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하라 2/6 딤전3:14~4:5 스크랩, 출처 1/6
폴 워셔 노르웨이 집회
오늘밤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것이
제게는 매우 큰 영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죄송한 점은 어젯밤부터 감기와 싸우느라 모임에 다소 참석치 못한 점입니다.
혼자 지내며 감기를 이겨내려 하고 있으니
내일은 좀 더 사교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데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입부를 배웠고
계속해서 서두의 몇 가지 진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하는데
복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공부하기 전에요.
통역자분이 말을 천천히 해달라고 하셔서 오늘밤에는 말도 좀 천천히 하려고 합니다.
아래 구절들에는 아주 많은 중요한 진리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좀 이상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는 걸 알지만
장담컨대 그것들은 그 어느 시대 못지않게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딤전3:14~15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4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5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려주려고 편지를 쓰는데
어떻게 교회를 조직하고 어떻게 교회 사역들을 수립하고
교회에서 목회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로 모든 것의 차이를 만듭니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교회에는 ‘성경이 하라 명하신 일만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성경이 금하지 않는 일은 어떤 일이든 해도 된다’ 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두 번째 견해를 매우 위험한 견해일 수 있다고 봐야 하는데
그것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사역들이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를 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경우 문화나 도시로 가서 설문조사 같은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교회를 원하는지 묻거나
출석하려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으며
‘세상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이며 극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위험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인도자들 역시 위험합니다.
그 이유를 보여드리면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15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안다구요?
오직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5b
우선,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과 관련해서 “살아계신”이란 형용사를 들을 때마다
대개는 “참된”이란 형용사와도 연관되는데 보통 이것은 거짓 신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을 보시면 우상에 불과한 그 신들은 서지도 걷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 135:15-17, 115:4-6, 렘 10:5,10
이것은 그분의 하나님이심과 모든 것 위에 군림하시는 유일자로서의 주권의 선포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함인데
교회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도 아니며 세속적인 자들의 것도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그분이 교회를 주관하시며
교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몇몇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자들은
우리가 가진 이 본문과는 반대로 달려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구약을 공부하는 분이시라면, 그러길 바라는데요.
구약에서 무엇을 알 수 있나요?
누군가가 그들의 방식대로 무언가를 하려 했을 때마다
재앙이 닥쳤다는 것입니다.
아론의 두 아들은 무슨 일을 했나요?
그들은 여덟째날 하나님의 바로 존전에서 모세와 아버지 아론과 함께 제사를 지낸 후에
그분이 산위에 계실 때 그들이 가서 레위기 10장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켜 죽였습니다. (레 10:1-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지만 그도 한번 경솔했었는데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려 했을 때
레위인들이 궤를 메고 옮기는 대신 수레에 싣고 왔습니다.
선의였고 하나님을 경배했고 사랑했으며
백성들은 그들 중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에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수레가 뒤집히려고 했을 때 웃사가 무슨 일을 했나요?
선의로 하나님의 궤를 잡아 바로 세우려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행동을 고맙게 여기실거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웃사를 죽이셨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네 마음이 바르면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바르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계획하고 또다시 계획하고 교회와 복음을 재포장하고
교회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에 굴복치 않는 자들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전통대로 이끌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또한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양쪽 모두가 낭떠러지인 길을 걷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때때로 저는 특별히 예배사역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 질문을 합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예배방식을 통해 무엇을 배우셨나요?”
아직까지 제게 와서 실제로 그렇게 해봤다는 사역자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배사역자들은
가장 인기 있는 예배형식을 따라 사역을 시작합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의
대중화된 예배로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시나요?
사사기의 가장 큰 표어가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사 17:6, 21:25)
모든 참된 개혁과 모든 참된 부흥의 결과는 이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이 목회자라면 묻습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은 성경이 명하신 일을 하시나요?
아니면 전통으로 내려온 일을 하시나요?
아니면 여러분이 새롭게 고안해낸 무언가를 하시나요?
아니면 현대사회 첨단을 걷는 교회 성장 전문가에게서 배운 일을 하시나요?
당신은 왜 그 일을 하시나요?”
이것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몇 주에 걸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니
예를 들어 부연설명 드리겠습니다.
제가 여러분 교회에 부임한 새 교역자인데
부임 첫 주일 교인들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남편들 중 몇 분이 아내를 말씀으로 씻기고 가르치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시는지 손들어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며 웃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들 중 몇 분이 의도적으로
일주일에 적어도 네 번 자녀들을 성경으로 가르치고 기르시나요?”
또다시 아버지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립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신임 목회자로서 저의 첫 번째 할 일은
교회 내의 모든 여성모임, 어린이교회, 청년모임을 없애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반응은 격분해 일어나 아마도 저를 목회직에서 해임하고
마을 전역에 저를 여성들과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소문낼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뭐라고 할지 아시나요?
바로 이 말입니다.
‘위선자들. 자신들의 전통은 따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에는 무지한 자들.’
남편들에게 ‘아내를 가르침’에 관해 물은 것은
에베소서 5장에 나온 하나님의 직접 명령인데
그 명령을 노골적으로 불순종하고도 남편들 중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 관해 물었을 때 단 한명의 아버지도 손들지 않았는데
구약 신명기 6장과 신약 에베소서 6장을 노골적으로 범하고도
모두가 웃어넘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나님이 명하신 적이 없는 여러분들의 전통을 건드리자
여러분은 저를 십자가에 매달려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성경을 보지 않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시겠나요?
얼마나 크게 벗어났는지 아시겠나요?
실제로 우리는 교회 안에 교인들이 계속해서 불순종하도록 돕는
프로그램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시겠나요?
▲여러분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죠.
여러분이 일어나 제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다 말해도
중요치 않습니다. 무의미합니다.
성경의 무오성과 함께하는 또 다른 교리인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는다면요.
성경은 오류가 없을 뿐 아니라
신앙과 행위에 관한 모든 것들과 성경이 언급하는 그 외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참이므로
여러분에게 명령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요.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러분이 자동적으로 드는 또 다른 생각을 말씀드리면
오늘날 교회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따로
그들의 예배나 모임을 갖고 성인들은 성인들끼리 그리하는 것이 매우 대중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교회를 찢어놓는 일이자
하나님의 의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을 행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함께 모인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그분 안에서
모든 공통의 것을 나누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노인, 젊은이, 유대인, 이방인, 헬라인 등이 교회에 함께 모여 있지만
그 누구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청소년들과 아이들과 성인들을 따로 분리해 놓는 것은
어디서 배우신건가요?
제가 어디서 배운 건지 말씀드리죠.
▲1950년대 경에 ‘세대차’라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교육시켜야 하는 방식이자
젊은이들을 성장시키는 방법이라는 등의 거짓말로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죠.
실제로 성경은 여러분들에게 그 반대의 것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성경은 젊은이들을 매번 또래와 함께 있게 말고 나이든 자들과 함께 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그만두고 성장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 비디오 게임하는 30살 먹은 청년이 있는 것입니다.
아시겠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에서 원하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우리 소견에 좋은 일들을 할 뿐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면
때로는 교회 안에서 사도 바울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심하게는 프로이트(Freud), 스키너(Skinner), 로저스(Rogers) 등의
이설에서 흘러나온 현대 심리학이 돌아다니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때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성경을 믿는다 말할 때 조심하십시오.
조심하세요. 아주 많이요.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3:15b
교회는 어떤 곳이라구요? 즐거움을 제공하는 곳인가요?
아니요, 진리에 관한 곳입니다.
교회는 현실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 실제인지 알기위해 오는 곳으로
하나님의 인격과 함께 시작됩니다.
기독교는 교훈적입니다. 진리에 관한 종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인데
사람들을 그 진리의 현실 속에 살게 하여 그들의 잘못이나 죄에서 자유토록 하는 것이죠.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진리 선포의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심지어 인정까지 합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거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기독교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주(主)로 제시합니다.
아울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제가 청교도에게 너무나도 감사하는 많은 것들 중에 한 가지 주된 것은
제가 청교도를 언급했을 때 여러분은 아마도 겁이 나셨을 텐데
그 까닭은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들은 청교도에 관한 모든 것은
그들이 악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 배운 것 한 가지는
세상이 희다고 하면 거의 검다는 것과
세상이 검다고 하면 거의 희다는 것인데
실제로 저는 세상이 말하는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거의 현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청교도의 가장 큰 염원은 그들의 삶의 모든 모습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은 가톨릭 교회가 루터를 미워한 이유가
단순히 칭의의 교리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루터를 미워한 이유가 결혼 교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그 결혼은 단지 욕망을 잠재우는 것도, 단지 후사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 결혼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예로
마치 한 남편이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여
그녀의 성화와 믿음의 성장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종교개혁과 우리가 알고 있던 가톨릭과
우리가 아는 오늘날 발생하는 일들의 큰 차이는 이런 식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한 지역에 가서 그곳을 연구하는데
그 지역의 축제, 휴일, 토착신앙을 알아내어 어떻게든
그것들과 기독교를 혼합시켜 대중적이고 수용할 만한 것으로 만들려합니다.
초대 헬라인 교부들도 같은 일을 했는데
기독교와 그리스철학을 결혼시키려 했는데
그들에게서 비극적이고 끔찍한 것들이 나왔습니다.
무엇일까요?
복음주의의 현대 교회 운동들도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문화 속으로 들어가 문화를 알아내고
그 문화의 호의를 얻기 위해 교회를 문화에 맞추는 일을 합니다.
종교개혁, 신앙부흥운동, 하나님의 운동 등은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문화를 외면하고 하나님께로 얼굴을 되돌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가톨릭교회가 끼친 영향과
현대교회 성장운동이 끼친 영향과
번영, 값싼 복음, 구도자를 위한 예배운동이 끼친 영향을 보십시오.
세상 뿐 아니라 교회까지 오염시켜
교회를 세상 사람들과 진배없이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 끼친 영향력을 보십시오.
유럽의 도덕관념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부차적으로 오늘날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진보들을 야기시켰습니다.
세상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설교자 중 한분인 잠비아의
콘라드 음베웨 Conrad Mbewe목사님은 말하길,
“현대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가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하시는 말씀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일을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하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망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족들에게 현대사회이론이나 심리학을 따라 행한다면
큰일 나신 겁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리하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상담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세속적인 생각과 기독교인 사이의
이상하고도 비정상적인 결혼이죠.
그리고 어떤 생각이 성경과 같은 정도의 수준에 이를 때마다 발생하는 일은
그 생각이 성경보다 우선시되어 성경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우리가 지닌 매우 중요한 진리는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함이니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3:15
그 진리는 무류하고 무오한 성경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결혼, 교제, 교회에 대해 가르칠 수 있지만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의 기준이 성경에서 기인함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확신하셔야 합니다.
아주 심한 말이지만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어필되도록 재포장하는 자들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엄히 징계하실 것입니다.
제가 아주 오랜 여행을 떠나는데 제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가야 해서
여러분께 5-10년 동안 돌봐달라 부탁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녀에게 아름답고 단순한 하얀 드레스를 입혀 여러분께 맡겼다구요.
그녀의 아름다움은 소박함과 순진함과 순수함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여러분이 제 아내와 딸을
마치 창녀처럼 옷 입혀 욕정에 가득한 사악한 남자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그들 앞을 걸어다니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저는 그런 자들을 잡아다가 심하게 다룰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주의 교회를 더럽히고 화장시켜
음욕의 관능적 여인처럼 옷을 입혀
사람들에게 긍정의 힘, 번영 등을 약속하며 부도덕이 넘쳐나 한창일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뜻을 강하게 내비치실 텐데
가죽채찍이 아닌 오직 절대 진노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 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 세상살이에 밝아 침묵하는 자들은
제가 오래전 배운 것이 있는데 모든 인간은 겁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겁쟁이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타령을 하며
일어나 맞서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비겁함에 유죄인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이 설교를 한 후 한분이 제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들것이라’고 해서
제가 ‘그럼 가서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밤 제 아내가 외출해서 식료품을 사가지고 차로 돌아오는데
세 명의 남자가 아내를 움켜쥐고 때리고 다치게 하려는 장면을
여러분이 곁을 지나다 목격했는데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제 아내를 공격한 그 세 명의 남자를 찾은 다음, 여러분을 찾아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소심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
일어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이고
독하고 못된 마음이나 싸움의 자세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겸손으로 그 일을 하되
우리의 신념을 지켜
‘그 일에 나와 내 가족은 동참치 않겠다, 그 일을 행치 않겠다’고 말하고
나와 내 가정은 주님을 따를 것이며
전 세계적으로 대중들의 호응을 얻는 이런 미국의 현대 복음주의 서커스의
어떤 부분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말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미 노르웨이에도 그것들이 상당부분 뿌리를 내렸는데
그리되면 그것이 여러분들에게서 퍼지고 더 많은 나라들을 더럽힐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런 것들에 맞서야 하는데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으로 인지된 것으로
여기에는 어떠한 논란이나 논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 보편화된 진리는 큰 경건의 비밀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큰 비밀은 하나님께로의 참된 헌신, 참된 경건, 참된 신앙심,
참된 거룩으로 인도합니다.
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유는 그가 이어서 말하길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16b
큰 비밀은 구원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를 말씀드리죠.
성경적으로 여러분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과 대화의 주제가
여러분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자 여러분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은
성육신 사건이라 말합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그 의미는 그분의 죽음에서 그는 죽으신 후 장사되셨으나
그를 사망에서 일으키신 성령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받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받으사 우리의 죄가 속량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의 증명으로
믿는 자는 누구든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16
저는 때로 이 주장이 하늘과 땅의 증인들을 불러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뿐 아니라 인간의 우둔함을, 심지어는 믿는 자들의 우둔함을 꾸짖는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치 없는 싸구려 것들은 경이롭게 여기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될 때는 그러한 경이로움을 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말씀을 믿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42)
저는 오늘날 대다수의 이런 TV설교자들도 그와 같이
솔로몬과 그의 부를 만나기 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의로우심을 만나려 하기보다는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성숙함으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것은 모든 사소한 것들은 여러분의 시야에서 떨어져나가고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여러분이 더욱 갈망하는 모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갈망의 대상이며 천국조차 갈망이 아니라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갈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있기를 갈망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없는 천국에 있기보다는 그분과 함께 지옥에 있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그분께 매료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회자 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과업이란 것을 아시나요?
목회자는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이 아름다운 보석을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총력을 다하는데
그들도 이 동일한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바 되게 하기 위함이죠.
▲목회자는 마치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종과 같습니다.
종이 그곳에 도착해 리브가를 보고 무엇을 하나요?
그 종은 리브가에게 장신구를 주고 미래의 남편이 보내온
아름다운 것들을 줍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리브가에게서
조금이라도 의심의 낯빛을 볼 때마다 그 종은 보석을 하나 더 꺼내주며
당신의 남편이 주는 것이라 말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남편은 보석만 있는 게 아니라 금도 가지고 있다면서요.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우리는 신자들의 얼굴에서 의심의 낯빛을 볼 때마다
그리스도에 관한 아름다운 진리를 한 개 더 꺼내어
그들의 발 앞에 놓아두고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설교자들의 일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목회자나 설교자는 아니지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여러분께 전해주는 목회자나 설교자와 함께라면
여러분은 그분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 목사님은 앉아서 성경연구만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여러분이 그 목회자를 두둔하십시오.
목회자의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가 공부할 수 있도록 그를 옹호하고
그가 기도할 시간을 갖도록 하고 그의 삶을 지키십시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16
무엇이 전파되었나요?
무언가가 만국에 전파되었는데 그게 긍정의 힘이었나요?
번영하는 법이었나요? 기적을 행하는 법이었나요?
전파되었던 것은 비밀이었는데
그 비밀은 복음으로 경건으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람들이 변화되고 경건해지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아지고 의로워지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요.
수많은 부도덕한 거짓말쟁이들이 아니라요.
거룩하고 경건하고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로요.
그러한 말씀이 전파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16b
창세 전 그분이 아버지와 함께 소유하셨던 영광이죠.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시냐면 창세 전 그분이 아버지와 함께 나누셨던 영광은
신으로서의 영광이셨지만
이제 그분은 신으로서의 영광, 신성으로 충만한 영광인 동시에
인간이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인간으로 우리의 형제이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히 2:11)
전 우주의 통치자이자 신성으로 충만한 분께서
우리와 같은 혈통과 육신이라는 게 상상이 되시나요?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죠.
◑디모데전서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이러한 구문은 신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바울의 말을 들어보시면
이것은 바울이 아주 특별하고 엄청나게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보이려는 것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성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밝히,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후일에(말세에)”
무슨 말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제게 지금이 말세라고 해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은사주의 운동도 그렇고 표적과 기사는 말세에 다시 나타나는 거잖냐고 말합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세는 2000년 전에 이미 도래했다고 말씀드립니다.
“무슨 뜻이죠?”
다시 성경으로 되돌아가보면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해
“말세에”라고 했습니다.
모든 메시아 사상은 이 단어 안에서 발견되는데
메시아의 오심이 말세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세를 2000년 동안 지내왔고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렇게 말한 이유인데
디모데가 말세를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떠나”는 “출발”을 의미하는데
어딘가에 있다가 다른 어딘가로 떠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된 것에서부터 나와 새로운 것으로 간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니고 있던 것에서부터 나와
누군가가 생각해낸 새로운 무언가로 간 것입니다.
현대 복음주의에서 일각에서 벌어지는 일은
매번 누군가가 정신 나간 일을 하는 것으로
그들은 말도 안되는 예언을 하고 바닥에서 개처럼 짖고
머리와 팔이 떨어져 나갈 만큼 흔들어대는 등 온갖 것들을 하는데
여러분이 그들에게 성경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면 대답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입니다. 아시겠나요?’
언제나, 늘 그런 식이죠.
이것이 제가 왜 교회역사에서 부흥 속 개혁은
결코 전진이 아닌 언제나 후진이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뒤에 남겨진 오래된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변경불가의, 무류의 성경적 진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잡을 수 없는 이런 변덕스런 것들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이 모든 새로운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또 한 가지는
그것의 일시성입니다.
매 2~3년 후에는 어떻게 되나요?
또 다른 새로운 것이 세상을 휩쓸지만 절대 지속되지 않고 타락할 뿐이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터무니없어지고 부도덕해집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그것을 너무나도 맹신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언쟁을 벌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부도덕과 문제들을 알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다 하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이 그의 사역을 변호했던 방식과는 정반대죠.
바울은 결코 자신을 사도라 하며 자신의 말을 들으라 하지 않고
‘내가 너희 중에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너희가 안다’ 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내가 사도라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행 20:18-21)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너희가 아노니”, “너희가 보았나니”,
“너희가 증인이 된 것처럼”, “너희는 기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4:1
마귀가 그의 모든 부하들을 데리고 남프랑스로 휴가를 떠났다고 칩시다.
인간들은 여전히 잘못을 범하고 이설에 빠지기 쉬운데
그들의 마음 속 타락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큰 문제는 마귀가 아니라 육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인간의 문제점은 그의 회심치 않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매우 특별한 무언가를 이야기 합니다.
이 배교는 인간 마음의 근본적 타락에서 기인한 자연적 배교가 아니라
외부의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악에 대한 개인적인 언급이 아닙니다.
진짜 마귀가 있는데 사람이 마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숙주가 된 사람이 타락천사들과 연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격적이고 실제적이며 개별적인데 함께 협력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은 그가 어느 곳에서도 결코 말하지 않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건 드문 일이죠.
그는 어떤 배교는 너무나도 악마적이고 사탄적이며 사악하다는 것을
이런 예사롭지 않은 말을 사용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데, 그렇죠? 3절이나 4절에서요.
바울의 말을 들어보시면,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우리는 바울이 이제 우리에게 놀랄만한 무언가를 말해주리라 기대합니다.
어쩌면 적그리스도의 출현같은.
이 말들은 대단한 것들인데 이 말들을 들으면 거의 이런 태세죠.
“자 준비해, 바울이 다음에 우리에게 들려줄 말은 무시무시한 걸거라구”
◑딤전4:3
▲바울은 3절에서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우리가 바울한테 속은 건가요?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귀신의 가르침과 마귀의 음모와 외식과
거짓말쟁이들과 사악한 자들의 단결된 힘이 그들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하고
그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그들을 몰아가고
그들은 가르침을 받고 그들이 마귀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아
마지막 날에 그들이 교회로 들어와 성도들을 가르치는데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말라”
이건 마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항상.. 대체 뭐하는 거지?
네, 여러분은 바울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현재 노르웨이에서 음식을 먹지 말라고 설교하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설교자 자신이 너무 많이 먹어서겠죠.
“결혼을 하지말라”, “성과 관계된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끊어라”
라고 하는 이도 없을 겁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이 어떻게 적용될까하고 자문합니다.
네, 적용됩니다.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요.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인데 3장에서,
유념하세요, 성경은 장별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것을요.
때때로 3장을 보지 않고 4장으로 넘어가는데
4장만 보고 해석하면 내용이 엉망이 됩니다.
방금 전 3장에서 말한 것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3장 끝절
이 내용이 4장에서 계속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복음인데
복음이 교회의 중심이자 전파되어지는 것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으로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천국에 올리우심, 그분의 구속사역 바로 이것들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군가가 복음을 다른 무언가로 바꾼다면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희 교인들 대부분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공부시킵니다.
하지만 홈스쿨링이 점차 우리의 중심이 되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의 삶과 교회 생활이 홈스쿨링과 양육에 관한 것이 된다면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번영, 은사, 기타의 것들로 시작한다면
마귀의 가르침이 심기고 자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무엇이든, 어떤 가르침이든 간에, 교회에 들어와
복음의 첫 번째 자리를 뺏는다면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율법주의. 기독교를 단지 윤리 도덕으로 가르치는 것은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가 탁월한 윤리 규범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기독교는 윤리 규범이 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이 주된 것입니다.
그분이 으뜸과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근래 미국 기독교인들은 먹거리를 매우 중요시해
유기농 음식과 같은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전역에서는 유기농 음식과 바른 먹거리 등의
기독교집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복음보다 더 중요해지면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이 됩니다. 아시겠나요?
역사를 흘러 현재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많은 것들에 치여 뒷좌석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지 않았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반드시 교회의 으뜸이 되어야만 합니다.
복음이 반드시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해야만 합니다. 반드시오.
제가 저희 아이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방식은
일주일에 4~5번 신약에서 한권을 찾아 절별로 공부하는데
아이들 중 하나가 한 절을 읽으면 제가 그 말씀을 해석해 풀어주고
함께 토론하고 질문하고
또 다른 아이가 그 다음절을 읽는 형태로 해서
신약을 대략 일곱절 정도 공부하는데
로마서, 에베소서, 요한 1,2,3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서 등
신약의 다양한 책들을 공부합니다.
또한 매일 밤 아이들과 함께 잠언에서 일곱절씩을 공부하려하는데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 자립할 때쯤에는
잠언을 수도 없이 읽은 것이 됩니다.
하지만 저희가 잠언을 공부할 때조차도
모든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되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복음이며 모든 것이 예수입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배우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 그럼 제가 짤막한 실례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독교의 입문 정도로 생각하고
그것을 마치고는 다른 것들로 넘어갑니다.
제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설교학 교수님과 헬라어 교수님께서
제게 박사학위 따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페루 정글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박사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저는 복음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8년 페루에 갔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동안 저는 성심을 다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연구해왔습니다.
복음은 제 연구의 핵심 분야입니다.
저는 복음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는데 이제야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기 시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유를 물으신다면
그분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육신 전에
그분이 무엇이셨는지를 모른다면 여러분은 성육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능력, 그분과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성육신 모든 것이 성육신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단어 하나하나 모두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성육신 후 그분은 완벽한 삶을, 그 누구도 행한 적이 없는 가장 경이로운,
완벽한 삶을 사셨고 모든 것보다 존귀한 이가,
한없이 존귀한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여러분의 죄를 그분이 짊어지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리신
맹렬한 진노와 증오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만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거룩한 진노와 증오를 그의 아들에게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권능, 영광, 천국으로 올리우심,
아버지와의 재회가 이루어지고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분은 앉아 다스리시는데
다스린다고만 하지 않고 앉아 다스리신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움직이지 않고 만국을 통치하시는데
아무런 힘도 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복음이란 일생에 걸친 연구가 아닌 영원에 걸친 연구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여러분이 믿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으로 지금부터 시작해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무한하시므로 여러분은 그분의 영광이 고갈되는 것을 경험치 못하며
여러분이 만약 천국에서 한없는 영원 속 하나의 영원에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에베레스트 산 자락의 작은 언덕에도 미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교회여. 교회는 이미 너무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잘못된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배척하세요,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그리고 남겨진 것을 강화하십시오.
설교자들이여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십시오.
분노와 미움과 괴로움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을 지키며 말씀을 전하십시오.
교회를 개척하거나 인계받는 젊은 사역자분들은 이 점을 깨닫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열의, 모든 열의는 좋은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여러분의 모든 갈망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점을 유념하세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그는 11일 만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향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해 못할 사람들에게도 친절해야 합니다.
진리와 성경에 기반한 올바른 주장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의 삶의 모습으로도요.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기도하옵기는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타자 : L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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