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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시대

LNCK 2016. 8. 6. 11:24

성령의 시대          2:14-21           16.07.03.스크랩, 출처

   

모든 육체 위에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성령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이 임재하심으로써 교회는 비로소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시작을 누가복음은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사야서 말씀을 들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4:18)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임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세상을 향한 초대교회의 첫 선포도

성령의 임재와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임재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들며 그 말씀의 성취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2:17

 

말세는 마지막 때를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세상의 악과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날을 사모했습니다.

 

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그때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선지자나 왕이나 특정한 인물들에게 특정한 시대에만 임하였지만

이제는 모든 육체 위에 임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말씀을 순종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때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바로 지금이 그때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20 명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것은

바로 그 시대가 성취되고,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자녀들이나 청년들이나 노인들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 위에 성령이 부어집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이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진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령은 거룩한 사람들에게만,

이스라엘 자기 백성들에게만 부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모든 육체입니다.

그들이 원수처럼 대하던 사마리아 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집니다.

 

그들이 도무지 구원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민족, 신분, 성별을 떠나 누구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부어집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시대라는 단어를 쓴 사람은

12세기의 사제 요아킴 플로리스(1132-1202)입니다.

 

플로리스는 구약을 성부의 시대로, 신약을 성자의 시대로 구분했고,

지금은 문자가 아닌 영이 다스리는 성령의 시대라 했습니다.

 

이는 달리 경륜사적 삼위일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따라서 드러나는, 또는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부와 성자는 외부에 존재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권위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직접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를 찾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성만찬의 빵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지는 성령은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줍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신비주의의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인간이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인간은 신처럼 될 수 있습니다.

 

신처럼 된다는 것은 교만이지만, 성경이 엄격히 금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실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나 제우스 신처럼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로마로 항해 하는 도중 배가 표류하여 머물렀던 멜리데 섬에서는

독사에 물리고도 죽지 않은 바울을 보며 바울을 신이라 부릅니다(28:6)

 

어쩌면 인간이 가진 위대한 이성의 발견도

성령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간 이성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정신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성령 하나님입니다.

 

인간 생명의 고귀함도 성령의 임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부 중의 하나인 크리소스톰이란 분은 걷는 것도 조심조심했다고 합니다.

자기 몸이 성전인데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자아는 그 내부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가리는 덮개이다.

우리가 자아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우리 안의 신성은 더욱 더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의 완고한 자아에 갇혀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지만

자아의 껍질을 깨면 깰수록 우리는 신성에 가까워집니다.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주목할수록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더 뚜렷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품고 있고, 또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 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또는 목마른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순절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새로운 인간은 탄생했고,

인간의 위대함은 더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그렇지만 성령의 임재는 위험한 길입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교만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굳건히 붙잡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각성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하늘로부터 갑자기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그 한계와 겸손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매우 매력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교회사에서는 주기적으로 성령 운동들이 일어납니다.

 

20세기에는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고 한국에서도 이를 계승했습니다.

성령 운동의 효시는 2세기 중엽에 일어났던 몬타니즘입니다.

 

그 창시자 몬타누스는 성령을 강조하였고

이들의 모임 중에는 예언과 방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두 명의 여성 예언자인 프리스길라와 막시밀라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의 놀라운 예언 능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오순절 운동과는 달리

극단적인 성결과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습니다.

결혼을 금하고 금식을 강조하며 성결한 삶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이런 성령 운동은 활력을 잃던 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초대 교부 중 명성이 자자한 터툴리안도 이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 교회 공동체를 타락했다고 하며 비판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성령에 의한 예언이라 하며 종말을 선포하고

종말의 장소를 예루살렘이 아닌 아시아 지역이라 했습니다.

마치 자신을 예수처럼 신성시 했으며, 성경을 벗어나 거짓된 계시들을 주장하다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오늘날 등장하는 여러 이단들의 모습과 유사한 결말입니다.

 

성령운동은 교회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 위험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이 성령을 오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우리가 어떻게 성령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령의 역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을 받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 임재 사건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했다고 하여 우리가 임의대로 말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단이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의 위험은

마치 자신이 계시자나 예수님이 된 것처럼 말하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을 받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영입니다.

 

말씀을 벗어나는 성령 운동은 위험합니다.

성령에 충만했던 베드로나나 바울이나 스데반이 붙잡았던 것은

구약 말씀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의 설교에는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언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능력 중에 하나가 예언입니다.

217절입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18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베드로의 설교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이 아니라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구약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베드로는 한 구절을 덧붙입니다.

요엘서 229절은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하고 끝나지만

베드로는 여기에 예언할 것이요란 단어를 덧붙입니다.

 

이는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한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예언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이라는 것을 미래 일을 밝히는 것처럼 신비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언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미래 일을 점치거나 예측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 일을 밝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밝힌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선지자라 불리는 예언자들이 했던 사역이

모세 오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뜻에 어긋날 때 심판을 예고했고 다가올 심판을 자세히 풀은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그 미래란 것도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령에 의한 예언이란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성령은 복음을 증거하는 영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취임사와 같이 선포했던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4:18-19)

 

성령이 임해서 무슨 일을 하게 합니까? 여러 해방 사역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사역입니다.

곧 복음 전파입니다. 복음 전파가 곧 예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

그것이 예언이고 성령은 이 예언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설교가 바로 예언입니다.

사도행전의 3분의 1 분량이 설교인데, 이것이 바로 예언 사역, 곧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사역입니다.

 

방언이라는 것도 결국 복음 전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예언의 영입니다.

우리가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도 성령에 의지해서 하는 것이고

이것이 더 예언에 가깝습니다.

 

예언은 미래 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재하신 주된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환상을 보고

 

사도행전에서 전하고 있는 성령의 역사 중에 많은 부분이

17절의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라는 말씀입니다.

환상은 영어로 비전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환상은 젊은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이 그를 베드로에게로 이끕니다.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받아먹으라는 환상을 통해

자신의 민족적 편견을 깨뜨립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에게 해를 건너 유럽으로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바울이 타고 가던 이 배가 바로 유럽의 문명을 바꾼 배라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위기 때에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에서, 난파해가는 배 안에서

바울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합니다.

환상은 우리의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입니다.

 

비전이 가진 힘이 그렇습니다. 바울처럼 뚜렷이 우리에게 환상이 보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여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이나 소원이나 꿈의 형태로 우리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간절한 기대 소망이 바로 비전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의 대강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환상이고 비전입니다.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고

그것이 자신을 애굽의 총리의 자리까지 올렸습니다.

 

하프타임이라는 책을 썼으며

미국에서 큰 케이블 TV 사를 운영했던 밥 버포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젊은 시절 학교 수업 중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문득 자신은 백배의 결실을 맺는 인생을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문득 다가온 이 생각과 결심이 그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 모시던 이중표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한신대에 입학하면서 교문에 걸린 한신대학교글자를 어루만지며

이 대학을 나온 사람들 중에 자신이 최고의 교회를 할 수 있도록 기도했고

그런 꿈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실제 그 꿈대로 이 목사님은 기장에서 최고 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분입니다.

17절에서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꿈은 개꿈이나 백일몽이 아닙니다.

늙은이가 꿈을 꾼다는 것은 노년에도 할 일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직업에는 은퇴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신앙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이는 그 자리를 꿰차고 천년만년 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신체 능력에 따라 우리는 물러날 때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일들을 주십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완고한 사람이 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하여 나가도록 만드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꿈을 주시는 분이며 비전으로 우리를 이끄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이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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