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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에 대한 10가지 고발장 中 (8~9장)

LNCK 2017. 10. 5. 11:29

www.youtube.com/watch?v=pY-VqguYgwk

◈현대 교회에 대한 10가지 고발장 (8, 9)         히12:14

 

8. 여덟 번째 고발: 구별됨에 관한 침묵 

          A Silence on Separation    

 

오늘날의 교회에는, 거룩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물론 거룩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그래서 거룩해집시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세미나를 엽시다.’ 이렇게 일반적으로만 거론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아무도 거론하지 않고, 심지어 모르기까지 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14)

 

거룩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입니다!

믿으십니까?

 

어떤 분은 말합니다.

폴 형제, 내가 거룩한 삶을 강조하면

나는 행위를 가르친다고 너무나 자주 비난받습니다.”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혼동되시면

중생과 하나님의 섭리로 다시 돌아가서 보셔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 정말로 회심conversion 시키시면,

가르침과 은총과 경책와 권징을 통해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해서 일하십니다. 즉 성숙시켜 나가십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선한 일(거룩)을 시작하시고,

또한 그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그 길로 섭리providence 해 나가십니다.  빌1:6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성화가 없이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왜냐구요? 만약 거룩함 가운데 성장이 없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일하시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를 보십시오.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에게 세상적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축복받았습니다.

에서도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에서를 향해서는 심판과 진노를,

야곱을 향해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어떻게 하셨는지 말씀드리죠.

하나님은 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권징도 없었고, 경건함에 이르도록 그 속에서 아무 역사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의 삶 속에서 거의 죽을 만큼 고난을 주시고 때리셨습니다.

야곱의 삶속에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성화의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나는 에서입니까, 야곱입니까?

나를 거룩함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권징, 교정(correction 보통 환란을 통해 오죠)이 있습니까?

 

성경에는 거룩에 대해 아주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12;1

 

너희 몸을여기서 왜 몸이라고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극단적 영성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만 거룩하면 되지, 육신의 거룩은 도외시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여기서 너희 몸을거룩하게 하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글쎄요, 외적 행위만 보고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예수님께 내 마음을 드렸고, 당신은 책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글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이렇게 예수님도 행위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그분께 여러분의 마음을 진정으로 드렸으면,

그분은 여러분의 몸에, 섭리의 역사, 거룩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야곱처럼요!

 

그리고 사실 마음 heart”,

무슨 피를 퍼 올리는 근육이 아니고

어느 시인의 상상 속에 있는 환상적 실체도 아닙니다.
(몸과 분리된 어떤 것으로 상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존재의 가장 본질이며 핵심인데,

그것은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존재의 본질과 핵심에 왕으로 좌정하셨는데

당신의 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심한 사람은, 반드시 행위의 변화가 따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성경을 살펴보십시다.

 

, 율법적으로 행위를 지켜야 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단지 성경의 계명들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 관해서입니까?

 

나는 청교도들이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청교도들을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 삶의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Lordship 아래로 가져 오려는

정직한 시도를 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을 추구했다는 뜻입니다. *‘달성했다가 아니라요

 

일례로 그들의 생각 mind’을 보면,

그들은 성경적으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에 관해

800쪽 분량의 책들을 쓴 것을 보십시오. 거룩을 추구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내 눈은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이며,

이 귀로는 무엇을 들어야 하며, 무엇을 듣지 말아야 하는가?

 

내 혀는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는가?

내 삶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금 여러분은 무서워 떨고 있네요)

 

청교도들은,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할까?

그렇게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쳤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신중하려고 합니다.

이런 청교도적 생활양식에 대해

제가 섣불리 이게 정답, 표준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그 마음, 그 추구, 그 몸부림은 본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제 아내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크리스천의 얼굴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솟아나오는 얼굴입니다.

그의 옷차림은 그 영광스런 얼굴을 담는 액자 frame 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옷차림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의 옷차림이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가 아니라,

당신의 육체적 미를 드러내기 위한 이용도구 frame 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옷차림이 당신의 육신을 위한 틀이라면,

그것은 감각적이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워하십니다.

 

물론 거룩함이 단지 외적 행위로만 드러나진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당신 속에서 내적으로 거룩의 역사를 하고 계신데,

당신은 거룩하게 되었고, 더욱 더 성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데

외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일부 젊은이 여러분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기를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고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교회 집회 때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가서 1시간동안 이상한 영화를 보면

그 성령님은 여러분 속에서 너무나 근심하시고,

당신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시게 될 것입니다.

 

99% 순수한 샘물에 1%의 하수도 물은 섞어도

나는 그 물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아주 갈등하고 있었는데,

제 가까운 친구가, 레이븐힐에게 제 사정을 귀띔 했습니다.

 

그러자 레너드 레이븐힐은 제게 엽서 같은 것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걸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래도 되지만, 폴 워셔 당신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청교도식의?) 모든 것에 반드시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여,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 레이븐힐은 쇼핑센터에 가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더 거룩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최고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인 어느 노인이

그의 마지막 연주회에서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연주를 마쳤을 때,

한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에게로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처럼 연주하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을 바치려 합니다.”

 

그러자 그 노인 대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나도 나처럼 연주하기 위해서, 내 목숨을 바쳤다네.”

 

자네가 진짜 자네 인생을 다 바칠지는 미래를 모르지만,

나는 정말 내 인생을 다 바친 결과, 오늘에 이른 것일세!

 

젊은이들은 곧잘 이렇게 헌신적으로 기도합니다.

나는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는 여러분에게서 버려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을 알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어떤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뭔가 말씀드리죠.

대부분 청년들은 수련회들과 모든 집회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모여서 서로 껴안아주고 복음성가를 부르고 분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당신은 그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광야에 홀로 있으면서,

시편을 연구하면서 무릎 꿇고 일주일동안 금식하고,

오로지 하나님과만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당신의 아내조차도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당신이 가는 곳에 내가 함께 갈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요!

 

구별되어 조용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별됨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함께 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사귈 수 없습니다. (고후6:14)

어둠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는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그럴 수 없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그럴 수 없습니다. (고후6:15)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고후6:17)

무엇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까?

불법과 어둠과 사탄적 장치들과 불신자들의 세계와 삶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십시오.

 

 

9. 아홉 번째 고발심리학과 사회학이 가정에 관한

성경말씀을 대체하였습니다

 

Psychology and Sociology have replaced the Scriptures with regard to the family

 

이것은 가정을 꾸린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저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나는 30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습니다.

 

내 아내는 처음 8년 동안

약간의 뇌종양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를 가 질 수 없었는데

,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또 둘째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또 셋째가 태어났는데

그 다음에는 누가 알겠습니까?

 

심리학과 사회학이 가정에

관한 성경말씀을 대체하였습니다.

 

목사님들, 지도자들은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교회는, 우리의 주일 아침 예배는

너무 화장 cosmetic’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도 아름답고

설교가 예쁘게 하고

 

사람들이 감동받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증거는 아닙니다. (화장빨입니다)

 

신자들이 은혜 받은 진정한 증거가 무엇인지 말씀드리죠.

그것은 가정, 결혼, 가족입니다.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나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면

사실 누가 누군지 그들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의 가정을 보면 압니다.

그가 경건한 아이들을 길러낸 경건한 가정을 이룬 사람이라면,

저는 가서 그 사람에게 달라붙습니다. 그 사람과 교제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무엇을 알아내는지 아십니까?

 

내가 교회에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 보면,

그 대화의 주제가 거의 아줌마들이나 하는 허탄한 이야기들과

사회학과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지만,

다 사사기처럼,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소견들일 뿐이고

성경을 한 구절이라도, 진지하게 나누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나는

자신의 가정을 성경말씀대로 꾸려나가는

남자와 여자를 찾게 되는데

그 차이는 압도적입니다.

 

나는 비행기 안에 있을 때

이렇게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내 옆자리에 사람들이 앉을 것이며

그들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묻습니다.

 

나는 , 나는 한 가정의 남편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 그 밖에 또 무슨 일을 하세요?’ 라고 묻지요.

,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그 외에는 무엇을 하세요?

음 시간이 남으면 설교를 조금합니다.’

 

(*우선순위가 가정의 남편 아버지 그 다음에 목회자 라는 뜻)

 

사람이 전 세계를 얻어도

자신의 가정을 잃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을 그냥 이런 식으로 표현하겠습니다.

 

무엇에 의거해서, 무엇을 기반으로 해서

당신은 자녀들을 키우고 있으며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성경말씀으로 가서

말씀들을 끄집어내어 (암송하면서)

 

당신이 어떻게 가정을

그 말씀에 바탕을 두고 이끌어가고 있는지

제게 보여주지 않을 때,

 

그것은 당신이

심리학과, 사회학과, 일시적 기분과

이 시대의 거짓말들의 포로가 되어서

그런 원리에 영향 받아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8:19을 봅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로마서 122절은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는 사역을 위해서

내 가정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당신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세우려고 하는

작은 자기 왕국을 위해서

실상은 당신의 가정을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12:2)이 아니며,

그것이 무엇인지 분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두 가지만 예를 드리죠.

 

이것은 한때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던 때와 같습니다.

 

폴 형제, 당신은 전도에 반대하십니까?’

 

내 대답은 Yes 이기도 하고 No 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성경적인 전도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방식의 전도에는 반대합니다.’

 

당신은,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럼 주일학교와 중고등부에 반대하십니까?’
‘Yes or No 입니다.’

 

주일학교에 대한 제 입장은,

주일학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칠 때,

가정에서 자녀양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고

대신에 주일학교 교육을 잘 시키려고 애를 쓰시는데요

그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신이 무슨 교단이든지 간에 그 교단 교육국은

주일학교 교재를 만들고, 교사 세미나를 열고

그래서 주일학교를 성장시키기 위해

수십억의 예산을 쓰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교단은,

얼마나 많은 예산과 얼마나 많은 집회와 노력을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들을 집에서 성경적으로 가르치도록,

아버지들을 교육하는데 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가정을 대체할 두 번째 계획 플랜 B’는 없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첫 번째 계획(가정)을 피해가면

두 번째 계획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아이들이 그룹으로 모여서

교리문답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사역을 대체한다는 암시를 주기 시작한다면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버려야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단지 이 조그만 경우 하나만을 봐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주일학교를 위해서 쏟아붓습니다만

 

그러나 이 나라 전체에서

아버지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가정에서

자녀를 성경적으로 가르칠지를 교육하는 집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은

여러분의 아이를 징계할 권위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주일학교는 그저 오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 그런 권위가 있다해도

그들은 권징의 가치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작은 예 일뿐입니다.

 

중고등부를 봅시다.

글쎄요. 청소년들은, 그 시기에는 또래들과 함께 어울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함께 모일 필요가 있습니다만...

 

잠언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그 친구들이 지혜로우면, 함께 모이는 것이 배울게 많지만

미련한 자와 사귀면, 나쁜 것을 배웁니다.

교회 가서 어울려서 나쁜 것을 배우는 경우도, 사실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청소년들이

그때는 함께 어울려 지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죠.

 

1960년대의 심리학자들이 세대차이 generation gap’를 발표했습니다.

 

청소년들을 또래끼리만 어울리게 하지 말고,

그러면 천진난만한 바보들처럼 행동하는 것만 배우게 될 것이고

 

대신에 그들을, 어른들과 함께 어울리게도 하여

그들이 어른스럽게 되고

파괴로 인도하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도록

교회에서 어른들과 함께 모이게도 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청소년들을

함께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의 모든 부모들도

거기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럼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부모 잃은 청소년들은 어떻게 합니까?

결손가정은 어떻게 합니까?’

 

글쎄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한쪽 부모를 잃은 청소년들이나

양부모가 있는 청소년들이나

사실 그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거의 똑같습니다.

 

왜냐면 부모가 있지만, 부모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까

애들이 애들을 가르치고

아니면 머리에 무스를 바른

약간 더 나이든 아이가

당신의 애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 잃은 아이가

당신의 교회로 와서

거기서 또래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 세대와

함께 그룹으로 어울리며, 사랑의 놀라운 관계를 가지는 것을 본다면..

 

결손가정의 그들은

, 이런 것은 전에 본적이 없다.

그의 아빠를 좀 봐라.

또 내 친구는, 그의 아빠를 사랑하는구나.

이것 좀 봐라! 그러니까 이게 교회이고, 기독교이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나는 의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마에 피를 흘리며 와서

폴 형제, 나는 다 다녀봤습니다.

아무도 나의 문제를 진단해 주지 못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당신을 24시간 동안 따라다녀 보겠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만약 괘종시계가 한시를 울리면,

그는 벽돌로 자기 머리를 한번치고

 

시계가 두시에 , 울리면

벽돌로 자기 이마를 두 번치고

 

열두시가 되면

벽돌로 자기 머리를 12번 치는 것을

내가 알아냈다고 가정합시다.

 

24시간 동안 기록을 하면서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이것을 관찰한

후에 나는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저기요, 내가 당신의 문제를

알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당신의 문제를 알아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여, 우리가 그 정도로 측은합니다.

여러 심리학과 사회과학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문제를 진단하고, 알아내서

조심스럽게 말해 주는데 까지는.. 어느 정도 합니다만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이 매 시각마다 괘종소리를 듣고, 벽돌로 자기 머리를 친다면

그 사람이 괘종시계 근처로 못 가게 해야지요!

그 문제점만 진단해서 알려줄게 아니라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막아야지요!

 

왜 우리 아이들이

그런 일을 하느냐고요?

 

한 나이든 성도에게, 누가 한번은 물어봤습니다.

그는 자기 십대 아들이

또래 자매와 함께 어떤 조용한 장소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못 믿습니까?’

 

그 성도는 말했습니다.

, 나는 내 아들을 못 믿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나는 그의 아빠(자기 자신)도 못 믿습니다.

그의 아빠도 그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단둘이 있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그의 아빠는 그 아들보다 훨씬 더 자기통제력도 많은데도

그런 상황에서는 시험에 들기 쉬운데,

 

호르몬이 넘치는 십대 아들이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아들을 안 내보냅니다!’

 

우리는 성경적 원칙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위반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왜 모든 현실이

엉망이 되었는지 의아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