽 다 가능한 번역입니다.

 

영어번역에도 보면은 '하루 길의 여행을 다니며' 이렇게 번역이 된 번역들도 많습니다.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한데 그건 뭐냐면,

 

40일이란 시간이 주어져있고 통과하는 데만 3일이 걸린다고 한다면  

사실은 요나가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3일길이 걸리는 길을

40일이 걸린다면, 얼마나 많이 돌아다녀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 동안에 그 메시지를 전한 거에요. 그런데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건 하나님의 능력의 어떤 그 반응이 빨리 일어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그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아직 40일의 기간이 일어난다면 말씀을 전하고 난 이후에도

 

하루 동안만 아니라, 계속해서 요나가 40일이 끝날 때까지

마지막까지 전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요나는 하루 동안만 전하고, 이제 언덕위에 올라가서 구경합니다.

4장에 보면, 그 구경하는 게 뭡니까? '어떻게 되나 보려고'

 

요나가 순종해서 갔긴 갔지만, 전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열심을 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온전한 순종이라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이런 근거를 통해서, 요나의 순종은 순종이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이 완전히 담긴 순종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들을 행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정말 그 하나님의 마음이 온전히 담긴 순종도 있을 수 있겠지만

때로는 의무감으로, 어쩔수 없어서. 그렇게 전할수도 있습니다.

 

선교사역을 하지만 때때로 선교사님들도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의 마음이 완전히 담겨있는 사역도 있을 수 있지만,

때로는 어떤 사역대상을 만나면 '저 사람 내가 만나야 되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할 수도 있는 거예요.

 

어쩌면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비하면 올바르지 못한 마음의 상태일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뭡니까?

우리의 순종의 상태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이 차이를 우리가 잘 구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말씀 그 자체의 능력이, 우리의 순종의 상태보다 더 능력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 "40일이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거기에 요나의 어떤 따뜻한 사랑과 은혜와 간절함이 묻어있지 않을지라도

그 하나님이 전하시라고 하신 그 말씀 그 자체가 전해졌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도 그런 것을 참 많이 느낍니다.

어떤 때에 제가 충만해서 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복잡한 마음에,

그 영혼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이,

그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못한 가운데서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의 상태에 좌우되어서,

말씀의 능력이 가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나의 상태보다 더 능력있으신 거예요.

 

내가 기분이 좋으면 말씀이 능력이 역사되고,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하나님 말씀이 제한된다고 보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순종하지만, 역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역사하는 거예요.

 

우리 순예배를 인도하는 순장님들, 또 사회에서 일하시다가 힘들다고 하면은

"내 마음이 이런데 내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네 저도, 여러분의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때로는 저도 주일이 빨리 오지 않았으면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어느 40대 후반의 중년 남성이, 주일 아침이 되었는데

교회를 안 나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머니가 "왜 주일인데 교회를 안 나가니?" 그랬더니

찬양팀에 보이는 어느 집사님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못 나가겠다는 거예요.

 

"사람보지 말고 하나님 보고 가야지. 사람바라보고 교회 가는 것 아니다."

 

또 한 가지 더 있어요” “뭔데?”

주일만 되면, 교회 일이 피곤해서 가기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 예배가 중심이 되고, 예배는 드려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네가 꼭 교회를 가야되는 세 번째 이유인데

"네가 그래도 담임목산데 교회를 가야되지 않겠냐?"

 

담임목사도 때로 주일이 두려워질 때가 있어요.

정말 하나님을 깊이 예배하고 말씀을 전하는 그 충만함으로 나와서 설교해야 되잖아요.

때로는 그게 안 될 때가 있어요.

 

토요일 저녁에 부부싸움을 했다.’ 이거 여지없이 능력이 없어지는 겁니다.

 

여러 가지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정말 그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요나의 마음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니느웨까지 간 것만 해도 그는 참으로 순종했어요.

그걸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순종했어도, 그는 하나님의 마음까지 충만하게 순종하지 못했어요.

아마 요나는 지나가면서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순종해서 왔는데 니느웨 사람들 얼굴보니까 예상대로 마음의 분노가 일어났다."

그래서 지나가면서 말하는 거예요. "40일후면 니느웨가 무너진답니다."

 

옆의 사람이 "뭐라고?" 그랬더니

"못 들었음 말고."...

 

"40일후에 무너집니다." 그래서 "뭐라구요?"

"못 들었음 말고.. 못 들으면 당신 책임이고."

 

그러면서 이렇게 3일을 돌아야 하는데

그냥 지름길로 하루길 지나가면서 딱 얘기하고

언덕위에 와서 이렇게 성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형식적이고 의무감으로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그 순종.

 

근데 중요한 것은 그러면 그렇게 했으면, 능력이 안 나타나야 되잖아요.

그런데 요나가 더 뒤집어진 건, 자기가 그렇게 했는데도

하나님 말씀이 역사한 거예요.

 

지나가면서 한 말을 듣고, 한 사람이 듣고... 계속 퍼져 나갔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나의 순종의 상태보다 능력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사역보다 "내가 이렇게 사역했으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신 거다."

이건 교만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울 때가 더 많을지도 몰라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또 어떤 부분은

우리가 잘못해 놓은 것을 수습하는 일도 많아요.

 

그러나 우리의 어떤 사역의 상태, 활동, 내용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니느웨에서 나타나는 회개의 모습입니다.

 

 

3. 참된 회개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회에 속해있는 장벽도 다 무너뜨리며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의 모습을 보면

왕이 먼저 듣고 명령해서 한 것이 아니라

뒷부분에는 왕이 법령을 만들어서 전 지역에 선포해서 확장시키긴 합니다만

그 시작을 보시면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3:5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니느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요나의 선포한 예언을 들은 첫번째 사람으로부터 회개가 시작된 겁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신분을 가진, 어떤 위치 있는 사람이 주도하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일은 누가 주도하냐에 따라서 그것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누가 지도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신분과 제도를 뛰어넘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조건, 환경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권위 앞에 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 함께 동행하는 거예요참여하는 거예요.

 

교회 역사에 보면, <조직화 된 회개운동>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회개 선언문을 낭독하고,

성도들에게 함께 회개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문 발표로 회개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사례는 없습니다.

 

어떤 기도의 명칭에는 '통곡 기도회'라고 이렇게 이름 붙였는데...

그런다고 통곡이 안 일어나요.

타이틀을 잘 붙인다고 회개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조직으로 운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운동은 무명의 한사람, 소수의 기도모임, 미국의 대각성 운동, 한국의 대부흥 운동을 보면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지도자의 어떤 비전에 따라 이루어지는 회개가 아니라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게 그의 위치와 신분과 영향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왕이 나중에 이걸 듣고 거의 참여한 것 뿐입니다.

왕이 그러한 소식을 들었을 때,

왕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다가올 멸망에 대한 느낌이 있었겠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에 니느웨가 앗수르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쪽에서부터 공격을 받고 내부적으로 흉년이 일어나고

이런 멸망의 조짐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위에서 내려와, 재 위에 앉아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까지도 다 금식할 것을 명령하고, 그렇게 함께 참회했습니다.

 

이 지도자가 그 가진 영향력으로 확산시킨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회개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니느웨에 있었던 그 당시 사회적 어떤 체계.

어떤 장벽들이 다 녹아졌다는 거예요.

 

참된 회개 운동으로 하나 된 교회 안에서  어떤 사회가 가진 편견,

장벽들이 다 녹아지는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요나를 순종하도록 만드셔서

니느웨에 회개를 일으키셨습니다.

 

회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믿음과 회개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때로 순종의 상태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능력으로 역사 될 것입니다.

 

또한 회개의 역사는 이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업사이드 다운.

뒤집어 엎는 그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이일수록 복잡합니다. 절차가 많고

사람마다 그레이드를 따지고.. 세상의 위계질서가 가득한곳 일수록 뭐가 복잡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조직과 어떤 법규에 따라, 또 그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차별에 따라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왜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회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마땅히 죽어야 할 백성가운데 건짐을 받은 우리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러한 진정한 회개의 공동체를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회개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의 순종, 나의 감정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의 말씀앞에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어떤 편견과 차별과

그리고 신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천국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니느웨의 놀라운 회개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것을 감사하옵니다.

 

오늘 이러한 역사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된 믿음, 참된 회개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증거하며 전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상태로 하나님 말씀을 제한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그 능력으로 이 세상이 변화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말씀 앞에 날마다 회개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을 온전히 믿고, 돌이키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우리의 삶속에 살아있는 삶이 되기를 원하며

그 말씀을 전하는 순종하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K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