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5

뱀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 P1

LNCK 2016. 8. 17. 17:33

 

뱀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 P1    12:1~17          

정낙원 목사   계시록34, 출처

 

오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쟁이란, 신앙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 세상에서 일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단도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제가 종종 창세전 언약을 드라마로 비유하는데

이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스스로 출연하는 것이 아니고

감독의 허락 하에 출연을 하고 짜여진 각본에 따라 대사를 하고, 연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드라마를 위해서, 세트도 만들고 배우도 캐스팅하고 시나리오도 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지시 하에서 드라마는 완성되어집니다.

캐스팅 된 배우들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연기를 합니다.

 

이 세상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만물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드라마에 캐스팅 된 배우와 같습니다.

 

모든 드라마가 선악의 구도로 짜여서 펼쳐지듯이

이 세상 역사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투쟁하는 것으로 전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뱀을 후손을 나누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회 때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하듯이 하십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부활하여 승천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하늘에서 용과 전쟁을 하여 이기게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늘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이 세상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서로 대상만 다를 뿐입니다.

 

하늘에서의 전쟁은, 용과 미가엘의 전쟁이었다면

이 세상에서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의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와 예수님이, 자기 수하들을 가지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뱀의 후손간에 전쟁하는 대결장입니다.

이는 마귀와 예수님을 대리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양상이 하늘에서의 전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늘에서의 전쟁은 예수님이 용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정반대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이기고 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말입니다.

 

이 세상 관점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사단에게 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늘에 관점에서는 이긴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마귀는 이기고도, 하늘에서는 진 것이 됩니다.

예수님도 세상 적으로 보면 진 것인데, 하늘에서는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전쟁, 이 세상에서는 역리이고 역설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의 꿈처럼 살찐 소가 파리한 소에게 먹힘 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아셔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 땅에 속한 자들에게 먹힘 당하도록 해 놓았을까요?

, 역리와 역설로 다스릴까요?

 

이는 이 세상이 죄 아래 있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에게 천국이라는 유업을 주시려고, 지옥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지옥을 모르고서는 천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버려짐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설명하고자, 버려짐을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그 후손들을 이방의 객으로 살게 합니다.

그리곤 찾아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지고, 나중에 건져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이 역설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처절하게 버려지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천국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봅시다.

 

계시록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에 가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천국에는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왜 눈물을 닦아 줍니까?

이는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긴 자로 산 것이 아니라, 진 자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성공한 자로 산 것이 아니고

비천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누가 가느냐?

예수 때문에 눈물 흘린 자들이 갑니다.

 

예수 때문에 죽임 당하고,

예수 때문에 애통하고,

예수 때문에 애곡하고,

예수 때문에 아파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사망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이 세상에서는 역설로 숨겨 놓으셨습니다.

하늘로 나지 않은 자는 모르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세상에서는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비밀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지만

세상에게는 숨겨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너희저희로 구분하여서 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늘 백성이고, ‘저희는 땅의 백성입니다.

 

너희 와 저희의 전쟁이야기가 성경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상극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 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천지창조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그러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양과 염소처럼 종자가 다릅니다.

 

양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고, 염소는 사단에게 속한 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심판 하실 때

양은 천국으로, 염소는 지옥으로

각각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장기를 두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장기판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같습니다.

장기판에는 초 나라 군대와, 한 나라 군대가 싸웁니다.

그런데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이건 마치 하늘과 땅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하늘에 의한 것들입니다.

 

이 땅은 하늘에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뜻에 의하여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졸지에 사업이 망하고, 자식들이 죽어나가고,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급기야 온 몸은 병들어 죽어가게 됩니다.

 

욥과 그 친구들은, 이러한 사실을, 하늘의 뜻인 줄 몰랐습니다.

 

결국 욥도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그들과 같은 논리에 빠져 들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벌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논쟁이 32장까지 진행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

욥이 당한 고난을 창조의 사건으로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속에는,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습니다.

 

악어처럼 인간들을 해하는 것들도 있고

나귀처럼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악어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나귀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합니다.

 

비도 하나님이 내리시고, 우박도 하나님이 내리신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비는 좋은 것으로 여기고, 우박은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비나 우박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악어도 좋은 것이고, 나귀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어를 가지고 일을 할 때도 있고

나귀를 가지고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악어나 나귀나 비나 우박이나 모두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려가는데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귀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왜 창조이야기를 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펼쳐 보이는데, 욥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욥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욥을 장기판의 말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는 장기판의 말과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주인의 의도에 따라서 흥하기도 하고, 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자기 입을 닫고 유구무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욥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인과론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죄가 뭐냐?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을 질책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것이 뭔가요?

욥이 무슨 근거로 자기는 의롭다고 여깁니까?

그건 자기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근본을 모르고

자기의 착한 삶을 의롭다고 여긴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도 인정했습니다.

 

욥은 이러한 자기의 행위가 의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이렇게 하신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까지 탄핵하는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나타나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는데

하늘에 계신 분이 뭐가 부족해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로 희비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건 마치 사람들이, 개미나 바퀴벌레의 선과 악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퀴벌레 세계에도 선과 악이 있습니다.

개미의 세계에도 선과 악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바퀴벌레가 착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지 않고

개미가 악한 일을 했다고 벌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세계의 선이고 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바퀴벌레와 개미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선이다 악이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개미요 바퀴벌레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자기가 하나님께 대한 선한 행위를 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욥이 범사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산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길 땐 악이 됩니다.

 

이게 엄청 중요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자기 잘남으로 가지고 나올 때는 화가 되어요.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자기 의라고 여기면 죄가 되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산 것도 의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의는 따로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만이 의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것으로 나오는 것을 원치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나오는 것을 기뻐하세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의 잘못은 자기 행위로 아버지 앞에 나온 겁니다.

자기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순종한 것이

결국엔 아버지 앞에 목을 세우고 아버지에게 덤비는 무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산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자기 의가 되면, 악으로 나타나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킨 것은 잘한 일이에요.

예수님도 칭찬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 지킨 것을 자기 의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게 저주 받을 죄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이나 동일해요.

다 죄 아래서 난 죄인들이에요.

 

신자는 비록 율법을 지키고 살아도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하여야 해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해요.

이게 신앙이에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 지냄은 있는데, 하나님 앞에 긍휼 구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건 제사, 즉 예배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제사 속에 긍휼을 담으라는 말입니다.

 

제사 지낸 것을 자랑하지 말고 제사 지내면서

난 마땅히 저주 받아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사는 것은

나 때문에 죽은 흠 없는 제물의 피 흘림 때문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교회 생활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연보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구제하고 충성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므로 이러한 일 한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을 하게 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굴 섬기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교회에 오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우린 누굴 섬기거나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우린, 우리 밖에 몰라요.

나 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니까, 안 하던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섬기기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연보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에요.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한 일들이에요.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을 자기 의로 삼아서는 안 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로 오늘 본문을 보세요.

본문 계시록 12장을 보면, 하늘의 전쟁이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용이 땅으로 쫓겨나서

자기를 쫓아낸 주님의 후손들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늘의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곳입니다.

 

하늘에서 미가엘 천사와 용의 전쟁1라운드였다고 한다면,

이 땅에서는 2라운드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를 낳은 여자와 그 남은 자손들과

뱀과 그 졸개들과의 전쟁입니다.

 

신앙은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두 개의 이질적 세력과의 충돌을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뱀의 후손은 본질적으로 달라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세요.

한 형제잖아요. 그런데 달라요.

 

가인은 육에 속하였고, 아벨은 영에 속하였어요.

그래서 다투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 싸움을 기록하고 있어요.

가인과 아벨을 필두로 해서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레아와 라헬,

브닌나와 한나, 사울과 다윗,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어요.

 

육은 항상 세상 일에 관심이 있고, 영은 하늘에 관심을 가졌어요.

 

육에 속한 자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어요.

오로지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셨어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들과 함께 한 것은

그들이 사회적 약자라서가 아니고

그들의 모습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침을 통해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시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다고 해서, 그걸 흉내 내고자 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은 육적인 일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다고 하니까

이걸 흉내 내서, 마치 복음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냥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항상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흉내를 내고자 해요.

이는 영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뉴스에서 놀라운 것을 보았어요.

뇌 과학자들이 진보와 보수가 싸우는 것을 가지고

정신분석학으로 연구를 한 것을 발표하였어요.

 

진보와 보수는 뇌 구조가 다르다고 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정 반대의 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를 복음 적인 면으로 적극적으로 확대해서 말을 하자면

보수는 지키고자 하고, 진보는 혁파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진보주의자들은 공격성을 띠고

보수주의자들은 수비성을 띤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사람이 늙으면 다 보수가 된다고 하였는데, 틀린 말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진보와 보수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중에서도 보수가 있고, 어른 중에서도 진보가 있어요.

머리 허였게 하고도 데모하는 분들이 있지요.

 

이 분들은 데모 안하면 무료해서 못 살아요.

어디든 데모하는 곳에 나타나서 자기 자존감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목사나 신부나 스님도 동일해요.

뇌 구조가 진보이면,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고자 해요.

 

이렇게 보수와 진보가, 어떤 뇌의 구조로 정해져서 태어나듯이,

이게 그대로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게 성경에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속의 전쟁 이야기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걸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걸 잘 기억하세요.

 

이 세상은 여호와의 전쟁터입니다.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의 전쟁이에요.

 

여호와가 무슨 전쟁을 하십니까?

죄와의 전쟁이에요.

 

성경을 보면 여호와를 지칭 할 때 만군의 여호와라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란? 하늘 군대의 대장이 여호와라는 말인데,

한 마디로 전쟁하는 여호와란 말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오셨어요.

 

누구랑 싸우러 오셨나요?

마귀에요.

 

자기 백성들이 마귀에게 포로로 잡혀 있어요.

죄와 사망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죄와 사망 가운데 포로 잡혀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전쟁을 할 입장에 서 있지 않아요.

전쟁은 죄와 사망 권세 바깥에 계신 분이 해 주셔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신가 하면 여호와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전쟁이야기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를 구약의 출애굽 사건으로도 보여 주셨어요.

사사시대는 사사들의 전쟁을 통해서도 보여 주셨어요.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내는 것으로 보여 주었어요.

초림 때는 율법 아래서 구원해 주시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분류 없음 >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만지시는 손  (0) 2019.05.23
자기 자신에게 선포하라 / 존 파이퍼  (0) 2019.01.24
두 증인   (0) 2016.08.12
고난은 보상이다  (0) 2016.07.16
제2의 해방  (0) 2016.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