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지도자 8 삶으로 사역한다 / 잭 푸닌 - YouTube
◈영적지도자 8. 삶으로 사역한다 요1:4, 9:5, 히1:1~2 출처, 대강번역 中文
Ministering From Life Zac Poonen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을 보여주면서 사역하는 것이지,
자기 지성으로 뭘 가르쳐서 사역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리가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옛 언약적 사역' 과 '새 언약적 사역'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그 차이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율법을 연구해서 백성들에게 잘 가르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신약시대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되, 연구해서 지식으로 가르치신게 아니라
그 말씀을 친히 살아내시고,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시며,
그 내면적 신앙을 친히 보여주심으로써 사역하셨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 설교하는 것과
자기 삶에서 우러나오는 설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사는 인도의 신자들이, 대부분 얄팍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목회자들의 삶이 얄팍하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 신자들의 삶이 세속적이라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의 삶이 세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리더의 평소 생각이 세속적이거나,
그가 자기 아내와 또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또한 동역자들과의 관계에서
세속적이고 세상가치로 살면.. 성도들이 그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대개 지식이나 정보전달 수준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구약 언약적/율법적 사역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런 리더가 있다면, 그는 아직 구약언약 아래 매여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신학적으로 정확하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자기 삶을 나누지 않는다면, 즉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는 신약의 새언약 아래 사역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글자로 써서 전한 것이라면,
새 언약은, 마음에 새기는 글자입니다. 고후3:3
즉 자기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것이지만, 새언약은 살리고 생명을 줍니다. 고후3:6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들에게 빛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은
올바른 교리나 정확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도 필요하지만요
오늘날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은,
새언약의 성도들을 통해서 나타나 보여지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아직 이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처해진 것입니다.
비록 복음주의 진영에 속해있다 해도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글로 써 주신 율법이, 빛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빛이요, 내 길의 등이니이다.’ 라고 시119:105절에 말씀하셨죠.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그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요!
‘그의 생명(life, 삶)은 사람의 빛이었다.’ 요1:4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이 세상에 살 동안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9:5
이제 주님은 천국으로 가셨고,
이 세상에서 우리들보고 빛이 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5:14
그래서 우리 성도의 책임감은 아주 중대합니다.
바로 우리 삶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불가피하게 그 리더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주님은 교회나, 그 교회의 사자(리더)에게
똑같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교회나 그 리더가, 영적인 상태가 동일하다는 뜻이지요.
서두에는 ‘내가 그 교회의 사자(목회자)에게 편지하노니’ 하고서는
마칠 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의 사자와 그 교회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도 꼭 그렇습니다.
거기 나오는 5교회가 세속적이었고,
그 교회의 리더들도 세속적이었습니다.
두 교회는 영적이었는데,
그 교회의 리더들도 영적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리더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계3:15
그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리더, messenger, 메시지 전달하는 사람)는 충성스러웠고,
그 교회도 따라서 충성스러웠습니다.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이 ‘그 종류를 따라’입니다.
열매 맺는 과목은 열매 맺는 과목의 종류를 따라,
씨 맺는 식물은 씨 맺는 식물을 따라, 물고기와 새들도 각각 그 종류를 따라,
짐승들도, 기는 것들도, 가축도 그 종류를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도록, 유유상종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창5:1
그런데 타락한 후의 아담은, ‘자기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담은 백서른 살에 자기의 형상 곧 자기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창5:3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지요. 우리의 외모뿐만 아니라, 우리 인격까지도 닮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공동체의 리더, 지도자는.. 영적으로 자기를 닮은 자녀를 양육하게 되고,
또 서로가 끼리끼리 모이게 됩니다.
실제로, 아주 지성적인 목회자는,
그 교인들 가운데 지성적인 사람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만약 리더가 인색해서 구제나 나눔을 아까워하면,
구두쇠요 인색한 성도를 많이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리더가 교만하고 거만하면,
영락없이 그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만약 리더가 섬기는 신앙을 갖고 있으면,
거기서 신앙생활하는 영적 자녀들도, 대부분 섬기는 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세속적인 지도자 아래서
간혹 영적인 제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다만 희귀합니다.
엘리 제사장 밑에서 사무엘이 나온 경우가 그렇지요.
일반적으로는, 신자들은, 마치 눈이 가려진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지도자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말을 하죠.
그래서 그 목회자만 봐도, 그 성도들을 대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더나 양떼가 그렇게 상호 모두 눈이 감겨져 있을 때는,
결국 나중에는 웅덩이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제자들이 나가서 또 전도해서 신자들을 데리고 오는데,
또 자기랑 비슷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느니라. 마15:14
그래서 목회자는, 이제 자기를 닮은, 자기와 비슷한
영적인 손자 세대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를 통해 재생산 되고, 그게 그 다음 세대까지 확산됨을 볼 때
오늘날 우리는 굉장히 바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바른 본을 보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목회자는, 목회의 기본이
그저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인들을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만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먼저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나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삶의 모범을,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서,
살아내야 하고, 그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 목회자를 보고 배운 신자들이
나가서 전도해서, 또 다른 제자들을 키울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그저 구원의 교리를 지식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들은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소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을 사는 목회자는,
제자를 양육하게 될 것이고,
그 제자는 재생산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의 기본은,
자기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삶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구약에서 성막은, 교회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성막은, 뜰과 성소와 지성소, 이렇게 세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저 예수 믿고, 자기 죄만 용서 받은 사람은,
“성막 뜰”에까지 도달한 사람입니다.
성막에는 들어왔지만, 마당만 밟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지역교회에서 아무런 책임감이 없습니다.
“성소”에 들어온 사람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공동체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때 레위인들이 성막 봉사를 하던 것처럼요.
촛대에 불을 켠다든지, 향단에 향을 피운다든지요.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은,
새언약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진짜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과 싸우며 그리스도의 몸을 순전하게 지킵니다.
이런 “지성소”에 머무는 신자들이 많아야 되는데,
그런데 현실은, 많은 교회에서, 그런 핵심교인들이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참 제자들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현실은 모든 교회에서 보면, 큰 교회든지 작은 교회든지
“성전 뜰”에 거하는 성도들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두 마음을 품으며, 세상적으로 살고, 돈과 쾌락을 사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다니는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 튼튼한 교회는
“지성소”에 거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 교회의 나아갈 길과 미래는, 이 “지성소”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새언약과 옛언약의 대조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책은 성도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 책은 고기요, 우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신자들은 아기라서 아직 치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기/단단한 음식을 싫어하는데요.
그 히브리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히1:1~2
구약/옛언약은 주로 하나님의 계명의 선포였습니다.
그것은 ‘뭘 하라’ 와 ‘뭘 하지 마라’로 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는데요,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참 생명, 참된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산상수훈 설교를, 서재에서 주석책 등을 참고해서 준비합니다. *이것도 필요하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 설교를, 자기 삶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자기 삶으로써 살아내면서, 산상수훈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설교가 능력이 있었던 이유이고,
사람들이 그 가르치는 권세에 깜짝 놀란 이유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즉 옛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대언/전달했습니다.
만약 오늘날 이렇게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잘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새언약 아래서는, 구약의 옛언약 시대보다는 발전하는데요,
하나님이 예수님께, 어떤 특정한 날에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구약은 특정한 날에만, 하나님이 예언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서 즉 에스겔이 받은 예언은, 긴 48장에 걸쳐 기록되었지만
단 세 번, 하나님께 들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매일 상시적으로 대화하셨습니다.
특정한 날에만 하신 게 아니라요.
그래서 신약시대의 사역자들은,
주님과 상시적으로 매일 교제하고, 음성을 들어야 하고요,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8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날에,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 항상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사역자들은
매일 그 들은 음성을 통해서, 매일 생수의 강을 흘러보내야 하고,
또한 자기 삶으로써, ‘빛’을 매일 상시적으로 발해야 한다는 거죠.
이것이 바로 이 설교의 주제요 제목인 “삶으로 사역한다”입니다.
주일날 설교시간에만 사역하는 게 아니라,
매일, 상시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자기 삶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가 매일, 상시적으로 주님과 교통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공동체에서 신앙생활하는 신자들은,
다 그런 리더를 따라서, 제자가 되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 공동체에서는
그저 예수 믿고, 말씀의 규율을 지키며 생활하는 구약적 신자들을 키워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상시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매일 빛을 발하는,
그런 ‘복음적 삶을 사는’ 신약의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습니까?
그 대답은, 지도자의 신앙 스타일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들은, 지도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훌륭한 분들이었죠. 그들은 단지 메신저였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지만 전달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다릅니다. 그저 메시지만 전달하는 메신저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을, 대신해서 보여주고
예수님의 빛을, 대신해서 비춰주는 .. 그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구약적 사역자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서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때마다 수도를 틀어서, 물(메시지)을 받아서 나눠주면 그걸로 끝입니다.
이건 때때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적 사역자는, 자기 속에서 생수를 흘러내는 것입니다.
이건 상시적으로 자기 속으로부터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흘러넘쳐나는 생수는, 메시지도 되지만, 그의 삶도 됩니다.
삶으로써 전달되는 메시지입니다.
구약은, 단지 말만 전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신약은, 삶을 보여주는 것이며,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얼마 솟아올랐다가 마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는 물과는 다릅니다. 그건 곧 목마릅니다.
주님은 그 생수가, 우리 속에서 솟아오르기를 원하십니다.
그건 그저 ‘말로 전하는 메시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사역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서 그 분의 제자가 되는 것인데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와 더불어, 삶으로써
설교와 생활로써, 끊임없이 생수를 솟구쳐내고,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때 영적인 재생산도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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