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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 토저 - 짧은 일대기

LNCK 2017. 6. 20. 16:00

◈A.W. 토저 - 짧은 일대기                      ☞source  
A.W. Tozer - Short Biography                     
 

                     1897~1963



 
에이든 윌슨 토저 (Aiden Wilson Tozer)는 1897년 4월 21일
미국 서부 펜실베니아의 산등성이의 작은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역을 시작한지 불과 몇 년 만에 토저는 
"20th-century prophet, 20 세기 선지자"라는 평판과 칭호를 얻게 됩니다.

그는 그 호칭으로 불리길 좋아했습니다. ‘목사’보다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은사가 있었던 토저는
자기가 타고난 언어적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결합되어
당시 굶주린 영혼을 먹이고, 인간의 마음을 꿰뚫고,
땅으로 향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1912년 경, 그가 15세 때,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 주 애크런으로 이사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 그가 Goodyear(정비업소)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갈 때,
노천 설교자가 외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모르신다면 ... 그냥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좁은 계단을 통해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그 노천설교자의 권고대로, 토저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일을
그날부터 시작해서 그 후 일평생 계속했던 것입니다.


▲1919년, 그가 22세 때,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도,
토저는 웨스트버지니아의 나터 포트에  *Nutter Fort
작은 상점 앞 교회에 목회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 겸손한 출발을 시작으로 해서
토저는 아내 Ada Cecelia Pfautz와 함께
그 후 CMA교단에서 44년간이나 사역하며 헌신했습니다.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그 44년 사역 중 31년은, 시카고 Southside Alliance Church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토저의 설교에 사로잡힌 회중은 80명에서 8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50년, 53세 때 Tozer는
Alliance Weekly의 편집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지금은 Alliance Life라고 불리는 기독교 정기간행물입니다.


그가 편집을 맡은 후, 구독자 및 발행부수가 거의 즉시 두 배로 증가되었습니다.
그는 1950년 6월 3일자, 그의 첫 번째 사설에서 그는 (의역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제의 날, 퍼레이드 때
흥분한 남자들이 그저 흥분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무리지어 거리 위로 행진할 때,

그 대열에 같이 휩쓸리는 식으로 사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복잡한 시류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며 고요히, 평화스럽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뒤쳐지고 바보스럽게 살지만,  지나고 보면, 길게 보면, 결국 거기서 얻는 게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단기적인 것, 짧은 승부에 관심이 없고,
비록 지금은 느리더라도 장기적이며, 긴 승부를 바라봅니다.”


▲토저는 가난하게 태어나 평생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가정 형편상 그는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못했고, 그래서 대학도 못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1950년에 휘튼 대학은,
그의 저술과 기독교에 미친 영향력을 인정해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Tozer의 강점은 그의 기도생활인데
그는 종종 예배실의 통로사이를 걸어 다니며 기도하거나
또는 예배실 바닥에 얼굴을 닿게 하여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기도자세이지요. prostrate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평소에 "사람은 자기가 기도하는 만큼 된다. As a man prays, so is he”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최우선 적이었습니다.


토저의 전기 작가 제임스 스나이더는,
"그의 설교와 그의 저술은, 그의 기도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다른 전기 작가는 "그는 책상 앞에서보다, 무릎 꿇고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He spent more time on his knees than at his desk.” 라고 말했습니다.


▲Tozer의 말words에 대한 사랑은, 그의 가족생활에도 잘 나타났습니다.
그는 부인 아다 세실리아 파우츠 사이에 6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책을 읽은 것에 대해 아이들에게 질문하고
아이들이 잠들 때면, 늘 bedtime stories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딸 레베카는 이렇게 아버지 토저를 회상했습니다.


"내 아버지에 대해 가장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굉장한 얘기들이었습니다.”


6명의 아들 중 하나인 웬델은 "우리는 아빠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우리 어머니가 전등 스위치를 빨리 꺼주시길 바랬습니다."라고 기억했습니다.

그만큼 bedtime stories를 많이 들려주었다는 뜻입니다.


Tozer의 마지막 사역은 캐나다 토론토의 Avenue Road Church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1963년에 66세의 일기로 심장마비로 소천했는데,
그가 소년시절을 보냈고
노천 설교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회심했던
오하이오 주 애크런의 작은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간단한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A Man of God.”


▲어떤 사람들은 ‘왜 토저의 저서가, 이미 그는 소천했는데도
마치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신선한지’ 궁금해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책은, 피상적이며 사소한 것으로 떠났고,
사람들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책을 쉽게 던져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책이나 설교 시간에 간혹 던지는 그의 유머는 Will Rogers의 유머와 비교되었습니다.
약간 투박하지만 오히려 정직한 풍자들이었습니다.

설교시간에 회중들은 마구 웃음을 터트리다가도, 
즉시로 거룩한 고요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50 년 동안 토저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고,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 사람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해 줍니다."
 

 .........................



◈ 성령에 관한 짧은 묵상 3편          슥4:6


A. W. Tozer


▲1. 성령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 개인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아버지는 어느 날 전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가 보니,

17살 된 아들이 다른 비행 청소년과 함께 수갑을 차고 거기 있었다.

아버지는 수갑을 찬 자기 아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마치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런데 같이 붙잡힌 아들의 친구들은.... 쳐다볼 때 별로 아픔이 없었다.

왜 그럴까? 똑같은 청소년들인데.... 동정은 가지만, 가슴 아프지는 않았다.


사람이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거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가 비록 잘못되어도 → 가슴 아리는 슬픔은 없다.

 

성령님이 가슴 아파하신다는 것은....그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다.

근심하다(엡 4:30)의 영어 grieve는 “가슴 아파하다”는 뜻이다.


사춘기 자식을 둔 부모들은, 방황하는 그들 때문에 몹시 가슴아파한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요즈음 방황하는 나를 보시고는, 몹시 가슴아파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성령을 가슴 아프시게 하지 말라(엡 4:30)


주님이 저를 보시고 가슴 아파하시는 것을, 제가 잊어버리는 것을 용서하소서.

주님이 그 친밀하신 사랑이 제게 충만해서

오늘도 범죄해서 주님의 가슴을 아프시게 하는 일이 없도록...조심하게 하소서. *출처:

 



▲2. 무감각하게 만드는 - 설교자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7)


오늘날 교회에 크게 장애가 되는 것은 성도의 돌처럼 굳어진 마음인데

성도들이 성령 없는 설교를 계속 듣다보면....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진다.

더욱이 성령론을 가르치면서도, 싸늘한 심령으로 가르치다보니....


그래서 오래 다닌 성도일수록 대개 귀와 마음에 굳은살이 박혀 늘 무감각하다.

성령역사로 나타나는 환호성, 하나님을 높임 등은 설교에 은혜 받아야 나온다


보통 설교자들은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서 가르친다.

그러나 그 성실한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설교자가 진리에 反하는 설교를 하지 않고, 진리를 위하는 가르침이라도

집에 돌아가는 성도들의 발걸음이 굳은살처럼 무감각한 것은

그 설교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 음성을 못 듣고, 그 메아리(안 좋은 뜻)만 듣는 것과 같다.

그것은 참 빛을 못 보고, 그 그림자만 보는 것과 같다.


주여, 저는 내 인간의 힘으로 설교하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실수를 용서하소서.

내 실수 때문에 청중들의 마음이 더욱 굳어져 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출처, 정리


▲3. 다람쥐 쳇바귀 도는 - 교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4:6


성령의 역사 없이도 교회가 유지, 운영될 수 있다.

아는 친구와 친지들을 부르고, 운영위원회(제직회)를 조직하고,

목회자를 청빙하고, 성가대와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여전도회는 바자회 등 사회봉사활동을 실행할 수 있다.


이렇게 조직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조직은 필요하다.

내(토저)가 염려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빠진 교회는

모든 것이 조직적으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에 불과하다.

미국식 표현으로는, 실린더에 크랭크축 돌아가는 것과 같다.


남들 교회에서 다들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따라서 하는 것인데

그것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계 3:1)


매 주 예배, 매 주 성가대, 매 주 여전도회 모임 등에

성령의 역사가 빠진다면....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과 같다.

별 의미 없는 일을 계속 습관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럼 성령이 역사하는 개인, 설교자, 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마음의 흥분, 가슴의 불붙는 열정, (죄와 무기력에 대한) 탄식과 슬픔....

   이런 것들이 있는 교회인데,

   그것을 기도로 늘 구하고(눅 11:13),

   그런 분위기가 유지되도록 지도자는 영분별의 은사로 늘 깨어있어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