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스크랩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토요일 안식일이 일요일 주일로 바뀐 이유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본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으며, 더 정확히 말한다면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안식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 안식일이 주일로 날자만 바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적 근거도 없을 뿐더러 설득력도 없습니다. 안식일에 나타난 안식의 교훈과 정신은 지금도 강조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의식 혹은 제도로서의 안식일은 이제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안식일이 폐하여지고 그 대신 주일이 제정되었을까요?
(1) 안식일이 일주일의 마지막 날에서 첫째 날로 바뀐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지정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의 권위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퍼킨스(Perkins)는 "교회는 안식일을 제정할 권한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에서 "인간적인 권위가 아니라 신적 권위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을 첫 번째 날로 변화시켰다. 오직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 즉 그리스도만이 안식의 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막 2:28)이십니다. 그리고 그 날의 주인이신 분 외에 누가 한 날을 지정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에 이것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왓슨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르노비우스(Arnobius)와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주의 날'(계 1:10)이라고 불려지는 날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이해한다. 주님이 떡과 포도주를 제정하사 속된 용도에서 특별하고 성스러운 용도로 따로 구별해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주의 만찬'이라고 불려지는 것처럼 주의 날도 주님이 이것을 제정하사 보통 날들에서 그의 특별 예배와 봉사를 위해 따로 구별해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주의 날이라 불려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일의 첫째 날 무덤에서 살아나셨으며, 그 날 그의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는데(요 20:19, 25), 이것은 어거스틴과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가 유대인의 안식일을 주의 날로 옮기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암시하시는 것이었다."
(2)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사도들의 관례였습니다.
행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처럼 주일에 말씀을 강론하는 것과 성찬식과 헌금이 있었습니다. 즉 주일날 그들은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주일이 사도적 제정에 의해 인정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초는 신적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복음의 교리를 말과 문서로 선언할 때처럼 거룩한 행위들에 있어서도 성령에 의해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위임한 일을 하기 위하여 적절하게 성령을 부여받은 사람이 성령의 인도도 없이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한 주일을 지정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이 성령의 인도로 쓰여졌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 모든 장과 절을 불확실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날 예배하기 위해 모였던 사도들의 관례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결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3) 초대교회는 우리가 현재 기념하는 주의 날을 존중하였습니다.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초기 기독교의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에 살았던 초대교회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주일의 첫째 날 곧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킬지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날은 교회에 의해서 1,600년 이상이나 지켜져 왔습니다.
웰즈(Wells)는 "안식일 엄수의 실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초기의 제도와 명령에 대해 논쟁하느라고 암흑에 쌓인 채 분열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에 대해서만은 교회가 항상 침묵을 지켰던 것으로 볼 때 주의 날의 신성한 권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대해서 교회가 그처럼 침묵을 지켰던 까닭은 감히 하나님께서 세운 제도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4) 안식일은 구약의 율법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는 폐하여졌습니다.
구약에서 아무리 중요한 율법이라도 신약에 와서 폐한 것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안식일 문제가 그렇습니다. 구약에서는 중요하게 지켜졌지만 신약에서는 폐한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 준수는 더 이상 우리의 의무가 아닙니다.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즉 성, 속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엡 2:11∼22). 구약 시대에는 성·속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이방인, 레위인과 일반인, 거룩한 곳, 부정하고 정한 것, 거룩한 날 등의 규례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성·속의 구별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1)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엡 2:11∼17).
구약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이 법은 엄격하여 이방인과의 결혼이나 교제를 금하고 이방인은 기업을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구별이 폐하여졌습니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 1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처럼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이 없습니다.
2) 신약 시대에는 레위인과 일반인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벧전 2:9).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레위인과 일반백성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제사장은 언제나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들이라야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졌고 거듭난 성도는 누구나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5∼9).
3)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곳, 즉 성전의 개념이 없어졌습니다(신 12:5, 11, 14 마 18:20 고전 3:16 엡 2:21).
구약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곳(성전)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신 12:13). 만약 지금도 거룩한 곳의 구별이 있다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폐하여졌기 때문입니다.
4) 신약 시대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에 대한 구별이 없어졌습니다(겔 36:17 민 19:9 레5:3 히 9:13 롬 14:14).
구약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의 규례들이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이 부정하고, 경도하는 여인이 부정하고, 출산한 산모가 부정하고, 짐승이나 물고기 등도 부정하고 정결한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정한 것은 먹거나 만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다 사라졌습니다.
만약 지금도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있다면 경도하는 여인은 부정하니 교회에 나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분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5)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날과 보통 날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골 2:16 롬 14:6 갈 4:10∼11).
구약에는 거룩한 날(절기, 월삭, 안식일 등)과 보통 날을 구별했습니다. 이러한 날 중에 안식일에 대한 구별은 철저했습니다. 만일 안식일을 범하게 되면 돌로 쳐죽이라는 엄격한 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했던 안식일 구별도 다른 성·속의 구별이 폐한 것처럼 폐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 14:5)라고 말한 것입니다.
안식일이 어떻게 폐해졌는지를 말씀드리지요. 모델 하우스는 아파트 분양이 끝난 후에는 없애버립니다. 마치 이와 같이 실체가 이루어지면 모형과 그림자는 폐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 역시 같은 원리에서 폐해졌습니다(히 4:1∼6 마 11:28).
안식일은 실체가 아닙니다. 안식일은 그림자입니다. "...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이처럼 안식일은 그림자인데, 참 안식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마 11:28)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실체인 예수님이 오시면 안식일은 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이 "왜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키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하는데, 그런 질문은 "오늘날 우리는 왜 양을 제물로 잡아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한 류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심으로 속죄 제도의 의미가 성취된 것처럼, 안식일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심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4:3절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본래 인류가 안식을 잃어버린 이유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 짐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안식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안식의 그림자였던 안식일 역시 이미 폐해진 것입니다.
"안식일교회 대논쟁"이라는 책에서 최삼경 목사와 진용식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구절은 한 곳도 없다... 왜 신약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말씀이 한 곳도 없는가? 또 지켰다는 기록도 없는가?... 구약 성경에 그렇게도 많이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다가 갑자기 신약 성경에 와서 안식일 명령이 전혀 없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안식일이 폐했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 할례가 강조되다가 신약 성경에 전혀 그 명령이 없는 것은 할례 제도가 폐했기 때문인 것처럼 안식일도 폐한 것이다."
그럼 안식일이 폐해졌으니 이제는 칠일을 모두 일해도 됩니까? 모일 필요도 없고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대신 다른 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정복하고 인간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오늘날 우리가 성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2-24)
복음송 중에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 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바로 주일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이 복음송의 출처인 시편 118편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그 날을 가리킵니다. 물론 그 날은 천지창조 후 하루를 쉬신 그 안식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날은 언제일까요?
행 4:10-11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그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이 바로 여호와께서 정하신 그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성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5)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날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생각나게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창조를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안식일을 폐하고 주일을 제정하셨을까요? 그것은 창조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역, 곧 구속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의 사역도 위대하지만, 구속의 사역은 훨씬 더 위대합니다. 큰 지혜가 우리를 지으시는 데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구원에 나타났습니다. 큰 능력이 우리를 무에서 이끌어내시는데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더 큰 능력이 우리가 무보다도 더 악할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나타났습니다. 창조보다도 구속이 더 많은 값이 듭니다. 창조에서는 한마디 말씀하시는 것뿐이었으나(시 148:5), 구속에서는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벧전 1:19). 성경에 의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손가락의 사역이었고(시 8:3), 구속은 그의 팔의 사역입니다(눅 1:51).
창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속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창조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상의 낙원에 대한 권리를 가졌으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천국의 후사가 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창조보다는 구속이 더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속을 기념하시기 위해 주일을 거룩한 날로 제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을 중지하고 그가 안식한 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일에서 안식하신 바로 그 날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썼습니다. 참으로 주일은 안식일보다 배나 더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성일로 지켜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맥베드"를 보게 되면 왕을 살해한 맥베드가 독백으로 "이제 나는 잠을 자지 못한다. 맥베드여, 너는 잠을 죽였다. 아! 천진난만한 잠이여, 고민이 엉킨 실타래를 풀어 주던 잠, 피곤을 풀어주던 잠이여"라고 영혼의 창백한 절규를 합니다. 마치 이 맥베드와 같이 인류는 죄를 범하므로 말미암아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안식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안식일의 그림자가 아니라 안식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수 천년 째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오고 있지만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자인 안식일만 취하고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가슴속에 안식이 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 저는 이것이야말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3절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거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거운 마음은 짐을 지고 있는 마음이고 편한 마음은 쉬고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는 여러분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짐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죄 짐입니다.
시 38: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다음으로, 문제의 짐입니다.
시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다윗이 날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짐은 분명 죄짐이 아니라 문제의 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제의 짐도 맡아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마지막으로, 질병의 짐입니다.
마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주님은 이 세 가지 짐을 모두 짊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 세 가지 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여 영과 혼과 육의 전인적인 안식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가지 짐을 모두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특별한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히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들에 의하면 안식할 때가 성도들에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계 14:9-13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 의하면 지옥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곳이고 천국은 수고를 그치고 쉬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천국은 죄가 없고 가난이 없고 질병이 없는 곳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하나님은 이 땅에서 모든 신자들이 살기를 원하십니다(요삼 2). 그리고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죄를 이깁니다. 믿음은 가난을 이깁니다. 그리고 믿음은 질병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담대한 고백을 통해 믿음을 활성화시키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여러분의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여러분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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