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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베드로의 간증 / 楊寧亞

LNCK 2016. 8. 18. 07:52

www.youtube.com/watch?v=ZFGfHN9_jAM

야고보와 베드로의 간증                    12:1~5                   출처 #1

타이페이 전리탕 眞理堂교회 楊寧亞 牧師

 

*성도는 살아도 영광스럽게 살고,

죽음 앞에서도, 영광스럽게 죽어야 한다는 주제의 설교입니다.

 

성경을 펴시고 사도행전 1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은 그다지 유쾌한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이 가득하죠.

 

그런데 이 12장에서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사도행전 전체에서 말하는 메시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시고

사도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12장은 사도들이 죽음의 핍박을 받았을 때. 즉 사망의 문턱에 왔을 때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여러분도 12장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죽음'을 말하는 대목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실 겁니다.

 

12장에, 죽음의 위협에 놓인 4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먼저 야고보 사도인데요.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죠.

-둘째로 베드로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죽음의 위험에 처했지만, 결국 죽음을 면합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를 감시하던 군인들입니다.

베드로가 탈옥을 해서 처형을 당하게 되죠.

-네 번째는 헤롯왕입니다. 핍박자의 비참한 말로가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모두 영화롭게 죽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죽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같은 경험을 하게 되지만

모두 영화롭게, 품위있게 죽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가장 운이 없던 사람들이 군인들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까요.

 

헤롯왕은 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지만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그를 벌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볼품없이, 비참하게 형벌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2. 그러면 성도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주님을 증거하는 자로서 영화롭게 죽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주제입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와,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살펴볼 텐데요.

사도행전 12장 말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또 다른 핍박이 예루살렘의 교회에 임한 것이 나옵니다.

 

앞서 사도행전 8장에서 스데반이 순교한 이후에 엄청난 핍박이 예루살렘의 교회에 임하게 되고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납니다.

 

그때 흩어진 자들은 대부분 빌립 같은 헬라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과 8장에서 기록되었듯이

사도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그곳에 머물러 있었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십니까?

 

당시 핍박이 히브리파 유대인에게도 임했는데

히브리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사건이 발생한 후에, 유대인들이 다시 위험에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중요시하던 것은 성전이나 모세의 율법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룩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쪽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헤롯왕도 모세의 율법을 잘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는데

왜 야고보는 죽임 당하고 베드로는 살았을까요?

여러분, 어느 쪽이 더 간증이 될 만합니까?

 

어떤 분들은 본문 속에서, 야고보가 베드로보다 더 품위 있게 순교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베드로가 더 품위있다 라고 말하는데요,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이 더 간증거리라는 주장입니다.

교회가 절박하게 기도했지만, 야고보는 죽음에 이르고 베드로는 살았으니까요.

 

하나님은 베드로를 더 사랑하시고, 야고보는 덜 사랑하셔서 살리지 않으셨을까요?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명은 죽임을 당하고, 한 명은 죽음을 면했으니까요.

 

도대체 누가 더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일까요?

 

또 죽음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해야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그 판단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위해 증거 할 때 한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20절에서 말씀해주었는데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 기준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면 간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드러나면 간증이 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죠?

 

야고보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핵심제자 3명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죠.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만 익숙합니다.

 

그들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저서"를 기록하여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좀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죠.

그럼에도 초대교회 사람들은 야고보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12명의 제자 가운데 주님을 위해 가장 먼저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롯왕에게 핍박당할 때, 그의 생명을 내놓았고

그를 통해 예수님이 더욱 존귀해지시도록 했습니다.

 

즉 존귀하게 살다가,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죽음으로써, 충분히 영광스럽게 주님을 증거하며 죽었죠.

 

베드로도 핍박당할 때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둘째 날이 되면 야고보처럼 처형될 처지였거든요.

그럼 베드로는 과연 주님을 증거했던 것일까요?

 

베드로도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네 패의 군인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고

사슬에 묶인 베드로는 군인들 사이에서 잠들었죠.

 

베드로는 왜 이렇게 감시를 철저히 받았을까요?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는데요.

베드로가 천사와 연락이 잘 통하는 사람인지, 그때도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오잖아요?

그때도 천사의 도움으로 베드로가 풀려났습니다. 한마디로 경력이 있었죠.

 

그래서 이번엔 더 철저하게 그를 감시하려 한 것입니다.

이런 엄밀한 감시 속에서 베드로는 잠을 잘 잤습니까?

아니면 불안해서 못 잤습니까? 그는 잠을 잘 잤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땠을까요? 다음 날 목이 날아갈 처지면 여러분은 잠 잘 수 있어요?

베드로에게는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영광스럽게 죽었고,

베드로는 영광스럽게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살든지, 죽든지.. 영광스럽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비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아주 영광스럽고 존귀합니다.

 

우리가 현재, 그리고 남은 생애에, 이런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영광스럽게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는 것입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의 천사가 와서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고

예루살렘 회의가 열릴 때도 살아서 참석을 합니다.

 

그가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베드로를 살려 주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는,

내 삶이, 또는 내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떻게 존귀하심이 나타나는지를 봐야 합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된다면, 죽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죽음을 통해서, 베드로는 삶을 통해서

각자 주님을 존귀케 하고, 또한 자신도 영광스럽게 행했던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죠.

베드로의 설교가 능력이 있었습니까? 스데반의 설교가 능력이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설교만 했다 하면 3천명, 5천명이 회개했죠.

그러나 스데반은 설교만 했다하면 돌이 3천개, 5천개가 날아 왔지 않습니까?

 

그럼 누가 능력 있죠?

박수를 받았고 반응이 좋은 베드로가 당연히 능력이 있고

스데반은 돌이 날아와서 그를 죽게 만들었으니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사도행전 7장을 읽으면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우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셨다고 나옵니다.

 

보통은 우편에 "앉아계신다." 라고 기록을 많이 하는데

왜 서 계셨다고 했을까요? 천국으로 오는 주의 종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얼마나 영광됩니까!

 

그럼 베드로가 더 증거가 됩니까? 스데반이 더 증거가 됩니까? 둘 다죠!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드러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나 다른 이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하실 땐 더 그렇습니다.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하면 어떤 분들은 돌아가시고, 어떤 분들은 좋아지십니다.

돌아가신 분들은 간증할 것이 별로 없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들은 간증할 것이 많으실 것 같죠?

그러나 그러면 안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죽거나/ 살거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간증입니다.

 

히스기야왕은 원래 죽어야 할 목숨이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15년의 시간을 교만하게 살았고, 하나님께 수치를 주었고 영화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을 보면 죽음을 앞두고도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영화로움을 나타냅니다.

 

제가 대학 1학년 때, 토요일 밤에 성경공부 모임을 다녔었는데

하루는 제가 모임 전에, 근처 식당에 갔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에게, 그 집회에 참석하라고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기대도 안 했는데, 그 친구가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고, 결신도 했어요.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바로 세례반으로 올라가도록 권유했고

세례반을 가르치는 목사님을 통해 교육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참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침 그 친구 연락처를 알아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1주일 전에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암이 발견되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친구는 병원에 간 후에 계속 퇴원하지 못했고

저와 교역자님들이 1년동안 계속 친구가 입원한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친구는 결국 1년 만에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저는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요.

 

죽기 직전에도 그처럼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치료 초기부터 말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그 친구는 제가 볼 때마다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비록 말라가긴 했지만요.

 

그 친구는 어떤 원망이나 원한도 없었습니다. 기쁨만 가득했죠.

그 친구의 얼굴이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또 그 친구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존귀하심과 능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금방 예수를 믿게 된 설렘으로, 마치 아이처럼

그 안에 기쁨이 가득하고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저는 친구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두고 있어도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죽음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그 사랑이, 그 영광이 있으면.. 주위 모든 사람에게까지 평안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죠.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고백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어떤 일을 겪든지

또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어떤 특징을 가졌든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과 연합한다면

예수님의 존귀하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죠.

지난 번에 제가 미국에 갔을 때, 며칠 간 자녀의 결혼식으로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열리기 바로 하루 전날 밤,

결혼식 때 제가 영어로 기도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왜 웃으세요? 영어 기도가 쉽지는 않죠?

사람들 앞에 서서 중국어로 해도 어려운데

영어로 기도하라고 하니까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저는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거든요. 특히 기도는 더 그래요.

 

그러나 저는 용감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옛날 생각이 났거든요.

1984년에 제가 처음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각 교회를 다니면서 3분 간증, 5분 간증을 참 많이 했습니다.

미국교회에서 처음 영어로 간증할 때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었죠.

 

그 당시 장인어른께서 저희와 함께 계셨는데

그분이 그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영어가 형편없을수록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지!

아마 졸지도 않을 걸? 유창하게 영어를 하면 더 집중을 안 하겠지만

자네는 영어가 더듬거리니, 주의 깊게 들어줄 걸세!"

 

그때 장인어른의 응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 장인어른의 응원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제 단점마저도 순식간에 장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단점도 장점으로 바뀌지만

사랑이 없으면 장점도 단점으로 바뀝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가 요즘에 자주 하는 질문인데요.

검소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이 없으면 절약은 인색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아낌이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제 큰 형님도 만났는데요.

큰 형님은 정말로 매우 검소한 분이십니다.

몇 십 년을 입으신 옷도 버리기 아까워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양말 하나도 아까워하면서

동생들을 위해서 언제나 조건 없이 다 주십니다.

 

미국에 갈 때면 비행기표, 숙박하는 비용 등 모든 것을 부담하십니다.

저는 그때마다 감동하죠.

 

따라서 한 사람의 장점과 십자가의 사랑이 합치면

그리스도가 그것을 통해 더 존귀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단점과 십자가의 사랑이 합쳐져도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서 존귀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장점이 십자가의 사랑과 단절되면

장점도 독약으로 변해서 사람을 해치고 맙니다.

 

헤롯왕이 그랬죠? 그는 권세와 돈이 있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자기 자신도 자멸하여 죽음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존귀하게 되시기 위한 핵심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 장점이든, 내 단점이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십자가의 사랑과 연합하죠?

빌립보서 119절에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도 감옥에 갇힐 위험에 처해 있었고, 붙잡힐 위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 나타나셨습니다.

 

그 핵심이 사랑인데요. 그 사랑은 어디서부터 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에겐 사랑이 없어요!

 

그러나 기도와 간구, 성령의 도우심이 있으면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고 우리의 장점이나 단점이

주님의 사랑과 합쳐질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고 존귀하게 할 수 있고, 다른 이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핵심은 간구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겁니다.

성령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6절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죠? 우리는 늘 간구해야 합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님께서 부어주셨죠.

그들은 사랑이 있었기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또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으면 능력이 생기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는데

유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고 돌아왔어요.

 

이번에 6명의 자녀와 부모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장장 40년 만에 말이죠. 며느리, 사위들도 모두 참석했습니다.

 

저희는 함께 크루즈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요.

제 매제도 목사, 매형도 목사, 저까지 목사다 보니까 돌아가며 예배를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충격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정말 상상하지도 생각지도 못했었는데요.

형님들, 누님들, 여동생들의 모습을 통해 절 보았습니다.

그들은 장점과 단점 모두 부모님께 물려받았죠.

 

또 그분들의 모습을 통해 자녀들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저희와 똑같을 수가 있나요?

닮아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신기했습니다.

 

안 믿기시면 제 아내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저는 유전의 놀라운 능력을 계속 감탄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할 때 어떤 형제님께서 물었습니다.

제 중보기도를 늘 해주셔서 매우 친한 형제님인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럼 제 나쁜 버릇을 아이들이 물려 받나요?"

", 100% 물려 받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거예요.

 

저는 자녀들에게 100% 유전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But'이라며 조건도 함께 말했습니다.

"형제님, 그리스도의 사랑이 형제님께 가득하다면

형제님의 나쁜 버릇, 단점이 자녀들을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제가 제 여동생과의 관계, 또 형들과의 관계를 보면

제 자녀들의 관계를 보는 것 같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득히 있다면

나쁜 습관이나 단점이 방해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도록 성령님께 간구합시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살아있을 때도 그렇고 죽음을 앞두고도 그렇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떻게 살아있는 것처럼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비결을 알려드리죠.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시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 죽음에 부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죽음을 맞이할 때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가 주관하게 하시고 존귀하게 높여 드립시다.

죽음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웨 목사님이 생각나는데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 되셨습니다.

 

이 분은 혈혈단신으로 타이완에 오신 후 다른 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조용히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혼자서 돌아가셨는데

매우 영화롭게 돌아가셨으며 평안한 모습이었습니다.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두 번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한 명은 저보다도 어린 젊은 사역자였는데

뇌혈관이 파열되는 바람에 갑자기 천국으로 갔고

미국에 있을 때 한 남매가 저에게 오더니 타이완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갑자기요.

 

우리는 매일 이런 일을 목격하면서 삽니다.

어제는 한 목사님에게 소식을 들었는데

지난번에 시무하시던 교회의 한 장로님께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셔서 혼수상태에 빠졌답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일들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님께서 오셔서 사랑을 부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졸지에 사고가 있어도,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내게서 드러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지난 번 장스웨이 목사님의 사모님을 만났을 때 정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어느 날 사모님께서 소식을 들으셨는데, 90세가 되신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어머니께 가려는데 비행기표가 없었습니다.

겨우겨우 표를 구해 집으로 갔는데 빈소에 와서 보니 남동생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가서 보니 눈이 뒤집혀 흰자위만 보였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남동생이 귀신 들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나서서 해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사모님의 남동생은 50대로 온갖 나쁜 것들이 몸 안에 다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민간종교와 접목된 제사 등 이상한 곳에 많이 다니면서

나쁜 영들이 모두 나와서 들러붙은 것이었죠.

 

사모님은 동역자를 불러서 이 일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모님께서 해결하시고

그 집안의 4남매가 모두 세례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구원받기 위해 사모님은 오래 기도하셨어요.

주위에 다른 가족들이 하나 둘 주님을 영접할 때

혼자 신앙생활하는 사모님은 절망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번에 온 가족이 주를 영접했습니다.

저는 온 가족이 구원받는 그 멋진 비전을 저희에게도 나눠달라고 사모님께 부탁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께서 온 가족이 구원받는데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모님께서 귀신을 쫓을 때 귀신들이 말했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는 줄 알아? 너는 우리를 쫓지 못해!

저기 있는 저 끈이 아주 튼튼해 보이는 걸?

저걸로 네 동생 목을 졸라 죽여 버리겠어!"

 

그러더니 남동생이 손으로 목을 막 조르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귀신을 쫓을 때는 귀신 들린 본인의 의지도 중요합니다.

정신을 잃을 때도 있지만 정신이 돌아올 때도 있어요.

 

사모님은 남동생이 너무나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동역자들과 함께 동생에게 기도문을 읽으라 했습니다.

그러자 남동생은 회개나 죄를 뉘우치는 부분 등 모든 부분을 다 읽었지만

"예수님은 내 주시다."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답니다. 말이 안 나오는 거죠.

아무리 말을 시키려 해도 말하려 하지 않더랍니다.

 

사모님은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고백을 하지 않으면 귀신이 떠나지도 않거니와

사랑하는 남동생을 보니 마음이 아파서였습니다.

 

그렇게 씨름을 하다 남동생이 정신이 돌아왔을 때 말했습니다.

"누나, 예수님을 내 주로 모시고 싶어요."

누나의 사랑하는 마음이 동생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남동생은 예수님을 구주로 계속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귀신들이 모두 떠나갔습니다.

사랑은 다른 이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둘째, 사랑은 사모님에게 감동을 주셔서

사모님이 바로 타이완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모님이 비행기표를 발권하려고 하실 때

목사님께서 사모님에게 말씀하셨답니다.

이틀 늦게 가면 표값이 훨씬 싸진다고 말이죠.

 

그때는 사모님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을 몰랐으니

상식적으로 조금만 늦어도 상관없다고 여길 수 있었죠.

 

그러나 사모님은 그래도 일찍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요.

 

그리고 나중에 언니로부터 어머님이 돌아가셨으니

서둘러 올 필요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계획대로 빨리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모님께서 빨리 고향에 내려가지 않으셨으면

가족들이 아마 다른 방법으로 남동생 문제를 해결했겠죠?

아마 도사나 무당을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사랑을 가득 부어주셨기 때문에

'죽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기회를 붙잡게 하셨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핵심포인트입니다. 내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또 다른 사람의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존귀하게 될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조건이 없는 큰 사랑이

우리에게 들어오도록 매일 간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19절과 20절의 말씀처럼 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드러나고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통한 야고보가 증인이 될 수 있었고

죽음에서 면한 베드로도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의 끝부분에 좋은 소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사도행전 12장은 그다지 유쾌한 말씀은 아니지만,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죽음에 직면해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존귀하게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더하여 지게 된 점입니다.

 

오늘 타이완의 변화와 부흥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새 일을 행하신 것을 보고 무척이나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뭡니까? 조건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매일 부어주시도록

우리가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모든 사건과 모든 사람에게 뿌려지면

주님의 존귀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아멘!

 

또 주님께서 행하신 새 일도 드러나게 되죠. 9, 10, 11, 12!

계속 새 일이 보기를 소망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이 기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도 죽음이 먼 일이라 여기지 마세요.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가족의 죽음을 위해 기도하길 바랍니다.

모든 가족이 주님을 믿고 구원받는 그 비전이

우리 교회에서 이뤄지도록 함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