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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7

영적지도자 6. 복종을 통해 깨어진 사람

LNCK 2017. 9. 14. 19:13

 

영적지도자 6. 복종을 통해 깨어진 사람 / 잭 푸닌 - YouTube

영적지도자 6. 복종을 통해 깨어진 사람  벧전5:5, 행16:9~10, 마26:7~16  출처, 정리

Broken Through Submission by Zac Poonen

 

◑‘공동체적 연합’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각 지체 개인적으로 individually 올 수도 있고,

-공동체 단체적으로 corporately 올 수도 있으므로

세밀하게 분변해야 합니다.

 

“머리”로부터 “손”에게 오는, 개인적 명령은.. 어떤 면에서 쉽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로부터 “팔 전체”에게 어떤 공동체적 명령이 주어졌을 때,

그 지체인 ‘손’이나, ‘팔꿈치’, ‘팔의 근육’ 등의 각 지체가,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떨어진 명령이 아니라고.. 복종을 거부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1)

 

▲‘공동체적인 임무, 사명’은.. 주로 그 공동체의 리더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물론 리더가, “머리”로부터 엉뚱한 명령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리더가 성숙한 경우’를 가정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리더는 성숙해서, <공동체적인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그 공동체에 속한 각 지체들이, 미성숙해서, 그 ‘공동체적 임무’에 불순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반대로 리더가, 하나님 뜻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서

각 지체를 보고, 복종을 요구할 때도 있지만, 그런 예는 드물고요..

리더는 성숙했는데, 팀원들이 미성숙해서,

하나님의 뜻과 사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복종을 통해서, 장래의 지도자를 준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장래의 지도자는,

그가 팀원으로 있을 때, 그가 지체로 있을 때,

거기서 ‘복종’을 배운 사람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의 리더에게, 철저히 복종한 사람을

하나님은 장래의 리더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에 더욱 자세히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머리”에 (즉, 주님께) 개인적으로 복종하기는 쉬워도

“머리”에 단체적으로 복종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개인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뜻만 분변할 것이 아니라,

단체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기 사명과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의 리더에게, 불복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건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거스리는 것이 되는, 큰 잘못이 됩니다.

 

▲이렇게 ‘공동체적 사명’에 순복한 경우를, 행16:9에서 볼 수 있습니다.

2차선교여행 때 바울의 일행이 드로아 근처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본 사람은,

그 선교팀의 리더인 바울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에는,

다른 팀원 모두가, 바울이 받은 환상, 하나님의 명령에, 동의하고 따릅니다.

 

10절,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우리”에는

적어도 실라, 누가(사도행전 저자), 디모데(16:3)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9절에는 분명히 바울 한 사람만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그런데 어떻게 다른 팀원들이, 모두 다 바울이 본 환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따를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바울을, 그 선교팀의 리더로 세우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 팀 리더가 깨어있을 경우,

하나님은, 팀 전체의 비전과 사명은, 그 팀의 리더에게 주십니다.

팀원 각 개인에게 주시지는 않습니다.

 

팀원들은, 그 리더만 순종하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팀의 리더가

사실은 그 팀의 비전을 놓고, 가장 많이 기도하고, 가장 많이 수고하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은, 그 리더에게, 팀의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만...)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공동체의 리더에게 순종하기가 어려우면,

제 푸닌의 생각인데,

남아서 계속 리더에게 끝까지 불순종하기보다는,

자기가 조용히 그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어떤 면에서 더 현명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팀 리더에게 불순종하는 것도 큰 문제인데,

그것이 더 큰 문제로 번져서, 반역rebellion이 되거나,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그 공동체에 남아있어서, 계속적으로 지도자에게 반역을 일으키는 경우라면,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지도자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들면,

그래서 자기가 자꾸 리더에게 반역하게 되는 죄를 짓게 된다면,

그 공동체를 조용히 떠나서, 다른 공동체로 가서 조인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제도적 지도자’가 있고, ‘영적인 지도자’가 있습니다.

 

▲살다가 보면, 이런 일은, 성경에도 나오고, 또한 교회 역사에도 반드시 나오고

물론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있습니다.

 

‘제도권적 지도자 ecclesiastical authority’란..

교단지도자, 교회지도자를 뜻하는데.. 주로 사람의 투표에 의해 선출됩니다.

 

반면에 저 푸닌은 ‘영적인 지도자 spiritual authority’도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에 의해 뽑히고, 세워진 지도자입니다.

(혹자는 이런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도권적 지도자’들이,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를 따로 세우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도권적 지도자’들이, 지난 교회 역사를 보면,

버벅거린 경우가 항상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제도권 바깥에서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존 후스, 위클리프, 루터, 웨슬리, 휘필드 .. 등이 그 대표적입니다.

 

꼭 그런 유명인사가 아니더라도,

개교회에도, ‘제도적 지도자’가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이 그 교회에 세우신 ‘영적 지도자’가 따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영적 지도자가 그 교회의 ‘종치기’ 일수도 있습니다.

 

▲‘제도권적 지도자’들이, 사도베드로, 사도바울, 사도요한처럼

양떼를 잘 돌보고, 영적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그런 공동체도 일부 있습니다만,

또한 그렇지 못한 공동체도 일부 있습니다.

 

무조건 다수 득표로 당선된 장로가,

교회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도, 일부 있습니다.

그래서 제도권 지도자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하는 경우도, 일부 있습니다.

 

또한 총회장이나 주교가

자기 권위로 어떤 지도자를, 어떤 지역교회에 임명해서 보내기도 하는데,

그 지역교회가 그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해서 잘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삐거덕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의문을 품습니다.

‘저 지도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과연 맞나?’

 

▲저 푸닌은, ‘제도권적 지도자’의 권위를 무시할 목적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제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을 말씀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도권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뽑으시고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제도권적 지도자’들에게만 순종하라고 배웠습니다만,

 

동시에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순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가르칠 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가르칠 때,

그의 전하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 역시, 그를 영적 지도자로 파송하신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런 불순종자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인 지도자’는, 어떤 임명장도 없고, 어떤 임명기간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개교회에서, 일생에 단 한 번, 그가 영적지도자로 세워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의 음성을 발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분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음성이 맞다면,

우리는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가 단지 ‘종치기’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다가는 큰 일 납니다.

 

▲‘(비제도권) 영적 지도자’ 스스로도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내가 영적 지도자다.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았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인정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아무런 공식적인 직함이 없거나,

있어도 ‘제도권적 지도자’에 비하면 모든 것이 미미하겠지만,

 

그가 ‘영적 지도자’로 인정받는 것은,

오직 자기가 가진 ‘영적 권위’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영적 지도자’로 인정해 주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가 계속적으로 ‘영적 권위’를 행사할 때,

사람들은, 그가 비록 ‘종치기’라도, 그를 결국은 ‘영적 지도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가 (그의 기도가, 그의 조언이, 그의 존재가) 없으면.. 뭐가 제대로 안 돌아가니까요!

 

사람들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결국은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기름부음을 진짜 받은 사람은, 즉 영적인 지도자는

그 기름부음 받은 값을,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제도권) ‘영적 지도자’가 인정을 받게 되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에서 ‘개인적 명령’에는 순종하기가 쉽지만,

‘단체적 명령, 공동체적 명령’에는

우리 각자가 순종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도권적 지도자’에게는 순종하기가, 어떤 면에는 쉽습니다.

그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세우신 (비제도권) ‘영적인 지도자’에게는,

순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가 ‘제도권적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제도권적 지도자’였다면

선지자들은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도권적 지도자들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제도권적이든지, 비제도권적(즉 영적 지도자)이든지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로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그가 비제도권적, 즉 영적 지도자이고,

그가 영적인 메시지, 즉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다고 칩시다.

우리가 그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습니까?

 

결국은 내 손해입니다.

내가 또는 우리 공동체가, 손해를 왕창 보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른 엉뚱한 길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도권, 비제도권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그 길을 떠나 엉뚱한 길로 나아간다면,

1년 후, 2년 후, 5년 후를 보십시오.

그 결과가 아주 비참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먼저는 ‘제도권 지도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하나님은 종치기라도, 누구든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를 들어서 쓰실 것입니다.

 

비제도권, 여기서 다른 말로 영적인 지도자는,

그렇게 불가피하게 탄생되는 것을 봅니다.

 

마귀가 언제나 교묘하게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올무에 걸리게 합니다.

그런 비극과 실수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길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과 그의 가르침에, 우리가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가 제도권이든지, 비제도권이든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제도권이든지, 비제도권이든지

경건한 사람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가르치는 지혜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 배워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순복한 사람이, 장차 지도자가 됩니다.

 

벧전5: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이 구절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권위 spiritual authority를 얻는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저 푸닌은, 많은 훌륭한 젊은이들을 보는데,

그들에게 영적인 권위가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는, 안타까워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영적인 권위’를 안 주시니까, 그들이 못 받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위 구절이 말씀해 줍니다.

‘그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영적 권위도 못 받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는데,거기에 영적 권위 spiritual authority를 대입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제 푸닌이 생각하기에는,

‘권위, 권세’ 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 다루면, 많은 사람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고 싶어도, 마음 놓고 주실 수 없습니다.

그 위험한 것, 즉 권위, 권세를 주시려면,

반드시 깨어진 사람, 반드시 겸손한 사람, 권위에 복종해 본 사람,

즉 그 ‘권위, 권세’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것을 주십니다.

 

자기 윗권세에게 순복할 줄도 모르는,

자기 자아가 강하고, 깨어지지 않은 사람에게, 교만한 사람에게, 

‘권위, 권세’가 주어지는 것은, (여기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뜻)

자신에게나, 그의 지도를 받는 사람에게나, 모두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를 지도자로 세우시기 전에,

그를 먼저 깨뜨리시는데, 주로 그의 윗권세를 통해서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먼저 ‘순복함을 배운 사람’을

지도자로 들어 쓰시는 것을, 저 푸닌은 봅니다.

 

▲이 원리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그가 온전한 권위자로 서려면,

그는 먼저 반드시 깨어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바깥에 나가서, 자기 윗 권세, 또는 다른 영적 지도자에게

순복하는 사람이, 그 순복함을 통해서 자기 자아가 깨어진 사람이

자기 집에서도, 올바른 가정의 지도자로서 권위를 행사함을 봅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깥에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순복해 본 적도 없는,

즉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강한’ (부정적 의미로서의 ‘강한’) 사람이

자기 집에서도 올바른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여,

자녀나 아내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함을 봅니다.

 

벧전5:5절의 말씀은, 일반 가정의 젊은 아빠에게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가 나가서, 다른 윗 권세들에게 복종하기를 배울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가 가정에서부터, 온전한 지도자로, 존경을 받고요, 

 

나중에 그런 젊은이가

사회에서, 교회에서 또한 영적 지도자로 세워 지겠지요.

 

▲제 푸닌의 경험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20~30세까지는,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많은 모욕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장로들은, 제 사역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제게, 입을 다물고,

장로(목사)에게 복종하는 훈련을, 계속해서 시키셨습니다.

 

제가 계속 그렇게 했을 때, 저는 그들과 결국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제가 그 공동체를 떠나서 단독 사역을 시작한 후에도, 그 좋은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장차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쓰실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헛된 시간이 아니었던 것은,

제가 자아를 깨뜨리고, 윗권세에게 순복하는 것을, 훈련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오랜 기간 후에, 하나님은 제게, 영적인 권세를 주셔서

이제 제가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는데,

저는 그 이유가,

제가 먼저 몇 년 동안이나, 윗 권세에게 기꺼이 복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총이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제가, 윗권세에게 순복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못했더라면,

제가 권세자의 위치에 올랐을 때,

아랫사람들을 마치 독재자처럼 휘둘렀을 것이고,

그러면 얼마 못가서, 그 자리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러나 제가 윗권세에게 배운 것이 있었으므로,

저는 그들을 긍휼과 인내로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도 계속 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를 계속 깨뜨려 가십니다.

이전에 경험했던 방식과는, 전혀 새로운 환란으로 제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이 이전에 저를 쓰신 것과 달리, 새롭게 저를 더 존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지금 저를 준비시키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서, 세워서 쓰실 때는

그저 아무나, 아무렇게나 불러서 쓰시는 것이 아니고,

많이 깨뜨리시고, 완전히 깨뜨리셔서, 그렇게 자아가 깨어진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깨어지는 과정에 있다면,

오히려 기대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하, 하나님이 앞으로 나를 존귀하게 쓰시려나 보다..’

 

 

◑교정을 겸손히 받는, 실제 예

 

▲하나님은, 교정(지적 correction)을 통해서, 우리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점점 지도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세상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교정을 받아서, 기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세 살짜리 꼬맹이도, 교정을 하면, 반발하고 성질부립니다.

 

그것도 특히, 공개적으로 교정을 받을 때는,

그것을 쉽게 소화시키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당신은, 공개적인 교정public correction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때가,

마지막으로 언제 였습니까? (매우 오래되었지요?)

 

어떤 사람은, 공개적인 교정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일생에,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체면, 자존심,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반발하고 튀어 나가버리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제 말은, 그런 사람은, 즉 윗 권세에 순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앞으로 자기가, 권세자가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지 않으십니다.  ←주제

 

▲당신의 윗권세가, 당신을 교정할 때,

너무 가혹한 방식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너무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교정하는 방식이 가혹하냐/ 친절하냐.. 그것이 핵심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서의 핵심 문제는,

당신이 그 교정에 순복하느냐/ 안 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괜히 자기가, 윗권세에 겸손히 순복하기 싫은 문제를 두고서

‘그가 너무 가혹하게 나를 공개적으로 훈계했다’고, 핵심을 엉뚱한 데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당신의 사소한 문제에, 그렇게 가혹하고 맹렬하게

교정, 훈계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가 윗권세로서, 더 윗권세자인 하나님께 질책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랫권세인 당신이, 교정을 받을 때 취해야 하는 자세는,

그 형식이 어떤 것이든지, 즉 아무리 강한 훈계이더라도,

거기에 겸손히 순복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적자, 반대자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강하게 반대를 받으신 적이

종종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예수님은 결코 불평을 했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게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데요..

그런데 예수님은, 신기하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즉, 어떤 공개적인 공격과 치심을 당해도... 순순하게 대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본입니다.

 

혹시 우리 대적이 우리를 비난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비난에 조금이라도, 2%라도, 진실이 섞여있는지..’ 그것에 유의하십시다.

그가 비방하는 방식이 무례하다고 문제 삼지 말고요!

 

그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대적이, 그런 혹독한 방식으로 달려드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처사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 일말의 진실이 숨어있다면,

그래서 내 잘못을 깨닫고, 내가 고치고, 스스로 회개하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무료 (영적)건강 검진’을 받는 셈입니다.

 

‘건강 검진’을 받기가 쉽지 않는데,

그것도 무료로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그가 나를 정밀 스캐닝하고, 비난하는 방식이 너무 졸렬하다, 치사하다..

진짜 너무 비인간적으로 이잡듯이 나를 뒤지는구나.. 이렇게 비난하지 마시고,

그가 비인간적으로 나를 염탐하고 공격하는 방식은.. 사실 큰 잇슈가 아닙니다.

 

지금 그 상황에서, 가장 큰 잇슈는,

‘내가 그의 스캐닝에 걸려들 만큼, 어떤 비크리스천적 요소가 있느냐/없느냐?’

하는 점입니다.

 

만약 그런 요소가 내게 발견되어진다면,

스스로 발견하기 어려운데, 그가 무료로 정밀하게 검진을 해 주니..

어쩌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무료 MRI, CT, PET입니다.

 

저 푸닌도, 크리스천 지도자로서, 사역을 해 나가는 중에,

다른 지도자들이 그러하듯이, 심한 공격과 비난과 주목(스캐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공격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거나, 교회 역사를 보거나

참 하나님의 종들은, 한 번도 편하게 살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그들은 비난과, 감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그런 ‘공개적 교정(비난)’을 받을 때, 유의하는 점은,

‘그들의 비난에, 일말의 진실이 섞여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저들의 공격을 통해서, 저의 부족한 점을 보여 주십시오!’

 

가끔은, 마귀가, 또는 대적들이

나 자신보다, 또는 내 편에 선 사람들보다,

내 약점, 내 고칠 점들을, 더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다’가 아니라, ‘가끔’입니다.

 

그러므로 교정을 통해서 들리는 ‘나의 진실’에

겸손히 회개로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교정을 순순히 받는 자세인가/ 그렇지 못한가?’

또는 ‘그들의 교정에 진실이 있으면, 내가 인정하고 회개하는가/ 반발하는가?’입니다.

 

우리는 엉뚱한 데로, 문제의 핵심을 돌리려 하면 안 됩니다.

‘그가 교정하는 야비한 방식’을, 문제 삼지 마십시오.

그는 대접한 대로 대접 받을 것입니다.

 

다만, 당신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귀한 지도자가 되려면,

이런 교정의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서, 가뿐히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정 받는 자세 :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비교.

 

베드로는 실수를 했지만, 교정을 순순히 받아서,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가룟유다는 교정을 받았을 때, 튀어나가서 반발하고서, 정반대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교정을 받을 때의 자세

-이것이 바로,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이었습니다.

 

▲마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더러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말렸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아니 ‘사탄’이라니요!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사탄아!’ 라고 욕하신 적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서 ‘독사야’ 라고 하신 적은 있어도, 대놓고 ‘사탄아’라고 부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보고는, ‘사탄아!’ 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서 ‘사탄아’라고 하신 것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 것입니다. 계3:19

그러므로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은 사람은, 더욱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를 듣고서, 떡을 먹었던 사람 대부분이 주님을 떠났을 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며

충성을 다했던 제자였습니다. 요6:60

 

그런 충성스런 제자에게,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이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더 심하게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 주님의 책망과 징계와 교정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주님께 쓰임 받는,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또 한 번 더 예수님께 교정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배반해도,

나는 죽을지언정, 그렇게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장담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베드로가 버럭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정을 순순히 받고, 참고 견뎌내는 사람..

그를, 주님은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것이 - 이 설교의 주제입니다.

실제로 그는, 오순절 이후로,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경험을 초대로 해서

베드로는 본문 베드로전서5:5절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위 말씀은, 베드로가 실제로 체험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공허한 이론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반드시 이 말씀을 믿으십시다.

내가 겸손해서, 손해 볼 것은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베드로와 비교해서, 가룟유다의 <교정 받는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 발에 값비싼 향유를 깨어서 부었을 때

유다는, ‘저것은 낭비다.. 차라리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나 주어라’

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요12:5, 마26:10)

 

그때 예수님은 아주 부드럽게, 유다를 나무라셨습니다.

‘저 여자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라.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행했느니라.’

 

그러나 유다는, 이 예수님의 교정을 듣고, 반발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마26:14절에 보면,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 것을 흥정합니다.

 

여기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 타이밍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유다는,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기가 잘못해서,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나무람을 들었습니다.

그 즉시로, 튀어나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앙갚음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깨어지지 않은 사람(유다)은,

작은 책망에도, 부드러운 교정에도..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다른 고려 요인들이 있겠지만,

<교정을 받을 때의 자세>

그것도 ‘초대교회의 지도자’ 와 ‘영원히 저주받을 자’로 나누는

어떤 구분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이와 같은 시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개적으로 지적을 당했을 때, 내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교만하다는 증거요,

내가 사람의 영광(평판)을, 필요이상으로 높이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자아도 깨어져야 하며,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자아가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자기 자아가 망가지는 것을.. 그리 펄쩍 뛸 정도로, 격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나 자신의 실상을 깨달아라고,

대적을 격동시켜서, 나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도록, 상황을 조성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대적은, 통과할 때까지, 나를 계속 격동시킬 것입니다.

시험은, 시험에서 이겨져야, 비로소 끝나게 되니까요!

 

▲베드로처럼, 우리가 공개적인 교정을 당할 때,

또는 성령님으로부터 책망을 당할 때,

우리는 순순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우리 각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벧전5:5절의 말씀으로, 젊은 자들에게 충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자아가 깨어지지 못하면,

내가 교정을 받을 때마다, 반발하면,

어쩌면 남은 평생을, 우리는 홀로 외롭게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절대 남에게 책망 받기 싫어하는 사람, 복종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은 홀로 외롭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지도자라도, 외로운 지도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지도자!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자기에게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을, 곁에 두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 말에는 100% 순종만 해 주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일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바로 덜 깨어진 사람이요, 그는 지도자로 세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공동체 저 공동체로, 나비처럼 떠돌아다닙니다.

나비가 예쁜 꽃들을 찾아서, 떠돌아다니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취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인같이 방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창4:12

가인은, 주님의 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로운 자에게, 영적인 지도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고 계시며,

그 몸은, 반드시 여러 기관과 지체가 연결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동떨어져 있지 않고요!

 

..........................

 

주1)  전략된 부분

 

▲장차 되어질 영적인 지도자는, 깨어진 사람이 되어집니다.

장래의 영적인 지도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준비시키시는가 하면,

그를 ‘깨뜨림’을 통해서 준비시키는데,

그 ‘깨어짐’은.. 주로.. 자기 위의 권위자로부터 혹독하게 당하게 됩니다.

그 윗권위자에게 복종(순종)을 배움을 통해서.. 그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느 날 하루아침에 짠 하고 지도자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벌써 30년 동안이나, 집에서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의 권위 아래서, 복종하는 훈련을 거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지도자로 서실 수 있었습니다.  

 

‘복종의 법칙’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이것을 제가, 이해하기 쉽게, 우리 몸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른 손은, 오른 팔에 붙어서 한 팀을 이룹니다.

오른 손은, 언제나 오른 팔의 지도력에 복종합니다.

 

그러나 왼손은, ‘오른 팔 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왼손은, ‘왼 팔 팀’에 소속되어, 왼팔에게 복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요, 각 부분이지만,

그 지체와 부분이, 다른 지체들보다, 자기와 특별히 가깝게 연결된 ‘팀’이 있습니다.

지역교회나 선교회가, 바로 그 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팀으로 연합해서> 입니다.

영어로는 “individually and corporately”입니다.

 

머리는, 오른 손이, 혼자서 스스로 움직이라고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몸을 보면, 팔이 전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손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결혼, 직업, 이사 갈 때, 또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이렇게 우리는, “머리”의 지시를 직접 받아서, “손”이 혼자서 스스로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사건건 모두에, “팔”의 지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사사건건한 일에도, 교회 지체의 조언을 받을 수 있지만,

내 개인적 삶의 결정권은, 내가 내립니다. 내가 주체입니다. “팔”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손”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팔 전체”에게 명령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팔을 들어 올려라’고 명령하면, 그때는 팔의 전체가 함께 들어 올립니다.

“손”이 ‘내게는 머리가 명령하지 않으셨다’고 하면서, 거부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