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보상이다 고후11:22~33, 히5:8~9 15.03.01.설교녹취
이 땅에 사시면서 배신을 당해본적 있으십니까?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나를 버리고 배신하고 가버릴 때 참담함이 얼마나 큰지...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는... 그런 것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광경을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때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오늘 이 시대처럼 교회에 나와서 맛있는 점심도 먹고...
그러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점심 너무 맛있었습니다. 교회 점심은 원래 맛이 없잖아요.
교회 밥은 원래 맛이 없는데, 오늘 교회 점심이 너무 맛있더라고요.
국도 맛있고 잡채도 맛있고 반찬도 너무 맛있고 그랬습니다. 제가 오늘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교회에서 밥을 주는 게 아니라
교회에 나오면 잡혀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무시무시한 것을 생각하며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그때는 ‘마음으로 믿어서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그런 구원을
생각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큰 대가를 지불해야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그런 때였습니다.
2년 반 동안에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사도바울은 그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러 갔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떠나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고린도에 가서 사도바울을 이간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설교를 잘 못한다." "복음을 잘 모른다." "사례비를 받지 않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이런 명목으로 사도바울을 그 교회로부터 이간질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간질을 시킨 것은,
사실은 사도바울이 전하는 순수한 복음에서 떠나서
구약성경의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주님을 버리고 종교로 돌아가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일종의 배신을 당한 형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불만에 대해 자신을 변호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이 고린도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고후11:22절부터 33절까지는, 그가 25년동안 사역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경험했던가를 성경이 쓰고 있습니다.
고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그 외에도 강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못 자고 못 먹고 굶주리는,
또한 바구니를 타고 다메섹 성에서 도망가는 그런 기가 막힌 장면들을
사도바울 스스로...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자기를 변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을까요?
사도바울은, 그가 선택한 주님, 그가 목숨을 걸고 따랐던 그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러한 길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저녁에 "왜 하나님은 사도바울에게 이런 많은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주요 논지
왜 사도바울은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았을까요?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도, 요한도, 야고보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죄가 많았을까요? 아니면 저주를 많이 받았을까요?
'그들은 왜 그런 많은 고난을 받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1. 저는 이런 사도바울과 제자들의 고난을 보면서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주님의 보상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실까요?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보상이다."
하나님을 사랑한 대가가 고난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것 같아 보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 대가가, 정말 좋은 것으로 돌려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가가 고난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요?
저는 강나루 장신대와 신대원을 졸업했는데, 제가 신학생일 때
저희 집사람이 저보고 새벽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새벽기도를 잘 하지 않는 신학생하고 내가 평생 앞으로 살다가
미래가 없을 것 같으니까, 이럴 바에는 이혼하자’고
저희 집사람이 저한테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이혼 당하고 싶지 않아서, 서울 북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때가 1984년경? 1월 달이었습니다. 눈이 정말 하얗게 쌓인 그런 때였는데
거기 가서 제가 40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40일 금식기도가 끝났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속에 무슨 마음을 주시냐면,
“나사렛과 갈릴리의 가난한 삶을 배워라.
그리고 농촌에 목회자 없이 비어있는 교회에 가서 그들을 돌보라.” 고 하는 마음을 제게 주셔서
제가 40일 금식기도 끝나고 난 다음에, 제 집사람을 설득해서 찾아간 곳이
경북 금릉군 부항면 월곡리 학동 부항중앙교회 라는 곳입니다.
이쪽으로 재를 딱 넘으면 충청북도 영동이 나오고,
저쪽으로 재를 넘으면 전라북도 무주구천동이 나오는
아주 경상북도의 첩첩산중에 목회자 없이 비어있는 교회에
제가 가서 그때로부터 6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저희 누님이 오래전에 독일에 간호사로 가서 저희 매형이 독일 사람인데
키가 190쯤 되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옷을 소포로 보내왔었는데, 윗도리, 바지를 보내왔었는데
제가 그때 6년동안 그 시골교회에 있는데, 사례비로 한 달에 9만원 받았어요.
그때 저희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꼬맹이들이 있었는데
9만원 받아서 옷을 사 입을 형편이 못되잖아요.
그래서 저희 매형이 키가 190인데, 그 옷을 세탁소에 갖다 주면
세탁소에서 소매와 바짓단을 잘라가지고, 헐렁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여기 미국의 목사님은 넥타이를 꼭 매시는데
저는 아마존 선교지에서 넥타이 매지 않고
그냥 거기는 적도 아래의 30~45도씩 올라가는데
거기다가 넥타이, 양복 입으면 더워서 못 견딥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이렇게 반팔남방을 입고 주로 설교하고
세례를 주거나 성탄예배 할 때만 제가 목에다가 로만 칼라 하고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한국도 다 이렇게 넥타이 매고 양복을 입어야 되니까
제가 6년 동안 독일 매형이 보내준 옷을 줄여서 입고 농촌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집사람이 늘 하는 얘기가
“서울에서 먹은 단물을 농촌에서 쫙 빼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좋은걸 많이 먹잖아요. 좋은걸 많이 누리잖아요.
좋은걸 많이 소유하잖아요. 그럼 우리 몸이 비대해지죠. 맞습니까?
네. 좋은 것을 많이 먹어서 비대해지기도 하지만
좋은 것을 많이 보고 좋은 것을 많이 누리면 내려가기가 어렵다고 그래요.
생활수준이 올라가는 것은 잘하는데, 내려갈 수는 아주 힘듭니다.
그때 저희 집사람이 얘기하기를
“하나님이 서울에서 먹은 단물을 쫙 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정말 단물을 많이 빼주셨습니다.
그 당시 저희는 너무 가난해서, 제 소원이 계란을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고
제 집사람은 고등어자반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해주셨는데
그러고 6년이 지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6년 동안 고생을 시켰으면, 하나님이 이제 어떻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6년 동안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좀 배워라.
그리고 농촌에 목회자 없이 비어있는 사람들을 돌보라.” 고 하나님이 보내셨으면
하나님 그 다음에는 무엇을 주시는 게 좋겠습니까?
무엇을 하나님이 보상으로 주셔야 좋겠습니까?
대형교회에 당회장으로 딱 가서,
정말 9만원 받으면서, 계란도 못 먹고 살고, 고등어 자반도 못 먹고 살았던 것을
실컷 소원을 풀도록 해주셔야 되는 게,
그게 자비와 은혜와 위로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저희한테 그렇게 안 대하시고
아마존으로 보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마존에 가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하나님, 우리가 아마존으로 온 것은, 큰 사역을 이루어서
정말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선교사라고 하는 이름을 얻는 것도 아니고
주님, 당신과 온전한 연합을 꿈꾸면서 여기 왔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세상 명예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주님과 완전한 연합 속에서,
당신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섬기고 따라가기 원하는 마음입니다.” 라고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 드리고 싶으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 보상으로 고난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고 선하심입니다.
잔느 귀용이라고 하는 영성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잔인하게 대하실 때가, 우리를 가장 자비롭게 대하시는 때다.”
이 말을 이해하시면 천국이 눈에 보이시구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면 천국이 눈에 안보이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잔인하게 대할 때, 가장 고난의 풀무 속에 집어넣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자아를 완전히 죽여 버리고,
우리의 자기연민과 우리의 자존심을 하나님의 발로 밟아버릴 때,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섭리하셔서
완전한 새로운 생명으로 당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는데요..
하기 싫어도 하게 될 때, 그때 속에서 올라오는 불평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 이것, 이것을 막 표출하고 나서
“하나님, 제가 죽어야 합당한 사람인데, 저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당신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통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고백하시나요? (아뇨)
우리가 이 주님께 순종한다고 하는 게, 이게 본성으로 안 되는 일이잖아요.
맞습니까? 주님께 순종하는 일이 본성으로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아니 본성으로 잘 되는 일을, 성경이 뭐하러 말하겠어요? 뭐하러 시키겠어요?
“사랑하라.”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잘 하면, 하나님이 뭐하러 ‘사랑하라’고 명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사랑 안하니까 사랑을 못하니까
우리 본성으로 사랑을 못하는.. 범죄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사랑할 수 없으니까, ‘사랑하라’ 말씀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잔인하게 대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원을 이뤄주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도 모든 것을 행해 가실 때,
그때에 본성을 위배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우리의 자아가운데,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자기연민이 완전히 없어지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보상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대충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없고
열심히 믿는 사람일수록, 우리의 자아가 죽고 자기 연민이 없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보상으로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야, 나는 왜 이렇게 복이 없어갖고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이나 뉴저지나 보스톤이나 달라스에 살지 않고
텍사스 샌 안토니오, 이 시골 구석에까지 와서 살아야 되는가.” 이런 생각해보신적 없습니까?
“나는 왜 샌 안토니오에 살아야 되는 팔자인가...”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 노래가 있더라구요.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팔자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시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팔자대로 만들어 놓으신다고 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은, 다 자기의 생을 제대로 못살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 또한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습니다.
사도바울 또한 수년 동안 그렇게 많은 고통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보상이다.” 라는 말씀을 드리는 중인데
여러분들 고난과 축복의 정의를 한번 이 시간에 외워봤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축복입니까, 고난입니까?
대답하실 때 정직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축복이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고난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자식이 텍사스 주립대학에 수석으로 합격을 하거나
또 2015년에 갑자기 그냥 사업이 확 커져서 돈을 셀 수 없을 만큼 벌거나...
하여간 암에 걸렸는데 암이 완치 되었다든지.. 이런 게 하나님의 축복 맞죠?
맞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건 축복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 좋아하는 축복, 전에 가끔 받은 적이 있어요, 없어요?
있으셨죠?
전에 우리가 좋아했던 것 “정말 하나님이 내 길을 열어주셨구나.”
그래서 기뻐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 기뻐했던 축복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못 가셨습니까? 정직하게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니까요, 아주 가난할 때는 주님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것 같더니
시집 못갈 미혼 처녀일 때는 주님이 전부인 것 같더니
결혼하고 나니까, 깨가 쏟아지는지.. 주님하고 멀어지더라고요.
또 그런가하면 시간이 없을 때는 시간을 쪼개서 봉사를 하더니
시간이 넉넉해지니까 휴가를 즐기느라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질 못 하더라고요.
아주 작은 개척교회 목사님일 때는, 한 영혼을 사랑하고 사랑하다가
교회가 점점점 커지니까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눈에 비전과 야망이 번뜩번뜩 거리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도와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합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축복)들이, 정작은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는 것들 아닙니까.
그리고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받으면, 우리가 기뻐합니다.
그 이후로 감사하곤 하죠.
좋은 일이 있어서 정말로 결혼 15주년, 그 다음에 또 승진을 기념해서
그 다음에 또 뭐 어려운 일을 해결을 받아서 감사하는 마음 특별히 드셨을 텐데,
그때 굉장히 감사한데.. 그러고 난 다음에 감사가 얼마나 갑니까?
그 감사가 며칠 안가고, 다시 또 고개가 팍 숙여져서
원망과 불평이 속에서 나오는 것을 아마 경험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고난은, 그 고난 속에서 가지는 교훈과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가지는 그 훈련을 통해서, 우리를 주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믿습니까?
고난이 우리를 주님께로 데려가고
우리가 누리기 좋아하는 것들, 우리가 갖기 원하는 것들은
우리를 주님께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생각을 하냐면,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껍데기 축복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 그것은 껍데기 축복이고
내가 갖고 싶지 않은 고난은, 주님이 주시는 진짜 축복이다.” 믿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세상 행복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잘 되는 곳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불렀고, 주님은 우리를 영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오셔서 행복하기를 꿈꾸고
교회에 오셔서 부자되기를 꿈꾸고,
교회에 오셔서 무엇인가 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꿈꾸면서 교회에 나오면
이 사람은 무당을 찾아가서 복채를 내고 굿을 하는 것이나
절간에 가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을 바로 기복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 복을 많이 받고 주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그냥 갈 곳으로 가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고난을 많이 받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기 원하십니까?
천국을 선택하시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5장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아들일지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삶의 문제는, 우리를 회개하도록 도와줍니다.
생활의 문제는, 우리의 겉사람을 깨뜨리고, 우리 속사람으로 새롭게 하고
우리 신앙 속에 있는 악한 암덩어리들을 제거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하지 않는 고난이오면 움츠립니다. 고개를 딱 숙입니다.
“나는 팔자가 왜 이렇게 사나워서 고생을 많이 하고 샌 안토니오에 살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을 하면서 슬퍼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권면을 드리고 싶은 것은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바치십시오.
전에는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헌금 바쳤잖아요?
이제는 고난이 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헌금을 바칠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요? 고난은 정말 하나님이 간섭하실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보상이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2. 둘째로 고난은 <세상을 좇아서 살아가지 말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늘 슬퍼하고 괴로워합니다.
우리가 손해본 것,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
우리가 불평등하게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것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요한1서 2장 15~17절 가운데 사도 요한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좇아서 살아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악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손대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악이 우리를 악한 곳으로 데리고 갈 때, 처음부터 악한 것을 보여주지 않죠.
마귀가 하와에게 찾아가서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참으로 선과 악을 알게 될것이다.” 라고 애기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와에게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아이를 낳을 때마다 죽을 만큼의 고통을 가질 것이고
남편에게 절대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남편에게 순종해야 될 것이고...”
이런 현실적인 얘기를 하지 않고, 마귀는 하와를 속여서
결국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먹었고, 그 후손인 우리가 지금까지도 그 고통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님께 순종을 하고 가나안땅에 도착했는데
그 가나안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흉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그곳에 머물렀으며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어쩌면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이라는 여자를 선물로 받아서
이스마엘을 탄생시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목구멍에 풀칠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서..
결국은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 죄를 지은 대가를 전에도 지불했고,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지불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세상을 좇아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
우리가 세상을 손댄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을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그들은 계속해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끌어내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고난을 줌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세상을 살아가면 내가 세상에 묶여서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고난이 있습니까?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가까이하지 말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네가 사랑하지 말라.’ 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 것을 믿으시고, 주님께 오히려 감사헌금을 바치시기를 바랍니다.
◑3. 세번째로 고난은 사도바울을 <연단하는 축복>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복음을 전하고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다가, 요즘 말하는 소위
“성공한 목회자. 스타가 되는 목사가 되었더라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인생을 마쳤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우리가 읽었던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말씀하는
“그런 고난과, 고난과 고난의 연속으로 인생을 살지 않고
성공한 목회자로 인생을 마쳤다면,
사도바울이 어떻게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일생 핍박과 고난가운데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그 일생에 핍박과 고난이 사도바울을 순전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참으로 우리 기독교의 교리를 세운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선대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참으로 고난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온전하게 바뀌어져간 사람들입니다.
고난속에서 풀무로 의를 단련하고
고난을 통해 사람을 단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C. S. 루이스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고통의 문제> 란 책에서
“사람은 고난이 따르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들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고통이라는 것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하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대로 사는 사람에게
잠잠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면, 도무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통해서 정신을 차리게 하며, 잠자는 자를 일깨워주고
사명을 잃은 자들을 돌이켜 회개케 하는 것이다.”
저는 C. S. 루이스의 얘기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고난은 사도바울을 연단하는 축복의 도구였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아주 훌륭한 미국 목사님이 저희 아마존 사역지에 오셔서
한 일주일동안 사역을 했는데,
그분이 저희 사역지에 오기 전에, 중국에 가서 중국 목사님들을 만나고 왔는데
거기서 20년 동안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 때문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온
두 목사님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었다고 그래요.
근데 그분이 무슨 얘기를 하느냐면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이 두 목사님이 나와서 얼마나 자기 자랑을 하는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제가 들으면서
‘20년 동안 중국 감옥에서 생활 한 것이 헛고생했구나.’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위선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 잘아는 시편 119편 67절, 71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낮아지고,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지고,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34살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34살에 선교사로 가서
브라질은 ‘A,B,C,D’라고 알파벳을 읽지 않고 ‘아, 베, 쎄, 데’ 라고 읽는데
가서 제가 브라질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포르투갈어를 배웠고
그리고 인디오 문화를 배웠습니다. 거기서 저의 사역지에 한국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저희 집사람이 유일하게 한국인이었는데
저희 집사람이 하나님 나라로 간 다음에는, 제가 유일하게 선교지에서 한국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 그 동안 한국사람 선교사를 보내주지 않은 것이 감사합니다.”
한국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교회 형제들과 브라질 사람들이 제 친척이고
형제고, 친구이고, 그들이 우리 가족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들 사회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 주류 사회속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제 수 십 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보니까
저는 지금 그들 사회 속에서 존경받는 유지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만일에 저도 한국선교사님들이 모여 사는 것처럼
여러 가정이 모여서 김치 먹고, 된장국 먹고, 한국음식 먹고 살았으면
제가 이 우리 브라질 형제들의 주류 사회 속에 들어가서
그 동네 사람들의 유지로 제가 세움을 받지 못했을 터인데
하나님이 저를 외롭게 놔두셔서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환경이 참 얼마나 감사한지요!” 라고 생각해 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브라질에 가서 브라질 말을 들었고 문화를 배웠고
또 고독을 배웠고 그리고 사역을 진행해 오면서
얼마나 많은 핍박과 배신과 고소를 당했는지 몰라요.
정말 하늘과 땅 사이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데
거기 한국사람 변호사가 있겠어요?
마나우스 같은 대도시엔 변호사가 있겠죠.
그런데 거기는 아무도 저를 도와줄 한국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거기서 고소를 당할 때, 정말 낯설고 무서운 땅에서
외국나라 검사와 판사 앞에서 제 자신을 변호하게 될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 가운데서, 그런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자랑과 의를 다 없애주었습니다.
저의 사역지는 보시다시피, 저희가 제일 중점적으로 하는 사역이 신학교 사역입니다.
이제 청년부를 데려다가 4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시키면서
공부를 시켜서 신학교를 졸업시키고
또 우리 신학생들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신학교 안에 4년 공부하는 동안에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시켜서
고등학교 졸업장, 그리고 신학교 졸업장을 주어서 내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인디오 말로 사역을 하는데
이제까지 120명 가량을 신학교를 세워서 졸업생을 배출했고
제가 교회를 4군데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다 합하면 한 500명가량,
저희 본교회와 개척한 지교회 합치면 500명 가량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에 병원선이라고 큰 배가 지나가는 것 보셨죠?
제가 병원선을 갖고 있는데 그 병원선을 통해서
의사와 치과의사들, 간호사들을 데리고
의료혜택이 미치지 않는 인디오 마을에 가서 그들을 치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2500명 가량이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의료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때는 “아마존 오지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했다.”
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런데 사실 그런 마음이 얼마 전까지만해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요!
저희는 믿음 선교 faith mission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기도로 도움을 요청해서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 방식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 조지 뮐러 목사님,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
워치먼 니 같은 분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서 사역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2013년까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이 저에게 필요한 모든 도움을 공급해주시는 것을 제가 경험했는데
그런데 오래하다 보니까,
다른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자기 명함에다가 계좌번호를 적어서 나눠주는데,
저는 한 번도 명함에 계좌번호를 적어서 나눠줘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제 자랑이 되니까 하나님은
“너는 내 의의 옷을 버리고, 너의 의의 옷을 입었다.” 고
하나님이 제게 보여주시는데
제가 얼마나 책망을 많이 받고 회개를 했는지요.
“하나님 이제는 제가 믿음선교를 하지 않고, 투명한 선교를 하겠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러고 제가 ‘투명한 선교’로 방침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제 집사람이 암으로 투병하고, 암이 다시 재발되고 하는 과정 가운데
제 자랑과 의를 하나님이 다 없애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또 브라질은 술이 얼마나 싼지 몰라요.
그래서 술 한 병을 사서 마시는데 술이 없으면
브라질은 에틸 알콜을 팔아요.
브라질은 사탕수수를 많이 재배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알콜을 그냥 통째로 마시는데
길가에 쓰러져서 누워서 잠자는 사람 항상 많이 있어요.
죽은 사람은 아니고, 길을 지나가다 보면 길가에 쓰러져 잠자는데
무슨 말로 술주정을 하느냐면, 부족언어로 술주정을 하는데
침을 줄줄 흘리면서 술주정을 해요. 제가 그걸 보면서
“하나님, 제가 술을 마시고 쓰러져 누워있는 저 영혼보다
제가 더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제 자랑과 의를 다 없애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저를 향한 축복이었습니다.
제가 사역을 크게 잘하고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한국교회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이 되고, 영광이 되고, 면류관이 된다면,
제가 천국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자랑과 우리 자존심을 다 없애시고
순전한 영혼으로, 금같은 영혼으로
다 우리 모두를 천국에 데려가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는데 그 연단의 끝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에 사도바울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이렇게 얘기하며 사도바울이 "내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지 살 소망이 끊어진 것은,
주님만 의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고생을 하면, 하나님이 언제까지 연단하시느냐?
살 소망이 똑 떨어질 때까지 입니다. 그때가 언젠지 아세요?
세상의 수치와 모욕과 조롱이 내 한 몸으로 다 쏟아지게 될 때...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온전히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연단의 끝입니다.
아직 여기까지 안 가신 분 계시면 “하나님 속히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실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버리시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릴 때, 세상이 우리를 버릴 때
그때 우리가 완전히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아가, 우리의 자랑이, 우리 의가 하나도 없어지게 될 때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온전하게 오셔서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는 말씀이 이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아직 제 고난이 아직도 연단이
세상의 조롱과 수치로부터 완전히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 제가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의지하는 구석이 한 가지라도 또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한 생명으로 역사하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속히 주시옵소서. 당신이 원하는 연단의 끝을 속히 주시어서
제가 내 생명으로 살지 않고 당신 생명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아까 오전에 제가 말씀드렸죠?
세상이 여러분을 버리기 전에, 여러분이 세상을 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세상에 못 박히고, 세상이 나를 못 박았다고 그랬는데
내가 세상을 못 박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못 박습니다.
세상이 나를 못 박은 것, 얼마나 창피하고 수치스럽습니까?
내가 세상을 못 박아 버리면, 그것은 승리하는 것이고,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끝을 속히 주시어서, 내가 내 생명으로 살지 않고
내가 의지하는 것들이 다 없어지고, 주 이름으로만 살게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실 수 있는, 선구적인 믿음을 주님앞 에서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의 고난은 <우리를 향한 고난>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이 곱게 늙으시고 자자손손 잘 되어서
100세에 주님이 돌아가셨다.. 그러면 그분이 아무리 좋은 명언과 교훈을 남겼다 할지라도
그분 앞에서 루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저처럼 홀애비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들까요?
여러분은 잘생기고 잘난 사람 앞에서 주눅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듭니까? 저는 드는데요.
너무 잘생기고, 그것도 뭐 공부도 많이 했지요. 돈도 많지요.
뭐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서면
"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일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보니까 우리 주님은 33살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25년동안 고난과 고난을 겪다가 목이 잘려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할 때에,
사도 바울을 생각하면, 주님을 생각하면,
“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죽음과 고난이 제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니 감사합니다.”
라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선교지에서 24년동안 얼마나 많이 울었겠습니까.
잠 못 드는 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은행잔고가 1500원밖에 없어서, 브라질 돈으로 3원밖에 없어서
누군가가 제가 발행한 개인수표를 갖다 은행에 집어넣으면,
나는 부도가 나는데 "하나님, 이 부도를 내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무도 돈을 빌릴 사람이 없는 이 땅에서
하나님, 수표가 은행에 들어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제가 얼마나 많은 잠 못 드는 밤을 보냈겠습니까.
그렇게 잠을 잘 못자고, 밥을 잘 못 먹으니깐
마귀가 제게 선물을 주는데, 제가 머리가 하얘 지더라구요.
그리고 혈압이 생기고 당뇨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 세상의 염려를 내가 한 몸에 품으면, 마귀가 이런 선물을 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을 생각할 때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겪었던 고난의 10분의 1도 저는 아직 안 겪고 있는데
그의 고난이 제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니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서 주님 앞에 나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고난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 고난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라고 생각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의 고난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고난 받은 것이 너에게 영광이라.”
우리 중에 고난 받는 성도님이 계시면
“오, 주님. 제 고난이 다른 사람들의 영광이 되게 해주십시오.
왜냐면 내 고난을 통해서 많은 다른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주님앞에 달려갈 것이기 때문에, 나는 고난을 받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는데, 하나님 저를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주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집사람이 떠나기 전에,
저희 선교지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브라질 국경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디오 부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에 있기 때문에
브라질이 아주 많이 신경을 쓰는 곳입니다.
그래서 절대 인디오들에게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많이 제한을 하고 그런 곳이기 때문에
제가 저희 동네 근처에다 신학교를 세웠고
저희 병원선은 인디오 마을에 들어가서 의료혜택을 주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와서
우리 병원선은 동네에, 제가 사는 도시에 있고
인디오 마을이 주변에 딱 떨어져 있는데
이렇게 사역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그 동네의 관료들이 반대를 하고
시비를 하고 핍박을 했는지.. 정말 제가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제 집사람이 죽으면서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화장해서 우리 선교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고 갔어요.
그래서 제 집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한국에서 장례식을 하고
화장을 해서 뼈를 갖고 와서, 제가 아마존의 신학교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이 집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 집사람이 자기들을 사랑했고, 자기들을 섬겼다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열려지는 것을 보면서
제 집사람이 살아서도 큰 일을 했지만, 죽어서 우리 도시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고
하는 사실에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한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문을 열어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죽으시고 우리를 살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난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주고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고난을 받지만, 그러나 주님께로 달려 나가게 해줍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의 최고가 되면 누가 여러분을 좋아합니까?
제가 이 설교를 마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최고가 되면 누가 여러분을 좋아하겠습니까?
샌 안토니오 최고 부자가 새생명교회에 나오면
그 가족들은 우리가 최고 부자라는 것 때문에 되게 기쁘겠지만
최고 부자의 자리에 못 서는 두번째 부자, 세번째 부자는
첫 번째 부자를 보면서 기분이 좋겠습니까, 안 좋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가정 중에 자녀가 샌 안토니오에 사는 텍사스 최고 좋은 대학에 1등으로 들어갔습니다.
근데 다른 자녀들은 대학도 못 들어가고
마약하고 술 마시고 문제를 일으키는 그런 자녀를 가진 부모가
여러분의 자녀가 최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좇아가는 것은, 나하고 가족만 좋으면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최고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겪어가면서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더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좋은 것 만을 쫓아가지 마시고
우리 눈에 좋지 않더라도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고난을 기쁘게 받으시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기 원합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고난은 보상으로 주십니다.
세상을 살아가지 말라고 하는 경고이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썩지 않으실 것으로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우리 영혼이 더 거룩해지도록 우리를 더 온전하게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고난을 허락해주십니다.
이때에 감사헌금을 드리시라고 제가 말씀드립니다.
근데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때 감사헌금을 하는데 이런 감사헌금은 또 안 해요.
‘이 고난을 없애주십시오’ 라고 감사헌금을 하는데
그 감사헌금은 기복주의를 꿈꾸는 감사헌금인데, 그런 감사헌금은 안 되고요,
“하나님 고난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실 줄 믿습니다.”
라고 하는 믿음으로 감사를 바치시는 분에게,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지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받는 고난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줄로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고난을 받아들이실 수 있는,
기쁨으로 고난을 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타자 K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