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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류 머레이의 생애

LNCK 2018. 1. 15. 16:00

◈엔드류 머레이의 생애                                  출처   

      1828~1917



 

◑성장 배경과 청년 시절


19세기 남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는 앤드류 머레이는

1928년 남아프리카 그라프 라이넛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앤드류 머레이 Sr.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화란 장로교 선교사로 남아프리카로 왔고,

그의 어머니는 독일 루터란과 프랑스 휴그노 전통을 가진 개신교인이었다. 

 

앤드류 머레이는 형제 앤드류 존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있는 애버딘 대학에서 문학 석사과정을 포함하여 7년 동안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19세기의 부흥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가졌다.

 

1838년에서 1840년 사이에 일어난 영적부흥은

피니의 지도 아래 미국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과 비슷한 것이었다.


앤드류 머레이는 장로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많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에게 특별히 많은 영향을 준 목사들은 칼머스(Chalmers), 켄드리시(Candlish),

맥체인(McCheyne,) 그리고 윌리엄 번스(William C. Burns) 등이다.

특히 번스 목사의 생애는, 젊은 앤드류 머레이의 성결과 부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애버딘에서의 공부가 끝난 뒤 앤드류 머레이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유트레히트(Utrecht)에서 3년간 신학 공부를 하게 된다.

네덜란드에 머무는 중에 그는 18세기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모임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848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이 소년 시절을 보냈던 남아프리카 땅으로 다시 돌아와서 목회를 시작한다.

 

1856년, 앤드류 머레이는 엠마 러더포드와 케이프 타운에서 결혼에서

4남4녀의 8남매를 낳아 길렀다.


◑앤드류 머레이의 목회와 저술 활동


그가 처음 사역을 시작한 곳은 남아프리카의 블룸폰테인(Bloemfontein)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1850년에서 1860년까지 11년간 목회를 하게 된다.

1860년 케이프콜로니의 주요 내륙 도시중 하나인 우스터(Worcester)에서

목회 요청을 받은 앤드류 머레이는, 그것을 받아들여 우스터로 향한다.

 

그가 우스터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던 1860년대에는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중요한 부흥이 있었던 시기였다.

이때부터 그는 수많은 경건서적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녀를 기르자」(The Children for Christ),

「주 안에 거하라」(Abide in Christ),

「왜 못 믿는가?」(Why Do You Not Believe)가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책들이다.


우스터에서 4년간 봉사한 후, 앤드류 머레이는 케이프타운에서 목회를 맡는다.

그는 이곳에서 7년 동안 지내면서 영국을 방문하여

케이프타운에 YMCA지사를 창설한다.

그는 또한 당시의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보수주의적인 태도를 확고히 하였으며

남아프리카 내의 화란 개혁파 교회가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이끌기도 하였다.


1871년 앤드류 머레이는 케이프타운에서 45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웰링턴으로부터 목회요청을 받고

그가 목사직을사임하는 1906년까지 그곳에서 봉사하였다.

웰링톤은 그가 목사로서 활동한 마지막 지역이 된다.


「그리스도와 같이」(Like Christ),

「그리스도의 기도 학교에서」(With Christ in the School of Prayer),

「너희도 거룩하라」(Holy in Christ),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은

그가 웰링톤에서 사역하는 동안 쓰여진 책들이다.


그의 목회는 그의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을 심도있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목회방향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강연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선교활동


그는 사회복지와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1874년에는 웰링턴에 위그노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종교단체인 “성서 기도 연합회”와 “기독 학생회”등을 시작하였다.

1877년 그는 웰링턴 선교대학을 세워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한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나타낸 것이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선교 사역을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남아프리카에서 자주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는 한때 종교 지도자가 전혀 없는 수천 명의 이민자들에게 사역하기 위해

트랜스바알로 들어갔다. 이 사역 도중 앤드류 머레이는 심한 열병에 시달렸으며,

몸을 회복하기 위해 영국으로 요양을 떠나기도 하였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아내를 얻었다.


또한 그는 남아프리카의 화란 개혁교회를 설득시켜

그들이 트랜스바알(Transvaal)과 말라위에 거주하는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세계선교에 대한 그의 공헌으로 앤드류 머레이는

1889년에 자신이 졸업한 애버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1907년에는 Cape of Good Hope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작품 세계 및 저서


오늘날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이 쓴 수많은 경건 서적들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앤드류 머레이의 작품 속에는 그의 삶과 목회, 그리고 사상들이 모두 담겨져 있다.

그는 240여 편의 주옥같은 글들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과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의 저서 중에

「그리스도의 기도학교」에서(With Christ in the School of Prayer)는

기도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웰링턴에서 목회하는 기간 동안 집필된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위치와 권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쓰여졌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가장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쓴 저서의 특징은 신앙의 핵심을 찾아서 일목요연하게 해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렉산더 휘트는 앤드류 머레이의 이러한 점에 대하여

“당신은 일의 핵심을 찌르도록 하나님의 택함과 임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또한 앤드류 머레이의 모든 저서들은 머레이 자신의 경건과 기도 생활 가운데

직접 깨닫고 체험한 것을 담고 있기에 더욱 놀라운 깊이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신앙생활과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그 영향력 또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난다.

남아프리카의 가장 사랑받는 설교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명성을 지닌 저술가인 앤드류 머레이,

그의 삶과 그가 남긴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앤드류 머레이의 탁월한 영성」(브니엘),


「앤드류 머리의 영성을 깨우는 기도」(프리셉트),


「절대 헌신」,

「하나님만 바라라」,

「하나님과의 교제」(이상 생명의말씀사),


「앤드류 머레이의 기도」(누가),

「성령」,

「성령충만의 길」,

「지성소」(이상 벧엘서원),


「하나님의 치유」,

「순종」,

「그리스도의 영」(이상 CLC),


「자녀가 축복받는 부모의 기도 50」(나침반),

「성령론」,

「앤드류 머리의 12가지 비밀」,

「경건한 삶을 위한 부르심」,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십자가의 보혈·오순절의 충만한 축복」,

「겸손 하나님을 바라라 」(이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외 다수