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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지도자 1. 부르심을 받은 사람

LNCK 2017. 9. 1. 10:33

 

◈영적 지도자 1 of 15 부르심을 받은 사람               살전2:7~9, 히5:4~5          출처보기

 

Zac Poonen 목사님 설교 번역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차이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은

하나님으로부터 ‘종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이 설교문에서 ‘영적 지도자’와 같은 뜻입니다.)

그의 사역이, 자기 직업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스스로 주의 종으로 행세 할 수 없습니다.

주의 종은, 자기가 원한다고,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이 불러주신 사람만..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주의 종’입니다.

 

여러분, 히5:4절에 보면, 예수님도 스스로 대제사장으로 자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부름을 받고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히5:4”

 

‘이 존귀’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을 뜻합니다.

예수님도, 또한 아론도.. 대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만..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는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르심을 받아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5:5”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부르심을 분명히 해야 하고, 부르심이 없는데, 스스로 주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비극은, 제 푸닌 목사가 보기에,

인도의 수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사역을 생계수단의 하나로,

마치 자기 직업처럼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에는, 목회자가, 자기 생활비를 버는 수단이 되어버린 사람이 많다고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데, 그게 불확실한데..

덜커덕 사역자가 되어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역자 자신에게, 또 그의 양떼에게.. 모두에게 안타까운 비극입니다.

 

그렇다면 사역이 자기 직업이 된 사람과, 소명감으로 수행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병원에, 한 아픈 아기가 입원해 있습니다.

간호사는 그 아기 환자를 8시간 동안 돌봅니다.

자기 의무인 8시간이 끝나면, 다른 간호사와 교대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돌아가면, 병원에서 돌보았던 아기 환자에 대한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퇴근하고 나면, 자기 시간을 가집니다.

극장에 가기도 하고, 집에서 TV를 보기도 합니다.

그 간호사는, 그 아기 환자에 대해서, 퇴근 후에도 염려하거나 관심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직업이지, ‘부르심’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음날, 또 자기 근무시간이 되면, 다시 그 아기를 돌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호사인 그의 생계수단이지, 엄마처럼 그 아기를 돌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간호사와 엄마를 한 번 비교해 보십시다.

자기 아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8시간만 돌볼 엄마는 없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다고, TV를 보면서,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자기 아기를 깨끗이 잊어버리는 엄마는..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호사와 엄마의 차이>입니다.

나는 오늘 기독교 사역을

간호사의 마음과 자세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엄마의 마음과 자세로 하고 있습니까?

내가 소명(=부르심)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 차이로 알 수 있습니다.

 

퇴근해서 자기 집에 돌아오면, 사역과 교회 일을 깡그리 다 잊어버리는 사람..

자기 오락, 자기 취미활동, 자기 가정 일이.. 자기의 가장 큰 관심사이고,

 

사역과 교회 일은.. 차선인 사람, 관심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사람..

그는 부르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일에는 힘들게 참고 교회 봉사를 하지만,

이 일만 마치면, 월요일은 편하게 집에서 하루 종일 쉴 수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스포츠, 여행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은, 자기 취미 활동을 목적으로 살고 있고,

그 취미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벌기 위해서,

주일날 힘든 봉사를, 억지로 참고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주일 봉사가 힘들지만.. 거기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사역이 어려운 면이 있지만.. 거기서 자기 삶의 만족을 찾는 사람,

그가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 종입니다.

 

오늘날 나의 삶의 만족과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사역과 섬김에, 자기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부르심을 못 받은 사람은, 취미생활, 오락에, 자기만족과 삶의 행복을 거기에 둡니다.

 

-고된 사역을.. 자기 특권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된 사역을.. 노동으로 생각하고 힘들게만 여기는 사람.. 부르심을 아직 못 받았습니다.

당신은 간호사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아직까지는 소명을 못 받았지만, 참고 인내하다보면, 앞으로 받을 수는 있겠지요...

지금은 ‘간호사’이지만, 앞으로 ‘엄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살전2:7~8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여기서 ‘유모 nurse’란 뜻은, 직업적 유모란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바울이, 부모처럼, 교인들을 돌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NIV에서는 아예 ‘moth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 부모이시고, 바울 자신은 유모라는 뜻이지요.

직업적 간호사란 뜻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인 부모’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자기가 아비가 되었다고, 너희를 낳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바울이 ‘내가 너희의 아비가 되었다, 유모가 되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 말은, 바울이 복음을 그저 가르치고, 전달해 주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자기 삶을 드려서, 그들을 돌보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복음과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들의 삶을 돌보는 사람, 그들의 삶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양떼를 돌보고, 인도하고, 사랑하는 사람... 그가 바로 ‘영적 지도자’요

참으로 ‘부르심 받은 주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섬기는 일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직업도, 이 일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은총은,

오직 주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스스로 주의 종이 된 사람에게는,

이런 은총이 임하지 않고, 이 일은 오로지 고된 직업의 일종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후, 제 삶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먼저, 저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확실한 이상,

저는, 사람들에게, 제 자신에 대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를 부르신 분이, 주님이시므로,

나는 주님께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

사람들의 기대와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이리 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은 후, 두 번째로 달라진 것은,

제가 사역하는 중에 여러 환란과 반대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서,

환경의 어려움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의 종으로 살다보면, 환란과 반대와 고난은, 종종 겪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나를 부르신 분이 주님이시고,

내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부르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고 침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내가 주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고,

주님이 시키신 그 일을, 주님이 완성하실 줄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에,

환란과 반대에 부딪힐 때.. 덤덤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제가 달라진 것은,

경제적인 문제에, 제가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사례비를 받든지, 못 받든지,

우리 집에 음식이 풍족하든지, 쪼들리든지.. 그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게, 경제적인 풍부함이 공급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게, 경제적인 쪼들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못 견딜 정도로 괴로운 일은 아닙니다.

 

제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내가 주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그 사명감이 너무나 중차대한 일이므로

내가 경제적으로 풍부하거나, 반대로 곤핍하거나..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논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농부에게, 오직 그 일에 정신이 집중된 농부에게,

무슨 옷을 입든지.. 그게 무슨 문제이며

무슨 음식을 먹든지..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의 관심은, 오직 농사일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다른 일은 관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섬기는 일을, 절대로 중단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일이, 돈을 버는 일이라면,

돈벌이가 시원찮을 때는.. 관두는 것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돈벌이가 아니라, 주님이 내게 시키신 일, 맡기신 일이므로,

수입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제게 그런 강한 동기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엄마가 자녀를 키우는 일은,

월급에 관계없이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자기에게 월급주는 사람이 없다고,

엄마 노릇을 관둘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엄마의 기쁨은,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기가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을 보고.. 엄마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요,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사례비를 많이 받아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사례비를 많이 받든지, 적게 받든지에 관계 없이

영적인 자녀들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부름 받은 종’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특권인지요!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기독교 사역을 주님의 뜻대로 할 수도 있다’고...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사역을, 일종의 자기 직업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 사명 감당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리 명목적인 직함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를 통해서, 주님의 사역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고 봅니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나, 내실은 전혀 없습니다.

 

누가 정말 영적인 아버지로서, 영적인 어머니로서

맡겨주신 양떼들을 헌신적으로 돌볼 수 있겠습니까!

이건 인간의 자기 의지, 자기 노력으로는.. 글쎄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진정 우러나오는 헌신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전4:14절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에게 1만 스승이 있을지라도, 자기는 그들을 낳은 ‘영적인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치고 양육한 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과 열심으로,

그래서 부모가 자기 자녀를 낳고 기르는 그 관심과 헌신으로

섬기고 봉사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자기 명예나, 자아성취나, 자기 돈벌이 등 다른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들을 헌신적으로 양육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는, 나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돌볼 때,

‘나는 그들의 아버지다. 어머니다. 해산의 수고를 했다’고

바울처럼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제 개인적 간증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출애굽기 2장 9절 말씀을 하나님께 받고서, 오래도록 묵상하며 기도해 왔습니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출2:9.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이 나의 경제적 필요를 채우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먼저는 제가 제 자녀를 키울 때.. 하나님이 제게 삯을 주신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나아가 제가 영적인 자녀들을 양육할 때.. 하나님이 제게

반드시 그 삯을 주시리라는 확신과 믿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역을 할 때,

제 가정과, 제 생활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을 믿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셨습니다.

 

꼭 이 말씀을, 여러분도 똑같이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여러분 각자는, 개인적으로 다른 말씀의 약속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주님의 양떼를 돌볼 때,

우리의 육신적 필요는, 주님이 반드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로, 절대로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나를 채우시고, 사례를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으로부터, 물질을 공급받게 되지만, 그 때도,

그 사람에게 감사하기에 앞서,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내게 공급해 주셨으니까요!

 

그리고 얼마를 받든지.. 제가 자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알아서, 적당하게 나에게 채워주셨다’ 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신뢰가 생기자, 물질에 염려하지 않고, 안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사역에만, 제가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하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십시다.

얼마를 채워주시든지, 채워주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은, 권위와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돈으로 조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지,

구걸하듯이 애절하게, 사람을 쳐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보상은, 꼭 물질적인 보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을 보상해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그것을 꼭 물질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부르심을 받은 자기 종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때

-먼저는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영적인 부요함을 주십니다.

믿음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성령도 주십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필요입니다.

 

-그 다음으로 가정의 평안도 주시고, 사역의 안정과 열매도 주십니다.

감정적인 안정도 주시고, 건강도 주십니다.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은,

그 많은 하나님의 은총과 채우심 중에, 지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영적인 보상이 있는 데,

그것은 그 날에, 주의 종들이 받게 될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2:19~20”

 

그런데 그 기쁨은, 꼭 재림 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반드시 있습니다.

 

부모가, 부쩍부쩍 자라는 자기 육신의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듯이..

농부가, 쑥쑥 자라나는 자기 농작물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듯이..

 

주의 종들도,

자기 양떼들이, 믿음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과 감격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기쁨과 희열과 감격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눈물로, 그 양떼를 양육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편하게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126:5~6.

 

그러므로 너무 ‘물질적 보상’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마십시다.

‘물질적 보상’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보상과 은총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열리고, 영안이 열린 사람은,

자기의 <주의 종으로서의 섬김>을.. 스스로 너무 가련하게만 여기지 않습니다.

 

왜 주의 종들이, 자기의 주의 종 된 것을, 스스로 가련하게 여깁니까?

그 보상을 꼭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고, 자신을 다른 부자들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종들에게 주시는 보상은,

마지막 재림 때, 최후의 심판 때는 물론이거니와

(그 때 왕들은, 부자들은, 바위야 나를 가려다오.. 하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오늘 현실에도 여러 가지로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보상 한 가지는,

양떼들이, 영적으로 쑥쑥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역자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겐,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직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여러분의 책임을 다했다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양떼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그 조각은 계속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고, 그 외에도

자신이 먼저 삶의 본을 보여야 하고,

또한 양떼들과 함께 울고, 함께 울어야 하며,

 

때때로 양떼들이 목자를 배신하고, 염소가 되어서 들이받을 때도

십자가 고통을 묵상하며, 그들을 참고 용납하고,

유순한 유모처럼 계속 그들을 기르며,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조각가들이, 대리석이나 화강암 등 큰 돌을 가져다 놓고,

망치질과 끌질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자기 머릿속에, 먼저 그 완성품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상상으로 그리면서, 망치질과 끌질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사역자들도, 그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어떤 완성된 모습이 그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떼들이, 그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볼품없는 원석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영혼의 조각가 된 주의 종들이,

다듬고, 갈고, 깎아내어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기쁨이란!

그걸 어떻게 ‘돈의 얼마’에 비기겠습니까! 어떻게 조각가의 기쁨에 비기겠습니까!

 

그리고 육신의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에 비유해 봅시다.

기어 다니던 아기가, 아장아장 스스로 걸음마를 뗄 때, 부모는 경이의 탄성을 지릅니다.

 

그러던 아이가 훌쩍 커서, 이제는 시집 장가를 보내면서, 떠나보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모는, 또 한 번, 키워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성한 자녀가, 시집 장가를 가지 않고,

계속 집에 머물러 있는다고.. 그게 어찌 기쁨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영적 자녀를 시집 장가 보내신 기쁨이 있으십니까?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애가 애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아이가 12명이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요즘처럼 하나 둘 낳아도, 기르기 힘들어하는 부모들은,

과거에 부모 세대가, 자녀들을 10명씩 낳아서 키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기절할 정도로 놀라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이 12을 키우는 엄마가, 아이 단 둘을 키우는 엄마보다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둘째가 다섯째 여섯째를 업어서 키우고,

아홉째 열째가 태어나면,

다시 다섯째 여섯째가, 아홉째 열째 동생을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업어도 주고, 밥도 먹여주고, 같이 놀아도 줍니다.

 

아니, 첫째 둘째가, 셋째 넷째를 훈련시키고,

셋째 넷째가, 다섯째 여섯째 동생을 교육시킵니다.

동생들을 어떻게 잘 돌보느냐.. 에 대해서요!

 

그래서 오히려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부모는 더 편해지는 면도 반드시 있습니다.

집안이 하루 종일 재미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의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활성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비결은 ‘델리게이션 (위임)의 원리’에 있습니다.

 

너무 어린 신자에게, 무턱대고 사역을 위임시킬 수는 없습니다만,

신자를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숙시킨 후에.. 과감하게 사역을 위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근본적으로는,

사역자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건 ‘위임’보다, ‘제자양육’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입니다.)

 

◑마치는 말

 

예수님은 12제자를 집중적으로 양육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효과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 숫자는, 아마 12를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약 열두 제자가, 예수님처럼, 또 각자의 양떼를 돌보았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는 120명의 제자그룹이 생겨났습니다.

한 사람이 약 10~12명을 돌본 셈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것은 ‘부르심 받은 사역자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 부르심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워낙 직업이 없으니까, 그저 직업을 얻기 위해서,

-또는 목회자가 받는 존경과 명예가 좋아보여서

이런 부르심 받지 못한 사역자들이 대거 생겨날 때는.. 그 ‘그리스도의 몸’에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많이 하면 좋겠지만,

예수님처럼, 단 열 두 명이라도,

참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보십시다.

‘참 소명 받은,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를 양육해 보십시다.

 

그 열 둘이 나가서,

또 참 그리스도의 제자, 열 둘씩을 만들 것입니다.

 

그런 프로세스가 일어나려면,

나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부르심’을 확실히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여러분, 부르심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여러분이 부르심을 확인하지 않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역에 뛰어들었다가

나중에 주님이 심판하시는 그 날에, 과연 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날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짚이나, 나무나, 풀로 지어서,

불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다 타버리고, 자기는 겨우 불 가운데 구원 받을 것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3:12~15.

 

기독교 사역은, 부르심을 받아서,

마치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양육하듯이

사례비의 유무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고,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없이, 사역을 하는 척.. 흉내만 내는 것은,

우리 각자가, 오래 기도하면서, 자기의 부르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부르심이 확인된 사람은,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르심이, 너무나 확실하고 견고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